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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요즘 전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TV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을 보면서 문자투표를 통해 가수를 직접 뽑는 시청자가 어떠한 기준으로 선발과 탈락을 가늠하는지 궁금해졌다. 가수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 외에 평가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폭발적인 인기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유사 프로그램이 비슷한 만듦새로도 상당한 시청률을 올리는 데는 방송에 출연하는 가수지망생의 공이 절대적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일종의 인간 드라마를 본다.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진 오디션 절차를 통해 한국에서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주는 감동은 크다. 우리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데도 음악으로 소통을 꿈꾸는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고 응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경합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다소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며 모순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는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전문가인 심사위원들의 기준도 중심이 흔들릴 때가 있다. 우선 한국가요를 잘 소화한다고 판단하는 하나의 잣대로써 일부 심사위원은 발음이 부정확한 일본인 출연자에게 여러 차례 발음 문제를 지적했다. 한편, 캐나다에서 왔다고 보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다른 출연자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발음이 부정확한 출연자는 일상 생활에서도 한국어로 소통하는 데 큰 문제 없지만, 노랫말의 발음이 정확한 출연자는 그와 반대로 통역이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가수는 노래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직업이라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만 가지고 한국가요에 대한 이해와 가사의 전달력을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단시간에 고치기 어려운 발음 문제를 집요하게 논하는 심사기준은 그나마 이미 인기를 끌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껄끄러운 문제를 경험한 터라 그리 심하지 않았고, 또 마침 그 출연자가 일찌감치 탈락하면서 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이보다 한국어에 대한 발음 자체가 정확한 이가 확실히 좋은 평가를 얻을 만한 요소를 지녔다고 볼 수 있는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일본에서 온 출연자에 대한 호감이 연변과 캐나다에서 온 출연자의 그것에 비해 근본적으로 낮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본에서 온 친구는 재일한국인으로 한국과 뿌리 깊은 인연을 맺고 있고 우리 문화에 적잖은 관심을 보여왔는데도, 별 의식 없이 일본인(외국인)으로 선을 그어버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다른 요소들이 뒤섞여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를 등장할 때부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가 많았다는 것은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그녀의 부족한 노래실력은 재일한국인을 한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시선에 의해 유독 날선 도마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락의 순간에도 씩씩하게 굴었지만, 오디션에 응하기 전처럼 한국에 대한 애정이 변하지 않았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일본 국적을 선택하고 일본어만 배워도 살아나가는 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어로써 한국어를 택하고 부단히 한국이라는 사회로부터 스스로 민족의식을 부여하는 이들이 이 땅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은 오래됐다. 열심히 한국말을 배워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재일한국인에게 일본어 특유의 억양에서 오는 말투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그러잖아도 불안정한 경계에 놓인 그들에게 우리는 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느냐고 아무런 의식 없이 묻기까지 한다. 억압의 역사에 대한 분노와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우기는 데 따른 증오가 가혹하게도 그들에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는 것에 대한 몰이해도 그 부정적인 시선에 한몫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한번도 귀기울이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서경식은 재일조선인(그는 분단 이전의 민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한국인 대신 조선인을 사용한다)으로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나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한반도 분단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재일한국인의 상황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개념을 쓴 것이다. 한일 양국은 질곡의 세월 속에서 일본땅에 갇혀 버린 재일조선인을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한때 그들에게 일본 국적을 취득할 것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지정학적 위치와 열강의 세력 다툼으로 자국의 힘을 기르는 데 바빴던 7,80년대는 그렇다고 쳐도, 아직까지 국가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일본은 이 문제에 손을 대는 순간, 지난 과오가 되살아날 것을 염려해 입을 굳게 걸어잠궜다. 일본의 리버럴 세력조차 책임의 문제를 회피하고 윤리적인 차원의 인식만 되풀이한다.
한국으로 오지도 못하고, 일본에서 자유롭게 살지도 못하는 재일한국인 2세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느끼는 심정은 부모가 제 아이를 버젓이 쳐다보면서도 나몰라라 하는 충격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우리'를 말할 때, 거기에 해당되는 '우리'는 누가 있을까? 우리는 혈통 때문에 '우리'인 것이 아니라 여러 삶의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태어난 장소와 성별과 문화적 배경과 모어에 관계없이 정치적 목표를 연대할 수 있길 바랐다. 자연적인 요소들을 오히려 가능한 한 배제하고 그래도 타자와 내가 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가리는 작업은 분단의 현실을 이상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리라.
교수로서 작가로서 글쓰기를 통해 치유되지 않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속해 온 저자는 그간의 강연과 저술이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현재 일본 사회는 내부적으로도 매우 황폐하기 때문에 외적인 문제를 논할 계제가 못 되는 것이다. 한국 역시 분단이라는 상황을 수습하는 것조차 버거워 한반도에 마음을 품은 이들을 끌어안는 데 무관심하다. 이 무참한 사회를 또다시 젊은 세대에게 넘겨주게 될까봐 마음이 무겁다고 밝힌 그는 이 책에서는 모든 식민의 언어를 바로잡는 노력을 바탕으로 마지막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은 국민이고 민족이면서 국민이 아니고 민족이 아니다. 중첩된 이중의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그들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국가나 민족이라는 범주의 자명함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디아스포라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