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그린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내 식으로 그려봄



중학교로 올라갔을 때에는 초등학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6학년이라는 최고학년이 지니는 굳건함과 남학생과 여학생이 어우러진 교실의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중학교는 냄새나는 아이들과 함께 목욕탕 한가운데 던져진 기분이었다. 가장 힘이 없는 1학년이 지니는 분위기는 2학년과 3학년의 그저 좆밥인 것이다. 어린이는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청소년이 되지도 않은 아주 기묘한 성장기가 중학생이다. 아직 패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교복도 전부 커서 어딘가 로봇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위계질서를 잡으려는 권력욕은 심해서 힘이 있는 아이들은 힘이 없는 아이들을 극도로 누르는 모습을 보인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그저 먼지처럼 지냈다. 나는 너무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없는 존재감 때문에 딱히 힘들어하거나 나를 누군가에게 내보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중학 3년 동안 내내 했던 생각은 빨리 중학생이 지나갔으면 했다. 정말이지 그렇게 어린놈의 자식이 얼마나 무료하고 존재가 먼지 같았으면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했을까. 나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초등학교 때에는 분명 공부도 곧잘 해서 성적순으로 뽑는 반장도 했는데 중학교에서는 성적도 나오지 않았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이어폰으로 음악이나 들으며 등하교를 했다. 고작 미술시간 정도가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미술을 잘한다고 해서 그 어떤 선생님도 칭찬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술 선생님도 그런 분위기였다. 미술시간은 구색 맞추기였다.


한 번은 담임이 나를 불러 문제집을 주면서 이걸로 공부를 해보라고 했다. 담임은 뾰족하게 생겨서 절대 나 같은 학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가 학교로 와서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뭔가를 준 모양이다. 그게 너무 억울했다. 촌지를 받고 관심도 없는 학생에게 관심을 던지듯이 주는 인간이 나의 담임이라니. 공부를 하지만 성적이 나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부모님은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6학년 때까지 그랬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는 순간 알았다. 나는 루저 중에서도 먼지 같은 루저라는 걸. 발버둥 친다고 해서 나에게 머물러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걸. 발버둥을 치기도 싫었다. 발버둥이라는 건 함부로 치면 안 된다. 가망이 있을 때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발버둥 쳐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에너지만 소모하게 된다. 서열이 확실하고 성적순으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판단했다. 나처럼 성적이 안 좋고 먼지 같은 애들은 학교의 숫자를 채우는 하나의 몹인 것이다.

 

나는 집에서 중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버스로 치면 6 정거장, 7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였다. 방송국이 있는 산을 지나 도로를 따라 죽 걸어서 하천을 건너 XX여중을 지나서 학교까지 걸었다. 집에서 좀 일찍 나와서 라디오를 들으며 천천히 걸어서 학교에 갔고 돌아올 때에는 빙 둘러 다른 길로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래서 걸으면 보통 1시간 이상이 걸렸다. 너무 싫은 시간이 영어 시간이었다. 영어를 가르쳐 주기보다 억양만 가르쳐주었다. 영어 문장이 있다면 억양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 선생님은 연필로 억양을 표시했다. 그리고 시험도 숙제도 전부 억양을 표시하는 거였다. 한 번은 억양을 내 마음대로 표시해서 숙제를 냈다. 영어 선생님은 로렉스를 차고 있었는데 시계를 탁 풀더니 들고 다니는 드럼 스틱으로 머리부터 손바닥 허벅지까지 난도질했다. 때리다가 자기가 더 화가 나서 강도가 더해졌다. 나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암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마 2학년이었을 것이다. 반에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 녀석이 생겼다. 그 녀석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아이로 학교가 끝나면 나와 같이 걸어서 집으로 왔다. 얼굴은 유재석처럼 생겼고 머리가 곱슬곱슬해서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성적을 제외하면 둘 다 먼지 같았고 이야기도 잘 통했다. 같은 반이라 점심도 같이 먹었다. 그렇게 1학기를 같이 보내고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인사를 하고 방학이 끝나면 잘 지내보자며 헤어졌다. 여름방학을 보내고 2학기가 되었을 때 그 녀석은 나를 피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언젠가 그러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녀석에게 왜 그러냐, 또는 그런 일로 내가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날은 가을에 접어든 날이었다. 가만있으면 춥고 움직이면 더운 날이었다. 곧 기말고사가 있다. 공부를 매일 했지만 시험성적은 안 나올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부모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하천을 가로질러 가는데 하천 바닥에 누군가 엎드려 있었다. 하천은 발목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지만 저렇게 사람이 엎드려 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그 사람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했는데 사람이 맞았다. 그때까지 왜 사람이 물이 흐르는 하천바닥에 엎드려 있는지 잘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물웅덩이에 얼굴이 그대로 처박혀 있는데 도통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물에 빠져있는데 십분 이상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저 아저씨가 술에 취해 저런 모습으로 잠이든 건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고 저대로 물에 얼굴을 빠트린 채 10분을 꼼짝 않고 있었다. 아저씨는 체크무늬의 난방을 입고 있었는데 등이 위로 부풀어있었다. 그 모습이 나에게는 몹시 끔찍한 현실로 다가왔다. 움직여야 할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 모습을 실제로 봤다는 것이 나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사람이 죽는 방식에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얼굴이 물에 잠겨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방식은 너무나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은 나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양손이 차렷 자세로 물에 빠져 있는데 손도 물에 퉁퉁 불어 사람의 손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얕은 물에도 사람이 빠져 죽을 수 있다니.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아니, 당시의 나에게 충격이라는 단어로 그걸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나는 죽은 자의 바로 앞에서 꼼짝도 못 하고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나에게는 끔찍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제야 경찰이 사이렌을 올리며 오고 바리케이드를 쳤고 나를 거기서 떨어지게 했다. 후에 얼굴이 하천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은 잔상을 남기며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이후로 내가 하는 말이 옳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렇지 못한 지 전혀 구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상대방의 이야기가 조금씩 축소되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고 올바른 행동을 하더라도 이것이 진정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한 척도를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 중학시절 내 몸속에는 텅 빈 공동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그 속에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들로 채워나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현실의 죽음을 본 이후 공동 속에 기이한 존재가 싹트기 시작했다.  얼굴을 박고 죽은 아저씨는 사랑받고 중학교 그 시절을 보냈을까. 시간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책임이 따르는 일이 많고 또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말을 하천에 얼굴을 박고 죽은 아저씨가 일어나서 나에게 말했다. 인간의 생이란 대체로 고달프고 자주 고통스럽다가 아주 가끔 반짝인다고 나는 알아 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