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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된 여우 - 어른도 함께 읽는 동화
금관이야(박미애) 지음, 김경수 그림 / 고래책빵 / 2021년 11월
평점 :
동물원의 여우와 눈이 마주친 저자가 여우가 건네는 말을 듣고 몇 달 후 완성된 이야기이다. 새끼를 잃은 여우와 부모를 잃은 인간 아이, 불행의 날 잠시의 조우가 여우의 마음에 내내 남아 있다.
이 책에는 아주 특별한 추천서도 있다. 이름이 완전히 옛 사람스러워 놀랐다.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라 이름이라기엔 애매한가... 어쨌든. 다른 추천인인 거미씨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사는데 이름은 집거미이다. 자꾸 놀라는 나는 경직되고 고전적인 개념들이 상당히 많은가 싶다.
이야기 속에는 제발 만나고 싶은 능력자 소나무가 등장한다. 소원을 비는 존재들의 소원을 이루게 도와주는 분이다. 그런데 몹시 엄격하기도 하다.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알게 된 여우가 변신을 해서라도 아이를 지켜주고 싶어 한다. 신령한 존재인 소나무는 여우에게 진정성을 보이라며 재주넘기를 ‘멈추지 말고’ 아흔 아홉 번을 하라고 요구한다. ‘재주넘기’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려운 동작이 맞는 건가 검색해보았다.
그래도 소원 성취를 빌 확실한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능력자 소나무의 충고는 의미심장하고, 갖가지 생각에 읽기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림자는 너무 정직하거든. (...) 그림자를 속일 순 없어. 너의 그림자는 언제나 여우 금리자일 거야.”
그리고 전래 이야기 속의 모든 변신처럼 여우의 소원 역시 완성을 위한 마지막 조건이 남아 있다.
잠시의 짧은 위로만 남기고 떠나는 바쁜 인간 어른들보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소나무를 좋아하는 애나는 소원을 자주 빌었다. 할머니와 둘만 사는 아이가 바라는 소원을 무엇일까.
무사히 애나를 찾아온 엄마 여우는 무리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다. 그러다 애나가 해주는 이야기들 속에서 불안한 내용을 감지한다. 애나 아버지의 친구라고 할머니 일도 도와주고 애나를 데리고 가서 놀아주겠다는데...
걱정이 된 엄마 여우가 확인한 그 얼굴에서 그날의 총성이 들린다. 인간으로 변신한 여우 역시 평범하지 않다. 순식간에 차도를 두 군데나 막아 방어선을 만들 수 있다. 그 사이 애나는 자신이 생각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죽은 자식의 복수를 겸한 엄마 여우의 복수를 겸한 애나 구출이 펼쳐진다. 그리고 또 다른 능력...
애나가 나쁜 기억은 잊고 엄마 여우가 자신에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은 잊지 않아 다행이다. 남녀의 애정사가 아니라 약자 존재를 보호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신을 원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지 않고 인간 가족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여우의 간절함이 새롭고 뭉클하다.
인간이든 다른 존재이든 진정한 관계란 가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일을 다시 생각해본다. 소나무에 이어 달 역시 소원을 빌고 이뤄줄 존재로 등장해서 또 기뻤다. 현대에서 모두 사라진 마법들이라 부럽다.
놀랍게도 엄마 여우의 마지막 소원은... 힘도 없고 어린 애나가 보호만 받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나이와 능력을 제외하고도 우리가 서로 돕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잠시 멈춰 생각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돈과 폭력과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한 세계와 공감과 사랑과 아이와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두 세계가 대결을 벌였다. 현실에서는 드물 안심이 되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