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가을빛이 스며든 바람이 불어와서 얼굴을 건드렸다.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 나무에 색을 칠하고 하늘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렇게 있으면 추울 텐데,라고 학교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위 아저씨를 보고 목례를 했다. 서쪽 숲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지,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다리를 모으도록 해, 그러면 덜 춥지. 라며 낙엽이 바람에 딸려 가듯 수위 아저씨가 학교 뒤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일요일의 학교는 고요했다. 종소리도 평소와 달랐다. 아이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싹 소거된 학교는 학교 같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는 수위 아저씨가 없다. 누구일까.


발바닥이 가려웠다.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발바닥이 가려워서 욕실 바닥에 앉아서 발바닥을 긁었다. 좀 시원한가 싶더니 긁는 걸 멈추었더니 두 배로 가려웠다. 술만 마시면 이렇다. 특히 와인을 마시면 더 그렇다. 와인의 어떤 성분이 나의 세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미지를 입힌다. 그 세포는 발바닥에 포진되어 있는 세포들로 방어막을 펼치느라 분주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손은 열심히 긁어야 했다. 와인을 분명 한 병 정도 마신 것 같은데 술에 취했다. 와인은 요즘 흔히들 마시는 시고르 자브종이다.


그 정도에 이렇게 술에 취해 발바닥의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있다. 샤워를 하는 내내 발바닥이 가려웠다. 몸을 닦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으니 발바닥이 가려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는 시고르 자브종 와인을 마시지 않으리.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그동안 살면서 다짐을 몇 천 번이나 했을까. 가려움은 점점 증식했다. 가려워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처한 입장, 나와 관계된 일, 내 주위의 인간관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려움은 여지를 두지 않았다. 가려움은 뇌를 침투해서 두정엽, 측두엽, 전두엽 같은 것들이 해야 할 일을 몽땅 스톱시키는 것이다. 가려움이란 그런 것이다.


너무 가려워 손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다. 책상으로 가서 자를 찾았다. 서랍을 여는 동안에도 발바닥이 가려워서 발가락을 오므렸다. 늘 첫 번째 서랍 안에 자가 있는데 거기에 없었다. 내 기억의 문제일까. 발바닥은 자로 긁어야 하는데 자가 없다. 할 수 없이 볼펜으로 발바닥을 긁었다. 그렇지만 자만큼 시원하지 않았다. 좀 더 날카로운 무엇이 필요하다. 술이 올라온다. 술이 목구멍을 드래프트 한다. 곧 머리까지 올라올 것이다. 한 손은 발바닥을 긁고 있고 한 손은 다리를 잡고 있었다. 인간이 할 수 없을 정도의 묘한 자세다.


인간관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해줘야 맞는 것일까. 진정 그게 올바르게 생활한다고 믿게끔 보이는 행동일까. 모든 이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될 수 있으면 인간관계를 축소하고 축소하여 협소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것일까. 한 이불에 같이 들어도 잠은 혼자서 잘 텐데. 인간관계란 그런 것일 텐데.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발바닥이 너무 가려웠다. 손에 차가운 무엇이 잡혔다. 잠이 드는 동안 술까지 더 취했다. 천장이 빙빙 돌 정도로 어지러운데도 발바닥은 가려웠다. 욕이 나오지만 지성인이라 욕은 삼켰다. 욕을 하고 싶은데 욕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인간이 괴물이 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내일이 오는 게 무서운 것이다. 크앙.


일단 손에 잡힌 차가운 무엇인가로 발바닥을 긁었다. 잠결이고 술이 취했지만 너무 시원했다. 그 시원함이 뇌를 습격했다. 머리가 마치 무더위에 지쳐있다가 은행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가려움이 순식간에 발바닥으로 줄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긁는 그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 시원하게 다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시원함이었다. 배가 고팠다.


학교 로열박스에 앉아 있었다. 다시 계절이 돌고 돌아, 기가 막힌 햇살과 그에 맞먹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기에 왜 또 앉아 있는 것일까. 기시감이 드는 동시에 낯선 이곳은 내 학교일까. 나는 수위 아저씨를 기다렸다. 해가 조금 이동을 했다. 수위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는 아저씨가 낯이 익었다. 해는 등지고 있지 않았는데 수위 아저씨의 얼굴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었다.


역시 쉬는 날 학교는 적요했다. 이런 적요는 나쁘지 않다. 세상에는 소음이 지배하고 있는데 쉬는 날 학교에는 비교적 적요가 고요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게 마음에 든다. 마치 파동 없는 호텔 풀 사이드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다. 바람은 있지만 소리가 소거됐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깊이가 느슨했다.


서쪽 숲은 이미 한 겨울이네, 라며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수위 아저씨를 봤다. 역시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쩐지 수위 아저씨에게 나는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음 저 밑에서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수위 아저씨는 뒷짐을 지고 내가 보는 운동장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나도 시선을 아저씨가 두는 방향으로 옮겼다. 해가 또다시 조금 이동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도 조금 길어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같이 먹으려고 햄버거를 사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 말에 아저씨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이 먹고 싶어서요, 옛날 햄버거예요, 햄버거 안에 햄과 상추만 들어있는. 라며 나는 수줍게 내밀었다. 수위 아저씨는 표정은 없었지만 내가 내민 옛날 햄버거를 받으면서 아마도 조금 기뻤을 것이다. 예전 그 오래 전의 기억이 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햄버거를 까서 야무지게 먹었다. 맛이 썩 있지는 않았지만 꽤나 맛있었다. 수위 아저씨는 마치 나를 어린이처럼 내가 잘 먹고 있는지 뒤에 서서 흐뭇하게 지켜봤다. 해가 이동을 할 때마다 그림자도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 나는 수위 아저씨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살을 받으니 잠이 쏟아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저씨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정신이 몽롱했다. 가물가물 한 것이 발바닥으로 나의 의식과 자아가 몽땅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겨우 눈을 떠 발바닥을 보니 날카로운 것에 난도질이 되어 침대 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위 아저씨는 눈물보다 진한, 붉은 사랑을 주고 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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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방 안의 온도, 창문의 유리를 투과하는 옅은 빛과 이불 안의 따뜻함 때문에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었다. 잠에서 깼다가 다시 들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디제이의 멘트가 들리다가 끊어졌다가. 가장 기분 나른한 오전의 시간이었다. 눈을 뜨면 아직 시간은 10분 정도 지나가 있고, 다시 잠이 들고. 이렇게 오후까지 있고 싶었다. 하지만 방뇨의 기운과 생리현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분명 일어나고 나면 이 포근하고 아늑함이 와장창 깨질 것이 분명하다.


늘 이런 인생이다. 매일 언제나 그 시간쯤이면 화장실에 가야 한다. 군대 훈련소에서 고욕이었다. 그 시간에 구보를 했다. 얼굴이 물에 불린 찰흙을 유리창에 던져 흐르는 모양이 되어서 매일 아침 달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누워서 억지로 이 아늑함을 찾으면 찾을 수 있지만 그게 쉽지 않다. 지금 딱 이 기분은 아닌 것이다. 화장실에 가는 동안 30%가 깨지고 화장실에서 나오면 70% 이상이 깨져서 정신이 들어 버리고 만다. 그래도 아직 이불속 포근함을 기억하는 30% 때문에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서 이 고요한 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라디오에서 마스다 미리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고양이 사랑은 ‘생각이 많을 땐 고양이’에도 잘 나와 있다. 여하튼 나직하게 라디오에서 마스다 미리 씨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고양이의 모습도 좋고 고양이의 얼굴도 좋고. 또 마음에 드는 게 고양이의 우아한 꼬리다. 만약 저 꼬리가 사람에게 붙어 있다면.


디제이는 만약 고양이 꼬리가 있다면 우아하게 움직여 라디오를 켜고 끄고 볼륨을 높이고 싶다고 했다. 나도 예전에 이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배트맨에서 캣우먼이 나오는데, 여러 캣우먼이 있지만 미셀 파이퍼의 캣우먼이 제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는 꼬리가 없지만(아마 없었을 것이다) 꼬리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사람에게 고양이 꼬리가 붙어 있다면, 날 때부터 붙어 있는 꼬리라면 적응이 되겠지만 꼬리를 달고 누우면 아주 불편하다. 아니 불편할 것 같다. 항상 옆으로 누워 자야만 한다. 보기 싫어진 남편의 얼굴을 계속 보거나 아예 등을 돌려 자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인간화된 고양이는 지 주제도 모르고 사람처럼 벌러덩 누워서 잠을 자기도 한다.


꼬리가 인간의 몸에 붙어 있으니 세포가 연결이 되어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사실 귀처럼 그저 보형물 같이 붙어만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게 움직이지 않는 근육은 퇴화가 되어 점점 사용이 불가능하며 그쪽으로 보내는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곳으로 돌리게 된다. 보통 네 발로 걷는 동물에게 꼬리가 있는데 아무래도 달리거나 날렵하게 움직일 때 중심을 잡으려고 꼬리가 붙어 있기도 하겠지만 인간에게 꼬리가 붙어 있으면 달리게 되면 더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꼬리 때문에 몸을 더 구부려야 하지 않을까. 바지나 치마에 구멍도 뚫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요즘처럼 민감한 세상에....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한 구역에는 집집마다 말이 있다. 그래서 그 구역의 사람들은 말을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키운다. 물론 말이 들어갈 살 정도로 모든 집들이 넓고 크다. 미국의 캔자스 시골 같은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 대신 빌라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그렇다. 아파트에도 말을 키운다. 이 구역은 몹시 아름다운 구역으로 자연이 다른 도시보다 훨씬 조성이 잘 되어 있다. 호수나 들판 같은 것들이 보기 좋다.


이 구역을 의미적으로 '말의 구역'이라고 하자. 말의 구역에 들어오면 자동차보다 말들을 타고 다니는 모습을 더 볼 수 있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가 말을 타고 터득 터득 다닌다. 말을 쓰다듬고, 말에게 뽀뽀를 하고, 말에게 말도 거는 등 말과 인간이 거의 가족처럼 지낸다. 그런데 모두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말 뒤에 큰 삽을 한 자루씩 들고 다녔다. 이상하다? 왜 모두들 삽 한 자루씩 들고 다닐까. 그리고 그 옆에는 포대자루 같은 큰 자루도 들고 다녔다.


이 아름다운 구역의 광경을 즐기고 있을 때 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말을 타고 가면서 손인사를 했다. 나도 손인사를 하는데 말이 우아하게 멈추었다. 그러자 여성이 우아하게 내렸다. 말은 꼬리를 툴툴 한 두 번 털더니 우아하게 이히히힝하며 똥을 쌌다. 근데 그 양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강아지가 배변을 보는 양의 150배는 넘어 보였다. 어떤 말은 뭘 먹었는지 묽었다. 엄청난 양의 똥을 도로에 싸질렀다. 우아한 여성은 재빨리 삽으로 그 똥을 퍼서 포대자루에 넣었다. 삽자루에는 똥이 묻어 있었고 우아하게 똥을 치우던 여성의 몸에도 우아하게 말의 그것이 묻었다. 어쩐지 이 구역으로 들어오니 아름다운 광경에 비해 미미한 비린내가 계속 나를 괴롭히더니.


이제 일어나서 하루를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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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주 토요일, 5일에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 미국 유튜버가 김종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글을 작성해서 올린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그 미국 유튜버가 틀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고, 더 나아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다, 라는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때가 되면 내 머리를 한 번 리셋해야 한다는 것이다.


 #


상략


내가 조깅을 한 지는 적어도 10년은 되었다. 대체로 운동을 십 년 했다고 하면 와와 하는데 그래 봐야 24시간 하루 중에 고작 한두 시간을 낼 뿐이다. 보통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운동을 하게 되면 3년 운동한 것으로 30년 동안 운동하지 않을 것을 퉁 치려고 한다. 일주일에 5일, 그것도 하루에 한 시간, 그럼 시간으로 따지면 한 달에 몇 시간 운동을 한 것일까. 하루 한 시간 운동을 한다고 해도 옷 갈아입고 벗고, 트래드 밀 하면서 휴대전화 보고, 이런 걸 따지면 운동을 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운동을 하게 되면 3년 동안 몇 시간 운동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3년 내내 운동을 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3년 운동을 하다가 석 달 운동을 안 하게 되면 다시 살이 찌고 근육이 없어지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제 기사에 미국의 헬스  유튜버가 김종국을 저격하는 유튜브를 올렸는데 그걸 보면서 그 사람 참 지질하거나, 아니면 한국이 요즘 이래저래 유명하니 조회 수를 노리고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는 순전히 글을 올리는 플랫폼이고 나처럼 소설을 위주로 올리는 사람의 피드는 인기가 없다. 동영상 플랫폼이 아니기에 조회 수가 나오기는 참 어렵다. 그럼에도 브런치를 시작한 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무렵 백만 회가 넘었다. 이건 굉장한 일이다. 그럼 어떤 글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까.


내가 소설 이외에 올리는 글은 조깅에 관한 에세이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다. 좀 더 텍스트적으로 풀이하자면 ‘생활 음식의 인문학‘이며 ‘조깅의 생활화’이다. 음식에 관한 에세이는 인스타그램에서 보통 인기가 많은 사진 속 예쁜 음식이 아니라 그저 보통 밥상에 오르는 음식의 글이다. 보면 알겠지만 라면, 새우깡, 과일, 순대 이런 글이 고작이다. 여기에 생활의 인문학을 내 나름대로 덧입혔다.


사람들은 멋진 호텔의 조식 같은 예쁜 음식을 동경하지만 실은 생활 속 음식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관심은 조회로 이어지고 조회 수가 올라가면 다음이나 카카오의 메인에 노출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런저런 곳에서 뭔가를 해보자고 메일이 온다.


나는 매일 조깅을 하는 편이다. 거의 매일 하는데 비나 눈 같은 자연현상은 조깅을 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깅은 대체로 6, 7킬로미터를 뛰며 그 사이에 3, 40분 정도 산스장에서 근력운동을 하는 편이다. 사진은 2013년부터 2021년도까지의 조깅 후 사진인데 몸 상태가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나는 40대이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해본 경험은 없다. 물론 보충제를 먹어본 적도 없고 닭가슴살을 갈아서 먹지도 않는다. 그저 매일 조금씩 조깅을 하고 근력 운동을 할 뿐이다. 여름 전에는 플랭크를 2분 정도 했는데 요즘은 30초 더 늘렸다. 그거 늘렸다고 거의 죽을 것 같지만 어떻든 하고 나면 즐거운 고통이 따라오는 것이 좋다. 친구들은 결혼하기 전에 나와 비슷했는데 녀석들은 지금 몸이 좀 망가졌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매일 운동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미국 유튜버는 나이 드는 것과 늙어가는 것이 다른데 동일시하고 있다. 몰라서 무식한 건 못 배워서 그렇기에 이해하지만 자기가 다 안다고 착각하는 무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미국 유튜버는 지가 아는 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무지한 것이다.


나도 먹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먹는 족족 살이 쪄버리는 체질이라 먹는 것을 조절하는 건 아마도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것 같다. 국물 음식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먹고 밥은 될 수 있으면 한 공기만 먹으려고 한다. 매일 두부를 먹고 집 밖의 음식들, 소스가 가득한 음식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음료도 커피와 물과 우유를 제외하고는 잘 먹지 않으려 한다.


절제와 조절, 그리고 매일 조금씩의 운동-조깅과 근력 운동을 하면 약물과 무관하게 근육은 자리가 잡히고 유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보디빌더가 직업이 아닌 다음에 매일 운동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매일 밥 먹듯, 잠을 자듯 운동을 하게 된다면 그 부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유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구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저 조깅을 매일 할 뿐이고 그 사이에 계단을 좀 오른다거나 근력 운동을 산스장에서 할 뿐이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근육을 만들었고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 운동을 하는 것은, 내가 조깅을 하며 근육을 만드는 것은 매일매일 몇 시간씩 글을 쓰기 위한 동력인 것이다. 긴 시간 글을 쓰려면 체력과 체격, 그리고 정신력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저격하고 의심할 시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책이나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2013년 조깅 후


2016년 여름 조깅 후


2017년 조깅 후


여기서부터는 2020년 여름에 조깅을 하고


비가 오는 날에도 우산을 들고나간다




여기서부터는 2021년

10월 초


9월


7월



가장 최근, 지난주에


#

전문 운동가가 아닌 사람이 매일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그 미국 헬스 유튜버는 뭔가 받아들이는 게, 그 뭔가를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헬스장에 가보지도 않고, 기구를 들어 본 적도 없는 내가, 매일 조깅을 하면서 그 사이에 산스장에서 조금씩 근력 운동을 그동안 했다. 단지 거의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이다. 올해는 오늘까지 3일 빼곤 매일 조금씩 달리고 산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했다. 요컨대 산스장까지 40분 정도를 달려서 도착해서 바로 플랭크를 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근력 운동을 해서 몸에 힘들 좀 뺀 다음에 플랭크를 2분 30초 한다. 그래야 플랭크가 힘이 든다. 뭐랄까 운동을 할 때 그 부위가 힘이 들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운동을 하면 좀 이상하다. 초반에 플랭크를 하니 플랭크가 힘이 들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리지 않았다. 플랭크는 자고로 중력에 온 몸이 밑으로 꺼지는 그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재미가 있다. 그걸 느껴야 하는 운동이니 그걸 느끼게 운동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운동하는 부위에 고통이 가하도록 움직인다. 고통이 오도록 몸에 무리를 준 다음 다시 40분 정도 달린다. 마지막 코스 1킬로미터 정도가 오르막길이라 그 1킬로미터가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오는데 그걸 매일 느낀다.


헬스 유튜버만큼 좋은 몸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은 몸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그 미국 헬스 유튜버는 매일 운동이 너무 좋아서, 운동을 할 때 내추럴하게 즐겁게 운동을 하는 김종국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 미국 유튜버는 늙는 것과 나이 드는 것의 차이를 모르며, 무식과 무지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내가 일하는 건물의 7층에는 헬스장이 있는데 운동이 좋아서 매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와 약물과 무관하게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고 잘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유튜브에 하루에 5분, 이 동작 한 달만으로 몸의 엄청난 변화, 같은 제목에 끌려가면 안 된다. 싸고 좋은 전자제품이 없는 것처럼 하루 5분 투자해서 한 달만에 몸이 달리지는 운동 같은 건 없다. 매일 밥 먹고, 매일 잠자고, 매일 일하고, 매일 폰 보는데 운동 따위 매일 하는 거 어려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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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일아트가 아가씨들의 전유물에서 이제는 모든 여성들의 기호가 되었다. 어쩌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동안 신경 쓰지 못한 부분에 투자를 하는 여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들에 비해 더 네일아트를 할지도 모른다. 그건 주위에 네일 샵들이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지나가다가 쓱 들어가서 네일 손질을 받으면 되는데 이제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결혼을 하고 다른 곳은 결혼 전에 비해 망가졌을지라도(피부나 몸매) 손톱은 손질을 받으면 받은 만큼 표가 확실하게 나기 때문에 손질을 받기 전과 후의 기분은 정말 다르다고 한다. 또 무엇보다 자기 만족도 있지만 남편이나 남자 친구도 좋아한다. 손톱이 예쁘면 남자들도 좋아한다. 더불어 아이들이나 친구들도 손톱이 예쁘다고 한 마디 한다. 그 별거 아닌 한 마디가 비록 손질한 네일이 무너질지라도 또 내일 열심히 일상을 보내는 동력원이 된다.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표가 나는 것 중에 하나가 손톱이다. 단백질이 빠져나가니 줄이 가거나 울퉁불퉁해진다. 네일 손질을 받으면 그렇지 않은 손톱에 비해 그걸 가릴 수도 있다. 또 손톱도 사람의 귀처럼 다 다르지만 손톱 바디가 길고 끝이 뾰족하게 모여 있는 예쁜 손톱을 가지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누군가들에게 자신의 손을 자신 있게 드러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쁘니까.


우리는 보통 손이 예쁜, 섬섬옥수라고 하는데 실은 손톱이 예쁜 손을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손톱이 예쁘게 보이기 위한 네일 손질이 근래에 나타난 건 아니다. 세기의 디바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도 손톱에 신경을 아주 많이 쓰는 스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손톱은 늘 정갈하고 길쭉하고 튀는 색의 매니큐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어쩌면 바바라의 얼굴보다는 손으로 먼저 시선이 갈 수도 있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는 40년대 생으로 할머니지만 손톱은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66년 1월 1일에 개봉한 아주 재미있는 ‘말띠 신부’라는 영화가 있다. 42년 생의 말띠 동창생들의 이야기다. 엄앵란, 최지희, 남미리, 방성자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는데 세련됐고 지금 봐도 재미있다. 영화 속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밴드 키보이스가 나오며 영화 속에서 밴드와 어우러져 뮤지컬처럼 춤과 노래를 한다.


영화 속 최지희는 독보적이다. 사람들과 춤을 추는 장면은 정말 뮤지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 장면은 왜 그런지 수많은 리메이크 장면을 탄생시킨 존 트라볼타의 토요일 밤의 열기를 떠올리게 한다. 말띠 신부가 66년이고 토요일 밤의 열기가 77년이니 얼마나 앞선 것인가.

이 66년의 영화 속 여주인공들의 손톱은 지금의 네일 손질을 한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마도 그 오래전부터 손톱이 예쁜 것에 집착 아닌 집착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에 대한 동경은 괴테의 시절에도 예뻐 보이기 위해, 피부가 하얗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피를 빼기도 했을 정도이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클레오파트라까지 간다.


이렇게 예쁜, 길쭉하고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에 집착한 사람은 마광수 교수였다. 마광수 교수는 평생 윤동주를 연구하다 ‘즐거운 사라’를 펴내면서 사회에 폭풍과도 같은 파란을 일으켰다. 오죽했으면 즐거운 사라는 판매금지를 받고 정부 산하기간에 끌려가기도 했다.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에서였다. 얼마나 한국이라는 사회가 무지했던가. 마광수 교수는 사라의 손톱에 집착을 했다. 사라는 예쁘고 길쭉한 손톱 바디를 가지고 있으며 늘 매니큐어를 발랐다. 미대생인 사라는 다른 여학생들과는 달랐다. 한지섭 교수의 강의 도중에도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가서 사라는 몹시 자유롭다.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그 자유에는 예쁜 손톱, 즉 섹시한 손톱은 큰 한몫을 한다. 마광수 교수 자신도 붉은색의 매니큐어를 바른 길쭉한 손톱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보면 발에 엄청나게 집착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예쁜 발을 보면 참을 수 없었다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자신이 밝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발에 대한 집착이 잘 나타난다. 작고 예쁜 발과 발톱이 예쁘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양말에 그 예쁜 모습은 늘 감추고 있으니 자신밖에 볼 수 없다는 알 수 없는, 악마적인 안도감과 성취감으로 발을, 발가락을 열심히도 탐미한다.


'미친 사랑'을 읽어보면 불편하고 자극적인데 격렬한 문학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면모가 가득하다. 나오미의 바람기와 방자함은 그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남자에게 내 보일 때 발이 드러난다. 그 결점을 없애버리면 조지의 것이 되지만 결점이 사라지면 나오미의 가치도 사라져 버린다. 조지는 나오미를 향한 일방적인 미친 사랑에 빠져들어 점점 수몰되어간다.


준이치로의 ‘만’을 읽어보면, 이렇게 예쁜 몸매를 하고 있으니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어,라고 하고 죽여줘, 죽여줘. 차라리 당신 손에 죽고 싶다고 한다. 여배우의 나체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준이치로는 발에 집착을 한다. 예쁜 발, 파멸하는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되는 육체의 한 부분이 성적으로 드러나는 가슴이나 성기가 아닌 누구도 가지지 못한 예쁘고 섹시한 발인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880년대 사람이니까 이렇게 너저분하고 악마적이지만 인간의 본능에 몰입하는 소설을 써서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불륜, 미친 사랑, 자살이 예전에는 금기시되었다. 아니 요즘도 금기시되고 있다. 우리나라 56년도 영화 ‘자유부인’을 봐도 파격적이다. 금기라는 건 그만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고 나면 강력하고 파괴적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동경하는 것이 '금기'일지도 모른다. 그 금기 속에는 예쁘고 섹시한 손톱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도 남자들의 예쁜 손, 손톱을 좋아한다. 한때 소지섭의 길쭉하고 잘빠진 손톱에 여성들이 열광을 했다. 성시경의 요리하는 길쭉한 손가락에 또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묘하지만 손가락이 짧은데 손톱 바디가 길거나 손톱 바디가 긴데 손가락이 짧고 굵은 경우는 잘 없다. 소지섭의 예쁜 손은 이렇게 짤로 돌아다닌다.

실사만 그런 게 아니라 만화에서도 예쁜 손톱은 드러난다. 드레곤 길들이기 홈 커밍에서도 예쁘게 손톱을 표현했다.

우리는 왜 예쁜 손톱에 빠지고 좋아할까. 그건 정말 본능에 가깝지 않을까. 누군가를 불러 놓고, 아니면 여럿 모아 놓고 왜 그런가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대답을 할 것이지만 이런 본능에 가까운 집착을 말로 풀어서 설명을 하기는 애매하다. 그저 예쁜 것이다. 예쁜 것에는 남자 여자가 따로 없다. 예쁜 것을 보고 끌리는 건 나이와도 무관하다. 그리고 동물들, 새들도 그렇다. 공작새를 보라. 암컷을 꼬시기 위해 엄청난 컬러를 뿜어내며 날개를 얼마나 뽐내는지.


예쁜 것에는 대체가 없다. 베토벤을 살아생전 동경하던 슈베르트는 32살인가, 아주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한 번이라도 베토벤을 만나고 싶었지만 베토벤은 만나주지 않았다. 더불어 좋아하는 여자에게도 다가가지 못했다. 배는 나오고 150 정도의 키에 머리통이 커서 사랑하는 여성도 슈베르트를 만나주지 않았다. 사창가를 돌다 그만 성병에 걸려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었다. 천재적인 능력도 예쁜 외모를 이기지 못한다. 베토벤은 슈베르트가 작곡한 악보를 보고 왜 만나주지 못했을까 후회를 했다. 사후 후세들이 그 둘의 무덤을 나란히 둬서 조금이라도 슈베르트를 기리고 있다.


예쁜 건 빨리 질리지만 아름다운 건 쉽게 질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본능은 예쁜 걸 찾는다. 예쁜 걸 보면 집착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미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만 미질 때문에 불행해지기도 한다. 그게 인생이고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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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1-16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중 반복되는 부분이 있네요.

그런 영화가 있었군요.저도 찾아 봐야겠어요.
저도 긴 손톱을 좋아하지만 남자 손톱 긴건 좋은 줄 잘 모르겠..ㅋ
암튼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교관 2021-11-16 17: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리 할 수 있었네요.

예쁜 손톱 같은, 좋은 하루 되세요~~
 

평소에 먹지 않던 맛있는 음식을 보게 되면 폭식의 유혹에 빠져든다. 폭식의 유혹은 먹다 보면 더 강하게 온다. 냠냠 이거 맛있군, 자주 먹던 소시지의 맛이 아니군, 하며 먹다 보면 이미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먹게 된다.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었을 때 자제를 해야 하는데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은 그런 것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앉아서 먹을 때는 모르지만 일어나면 배가 엄청 부른 경우가 있다.


폭식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한 번에 집중적으로 많은 양의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른 데도 먹는 것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며,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할 것인지 조절할 수 없는 상태’라고 되어있다. 정말 이 얼마나 멋진 상태인가. 최고의 상태가 폭식이 아닌가.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할 것인지 조절할 수 없다니, 세상에 만상에 이렇게나 흐트러질 수 있는 상태라니. 몇 그램, 몇 미터, 몇 센티, 몇 개, 몇 리터처럼 딱딱 정해진대로 생활해야 하는, 생활하고 있는 요즘에 이렇게 뇌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정신줄을 놔버린 상태는 그야말로 멋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이 강하다. 그 강한 유혹에 또 넘어가게 되면 유혹에 빠져 있는 동안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하지만 유혹에서 빠져나오면 후회가 따라온다. 폭식의 유혹은 사람에게만 따라다니고 사람이라 폭식의 유혹에 늘 지는 인생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배가 고플 때 배를 채울 뿐이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음식을 먹거나, 배가 불러 터질 것 같아도 자제가 되지 않아도 폭식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때가 되면 식사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또 뭔가를 먹는다. 굳이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사와 식사 사이에 빵을 먹고, 과자를 먹고, 컵라면을 먹는다. 어쩌다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몬스터처럼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습관처럼 음식을 먹기도 한다.


폭식은 아주 멋진 말이다. 너무나 멋진 말인데 그걸 쉽게 할 수 있으니 더없이 유혹이 강할 수밖에 없다.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생활 속에서 인간이 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생활 속에서 보이지 않는 끈을 겨우 붙잡고 살아가는데 유혹에 넘어가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그쪽으로 몸이 확 쏠리게 된다. 배움이 많고, 똑똑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 유혹에는 혹하게 된다. 그리고 폭식의 유혹에 한 번 빠지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수도꼭지에 물을 콸콸 틀어 놓듯이 속수무책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맛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맛있는 것들을 실컷 배부르게 먹어가면서 아무렇지 살아가기는 어렵고. 이 폭식의 유혹이 오늘도 날름거리며 혀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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