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3 - 인간의 탄생과 판도라 어린이를 위한 인문학 시리즈 3
최설희 지음, 한현동 그림, 정수영 구성 / 미래엔아이세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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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모습과 사회의 구성은 서양문명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평소엔 늘 그랬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많은 것들이 없었고 많은 것들이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역시 서양의 민주주의와 공화정 체제를 받아 들여 개선시켜 나간 것입니다.

 

최초를 밝히고 근원을 따져보는 일이 어쩌면 지식 정보 이상의 별 의미를 갖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 알면 잘 고쳐가며 쓸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형태와 형식만 활용하지 말고 인류 문명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한 문화, 역사, 철학을 배워보는 일은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문명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신화와 역사를 마주하게 되겠지요. 어떤 의미로 우리 모두가 후손일 수도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배우고 이해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친절하고 유익하면서도 충실하고 재미있는 책들이 많지 않아 저는 어린 시절 그리스로마신화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십 대 아이들과 함께 읽는 요즘의 책들은 정말 재밌고 쉽습니다.

 

주제와 메시지에 잘 집중하면서도 연령에 따른 이해가 가능하고 거부감이 들지 않는 방식으로 많은 애를 써서 기획하여 만든 책이란 느낌이 확실히 듭니다.

 

덕분에 막상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그다지 선명하지 않을 여러 조각난 정보들을 저도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정리하며 하나의 스토리로 이어가보았습니다. ‘만화는 언제나 옳다는 말은... 아마도 언제나 옳습니다!

 

시리즈 처음부터 읽자고 하면 혹 과제처럼 느껴질까 봐 아이들이 고르게 하니 인간의 탄생편이 가장 궁금하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신들의 전쟁이 남긴 폐허 그 상처를 다채롭게 메워간 인간의 생명들을 만나는 이야기가 즐겁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들 중 가장 인간을 사랑한 신의 이름이 반갑습니다. ‘현명한 프로메테우스는 고민 끝에 진흙으로 신을 닮은 인형을 만들고 생명을 불어 넣고 인간이라 불렀습니다. 다양한 동물들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생명의 만나는 기쁨에 신들은 재능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순서가 마지막이었네요. 이미 모든 종류의 재능을 나눠 준 터라 인간 몫의 재능이 없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부모와도 같은 애정을 느꼈을까요. 받은 재능이 없어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받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간이 가여워서 고민에 빠집니다.

 

그 결과 재능이 아니라 기술을 알려 주게 되는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전한 불은 신들의 대장간에서 훔친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인간은 동물을 잡고 요리를 하고 추위를 녹이고 대장간에서 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고신인 제우스는 인간 독자로서 참 비호감입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영원한 고통을 가하는 벌로도 모자라서, 동생을 이용해서 인간에게까지 벌을 내립니다. 선물을 받은 것이 무슨 죄가 되나요.

 

오랜 세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모든 불행의 원인처럼 회자되는 판도라는 제우스의 계획에 이용된 인물일 뿐이란 생각이 듭니다. 판도라도 판도라의 상자도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한 계략이었으까요.


 

재미있고 쉬운 만화이야기가 끝나면 진지한 학습자료들이 따로 있어서 복습도 할 수 있고, 외워도 자꾸만 잊히는 신들의 계보가 정리되어 있어 보기에 편합니다. 마음먹고 한 번 외워볼까요. 아이들과 간단한 내기 게임을 해도 좋겠습니다.


 

물론 학습만화답게 마지막에는 독후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이렇게 즐기면서 배울 수 있는 가족 모두가 함께 읽고 대화하기 참 좋은 책입니다. 다른 시리즈들도 궁금해집니다. 신화란 여전히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설레게 하는 힘이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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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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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 이후 재회입니다살다 보면 이런 황당한 일들 없는 것도 아니라연말 핑계로 인성과 이성을 잃어가는 독자로 타석으로 삼으리란 굳은 결심으로 읽었습니다.

 

5개의 단편 소설집입니다계기가 된 사소함들폭력과 애증과 무관심이 하나 같이 무섭습니다누가 내면에 기식하는 이런 것들 좀 다 꺼내서 분리수거해 갔으면... 가끔 그런 헛된 상상을 해봅니다.

 

표제작부터 읽어야겠지요이런 오랜 버릇도 문득 배반해볼까 싶습니다만...

 

1.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합니다이런 오래되고 다수가 가하는 풍습과 문화라 불리는 폭력은 그 수명이 어떤 계기로 말끔히 다할 때까지 어찌해야 좋을지 개인으로서는 막막할 따름입니다전학을 갈 수 있는 학교도 아니고 삶의 터전인 마을에서 왕따*를 당하며 살아오신 할머니가 계십니다.

 

* 무라하치부 마을 구성원 전체가 한 사람을 집단으로 따돌리는 관습

 

끝이 없는 건 무섭지끝이 있다는 걸 알면 어지간한 일은 견딜 수 있는 법이다만.”

 

할머니는 어느 날 암으로 시한부 삶을 살던 시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합니다법정에서 할머니의 변론은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였습니다. 5년의 징역 생활 도중 폐암으로 사망합니다유골은 매장도 못 되고 마을에 버려진 채로 나뒹굴게 됩니다.


 

18년 전의 일이고 이제 손자 료이지가 그 할머니의 유골을 절에 봉안하기 위해 마을에 찾아 옵니다그런데 함께 열차를 타고 온 연인미즈에는 유골을 절에 봉안하는 것을 반대합니다왜 그럴까요아프고 놀란 마음이 음성으로 새어 나올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2. 목격자는 없었다

 

영업 성적이 바닥이던 영업 사원 가쓰라기 슈야가 어느 날 상당히 좋은 실적을 기록합니다그런데 발주처의 주문량을 잘못 기입해서 열 개나 추가 주문이 된 것이었습니다솔직하게 인정할 수 없었던 슈야는 실수를 감추기 위해 발주처 직원인 것처럼 추가 주문 열 개를 자신의 돈으로 구매합니다그리고 귀갓길에 차량 추돌사고를 목격합니다.

 

이후 뉴스에 나온 사건 경위는 자신이 목격한 것과 정반대였습니다가해자인 승용차 운전자가 피해자가 되고 밴의 운전자는 사망한 상태입니다진실을 알리려면 자신이 실수한 것을 설명하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목격한 경위를 제보해야 하는데 알 수 있을까요혹은 제목처럼 목격자는 없는 채로 사건은 잘못된 결론으로 마무리되고 마는 걸까요슈야의 결정으로 어떤 파급이 생길까요?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증언하는군요.”


 

당사자가 되고 싶지 않은 갈등의 여지가 너무 분명한 소재라 피하지 못하고 그 상황에 처한 자신을 상상해보고야 말았습니다. 100명 쯤 대답한다면 어떤 선택이 더 우세할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3, 고마워할머니

 

제목과 내용의 괴리가 커서 자꾸만 오싹했습니다재능의 노예로 사는 것도 어린 아이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닌데어머니와도 학교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할머니의 기대와 바람은 거세고. ‘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지경에 이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아이의 감정이 도달한 결론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정말 아프고 무섭습니다.



 

4, 언니처럼

 

언니처럼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네요언니처럼 될까봐 되지 않으려 경계의 날을 세우다가 결국 무리하게 되고 절망 속에서 아이를 학대하게 됩니다서로의 트라우마에 각자 휘둘려서 다치는 이야기... 마음이 칠흑처럼 바뀌는 비극입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도 바로 볼 수 없고 타인의 존재도 인정하지 못하는 경계 분리에 실패한 관계가 어떻게 끔찍하게 충돌하여 망가지는지... 격렬함만큼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5. 그림 속의 남자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그림의 내용들이 과거의 불행에서 시작되었다는 것화가가 경험한 참혹함은 화염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그림의 풍경처럼 지옥과 같았다는 것그 까닭을 알아가는 시간이 뜨거운 인간의 내면에 들어가는 일처럼 데일 듯한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거대한 사건에 늘 거대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요진실은 때론 초라하고 이해가 어렵고 간혹 정말 별 게 아니라서 너무나 사소해서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물론 그 사소한 이유가 원인의 전부는 아닙니다참고 있는데 누가 툭치고 지나가는 우연한돌발적인별 거 아닌 일이 누군가의 감정의 뚜껑을 열어젖히게 됩니다.

 

미스터리 소설의 장치라 그런 것만이 아닐 거라고안타깝지만 현실에서 성립된 수많은 사건들도 이런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을 쓰게 합니다.

 

온통 화끈거리는 열상이 가득한 이야기들을 읽었는데 서늘한 한기를 한참 느끼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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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키스 스토리콜렉터 98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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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유다의 키스>는 여러 작품으로 존재합니다제가 좋아하는 두 작품은 카라바조Caravaggio의 <유다의 키스Kiss of Judas>와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Sagrada Familia의 수비라치Josep Maria Subirachs의 조각품<The Kiss of Judas>입니다.


 

키스라는 행위가 배신과 밀고의 표시로 사용된 신뢰 붕괴와 가치 말살의 아찔한 순간이어서일까요볼 때마다 제게는 참 강렬한 느낌이 전해지는 이미지입니다.

 

북유럽 소설의 가감도 자비도 없는 스릴러추리미스터리범죄 소설을 읽기 두려운 분들도 아나 그루에의 작품은 조금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캐릭터는 매력적이고 심리 묘사는 섬세하고 긴장감은 아슬아슬 최고이고 사회파 문학으로서의 기본기와 곳곳에 유쾌한 위트들이 등장합니다.

 


시작부터 시신 찾는 전개입니다그런데 묘사가 장르처럼 코지cozy합니다인간의 심리와 문명의 일그러짐을 다루는 메시지에 소름이 끼칠지는 모르겠어도 적어도 묘사 때문에 놀라고 겁먹을 일은 없겠습니다편하게(?) 읽을 수 있을 듯.

 

첫 사건은 선입견이라 안 하려해도 아주 드문 커플 - 우르술라와 요한 - 이라 의심이 드는 이야기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된 문신의 등장입니다미스터리 장르에서는 반드시 단서나 복선으로 쓰이겠지요미술을 매개로 만난 커플에 어울리는 단어, ‘색깔이라고 야곱에게 들었다고 합니다과연 그 뜻이 맞을까요.

 

평온하고 나른한 아침 시간이 지나고 무척 로맨틱한 청혼 장면에 사건의 단초와 비극을 암시하는 고백이 섞여듭니다사기꾼의 목적은 뿐입니다그럴 일이 없길 바라지만 지나친 행운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짜 맞춘 듯 접근한다면 조심하시길그러려면 이야기 속 여성처럼 복권 당첨이 되어야할 듯!

 

공항의 이별의 장소이지요요한이라는 남자에게 다가온 분명한 공범일 남자에이나르 그레이프 요한센이 등장합니다이 이름 역시 어떻게 활용될지 모를 단서이겠지요뭔가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난이도의 재미난 게임을 시작한 기분입니다.

 

사기를 당하고도 믿지 못하거나 부정하거나 하는 시간이 긴 것이 일반적인데우르술라는 헤어지는 순간 모든 걸 다 감지하고 알아버렸다고 하네요이 또한 드물고 신기하고 어쩌면 진심으로 사랑한 상대와의 진짜 이별을 감지한 것이 이상한 일만도 아니란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묘하게 서글픈 장면입니다.

 

상대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가짜거짓이고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립니다자살을 시도한 우르술라 선생님의 제자 중에는 라우라가 있고그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반쯤은 경찰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아빠이자 주인공인 단 소메르달은 광고기획자입니다단짝이자 아내의 전남친인 플레밍 토르프는 경찰이고 둘이 함께 범죄 사건을 해결해나갑니다독자로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경찰의 방식이라기보다 탐정 쪽이니 단 소메르달의 직업을 자꾸 잊고서 읽게 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사기사건은 하나가 아니고수법 또한 대단합니다단지 연기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극단적인 단식으로 시한부 인생을 재현하고 사기 결혼을 감행합니다알고 읽어도 기막히니 표적이 되면 속지 않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이렇게까지 기괴하고 집요하게 사기를 치는 이유가 단지 돈인지... 의문이 생기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뭔가 더 근원적으로 범인을 유도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아직 전모는 모르겠지만 문신 이야기가 재등장합니다이번엔 거룩한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그리고 세 번째로 등장한 문신 이야기에서 그 의미는 사랑하는 엄마로 다시 변합니다.

 

복권 당첨된 여성들의 돈을 노리는 사기범죄를 조사하다 오래 된 사건으로 연결되고더욱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종교 단체에 이릅니다종교적 신념으로 간혹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는 일들도 있지요설득할 수 없는 상대를 설득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습니다.

 

상식도 지식도 받아들이지 않고 법보다는 교리가 우선이고그러니 아동 학대와 같은 명백한 폭력 행위도 사소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지요자신의 신체권과 생명권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포기하는 이들을 사회가 어디까지 설득해내야 하는 것인지... 막상 생각해보니 참 어렵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영구적인 해를 입고 상처입고 위험한 사고방식이 고착된 아이들입니다반사회적인 동기를 갖게 되고 폭력적으로 사회화되고그런 자신의 문제 해결 방식과 원인이 어린 시절의 사회화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제목이 왜 유다의 키스인지 이야기의 말미에 가서 이해가 됩니다문신의 진짜 의미는 속죄였습니다.


바꾸고 싶은 것들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대단하고 늘 지치도록 오래 걸리기도 한다는 것을 충분히 목격한 나이라서, 사회파 미스터리가 전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만나도 예전처럼 확실하게 분노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태어나보니 그런 부모, 그런 환경에서 살아 남으며 뒤틀린 존재들을 만나는 일이 무척 쓸쓸하고 서늘했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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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된 여우 - 어른도 함께 읽는 동화
금관이야(박미애) 지음, 김경수 그림 / 고래책빵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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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여우와 눈이 마주친 저자가 여우가 건네는 말을 듣고 몇 달 후 완성된 이야기이다새끼를 잃은 여우와 부모를 잃은 인간 아이불행의 날 잠시의 조우가 여우의 마음에 내내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아주 특별한 추천서도 있다이름이 완전히 옛 사람스러워 놀랐다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라 이름이라기엔 애매한가... 어쨌든다른 추천인인 거미씨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사는데 이름은 집거미이다자꾸 놀라는 나는 경직되고 고전적인 개념들이 상당히 많은가 싶다.


 

이야기 속에는 제발 만나고 싶은 능력자 소나무가 등장한다소원을 비는 존재들의 소원을 이루게 도와주는 분이다그런데 몹시 엄격하기도 하다.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알게 된 여우가 변신을 해서라도 아이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신령한 존재인 소나무는 여우에게 진정성을 보이라며 재주넘기를 멈추지 말고’ 아흔 아홉 번을 하라고 요구한다. ‘재주넘기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려운 동작이 맞는 건가 검색해보았다.

 

그래도 소원 성취를 빌 확실한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능력자 소나무의 충고는 의미심장하고갖가지 생각에 읽기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림자는 너무 정직하거든. (...) 그림자를 속일 순 없어너의 그림자는 언제나 여우 금리자일 거야.”

 

그리고 전래 이야기 속의 모든 변신처럼 여우의 소원 역시 완성을 위한 마지막 조건이 남아 있다.

 

잠시의 짧은 위로만 남기고 떠나는 바쁜 인간 어른들보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소나무를 좋아하는 애나는 소원을 자주 빌었다할머니와 둘만 사는 아이가 바라는 소원을 무엇일까.

 

무사히 애나를 찾아온 엄마 여우는 무리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다그러다 애나가 해주는 이야기들 속에서 불안한 내용을 감지한다애나 아버지의 친구라고 할머니 일도 도와주고 애나를 데리고 가서 놀아주겠다는데...

 

걱정이 된 엄마 여우가 확인한 그 얼굴에서 그날의 총성이 들린다인간으로 변신한 여우 역시 평범하지 않다순식간에 차도를 두 군데나 막아 방어선을 만들 수 있다그 사이 애나는 자신이 생각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죽은 자식의 복수를 겸한 엄마 여우의 복수를 겸한 애나 구출이 펼쳐진다그리고 또 다른 능력...


 

애나가 나쁜 기억은 잊고 엄마 여우가 자신에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은 잊지 않아 다행이다남녀의 애정사가 아니라 약자 존재를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신을 원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지 않고 인간 가족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여우의 간절함이 새롭고 뭉클하다.

 

인간이든 다른 존재이든 진정한 관계란 가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그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일을 다시 생각해본다소나무에 이어 달 역시 소원을 빌고 이뤄줄 존재로 등장해서 또 기뻤다현대에서 모두 사라진 마법들이라 부럽다.



놀랍게도 엄마 여우의 마지막 소원은... 힘도 없고 어린 애나가 보호만 받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나이와 능력을 제외하고도 우리가 서로 돕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잠시 멈춰 생각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돈과 폭력과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한 세계와 공감과 사랑과 아이와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두 세계가 대결을 벌였다현실에서는 드물 안심이 되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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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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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은 날마지막 가을이려나... 역대 최대 최악의 확진자사망자위중증자 수를 확인하고도 하루 종일 밖에 머물렀다내일 두 달 만의 책보람을 상상하며 판데믹의 시간이 모조리 날마다 만우절이었다면... 싶었다.

 

발자국을 꼭꼭 찍으며 계속 걷다 잠시 쉬어가는 곳에서 한 낮의 가을볕보다 더 맑고 환하게 웃는 윤성희 작가의 얼굴을 만나 마스크 속에서 따라 웃어본다가져 오지 않은 책에 담긴 2016년부터 2020년 겨울의 이야기들이 견딜 수 없이 궁금해졌다.

 

온통 반짝거리는 따뜻한 이야기들을 만난다문득 출근길 문자로 찾아 온 힘내 기운 내 잘 지내처럼아주 자그마한 세상에서 잠시 찾아왔다 사라지는 온기들이라 내 시간의 곳곳에서 깜빡거리는 시간들을 그립게 찾아내본다.

 

이유 없이 일찍 눈 뜬 새벽 안 하던 운동이나 가볍게 할까 하고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풍경 혹은 사람들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걸어갈까하고 처음 시도한 귀갓길에서 만난 재미난 풍경과 사람들늘 스쳐 지나다 용기 내어 혼밥을 시도한 작은 식당에서 나눈 따뜻한 인사와 식사…….

 

잠깐만... 소설인데... 소설이라고 했는데...

 

내게 세상은 간단하고 쉬워 보이지 않았다고민이 깊은 날엔 혼란이 무섭도록 커졌다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친 시간이 지나면그 풍경만큼 의미를 알 수 없는 수학문제들을 한참 풀며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했다맥락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사람들도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다중요한 일만 집중해서 살고 싶은데불필요한 스트레스로 낭비된 시간이 짜증스럽고 고단했다의도적으로 결론과 의미를 숨겨 놓은 장르 문학을 읽었다암시와 복선과 난해함과 반전의 기술들이 다다르는 곳에 이르면 현실의 재미없는 미스터리도 지워졌다.

 

이렇게 볕이 맑고 밝았던 날그런 거 저런 거 아무 것도 없이 단순하고 명료한 이야기들로 진짜 경험한 감정만을 톡톡 건드리는 이야기들은 곤란하다나직한 독백을 풀어 놓은 이야기들을 쿡쿡 웃으며 듣다 보면 이건 다 거짓말인지 고백에 준하는 진실인지 혼란스럽다.

 

나는나는그냥 어른이 되었지.” 나는 그렇게 말해보았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병원 복도를 밤새 돌아다녔다병실 문 앞에 적힌 이름들을 찬찬히 읽어가며 복도를 거닐다보면 눈물이 났는데그렇게 울다 아침해가 뜨는 걸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고아라고 했을 때 남편은 내 손을 잡고 말했다우리집은 가족이 아주 많아요내가 반 나눠줄게요그런 말에 감동을 받다니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남자와 연애를 할 것이다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어요이제 걱정말아요.”

 

그런데 싸우지 않고도 헤어질 수 있더라고요. (...) 그럼그럼사랑하지 않아도 평생을 사는 사람도 많고.”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나는 어른이 못 되었고 못 될 것 같다죽을 때까지 여기가 내 자리인가 불만스러울 것 같다다 같이 엉망진창일단 괜찮다고 말해주는 작가가 있어 몸에 힘이 쪽 빠지고 실실 거리는 웃음이 난다이래선 어느 작품이 제일 좋다고 고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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