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아 양념통닭


그래, 카나리아 통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몇 군데의 아지트 같은 곳이 있었다. 그중에 한 곳이 카나리아 치킨집이었다. 구역전 시장의 입구에 있는 치킨집으로 합기도를 다니다가 형들을 따라 들어가게 되면서 생맥주와 치킨의 조합을 알아 버렸다. 그 후 우리는 지치지 않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카나리아 통닭집에서 모여 양념통닭을 뜯으며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지치지 않는 것에는 정말 지치지 않았다. 열심히 했다.


합기도 도장에 다니게 된 것은, 사진부였는데 암실에서 선배들에게 혼나고 정리를 하고 늦은 밤 집으로 오는데 깡패 3명을 만났다. 있는 돈을 달라던 깡패, 같지 않은 양아치들. 골목이었고 가로등도 없는 그런 으스스한 골목에서 맞닥뜨렸다. 나는 돈이 없는 대신 카메라가 있었다. 늘 들고 다니던 카메라. 그 카메라를 지키지 위해 고슴도치처럼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누구나 집 장롱 속에 있는 카메라. 아버지의 카메라. 아버지는 이 카메라로 어린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많이도 담았다. 가난해도 사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 의 카메라는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그때 지켜낸 올림푸스 카메라를 아직도 들고 다닌다.


자고 일어났더니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고 며칠 지나니 부어서 동그란 얼굴 한쪽이 네모네모가 되어있었다. 합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속상했던 어머니가 도장에 보내주었다. 합기도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척도가 되었다. 대신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21시까지 자율학습. 합기도 도장 22시 도착. 한 시간 정규 발차기. 01시까지 발차기 연습 겸 놀다가 집으로 와서 그대로 뻗음. 학교에서도 뻗음. 점심시간에도 밥만 먹고 뻗음. 쉬는 시간 뻗음. 한문 시간 뻗음. 불어 시간 뻗음. 자율학습시간에 이어폰으로 음악 들음. 22시 도장 도착. 01시까지, 반복, 반복. 하지만 합기도는 너무 재미있었다.


어느 날 옆을 보니 어랍쇼, 친구 녀석들까지 합기도에 합류. 같이 발차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전부 하얀 띠를 매고 열심히 발차기를 했다. 우리는 아니지만 특훈이라 불리는 특수 훈련반에도 끼여 주말에는 요즘 조깅을 하는 강변으로 가서 강바닥에 그대로 낙법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죽기 살기로 했던 것 같다. 여름이라 아스콘이 이글이글한데 맨발로 구보를 하고 며칠 지나니 발바닥이 전부 벗겨졌다. 관장님은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학교 밖에서 듣는 칭찬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 합기도에 같이 다니는 형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이 카나리아 통닭집이었다. 토요일 저녁 맥주는 꿀맛이고, 양념 통닭은 튀겨서 바로 양념을 입혀 그대로 바로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통닭은 식어도 맛있다지만 뜨거울 때 먹는 그 맛이 있다. 단짠단짠처럼 뜨거운 양념치킨을 입에 넣어 후후 하며 먹고 차가운 생맥주를 들이켜는 맛. 그리하여 우리의 단골집이 되었다. 3년을 그렇게 일주일에 몇 번씩 다녔다.


카나리아 통닭집 구조를 설명하자면(잘 안 되겠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네 치킨집처럼 문 바로 옆에서 닭을 튀긴다. 그리고 카운터도 겸한다. 거기서 양념도 비빈다. 그런 바를 지나 들어가면 테이블이 3개가 있는 작은 홀이 나온다. 두세 평 정도로 작다. 홀에는 작은 어항이 있고 그곳에는 금붕어가 세 마리인가 있다. 어항 속 금붕어를 보는 재미가 있다. 구피나 열대어를 키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어항 속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저 보게 된다. 세상에는 그렇게 그저 보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기쁨을 준다. 그렇게 멍 하게 보고 있으면 맥주가 나온다. 앉는 소파는 싸구려 가죽으로 덮인 소파인데 쿠션감이 좋고 편안하다. 누군가 술이 되어서 한쪽을 쥐 파먹듯 뜯어 놨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솜을 끄집어내는 재미를 아는 녀석들은 자꾸 그 자리에 앉으려 한다.


자주 가다 보니 생일을 전부 카나리아 통닭집에서 하게 되었다. 인원이 많으면 주인아저씨와 아줌마는 방을 내주었다. 홀의 테이블이 있는 곳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안방이 나오는 그런 구조다. 방이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 대략 8, 9명 정도가 밥상을 놓고 빙 둘러앉아서 양념통닭과 후라이드 몇 마리씩 놓고 맥주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붙여 생일파티를 했다. 그리고 케이크는 반이나 잘라 카나리아의 7살 아들내미에게 덜어 주었다. 귀여운 녀석으로 우리는 그 녀석의 사진도 찍어서 인화를 해주고 액자도 만들어 줬다. 그러면 주인아주머니가 너무 좋아했다. 생일을 하면 통닭 이외에도 주인아주머니가 만든 잡채나 요리도 해줬다. 그래서 안 갈 수가 없었다. 우리와 교류를 했던 XX여고 문예부 애들은 아들내미에게 그림책도 주고, 동화도 읽어 주면서 아들내미와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인집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우리가 오면 몹시 좋아했다. 아들내미는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노는 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 도대체 공부는 지지리도 하지 않았구나.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조카나 동네의 친한 초딩들에게는 이왕 하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 엄마 아빠를 보면, 사는데 수학이니 자연과학이니 물리 같은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혹시 이런 질문받아본 사람이 있을까. 공부한 거 생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왜 열심히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1차적인 도움은 없을지 모른다. 수학이라든가,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사인이니 코사인이니 근의 공식 같은 것들은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놀고 싶어도 참고 앉아서 수업을 듣고 책을 보는 훈련을 하게 된다. 어른이 되면 일을 해야 하는데 사회에서 일을 하게 되면 공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하기 싫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초등 6년, 중고등 6년, 대학교 2년에서 4년, 의대라면 좀 더 해서 6년 정도 하면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도망가고 싶어도 앉아서 했던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 훈련의 결과가 생활에 나온다. 일을 하다가 도망가고 싶다고 나 오늘 안 할래, 하며 놀러 가버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특히 창작을 하는 일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매번 창작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글을 쓰던, 그림을 그리던, 작곡을 하던, 그 어떤 창작을 할 때 엉덩이를 붙이고 그 일에 매달려야 한다. 그 훈련을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면서 습득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한 사람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더 집중적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다. 그걸 확장하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나의 실패 아닌 실패는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와는 등을 지고 지낸 것 같다. 공부는 못해도 된다지만 나는 이왕 하는 공부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낫다고 본다. 성적이 안 좋으면 어때. 그 말도 맞지만 이왕 성적으로 나를 보여야 한다면, 학창 시절에 성적이 좋은 게 낫다고 본다. 그리고 양념 치킨을 좋아하는 시기도 딱 그때뿐이니까 먹을 때는 맛있게 먹자.


근래에 조깅을 하고 오다가 카나리아가 있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건물은 아직 있지만 폐허가 되어 있었다. 언제 허물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질지 모른다. 카나리아는 졸업 후에도 계속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시간 훌쩍 지나서 가보니 카나리아는 사라졌다. 형태가 있던, 형태가 없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진다. 그러면서 점점 이 세계에서 카나리아 치킨도 하나둘씩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도 검색을 해보면 아직도 구석구석에서 열심히 양념을 바르고 후라이드를 튀기는 카나리아 치킨집이 있다. 힘내 주십시오. 아무래도 우리는 그때 그렇게 먹은 카나리아 양념치킨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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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지금도 그렇지만) 1년 전에 느닷없이 그 녀석이 귀여운 딸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딸은 어려서 아빠의 다리에 붙어서 수줍어했다. 마스크를 해서 귀엽고 안타까워 보였다. 어린이들이 마스크를 한 모습은 왜 그런지 늘 안타깝다. 그 녀석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을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썩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 그 녀석은 주로 뒤에서 노는 편이었고 밴드를 하고 있어서 몸에 ‘반항’이 뿜어져 나오는 게 눈으로 보이는 그런 녀석이었다. 교복도 교복 같지 않게 입고 다녔다. 녀석은 대학교 밴드에 껴서 기타를 연주했을 정도로 기타를 잘 쳤다. 정말 누노 배텐코트 같았다. 머리를 길게 기르지 못해서 그렇지 얼굴도 잘생겼고(왜 밴드 하는 녀석들은 죄다 잘 생겼을까) 다리도 길었다. 밴드는 매틀밴드로 밴드 이름이 물레방아인가 그랬다. 스키드로우의 아이 리멤버 유의 12줄짜리 기타 연주도 곧잘 해서 날이 좋으면 학교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연주를 하곤 했다. 멋있었다. 그때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속주 기법으로 기타 연주를 하는 게 인기였다. 녀석은 당시에 고등학생 주제에 잉위 맘스틴의 곡을 연주하곤 했다. 대학교 축제에도 섰고, 각 고등학교 축제에도 불려 가서 연주를 했다. 아무튼 멋진 놈이었다. 강력한 록만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녀석은 비틀스의 음악을 몹시 좋아했다. 한 번 같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잉위 맘스틴, 잉베이 맘스테인, 잉위 맘스테인으로 불렸던 잉위 맘스틴의 앨범을 나는 가지고 있다




[넌 어때? 난 말이야, 비틀스의 화이트 앨범을 좋아해.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는 조지가 만들었어. 난 조지 해리슨이 가장 좋아. 넌 어때? 이렇게 좋은 노래를 만들었잖아. 조지 해리슨의 얼굴도 네 명 중에 가장 멋지게 생겼다고 생각해.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폴 매카트니는 어딘지 구울 같은 얼굴 모습이야. 존 레넌은 점점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 같고 말이지. 링고 스타는 전형적인 미국 만화 3편쯤에 나와서 죽는 얼굴처럼 생겼어. 그런데 조지 해리슨은 퍼펙. 많은 조명이 두 사람에게만 집중되었지만 난 달라. 조지 해리슨은 패티 보이드를 가지잖아, 세상에. 봤지? 패티 보이드, 사람의 모습이 아니야. 조지가 패티 보이드에게 사인을 해주면서, 무려 7개의 하트를 그려줬잖아.  


와일 마이 기타, 저 노래를 녹음할 때 에릭 클랩튼이 놀러 온 거야. 두 사람은 정말 친한 친구잖아. 이봐, 에릭, 기타 세션을 맡아줘. 조지가 에릭에게 말했어.  어? 내 기타가 없어서 잘 될까? 망치지 않을까?  해준다는 말이지? 자 그럼 내 기타로 연주를 해줘. 에릭 클랩튼은 즉흥적으로 기타 연주를 해 주잖아. 조지는 에릭에게 기타도 빌려주고 패티 보이드도 빌려주고. 박애주의자 같은 녀석.


하지만 조지도 존에 비하면은. 존 레넌은 정말 돌아이였어. 이 녀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생겨 먹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난 멤버들을 데리고 비틀스가 되려고 하지 않아, 그건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고.  존 레넌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존 레넌이 오노 요코를 사귀고 있을 때였어. 아직 메시아의 형상으로 돌입하기 전이었지. 아직 악동이었고 음악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어린이 같았을 때 말이야. 그 당시 일본에는 평범 펀치라는 잡지사가 있었어. 우리나라로 치면 선데이서울 같은 거지. 70년 전후에 생겨나서 거품경제가 파괴된 후 사라진 일본의 많은 잡지사 중에 하나였어. 요코 덕인지 평범 펀치라는 잡지는 존 레넌을 인터뷰하게 돼. 잡지사는 완전 대박을 친 거지.  존 레넌은 인터뷰에서 아주 화가 난 상태로 열변을 토했는데, 우리(비틀스) 네 명은 지금까지 대체로 어떤 여자든 모두가 돌리며 공유해 왔다. 그런데 이 녀석들 세 명은 요코에게만은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건 심한 굴욕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다.  친절한 박애주의를 몸소 실천하는 녀석들. 서로 평등하게 사랑을 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별을 보고 별의 그 모습에 홀딱 빠져서 보게 되는 그런 시기였다. 괴짜였다. 학교에 전기기타를 들고 오지 않나. 체육시간에 엠프를 켜서 징 연주를 하다가 체육샘에게 끌려가서 신나게 맞았지. 그래도 웃었다 그 녀석. 그랬던 녀석이었는데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그 이후로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 너 그때 우리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라고 하면 미소를 지으며 교통사고를 당하고 난 뒤에 기억이 안 되는 게 많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타 연주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석유화학단지에 입사해 다니면서 선을 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하여 귀여운 딸을 낳았다. 말을 빠르게 하지 못하며 살이 많이 쪘다. 약간 옆으로 넘어질 듯 걷는다. 어제도 지나가다가 들려서 아아를 사주고 갔다. 글쎄, 뭐가 잘못된 걸까. 아니면 잘되고 있는 걸까.


어제 '노웨어 스페셜'을 봤다. 3살인지, 4살인지 마이클의 연기 같지 않은 연기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 버렸다아빠와 손잡고 걸을   삐죽거림과 시리얼을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이나 표현할  없는 감정을 담아 아빠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어린 마이클의 모습에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렸다영화는  죽음을 앞둔 34살의 시한부 아빠 존이 엄마 없는 마이클의 부모를 찾아 주려는 이야기다영화가 되게 슬플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보는 이들의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그저 덤덤하게 흘러간다이래도  정도로 덤덤하게 흘러간다.


존은 마이클을 데리고 복지사와 함께 자신 대신 맡아줄 부모의 집을 다닌다. 하지만 존의 마음에 드는 대리 부모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마이클과 다니다가 마이클은 한 아주머니의 집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 아줌마는 언제 죽어요?


영국 영화인데 영화  내내 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또 비가 오는 날 뿐이다. 영화는 감정을 모으는 신파를 보여주지 않는 대신 감정을 분산시키는 배경이나 과정으로 존의 마음과 마이클의 심정을 표현한다. 아무튼 너무 좋다. 이런 영화의 태도도 좋고, 영화가 그냥 좋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피아노 곡이 조용하게 흐르면서 존이 마이클 데리고 그 아주머니의 집을 두드리고 아주머니가 나오는데. 그때 초췌한 존의 얼굴이 보이고 마이클이 손을 잡은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볼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눈물은 전조도 없이 어떤 감정의 이입이나 돌발도 없이 그저 눈물이 죽 나와버렸다. 잘 되고 있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거겠지? 꼭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덜 불행했으면 하는 거지 https://youtu.be/qRgEvytO4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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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2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교관 2022-01-24 11:24   좋아요 0 | URL
^^
 

하루키를 그린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내 식으로 그려봄



중학교로 올라갔을 때에는 초등학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6학년이라는 최고학년이 지니는 굳건함과 남학생과 여학생이 어우러진 교실의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중학교는 냄새나는 아이들과 함께 목욕탕 한가운데 던져진 기분이었다. 가장 힘이 없는 1학년이 지니는 분위기는 2학년과 3학년의 그저 좆밥인 것이다. 어린이는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청소년이 되지도 않은 아주 기묘한 성장기가 중학생이다. 아직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교복도 전부 커서 어딘가 로봇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위계질서를 잡으려는 권력욕은 심해서 힘이 있는 아이들은 힘이 없는 아이들을 극도로 누르는 모습을 보인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그저 먼지처럼 지냈다. 나는 너무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없는 존재감 때문에 딱히 힘들어하거나 나를 누군가에게 내보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중학 3년 동안 내내 했던 생각은 빨리 중학생이 지나갔으면 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어린놈의 자식이 얼마나 무료하고 존재가 먼지 같았으면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했을까. 나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초등학교 때에는 분명 공부도 곧잘 해서 성적순으로 뽑는 반장도 했는데 중학교에서는 성적도 나오지 않았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이어폰으로 음악이나 들으며 등하교를 했다. 고작 미술시간 정도가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미술을 잘한다고 해서 그 어떤 선생님도 칭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술 선생님도 그런 분위기였다. 미술시간은 구색 맞추기였다.


한 번은 담임이 나를 불러 문제집을 주면서 이걸로 공부를 해보라고 했다. 담임은 뾰족하게 생겨서 절대 나 같은 학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가 학교로 와서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뭔가를 준 모양이다. 그게 너무 억울했다. 촌지를 받고 관심도 없는 학생에게 관심을 던지듯이 주는 인간이 나의 담임이라니. 공부를 하지만 성적이 나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부모님은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6학년 때까지 그랬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는 순간 알았다. 나는 루저 중에서도 먼지 같은 루저라는 걸. 발버둥 친다고 해서 나에게 머물러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발버둥을 치기도 싫었다. 발버둥이라는 건 함부로 치면 안 된다. 가망이 있을 때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발버둥 쳐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에너지만 소모하게 된다. 서열이 확실하고 성적순으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판단했다. 나처럼 성적이 안 좋고 먼지 같은 애들은 학교의 숫자를 채우는 하나의 몹인 것이다.

 

나는 집에서 중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버스로 치면 6 정거장, 7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였다. 방송국이 있는 산을 지나 도로를 따라 죽 걸어서 하천을 건너 XX여중을 지나서 학교까지 걸었다. 집에서 좀 일찍 나와서 라디오를 들으며 천천히 걸어서 학교에 갔고 돌아올 때에는 빙 둘러 다른 길로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래서 걸으면 보통 1시간 이상이 걸렸다. 너무 싫은 시간이 영어 시간이었다. 영어를 가르쳐 주기보다 억양만 가르쳐주었다. 영어 문장이 있다면 억양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 선생님은 연필로 억양을 표시했다. 그리고 시험도 숙제도 전부 억양을 표시하는 거였다. 한 번은 억양을 내 마음대로 표시해서 숙제를 냈다. 영어 선생님은 로렉스를 차고 있었는데 시계를 탁 풀더니 들고 다니는 드럼 스틱으로 머리부터 손바닥 허벅지까지 난도질했다. 때리다가 자기가 더 화가 나서 강도가 더해졌다. 나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암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마 2학년이었을 것이다. 반에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 녀석이 생겼다. 그 녀석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아이로 학교가 끝나면 나와 같이 걸어서 집으로 왔다. 얼굴은 유재석처럼 생겼고 머리가 곱슬곱슬해서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성적을 제외하면 둘 다 먼지 같았고 이야기도 잘 통했다. 같은 반이라 점심도 같이 먹었다. 그렇게 1학기를 같이 보내고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인사를 하고 방학이 끝나면 잘 지내보자며 헤어졌다. 여름방학을 보내고 2학기가 되었을 때 그 녀석은 나를 피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언젠가 그러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녀석에게 왜 그러냐, 또는 그런 일로 내가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날은 가을에 접어든 날이었다. 가만있으면 춥고 움직이면 더운 날이었다. 곧 기말고사가 있다. 공부를 매일 했지만 시험성적은 안 나올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하천을 가로질러 가는데 하천 바닥에 누군가 엎드려 있었다. 하천은 발목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지만 저렇게 사람이 엎드려 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 사람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했는데 사람이 맞았다. 그때까지 왜 사람이 물이 흐르는 하천바닥에 엎드려 있는지 잘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물웅덩이에 얼굴이 그대로 처박혀 있는데 도통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물에 빠져있는데 십분 이상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저 아저씨가 술에 취해 저런 모습으로 잠이든 건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고 저대로 물에 얼굴을 빠트린 채 10분을 꼼짝 않고 있었다. 아저씨는 체크무늬의 난방을 입고 있었는데 등이 위로 부풀어있었다. 그 모습이 나에게는 몹시 끔찍한 현실로 다가왔다. 움직여야 할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 모습을 실제로 봤다는 것이 나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사람이 죽는 방식에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얼굴이 물에 잠겨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방식은 너무나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은 나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양손이 차렷 자세로 물에 빠져 있는데 손도 물에 퉁퉁 불어 사람의 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얕은 물에도 사람이 빠져 죽을 수 있다니.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아니, 당시의 나에게 충격이라는 단어로 그걸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나는 죽은 자의 바로 앞에서 꼼짝도 못 하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나에게는 끔찍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제야 경찰이 사이렌을 올리며 오고 바리케이드를 쳤고 나를 거기서 떨어지게 했다. 후에 얼굴이 하천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은 잔상을 남기며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이후로 내가 하는 말이 옳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렇지 못한 지 전혀 구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상대방의 이야기가 조금씩 축소되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고 올바른 행동을 하더라도 이것이 진정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한 척도를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 중학시절 내 몸속에는 텅 빈 공동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그 속에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들로 채워나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현실의 죽음을 본 이후 공동 속에 기이한 존재가 싹트기 시작했다.  얼굴을 박고 죽은 아저씨는 사랑받고 중학교 그 시절을 보냈을까. 시간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책임이 따르는 일이 많고 또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말을 하천에 얼굴을 박고 죽은 아저씨가 일어나서 나에게 말했다. 인간의 생이란 대체로 고달프고 자주 고통스럽다가 아주 가끔 반짝인다고 나는 알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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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24에서 책을 몇 권 주문할 때 채널예스도 받아서 펼쳐 보았다. 박준 시인의 인기가 좋아서 표지부터 해서 스타트를 끊었다. 제일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박준 시인의 인터뷰를 옮겼다. 박준 시인의 첫 시집 그걸 읽고 온 동네방네 읽어 보라고 떠들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박준 시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집 제목이 생각이 안 난다. 당신의 이름으로 밥을 지어먹었다인가? 암튼 이름을 먹었다. 아휴 알았다니까요, 읽어 볼게요. 라며 당시에 독서를 좋아하는, 취미로 가진 이들에게 들은 말이었다.

박준 시인의 시는 술술 읽힌다. 나는 술술 읽히는 시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편견이지만. 한강의 시는 술술 읽히지 않아서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박준 시인의 시는 술술 읽히는데 사색케 하고 사고하게 했다. 그 당시에 배캠에도 나왔었다. 배철수 형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때에는 창비인가 문지에서 편집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기억이란 이래서 기억인 거지.

채널 예스에는 소설가 정용준의 짧은 소설도 있다. 첫 문장을 읽고 나는 그만 세신사가 불국사, 백담사 같은 사찰로 읽어 버렸다. 여러분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소설 ‘돌멩이’는 세신사로 일하는 신 씨의 목욕탕에 온 몸에 멍이 들고 눈 안은 실핏줄이 터진 한 소년이 들어온다. 그리고 멍하게 앉아만 있는 그 소년의 몸을 무료로 밀어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주 짧은 소설인데 아주 긴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읽은 느낌이다. 소설이 참 좋다. 짧게 쓴 소설의 앞뒤의 이야기가 머리에 마구 떠오른다.

채널예스를 한 장 한 장 읽다 보니, 아무튼 채널 24, 예스 24의 목표는 책을 판매해야 한다. 하루키의 ‘무라카미 티셔츠’를 읽어보면 그 속 어디쯤에 책을 읽어 주세요, 그래야 작가들도 먹고 산다는 글이 있다. 채널 24도 책 판매가 큰 목적이니까 이 안에 이번 달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도 나왔다. 일기 형식이고 두 번째 산문집이다. 최승자 시집도 몇 권 있다. 역시 읽으면 어렵다. 그래서 좋다. 최승자 시인의 시에 얼마나 빠져서 뇌에 고통을 주었던가. 생각해 보니 한창 시를 적었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문예지에서 하는 시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탔다. 그런데 나는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이 정도로 적은 시에 상을 준다니? 주최하는 곳이 이상한 거 아니야? 같은 생각이 가득했다. 지금 생각하니 왜 그랬나 싶지만, 만약 그때 상을 받아서 어영부영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면 그 후에 나는 그 타이틀에 걸맞은 시를 열심히 적었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시시해지는 시는 시라기보다 문구? 정도다. 시라는 건 시를 적는 시인의 고통이 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까. 박준 시인도 저 인터뷰를 읽어 보면 산문에 비해 시는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고통스럽게 적는다고 했다.


아직까지 이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개근상도 못 타본 내가 상을 놓친 것은 조금 아쉽다. 예전에 강변가요제인가? 대학가요제인가? 거기서 대상을 타고 그날 저녁에 기쁨에 만취하여 트로피를 잃어버린 녀석들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시는 왜 그런지 하찮은 것,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관심을 두고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아서 좋다. 그래서 시는 대중교통 같다. 자가용이 아무리 많아져도 대중교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역시 시 또한 사라지지 않고 작고 힘없는 사람들 곁에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일기도 소개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잘 모르니까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이 사람은 괴짜에, 천재에, 바보에, 운이 너무 좋거나 물욕이 없고 안타까운 사람이다. 집안에 아주 부자였다. 엄청난 부자였는데 예술가들을 후원을 많이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8남매인가 그랬는데 어릴 때부터 집으로 음악가들이 와서 저녁 연주를 해주곤 했다. 그 음악가들 중에는 말러도 있고 브람스도 와서 막 연주를 해줬다. 집에 피아노가 7대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만드는 걸 좋아해서 후에 공학을 전공하니,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피아노였을 것이다. 클림트는 비트겐슈타인의 셋째 누나도 그려준다. 또 셋째 형인가? 2차 대전 중에 왼팔을 잃었는데 라벨이 그를 위해 한쪽 팔로도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곡을 작곡해준다. 대단하지.


비트겐슈타인이 어린 시절에 학교에 가는데 뭐랄까 말투가 이상해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초딩 때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을 텐데 비트겐슈타인이 좌측에 있고 우측에 있는 꼬꼬마가 히틀러다. 후에 독재자가 되었을 때 우리 학교에 이상한 말투의 유대인 녀석이 있었지,라고 했단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커가면서 죽음에 다가가려고 했다. 자신의 정체성 같은 것도 혼란했고, 무엇보다 아버지와 재산 문제로 늘 마찰이 있던 첫째형이 동성애자였는데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모습에 비트겐슈타인은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형과 셋째 형도 그만 극단적 선택을 하여 세상을 떠난다. 동성애자인 비트겐슈타인도 늘 죽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영국으로 가서 대학교를 다닌다. 캠브리지대학인가, 거기를 다닌다. (제가 비트겐슈타인을 다시 한번 찾아보고 글을 적으면 되는데 너무 귀찮습니다. 예전에 주워들은 것들을 그저 나불나불 거리는 것이니 어? 그게 아닌데 하는 부분은 제대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성인이 되면서 계속 죽음의 유혹에서 괴로워한다.


그러다 보니 철학을 너무나 하고 싶었다. 그래서 스승인 러셀을 찾아간다. 하지만 러셀은 귀찮아서 늘 도망 다닌다. 하지만 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녀석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할 수 없이 비트겐슈타인에게 그럼 방학 동안 글을 하나 써와라 그래서 그걸 보고 네가 철학을 할지 그냥 공대생으로 남을지 결정을 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방학 동안에 글을 하나 써온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이 써 온글의 첫 부분을 읽자마자 너는 철학을 해라, 그렇게 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지금 이렇게나 추앙받는 철학가의 길로 접어든다. 러셀에게 써 온 그 글이 인터넷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유명한 이야기,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지금 이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재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지금 이방에는 코뿔소가 없다고 했는데 비트겐슈타인이 그 말을 부정하며 증거를 보여달라며 두 사람의 논쟁이 시작된다. 결론은 이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하하. 러셀은 지독스럽게 이런 논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비트겐슈타인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다.


그러다가 1차 대전이 터지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면제자인데 손을 들고 나는 입대하겠다고 우겨서 입대를 한다. 전쟁이야 말로 죽음을 바로 맞닥트릴 수 있기 때문에. 더군다나 포병의 관찰병인가 그 보직을 자원해서 간다. 거기가 가장 적에게 포탄을 맞을 확률이 높은 자리다. 왜냐하면 적의 포대가 어디에 있나 관찰을 하는 곳이니까 적에게 노출이 되면 바로 포탄을 맞는 곳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곳을 자원한다. 그곳에서 총알이 빗발치는데 가운데에서도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한다. 그 일기가 바로 저 책이다.


전장에서 총알과 포탄이 터져 막사가 터지는 가운데에서도 글을 미친 듯이 쓴 작가가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셀린저다. 둘 다 정신이 나간 거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 머릿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래서 일반병으로 입대를 했는데 장교로 제대를 하기도 했고, 적에게 잡혀 포로가 되기도 하는데 집이 워낙에 부자라 돈으로 빠져나오기도 한다. 전후에 아버지가 사놓은 미국 채권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완전 부자에 부자에 부자 중에 부자가 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게 돈은 무용한 것이었다. 다 나눠주었다. 남아있는 형제들과 예술가들에게 다 준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에게는 나눠주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이 갑자기 돈이 불어나면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했단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자기의 별장 하나만 남겨 놓는데, 그게 말이 별장이지 산 언덕에 아주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이다. 이것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그 별장을 볼 수 있다. 거기서 생활을 한다. 그저 흙 파먹어가며.


그러다가 2차 대전이 터지고 이번에는 간호병인가?로 자원입대를 한다. 아아 이제 죽을 수 있구나. 비트겐슈타인은 늘 이런 생각에 시달렸다. 다시 제대를 하고 별장에서 생활하다가 별장 생활을 청산하고 한 초등학교의 교사로 가는데 거기서 애를 두들겨 패서 기절을 시키기도 하고. 친누나의 집을 자신이 지어주는데 그게 뭐랄까 당시의 건축물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금 현대적인 이 시대의 건축물과 흡사한 집을 짓는다. 역시 인터넷을 찾아보면 현대식으로 지은 비트겐슈타인 식 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캠브리지로 와서 연구를 하라는 러셀의 연락을 받는다. 그래서 훌훌 털고 그곳으로 가는데 마중을 누가 나오냐 하면 바로 케인즈가 마중을 나온다. 케인즈가 그 당시에 했던 말이 드디어 ‘신‘이 오는구나,라고 했다. 그러다가 50년대, 60대에 전립선암이라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비트겐슈타인은 몹시 기뻐했다. 철학적인 언어 말고 가장 유명한 말, 지난 나의 생활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했나. 그렇게 세상의 별이 되고 만다.

 

비록 이렇게 초간단 뇌피셜로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주절주절 했지만 그의 철학은 철학가들은 물론이고 음악가, 미술가, 작가,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이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가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를 규정한다’이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그의 글을 읽으면 철학적인 사유가 우리 일반화에 들어옴으로 해서 우리의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이 든다. 나도 한때는 비트겐슈타인과 사르트르를 읽으며 와 이건 철학인데 너무 재미있는 걸, 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두가 사랑하기 때문에 관심 있으면 한 번 제대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나올 전자책 표지의 디자인을 두 가지 버전으로 해서 보내주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기린의 언어는 주인공 라미라는 중학생이 어릴 때부터 다니던 동물원의 기린이 무력해 보이기에 중학생이 되어서 탈출을 시키기 위해 기린의 언어를 습득하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후에 라미가 성인이 되고 기린의 언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숨기고 살아가는데 느닷없이 기린의 언어로 라미에게 말을 걸어오는 어쩐 존재가 생기면서 다시 이야기가 진행되는 그 후의 이야기를 적으려고 초반까지 좀 적어놨는데 질질 끌고 있어서 혼자서 낭패군, 하며 있다.


대부분 이른 오전에 바닷가 맥도널드에 일찍 가서 자리를 잡고 맥모닝 따위를 먹으며 적었을 때가 제일 잘 적혔는데 코로나가 볼기짝을 후려치듯 몰려든 다음에는 그걸 할 수 없게 되어서 인지 수월하게 앞으로 쾅쾅 나가지 않는다.

 


나의 소설을 최초에 세상에 내보이게 만들어준 건 한 계간지였다. 그 계간지의 편집장님이 기묘하게도 나의 소설을 좋아해 주었다. 그래서 무려 2년이나 연재를 했다. 그 편집장님은 한솜 출판사 대표이시기도 하고 장편, 단편 소설은 물론이고 출판업에 뛰어들어 열심히 하신 분이다. 나의 소설을 좋아해 주시고 칭창만 해줬던 것이 기억난다. 그랬던 계간지도 코로나의 직격탄인지 어쨌는지 사라졌다. 거의 30년은 된 것 같은데 코로나 이후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계간지가 있던 기업은 한솜미디어로 굳건하지만 계간지는 이제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코로나로 사라진 출판업, 문예지, 가게, 직업들이 얼마나 많을까. 소설가 황정은은 코로나 시기의 일기를 꾸준하게 적어서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가 소멸하고 또 생성했을 것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번 채널 예스의 테마가 일기다. 작가들이 코로나에 접어들어 기록한 자신의 일기를 테마로 하고 있다.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가 뭘까. 그건 자기 혼자 쓰고 읽으면 일기고, 세상에 내보이면 에세이다.라고 생각한다. 에세이의 좋은 점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 보아라, 같은 문장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기니까. 밤에 쓴 일기라면 좀 더 감성적이고 감정에 치우쳐 후에 읽으면 오글거릴 수 있지만 솔직한 자신의 속마음이고, 낮에 쓴 일기라면 밤에 피는 꽃만큼은 아니라서 감정이 조금 소거되어 담백할 수 있다. 나는 태어나서 아직 자기 계발서를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상태로는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다. 매일 쓸 일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단 쓰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서 똥 누고 밥 먹는 것도 특별해진다.


그나저나 너는 잘 있냐, 그곳은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내내 얇은 하늘하늘 에이프릴 만으로도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있겠지. 대답도 없고 말도 못 하고 소식 없으면 잘 있는 거지. 아직 로비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게 마음이 안 든다. 크리스마스트리라는 건 12월 26일이 되면 싹 다 치워버려야 좋은 거 같은데. 아직까지 머라이어 캐리가 올아원포~를 부르고 있다니까. 아무튼 너도 그렇고. 너무 좋아하진 말자. 너무 좋아하면 너무 좋아해서 미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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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19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널 예스 이거 볼만하죠?
예전에 강남 예스24가 있을 땐 얼마만에 한 번씩 가서
뭉터기로 가져 온 적도 있는데 그곳이 없어지고 나니
잘 안 보게 되네요.
과월호는 2천원인가 하던데. 꽤 싼 건데 비매품으로 파는 걸
돈 주고 산다고 생각하면 좀 아깝더라구요.
당월호는 300원인가 하죠? 그건 또 적립금으론 결제가 안 나는 걸로
아는데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이래저래 저와는 인연이 없는 잡지가 되어버렸는데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요.^^

교관 2022-01-20 11:49   좋아요 1 | URL
체널예스에 대한 숨은 이야기가 많으시네요, 듣고 있으면 재미있습니다 ㅎㅎ. 이번 호를 관통하는 주제가 좋아서 그런지 다 읽어 버린 것 같아요 ㅎㅎ.
 

남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에 맥도날드로 달려가 커피와 감자튀김을 씹으며 하루키 읽기. 매일 달리는 조깅코스에서 표층적으론 미미하지만 심층적으로 다른 공기와 만나기. 안성탕면이나 스튜에 토마토를 듬뿍 넣어 으깨 먹기. 이층에서 창밖 일층 바라보기. 마음대로 일 시작해서 마음대로 일 끝내기. 덴마크식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 관찰하기. 사람들에게 소설적 거짓말하기. ost 찾아 듣기. 영화 보고 리뷰 적기. 협소한 인간관계를 좀 더 좁히기. 운전하면서 에버 프리 크게 따라 부르기. 돼지국밥 집에 계란 하나 들고 가서 나올 때, 아직 막 보글보글 끓고 있을 때 탁 깨서 넣기. 샤워하고 캐시미어 이불에 발가락으로 비비기. 애플 키보드로 활자 쓰기. 노순택의 사진 찾아보기.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우는, 나보다 약해 보이는 인간 노려보기. 자주 가는 오뎅 집에서 무 집어먹기. 핸드크림 바르고 손등에 냄새 맡기. 참치 인간 상상하기. 바닷가 라바짜에 제일 첫 손님으로 제일 첫 커피 받아 마시기. 비 온 후 해무 들어마시기. 조카와 서점가기. 상관없는 사람이 상관없는 세계에 대해서 하는 말 멍청하게 듣기. 잠들어 있는 곱슬이 배 만지기. 새 볼펜 구입하여 볼펜 심이 줄어들어가는 것 보기. 로렌스 라우리의 그림 속 사람들 따라 그려보기. 미스틱 훔쳐보기. 그럴만할 때 손톱, 발톱 깎기. 현실을 illusion 화 시키기. 기억의 표면에 붙어있는 당신의 눈동자 떠올리기. 오아시스의 스탠 바이 미 듣기.

따위를 예전에 좋아했다.

한동안은 그림 그리길 좋아해서 열심히 그렸었다.

불과 일이 년 전.


주위 사람들을 그려줬다.

그리고 보니 전부 여자다.

반성한다.



민들레가 좋은 이유는 이름이 민들레이기 때문이다. 민들레만큼 예쁜 이름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민들레는 거창하지 않고 들판에 가면 늘 볼 수 있어서 좋다. 불꽃처럼 한 번 화려하게 피는 꽃도 있지만 그저 늘 볼 수 있어서, 그래서 언제나 곁에 있어서 위로가 되는 민들레가 좋다. 누군가, 만약에 나는 민들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고 말한다면 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손을 내밀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민들레는 내내 초조해서 초초하게 바람을 기다린다. 그러다 바람이 불면 홀씨가 바람을 타고 그리운 사람에게로 간다. 그 사람은 홀씨가 코에 들어가 에취 하며 재채기를 한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핑 돈다. 눈물은 그리움의 맛이 난다. 민들레만큼 확실한 노란색을 띠는 꽃도 없다. 민들레는 노랗기 때문에 좋다. 노란 것들은 전부 예쁘다. 너무 흔해서, 너무 흔해빠진 노란색이라 좋아한다. 노랑은 사랑을 말한다. 민들레는 있는 그대로 사랑을 말한다. 안녕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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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18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그림 잘 그리시네요.
여자분들한테 인기가 많으신가 봐요.^^

교관 2022-01-19 11:47   좋아요 1 | URL
인기 같은 건 다 뜬구름 같은 것이에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