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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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 문학을 연구한 전공자는 아니지만, 자극적인 드라마나 영화 제목 같은 책 제목이 낯설고 그만큼 궁금했다. 더구나 이야기 개요를 다른 작가에게 사서 원고를 쓰다 마무리를 못하고, 또 다른 작가가 완결한 작품이라니 탄생자체도 신기했다.



 

책을 펼치지 종이 화약이 터지는 도입부터 잘 읽히는 편집과 프린트까지 이야기는 술술 읽힌다. 그런데 흥미진진한 암살사건들이 이어지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대화가 많은 희곡과도 같은 이 작품은 소설의 착장을 한 사상논쟁서 같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영화의 모습을 한 아나키즘 논쟁 다큐 같았던 것처럼.

 

이 조직은 인간의 정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에 가깝다네, 내가 떨어져나가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도 조직은 지금과 똑같이 운영될 거야.”

 

암살을 의뢰하는 쪽도 의뢰받는 쪽도 복수, 억울함, 비통함 등의 있을 법한 감정과 사연을 털어놓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정당성, 윤리의 엄격성, 추론의 설득력, 의도의 정직성, 원칙의 합당성, 계약의 비가역성 등, 법을 위반하는 암살 방식이라는 것만 빼면 이토록 엄정한 고민 끝에 계획되고 실행되는 살인도 드물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처형이라고 부른다.

 

그 죽음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면 거사가 치러져, 그게 규칙일세.”

 

인물들은 자신들이 윤리광이나 도덕광이라고 불리는 것도 평가하고 평가받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낯설고 새로운 잭 런던을 만날 거란 기대를 품었던 이 작품은 (오해일 수 있지만)알던 잭 런던의 실험 소설 같은 작품이다(처럼 보인다).

 

암살주식회사의 보스를 당사자에게 암살 의뢰하는 유쾌한 전개 속에서, 의뢰를 받아들이면 암살당하는 보스가 요구한 의뢰조건의 충족은 도덕적 근거가 무엇이며 합당한가...이다. 그 논쟁이 며칠 밤낮 이어진다. 오해마시길,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만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상대를 이해하고 지성적인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근본적 신념과 궁극적 이상을 철저히 검토하고 확인해야 한다고 느꼈다.”

 

: 암살 의뢰인. “사회는 진화했고 이제는 전체 사회가 스스로 구원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는 말에 올라탄 개인 혹은 소규모 집단이 사회의 운명을 관리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주장했다.”

 

드라고밀로프: 암살주식회사 보스이자 암살 대상인. “전체 사회가 스스로 관리할 능력이 있고, 서툴거나 실수해도 그런 자가 관리를 통해 진보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모든 내용이 설명과 입증으로 진행된다.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킬러들은 수사인가 했는데, 정말 그렇다. 철학과 원칙이 강철 같은 인물이, 현실에서 오점 없이 자신의 사상을 실행해온 조직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면, 그 조직의 마지막과 자기 삶의 마무리를 어떻게 상상했을까.

 

관건은 이 조직이 조직의 창조자인 나보다 더 우세할 것인가?가 되겠군. 조직이 창조자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창조자가 그보다 한 수 앞서나갈 것인가?”

 

법과 윤리는 정말 선호(favour)가 없는 창조물일까. 내 생각은 ism이고 남의 생각은 ideology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시련과 고통을 감수하고 목숨조차 걸었던 사상가들은 미치광이였을까.

 

홀은 와인잔을 한쪽으로 치운 뒤 테이블을 짚고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문장까지가 잭 런던이 쓴 내용이고, 이후는 다른 작가의 마무리이며, 다른 결론도 추가로 수록되어있다. 전혀 어색하지도 재미가 없지도 않게 잘 읽었다. 그럼에도 잭 런던 자신의 결론은 무엇이었을지...가 영원히 궁금할 것이다. 특이하고 재밌고 반가운 작품이다. 만나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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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안티구아 파노라마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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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 없는 커피를 즐기는 이에게 아주 좋은 향과 맛입니다. 빨리 품절되지 않고 스테디품목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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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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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지구공동체를 기본 단위로 하는 작품이 많은데, “한국에서밖에 나올 수 없는 SF”(김보영)라는 평을 받은 이 작품은 그래서 더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더구나 이토록 설레는 제목이라니요.

 

의료시스템과 삶이 철저히 자본화된 계급 시스템이라니, 얼마간 현실인 것도 같고 곧 현실이 될 것도 같아서 울울하지만, 그러니 더욱 문학이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차분히 만나보아야겠지요.

 

옛날 영화들이 몇몇 명작을 빼고는 대부분 잊혔듯, 우리의 기억 역시 선명히 빛나는 새로운 것들만 남고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다. 세계지도가 생겨난 이후로는 아무도 오아시스를 그리워하지 않듯이.”

 

.....................................................

 

되풀이해서 꾸는 꿈처럼 선입견과 편견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옵니다. 고령화, 장기이식, 의료시스템... 굳이 따지자면 확실한 이유는 없었는데, 저는 왜 작가가 20대라는 것에 놀란 것일까요.

 

작품에 몰입해서 읽어야하는데, 20대가 보는 문명과 사회가 어떤지가 궁금해서, 그런 내용들이 스토리에서 툭 튀어나와 도드라져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설정이 특이하면서 문장 가독성이 뛰어나서 곧 인물들의 매력이 단단해졌습니다.

 

참 많은 설정들이 이미 현실이거나 곧 현실이 되거나 너무 그럴듯해서, 전혀 낯설지가 않아서, 읽기엔 편했지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상업자본주의와 기술의 탄탄한 결합을 깨뜨릴 계기나 동력이 과연 있을까요. 벌써 그렇지만, 건강과 수명은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의 구매품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노화란 세금과 기억만으로 존재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것은 암이 아니라 심장 정지와 폐 정지다. 다른 말로 하면, 모자란 통장 잔고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아픈 거고, 그중에서도 오래 아프다 죽은 겁니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더 이상 지키지 못한 존재로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를 상상하면 정신이 어둑어둑해집니다.

 

이 작품에서는 건강보험이 아니라 정기구독의 방식으로 한 장기교환 영생이 가능해졌지만(한계는 존재), 여전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를 다룹니다. 생명연장은 정말 누구나 바라는 일일까요.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동의서는 어떤 단계까지의 연명과 치료를 거부한다는 의미일까요.

 

버디의 등장으로 우리 시대의 인간은 장기를 하나씩 임플란트로 갈아끼우며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숫자와 계산의 합리성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가장 영리한 방식, 죽음이 예정된 사람들의 마지막 인간관계를 돈과 교환하는 매매는 딱히 비난하거나 반대할 여지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진심과 사랑이 뜻밖의 사건이나 부담처럼도 보입니다. 불합리하고 복잡한 감정이니까요.

 

사회 곳곳의 허술하고 모순적인 안전망과 낙관들을 드러내고 꼬집고 무심하게 비판하는, SF 문학이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들을 서늘하게 만납니다. 인류가 도착할 세상은 이 작품 세계와 얼마나 닮아있을까요. 정말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을까요.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존재에 이유를 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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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에세이
4·16재단 엮음, 임진아 그림 / 사계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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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기... 10년이 더 흘러도 잊을 수 없는 그날 이후, 추모 리본은 제 빛을 잃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기억의 힘을 믿는다. 잊지 않는 이들이 아주 많아서 안도하지만,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위로하는 풍경은 너무 아프다.

 

그들이 누리지 못한 삶은 매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새롭게 갱신될 것이다. 그 어떤 말들 앞에서도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무거워 쉽게 고개 들 수가 없다.”(김애란)




 

처음부터 연재 에세이를 읽지는 못했다. 읽기 시작한 후에도 더러 눈으로만 읽고 잊거나, 한동안 새하얗게 잊고 살기도 했다. 그러니 기록은 정말 중요하다. 기록이 있으니, 늦더라도 빠진 시간을 주섬주섬 채워넣을 수 있다.

 

직접 겪지 않고 옆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 적어도 지금 유가족분들이 이뤄내려고 하시는 진상규명.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 세월호 참사를 계속 유효한 이슈로 만드는 것.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울 수 있으니까.”(이슬아)



 


봄꽃 중에서 노란 꽃을 보면 노란 리본이 떠오른다. 모니터 화면만 켜도 눈물이 흐르던 트라우마의 시절이 지나, 바뀐 사람들이 바꾸고 싶었던 세상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궁금한 시간이 되었다.

 

이전까지 나는 기억에 굳히기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제대로, 맞는 형태로, 단단히 굳는 것을 지키고 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잊제야 한다. (...) 이 공공의 기억을 확립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정세랑)

 

그건 권고사항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국가 차원의 세월호 대책과 무관하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들이 읽고 기록하고 곁에 서 있던 그런 순간들과 관련이 있다. 여러 번 건넸지만, 늘 좋은 인사를 반가운 분들로부터 이 책 속에서 받고 나도 보낸다.

 

슬픔의 기억력이 좋아질수록 훗날, 이 슬픔을 그대로 물려주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진실이 기억하는 느린 진심은 어떻게든 돌아오게 되어 있다. 우리는 떠나간 것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그 자리를 지켜낸다.”(서윤후)




 

전원구조라는 악랄한 오보의 붉은 글씨는 흐려지는 법이 없다. 이후 지속된 눈물과 슬픔에 오래 잠겼던 질문들이 점점 더 분명한 윤곽선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기억은 같고도 다르다. 그러니 50분이나 다른 목소리가 더 반가운 큰 위로다.

 

편리한 세상 속에서 기억은 힘을 점점 잃을 것이다. (...) 인간성과 이타심을 유지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효율적이지 않은 일로 판정되고 미끄러진다. (...) 4.16이라는 숫자를 외워본다. 지킨다는 건 본래 효율적이지 않고 불편한 일이다.”(황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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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봄을 달고
지향숙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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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이 아닌 책을 자연스럽게 읽기 시작한 것도 그리 길지 않지만, 에세이라는 문학을 알게 된 것은 더 근래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왜 자기 일기를 읽으라고 출판하는 거지? 자전소설만으로도 때론 불편하게 넘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창작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것저것 일단 읽다보니, 에세이란 내가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예단한 개인사나 사적 감정의 기록만이 아니라, 논픽션 르포에 가깝기도 하고, 전혀 모르던 세상을 안내하는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서로가 오래 깊이 나누는 대화 같기도 하다고 느꼈다. ‘에세이란 다양하고 무궁한 세계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다. (...)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을 존중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독서 모임에서는 서로의 성장을 생성하는 힘이 있다.”

 

직접 만나는 사람들의 수는 한정되어있지만, 책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수는 내가 펼치는 수만큼 늘어난다. 현실에서도 몇 시간씩 속 깊은 얘기를 나눌 관계가 흔치 않다는 걸 생각하면, 책으로 만난 이가 더 친밀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늘 배우게 된다.

 

“50대에 국문학을 공부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한 사람보다 춥고 배가 고픈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목표는 40에 퇴사하고 마음대로 살아보는 것이었는데, 40은 금방이었고 그렇게 살기에는 삶이 많이 무거워졌다. 별다른 계기가 없는 한 50에도 퇴사를 못할 것 같다. 도대체 다들 어떻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인지. 부럽고 궁금하다. 텃밭 농사를 하며 책방을 운영하는 꿈은 상상 속에서만 어찌나 황홀한지

 

책장에 책이 한 권씩 꽂힐 때 느꼈던 어린 날의 행복은 지금까지도 유효기간이 없다. 책을 사랑했던 이유만큼 삶도 소설처럼 다양했다. 책 때문에 망한 것인지 책 때문에 노후의 꿈을 꾸게 되었으니 성공한 것인지 미지수다.”

 

사람으로 힘들고 지친 만남은 노후에는 없을 것이다. (...) 인생의 책임감에서 해방되면 마음이 닿고 싶은 항구에 닻을 내리고 싶다.”

 

화들짝 놀랄 내용의 시련의 순간들을 만난다. 누구의 삶이라도 항상 꽃밭일 수는 없지만, 혼자만의 힘과 의지로 극복하는 방식 말고 필요한 도움이 멀지 않은 사회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저자의 강인한 선택과 행동력에는 중언부언 없이 감탄을 보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순간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삶은 희망도 절망도 없는 찰나이다. (...) 그 결정의 중심에서 육교는 나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시련이 없었다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적당한 안일함과 적당한 편안함에 길들여져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살아 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사물도 사람도 그렇다. 애타게 찾게 되지도 않는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은 부지기수고, 애착 역시 느슨해지니까. 비슷한 연배의 다른 삶에서 배울 것도 공감할 것도 적지 않았다. 아직 남은 봄을 서로 좀 더 즐기자고 응원을 보낸다.

 

한 사람의 삶이 사라진다는 것은 체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공간에서 사라져 간 것은 체온의 온기다. 사물에 스며든 사람의 체온을 기억으로만 느껴야 할 때 상실감은 슬픔이 아니라 끔찍한 고통이다.”

 

꽃과의 사랑에는 인간의 무의미한 감정에 지배당하는 복잡함도 없다. 나와 너라는 분리된 자아의 팽팽한 줄다리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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