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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가 더 일찍 오려면 ㅣ 사계절 민주인권그림책
정진호 지음 / 사계절 / 2024년 5월
평점 :
‘평범한’ 일상을 무탈하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동이 촘촘하게 작용해야하는지를 헤아려본 적이 있다. 아무리 떠올리고 추적 해봐도 빠진 노동이 있을 것이고, 우연처럼 엮여든 가는 연관성을 가진 노동도 있을 것이다. 때론 ‘내’가 ‘별 일 없이’ 하루를 살기 위해서 전 세계가 별 일이 없어야한다.
‘깻잎’이 생산되고 수확되고 유통되는 ‘참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다)’을 배울 수 있었던 책을 만나고, 깻잎은 물론 다른 식재료들을 볼 때마다 괴로워졌다. 힘을 보태 당장 바꿀 수 없어서 입맛도 잃었다. 가능한 생산자를 알고 생산방식을 아는 식재료를 구입하려 하지만, 그렇게만 먹고 살기란 불가능하다.
일회용품을 쓰는 일은 거의 없고, 최대한 포장이 적은 방식으로 꼭 필요한 물품만 구입하려 하지만, 500년 이상 썩지 않을, 미세한 쓰레기와 오염원이 될 포장지를 피하며 살 방법도 없다. 쓰레기 분리배출이라는 ‘내 눈앞에서만 치우기’를 할 때마다 무력감에 기분도 몸도 무거워진다.
제목만 봐도 집중하는 주제를 짐작할 수 있는, 그래서 반갑고 고맙지만 죄책감과 부끄러움도 드는 특별한 그림책이다. 천천히 넘겨 페이지마다 여백 없이 가득한 그림과 문자를 읽는다. ‘바나나를 주문한 행위’가 촉발한 사회 기능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의 삶의 풍경이 역순으로 이어진다.
가장 직접적인 노동이 직선 선로처럼 이어지지만,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는 심장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꼈다. 실온이 10도는 내려간 듯 기분이 서늘해졌다. 누구도 잠 못 자는 밤을 계속 유지하는 매커니즘을 아프고 선명하게 전한다. 그림책의 방식을 택한 이 책이 마지막 충격 효과에 더 귀해진다.
시스템이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그 구조를 다 알고 매번 행위를 할 수 있냐는 변명을, 이 책을 만난 뒤로는 너무 편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 구조 속에서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개인을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각 행위가 부정할 수 없는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라고 밝히는 작품의 힘.
시스템은 스스로 문제를 자각하고 스스로 고쳐나가지 못한다. 모두가 밤잠을 못자는 삶을, 고통을, 괴로움을, 그 반복을 멈출 수 있는 건 언제나 알아차리고 저항하는 인간뿐이다. 남은 2024년, 나는 이 책을 여러 핑계 삼아 자주 선물할 것이다. 머리가 맑아진다는 8시간 밤잠을 나도 자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