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하루키가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전합니다. 슈퍼든지 몰이든지 백화점이든지 어디나 새해까지 캐럴을 듣게 되는 것은 확실히 피곤한 일입니다. 그 마음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근래에는 그마저도 그립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인류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번 크리스마스에는 피곤하기만 하던 캐럴이 더 간절합니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떤 면으로 ‘치유’가 아닌 ‘용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삶을 통해서 또는 쓰는 일을 통해서 지금까지 저질러온 수많은 실수와 상처 입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음악은 한꺼번에 용서해 주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이제 그만 됐으니까 잊어버려요,라고. 그것은 ‘치유’가 아닙니다. 나는 절대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용서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음악의 힘은 꽤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무라카미 라디오를 하며, 기분이 정말 편안해졌다,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등 반응을 보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음악은 논리를 넘은 것이며 공감시키는 능력이 큽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이러스와 싸움은 선과 악, 적과 아군의 대립, 서로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서로 살리기 위한 지혜의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적의와 증오는 여기서 불필요한 것입니다. 코로나가 앞으로 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의 공기를 마시고 내뱉고 있는 한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코로나에 지지 않도록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뜨겁게 추구해 주십시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와인을 마실 것입니다. 밝은 내일을 위해 건배를 하며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들을 겁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하루키가 하지 않았을까. 하며 써봤습니다. 

카드를 부랴부랴 만드느라고 좀 엉성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올해는 카드를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여러 개의 디자인을 했습니다. 

하루키의 인사는 하루키의 인터뷰 이곳저곳에서 한 말에, 제 사견을 입혀서 써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메리 크리스마스.

하루키 그림 클릭해도 아무것도 없어요. 헤헤.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2014년 버전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입니다. 30년이 지난 후에 또 한 번 아프리카를 살리기 위해 당시의 유럽의 스타들이 뭉쳤습니다. 보노를 제외하고 모두가 라인업이 바뀌었죠. 새미(샘 스미스), 엘리 굴딩,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던 에드 시런, 크리스 마틴(역시 목소리 좋아) 등 유럽의 슈퍼스타들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필 콜린스의 영혼을 건드리는 드럼 소리는 없지만 이 바보들의 노래는 그렇게 우주로 뻗어갑니다. 이런 바보들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정말 세계는 바뀌지 않을까요.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음악이란 소설처럼 논리를 넘은 것이며 공감시키는 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노래는 약하지만 노래의 힘은 대단합니다. 모두가 소리를 내서 노래를 부르면 불편한 진실은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 바보들의 노래에 빠져 보세요.  https://youtu.be/-w7jyVHo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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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장소다. 집이라는 건 사람이 들락날락거리면 깨끗하게 유지가 되는데 사람이 며칠 비워두면 먼지가 쌓이고, 한 달 이상 비워두면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피기도 한다. 형태를 가진 어떤 물품이든 가만 두면 더 오래가고 깨끗한데 집은 그 반대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 오들오들 떨며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가면 아늑하고 따뜻한 방에서 편하게 잠들 수 있다. 그래서 집을 구입하려고 우리는 평생 노동을 한다. 집을 꾸미며 생활의 활력을 얻는 사람도 있고 집에서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집에 있으면 몸을 말고 있는 태아가 된 것처럼 편안하고 포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멀리 떠나가고 싶어 한다. 집에서 며칠만 머물면 어떻게든 집을 나가고 싶어 진다. 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리가 집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집에 하루 종일 머물러 있는 경우가 없다. 적어도 십 년은 넘게 아침에 집에서 나와서 일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들어간다.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오거나, 조금 일찍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와서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들어간다. 집은 내가 가장 게으르게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게으르게 있지는 않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  


뉴질랜드 영화를 한 편 봤다. 영화에는 잘생긴 남자 배우도, 늘씬한 여자 배우도 없다. 주인공이라 불리는 리키(데드풀 2의 러셀)는 뚱뚱하고 이모부 헥은 늙었고 이모인 벨라는 덩치가 크다. 또 다른 주인공, 리키를 쫓는 사회복지사 파울라 역시 산만한 덩치에 비포장도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영화 속에는 흥행에 도움 될만한 캐릭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홀딱 빠져서 보게 된다.


추운 뉴질랜드의 기후에 따뜻한 핫팩처럼 느껴지던 벨라 이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리키와 헥은 졸지에 또다시 고아가 되어 버린다. 벨라는 가족도 없는 헥과 리키를 줍다시피 해서 가족의 울타리 안에 넣어준 사람이었다. 리키에게 짧은 시간 동안 사격도 가르쳐주고 무엇보다 따뜻한, 그 안온 감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이 영화는 제목처럼 장엄한(영화를 보면 이 단어에 리키와 헥의 옥신각신? 이 나오는데 그 부분이 너무 좋다) 뉴질랜드의 숲 속을 누비며 특별한 여행을 한다. 정말 특별한 여행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생존을 위해, 그러다 자신을 알아가며 여행을 한다. 여행을 죽 따라가면 썩 웃기지 않은 것 같은데 큭큭 하며 웃음이 나오고, 요컨대 리키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땅바닥에 철퍼덕 붙어버리는 착지와 리키를 잡으러 다니는 사회복지사 파울라와의 설전, 같은 것이 웃음을 나오게 만든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벽 너머의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거의 모든 캐릭터가 가족이 없거나 가족 중 누구 한 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내가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이입이 되었다. 소년원에 가야 할 판인 리키와 다시 노숙자가 되어야 할 헥은 숲 속을 같이 자니며 서로를 알아간다.


모든 걸 ‘시’로 말해버리는 리키의 시를 듣고 헥은 문맹이었는데 글자를 알고 싶어 한다. 리키와 헥이 숲 속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혼자 지내는 사람이거나 엄마를 잃은 가족이거나 그렇다. 거대한 숲을 배경으로 했는데 이 숲이 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라는 게 가장 작은 단위의 집합이지만 그 속에서는 엄청나고 희귀하고 괴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집이 어쩌면 숲 같을지도 모른다. 목사로 나온 감독이 설교한 대목이 있는데 그 부분이 이 영화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다.


-가끔씩 인생에는 출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죠. 마치 늑대의 덫에 걸려버린 양처럼 말이에요. 우리에겐 항상 선택의 문이 두 개 있어요. 첫 번째 문을 통과하면 이건 통과하기 쉬운 문인데 그 너머에는 수많은 보상들이 여러분들에게 기다리죠. 판타, 도리토스, L&P, 버거링, 제로 로크, 그런데 또 다른 문이 있어요. 버거링 문도 판타 문도 아니죠. 그 문은 통과하기 까다로운데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채소?-



집이란 무엇일까.


오래된 작은 초등학교의 복도를 걸었다. 아직 나무로 된 복도였다. 걷다가 삐거덕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물밀듯이 밀려오는 작은 기억들.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삐거덕 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가끔 그런 소리가 있다. 잊고 지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 그것도 강력하고 강렬하게.


집에 관한 다큐영화를 봤다. 오래된 집만 보여주는 이상하고 참 재미없는 영화였다. 재미는 없는데 보다 보니 그만 빠져들게 되는 묘한 영화였다. 재미없는 인간이 재미없는 영화를 보니 재미없는 시간이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집에 관한 다큐는 오래된 연립주택에 사는 오래된 집주인이 오랫동안 살아온 자신의 집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을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뿐이다. 정말 재미없다. 집주인이 집의 거실에 앉아서 보면 창문 밖으로 여름에 느티나무가 보이고 바람이 불면 느티나무가 움직이며 그 뒤의 숲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리가 마음을 확 잡아 끄는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쌀을 씻는 듯한, 몽돌이 파도에 휩쓸려 가는 듯한, 시골의 개울가에 깨끗한 빗물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거실에 앉아 있을 때 바람이 불면 들리는 것이다. 강력하고 강렬하게.


그 집의 다 큰 아들은 외지에 나가 있다가도 가끔 집에 오면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시점의 과거로 가 있다. 가방을 울러 매고 뛰어서 학교로 등교할 때 라든가, 먹던 하드를 땅에 떨어트려 울던 때 라든가.


집은 오래되고 오래되었지만 주변의 고즈넉한 풍경과 어울려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집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닮았다. 인간이 만든 물품 중에 유일하게 사람의 들숨과 날숨이 오고 가고 손때가 묻어야만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것이 집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집은 몇 개월 동안 비워 놓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퀴퀴하고 곧 곰팡내가 퍼질 것처럼 죽어버리게 된다. 모든 물품이 사람의 손이 타면 망가지지만 집 만은 유일하게 사람의 손이 타야만 유지가 된다. 내 집에 앉아서 가만히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덜 불행한 것 같다.


집은 우리에게 너무 힘들면 요만큼 기운을 내봐,라고 한다. 절대 이만큼 힘내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들어오면 수고했다며 편하게 잠들라고 한다. 나에게 집은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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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22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누구의 속고재일까요?ㅎㅎ
정말 집은 그런 것 같습니다.^^

교관 2021-12-23 12:38   좋아요 1 | URL
집은 밖에서 보면 늘 평온하기만 한데 그 속내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미궁과도 같습니다 ㅋㅋ 그렇지만 집만큼 포근한 곳은 없으니 기묘하네요
 


이건 무슨 사진일까. 일본에서 유명한 쌀 중에 아키타 현에서 생산한 특산 쌀 ‘아키타 코마치’다. 포장 뒷면인데 재배 중 ‘살포한 농약의 횟수’를 표기해 놓은 것이다.


다른 음식은 모르겠지만 주식인 쌀에는 이렇게 정직하고 솔직하게 표기를 하고 국민들은 믿고 쌀을 사 먹는다. 그러면 우리도 농산물 포장지에 이렇게 확실하고 진실하게 표기해놓으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안 그래도 쌀이 안 팔리는데 더 안 팔릴까, 잘 사 먹을까.


인간은 진실을 늘 원한다. 그렇지만 진실과 마주하는 건 두려워한다. 진실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추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은 실체와 조우하기를 꺼려한다. 그 예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보면 된다. 병원에서 진실을 알고 싶지만 마주하기는 두려운 거와 비슷하다.


포장지에 농약을 몇 번 뿌린 것 정도는 표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된다고 지정해버린 곳은 어떻든 정부 관계 부서다. 좋게 보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실을 원하지만 대하는 건 두렵기 때문에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농약을 뿌린 건 표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일단 약을 뿌리지 않으면 굵고 맛있는 쌀알을 얻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벌레와 해충을 막을 수 없다.


좀 다른 얘기지만 가습기 살균기 피해자를 낳은 옥시 본사는 영국에서는 살균제를 만들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만들었다. 그 본사는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된다고 알고 있었다. 균을 죽인다는데 인간에게도 좋을 리가 없는데 그래도 된다고 알고 있었다. 포크스바겐은 미국에는 1조 원이 넘는 돈을 들여 잘못을 시인했지만 한국에서는 1원도 쓰지 않았다. 그래도 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쌍용 자동차 사태가 터졌을 때 상하이 자동차가 들어와 보장을 약속했지만 기술력과 디자인 모두를 가져가 버리고 경영권을 포기해버렸다. 그 사이에서 2천 명이 넘는 해고자가 나왔다. 중국에는 상하이 자동차가 잘 나가고 있는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한때 정부 부처의 ‘그래도 된다’가 방향을 바꾸었을 때가 있었다. 그게 한국 식당의 메뉴판이 엉망인 외국어로 소개되는 것에 부끄럽다고 느끼고 문화체육부에서 특별반을 꾸려 바로 잡으려고 했고 그 소식이 외신에 많이 보도가 되었다. 요컨대 베어 수프는 곰탕으로, 다이내믹 스튜는 동태찌개, 압권은 치킨 에쏘 블랙홀 하우스는 닭똥집이었다. 이런 엉망인 외국어 메뉴판에 부끄럽다고 한국 정부는 문화체육부를 통해서 표준어로 바꾸는 노력에 대해서 외신은 이렇게 다뤘다.


-한국 음식은 외국인들에게 어렵다. 그동안 비록 엉망이지만 그 이름 덕분에 한국 음식을 재미있게 먹고 맛있게 먹은 음식은 기억할 수 있었다. 꼭 표준어로 된 메뉴로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런 일을 굳이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하는 것일까. 치킨 에쏘 블랙홀 하우스를 먹고 싶다면 지금 당장 가서 먹어라, 곧 이 멋진 이름이 바뀔 것이다-


라고 하는, 몇 해 전에 이런 이슈가 있었다. 최초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농약의 문제, 유전자 조작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정부와 농민들의 대립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많은 병균을 싹 죽이고 무럭무럭 크게 하는 약을 뿌리면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회사의 제품을 매년 사용해야 하며 이런저런 제약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관계부처의 그대로 된다는 지금까지 여러 부분에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진실을 대하기 꺼려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먹는 쌀, 내 가족이 먹는 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먹을까. 지난달의 기사로 좋은 쌀을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마트에 파는 각종 쌀의 포장지 뒷면을 볼 수 있다. 


https://tv.kakao.com/channel/1492/cliplink/423941712

좋은 쌀 고르려면?.."포장지 꼭 확인해야"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 줄을 서서 먹는 음식 트렌드가 2014년에 생겼는데 그곳이 '집밥'이라는 곳이다. 집밥 식당에서 판매하는 상차림은 가정집에서 먹는 음식을 표방하고 있다. 상추가 있고 콩나물이 있고 멸치조림과 김치 정도가 나오는 게 전부다. 이렇게 해서 만 오천 원에서 이만 원 정도 한다.


다른 식당에 비해서 초라하기 그지없는데 사람들은 어째서 줄을 서서 먹을까. 식당은 식탁의 주인공은 밥이라 생각하고 식당 한 편에 도정기를 갖다 놓고 손님이 오면 바로 나락을 도정해서 밥을 해서 내놓는다. 


도정을 해서 바로 밥을 해 먹어 보라. 티브이 광고에서처럼 밥을 입에 넣고 입술을 오므리고 뜨거운 밥 때문에 혀도 말리면서 그 맛있음이 소리로 나오게 된다. 밥만 먹어도 사실 맛있다. 유튜브 천뚱을 보면 밥만 먹는데도 아주 맛있게 먹는다. 도정해서 바로 밥을 먹으면 정말 맛있다. 밥이 정말 맛있기에 반찬은 실제로 옵서버일 뿐이다. 그저 간장만 있어도 밥은 맛있을 수밖에 없다. 그 식당에서 그렇게 도정한 쌀로 밥을 할 수 있는 인원이 100명이 고작이다. 그래서 줄을 서지 않으면 가로수 길에서 '집밥'은 먹지 못한다.


쌀은 나락으로 있을 때는 살아있는 상태다. 도정하기 전에 쌀은 한 알 한 알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대신 도정을 하면서 나락을 까는 순간 죽어버려 변성이 시작된다. 그리고 도정한 지 15일이 지나면 변성이 되어서 밥이 조금 맛이 없다. 하지만 한국산 쌀은 아주 맛이 좋다. 

원화가 니시마타 아오이의 일러스트로 된 이 포장지로 인해 아키타 현의 아키타 코마치가 한 달만에 2년 분을 팔았다는 업계의 신화를 이룩했다는 소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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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2-21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우리나라 정부는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었네요.
참 이런 정부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어요.ㅠ

교관 2021-12-22 12:50   좋아요 1 | URL
뻔 한 얘기지만 의식이 깨어 있어야 우리끼리라도 똘똘 뭉쳐 살아가죠 ㅋㅋ 그래야 아이들이~~~
 

정전이 되었다. 오랜만의 정전이다. 어릴 때는 정전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어머니가 촛불을 집에 늘 두었던 것 같은데 정전은 어느 날 우리들에게 안녕을 고하며 멀어졌다. 하지만 정전이 찾아왔다. 정전이 오면 고요했던 어릴 때와는 달리 뭔가 정전이 되기 전으로 되돌아가려는 시스템 때문인지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자동응답기 전화기도 삐익 삐익거리고 소화전의 소리도 들리고 소음이 짙다. 그러다가 모든 소음도 사라지고 고요를 넘어 적요한 시간이 온다. 와이파이가 되어서 폰으로 유튜브에서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들었다. 정전이 된 깜깜한 밤에 조용히 듣는 장혜진의 목소리는 울고 있다. 그 소리가 그대로 노래가 되었다. 다른 거 다 잊더라도 이거, 이거 하나만 기억해달라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움과 미련, 그리고 받아들이는 그 담담함을 부른다. 장혜진이 불러 우리의 것이 되어버린 1994년 어느 늦은 밤. 

https://youtu.be/mKUg4XTknqA



지나가면 딩동 하는 소리가 들리는 전봇대가 있다. 딩동 하며 쓰레기를 이곳에 무단 투기하면 안 된다는 기계음이 들리는 장소가 있다. 나는 이 기계음이 참 듣기 싫은데 꼭 거기로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지나간다. 딱 거기가 햇빛이 가득 고여 있다. 전봇대가 마치 떨어지는 햇빛을 받아서 거기 밑에 고이게 둔 것 같다. 딩동, 기계음이 들리지만 고인 햇살 속에 감금되어 있는 잠깐의 기분이 참 좋다. 차가운 겨울에도 거기, 딱 거기만 오소소 내려앉아 고여있는 햇살을 즐길 수 있다. 오늘도 딩동, 쓰레기 투기 어쩌고 벌금 어쩌고 하는 이 아름다운 목소리는 지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500일의 썸머의 주이 디샤넬이 제일 예쁘다고 하는데 더 오래전에 나온 크리스마스 영화 ‘엘프’에서 조비로 나올 때가 더 예쁘다. 훨씬 반짝반짝 빛난다. 원래 가수였던 주이 디샤넬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더 예쁘게 들린다. 목소리 하면 조니 미첼이다. 조니 미첼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꼭 꿈을 꾸는 것 같다. ‘보스 사이드 나우'를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노래를 듣고 있는 지금 여기가 꼭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없는 곳에 누워있는 기분이다. 일단 들어가게 되면 나오는 건 무리고 나가기 싫어져 버리는, 아무것도 없지만 빛은 존재한다. 내가 흔히 알고 있는 가시광선의 빛에서 벗어난, 빛이라 불리기에는 애매한 빛이 나의 몸을 따뜻하게 비추는 느낌이다. 조니 미첼의 노래는 목소리가 다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구인이 낼 수 없는 목소리를 분명 지니고 있어서 듣고 있으면 예리한 정감이 내 마음의 한 부분을 묘하게 건드린다. 피아노 연주로만 노래를 부르는 ‘리버’는 듣는 내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녀의 ‘헬프 미’를 듣고 자란 리사 오노는 아마도 그때부터 가수가 되리라 결심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 혼자 생각이다. 좀 더 뒤로 가자. 그녀가 아주 전성기 시절로. 타임리프를 돌려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던 그 시대로. 71년도의 ‘올 아이 원트’의 도입 기타 연주가 이미 듣는 이를 부끄럽지 않게 한다. 조니 미첼만의 조니 미첼만으로, 조니 미첼만이 자아낼 수 있는 목소리로 올 아이 원트를 부른다. 이 앨범은 보브 딜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70년대 초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포레스트 검프의 제니가 떠오른다. 이해보다는 사랑으로 충만한, 오직 사랑으로만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이. 

당신은 지금부터 아이팟이 가지고 싶다 가지고 싶다


멀티버스가 판을 치고 에이아이잖아, 가 광고를 하는 요즘 오래되니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를 다시 한번 봤다. 상류 사회의 부인을 남편 몰래 만나면서 돈을 거머쥐는, 남창?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이야기다. 아주 젊었던 리처드 기어가 나온다. 이 영화는 볼거리, 들을 거리가 아주 많다. 근래의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들 만큼 볼거리, 들을 거리가 가득한 영화다. 신인 시절의 리처드 기어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때마침 영화 의상을 맡고 있던 신입 디자이너였던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담당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아르마니의 의상을 입은 리처드 기어는 옷을 입었는데도 섹시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런 현상이 스크린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집에서 빵만 구워대던 주부들이 모두 일어나 극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장은 양복으로 불리며 고리 터분하고 권위주의적 남성의 의상이었다. 그런데 아르마니의 의상을 입은 리처드 기어가 나타남으로 수트(슈트)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모델이 런 어웨이를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 리처드 기어는 멋져도 너어어어무 멋진 것이다.

아메리칸 지골로 한 장면


아르마니를 걸친 기어


그의 움직임, 그의 손짓, 그의 눈빛 그 하나하나가 전부 아르마니의 니트와 바지, 슈트가 물아일체가 된다. 영화 속에는 브랜드가 아주 많이 나온다. 가구나 스피커, 그리고 페리에의 병도 지금과 똑같다. 무엇보다 블론디의 콜미가 ost다. 블론디에는 바로 김아중의 마리아로 알려진 마리아를 부른 데보라 헤리가 있다. 데보라 헤리의 블론디의 노래는 현재 샤넬의 광고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정말 좋다. 그 당시에 이렇게 멋지고 섹시한 여성이 세계를 평정했다. 그런데 한 순간에 블론디를 그만두고 만다. 키보드였나, 기타였나 남자 친구의 병간호에 돌입한다. 그게 수십 년이 흐른다. 그리고 몇 해 전에 할머니가 되어 나타났는데 그녀를 기다려준 전 세계의 팬들, 그리고 그 앞에서 당당하게 마리아를 부르는 데보라 헤리. 정말 멋진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데보라 헤리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다는 소리가 몇 해 전부터 있었는데.

https://youtu.be/i4DI71X6PeM

옷장을 열면 아르마니가 수십 벌이 있다. 아르마니를 고르는 리처드 기어. 멋짐과 멋짐의 만남. 그런 기어 형님이 아침마당에도 나오시고 허허. 



젤리 비


하늘에서 젤리 비가 내린 지 2년이 되어 간다. 처음에는 비에 젤리가 섞여 내려서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늘 그렇듯 비를 맞았다. 젤리 비가 피부에 떨어지고 나서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피부의 땀구멍으로 들어가 사람의 세포를 공격하고 망가트렸다. 젤리 비를 맞은 사람들은 피부에 수포가 올라왔고 수포는 젤리처럼 변했다. 무엇보다 눈동자의 검은색과 흰색이 젤리처럼 한데 섞여 회백색을 띠었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그저 꿈틀대는 생명체에 불과하게 변했다. 죽지는 않았으되 살아있는 것 같지도 않게 변했다. 정부는 비를 맞지 않게 우산을 꼭 가지고 다니라 일렀고 아직까지 인간의 젤리 화가 된 사람들의 치료법을 찾지 못했다. 병원이나 자택에서 젤리 화가 되어 점점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2년 동안 3만 명이 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곤충은 젤리 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물들 중에서는 젤리화의 징후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털에 젤리 비가 떨어지면 괜찮았지만 피부로 된 배에 떨어지면 떨어진 젤리 비가 피부를 파고 들어가서 젤리 화 시켰다. 동물은 사람들보다 좀 더 덜 심각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개들도 눈이 회백색으로 변했고 주인에게 버려져 길거리나 골목의 어두운 부분에서 죽어갔다. 그 사체가 썩어가며 젤리는 하수구로 내려가서 물고기들이나 생명체들의 젤리화 변이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평일, 평소에도 늘 우산을 가지고 다녔으며 이 공포에서 불안한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다가 정부군의 제재에 대항하다 끌려가기도 했다. 2년 만에 규정 법규가 생겨나고 바뀌기도 했다. 허위사실을 배포하거나 시위를 주동하는 자는 정부군에 의해 사살도 가능했다. 장마를 제외하고 일 년에 가물 때는 몇 달에 오던 비가 젤리 비가 내린 이후 2년이 지난 현재는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젤리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면 일단 괜찮았다. 피부에 닿지 않으면 된다. 옷에 떨어져도 괜찮았지만 우산이 제일 안전했다. 그러다 보니 우산은 불티나게 팔렸고 우산 관련주는 어마어마하게 주가가 올랐다. 아이들이 젤리 화가 되는 모습은 처참했다. 비에 섞인 젤리의 성분이 무엇인지 왜 젤리 비가 내리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산을 쓰면 괜찮다고는 하지만 2년 동안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고 공포의 정도가 심각했다. 별거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했지만 예전 같은 분위기는 더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생활을 이어가야 했기에 평소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나 학교에 갔고,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았지만 2년 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2년 만에 사라진 곳이 목욕탕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이 일어났다. 젤리 비는 2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며 뿌려댔다. 식수를 공급하는 호수나 저수지에 젤리 비가 쏟아지면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2년 동안 비를 맞지 않는 가림막을 설치했고 정화시설을 최고조로 올린 곳만의 물을 식수로만 했다. 물을 펑펑 써가며 목욕을 하고 청소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목욕탕은 사라졌고 식당에서 첫 제공 이외의 물 한 컵 당 얼마를 지불해야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아파트 집집마다 할당된 물의 양은 정해져 있었고 사람들의 몸에서는 체취가 나거나 향수의 냄새가 더 심하게 났다. 무엇보다 옷을 빠는 일이 문제였다. 겨울에는 며칠씩 입어도 괜찮았지만 여름이 문제였다. 당연히 입원실이 있는 대형병원도 빨간불이 들어왔고 젤리 화가 된 사람들은 음압 병동에서 치료를 하며 겨우 목숨을 연맹했지만 살아나는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은 장관들과 의논을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국민들의 생활에 더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국민들의 눈높이와 맞지 않아 마찰만 일어나고 정부군의 총에서는 연일 총알이 발사되었다. 5개월이 있으면 대통령 선거일이라 나라는 양극화로 나뉜 사람들로 하여금 살얼음판이었다. 방역을 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행위일 뿐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티브이를 틀면 정규방송은 하지 않고 매시간 전문가들이 나와서 이 사태에 대해서 의견을 내놓지만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집콕족들과 니트족들은 왜 드라마를 보여주지 않느냐, 왜 예능프로그램을 하지 않느냐며 인터넷으로 방송국을 욕했고 대통령을 까돌리는 글을 올렸고 좋아요가 엄청났다.


집 안에 젤리화 된 사람이 있거나 동물이 있으면 신고를 해야 한다. 만약 신고를 하지 않다가 들켜버리면 정부의 제제가 들어온다. 일단 식수를 끊는다. 그리고 벌금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거주지의 방역을 핑계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다. 쓰리 아웃제에 걸리면 그렇게 된다. 한 간의 말로는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이 드물었고 수용소가 과포화 상태라 방치되는 수용자들이 많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피부병이나 발진 그리고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죽음으로 간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무시무시했다. 소문이라는 것은 바람을 타고 옆으로 옮겨갈 때마다 더 확장되었다.


바람이 불어 얼굴에 닿으면 사람들은 불쾌해했다. 바람에 습기라도 있을라치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인류는 그동안 재앙에 가까운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여러 번 겪었다며 비가 오면 실내에 있으면 그만이고, 밖에 나갈 일이 있다면 우산과 마스크를 쓰면 된다고 했다.


내가 사는 집은 다운타운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했다. 우주기지와 통신을 위해 거대 안테나를 설치해둔 산이 있다. 20년 전에 쏘아 올린 우주선이 달과 지구 사이의 궤도에 있는데 이 도시의 여기 산이 가장 가까워서 거대 통신 안테나를 설치했다. 현재는 산 밑으로부터 해서 건축물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지만 20년 전에 지어진 집이나 건축물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비교적 도시 중앙에 산이 있지만 거대 안테나 때문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없고 공권력이나 정부의 공무원들도 잘 오르지 않는다. 거대 안테나는 그저 신호를 보내고 받는 용도로 점검을 위해 6개월에 한 번 담당자가 헬기를 타고 안테나 주위 헬기장에 내릴 뿐이다. 내가 사는 집은 단독주택으로 작은 정원이 있다. 하지만 손질이 안 해서 벽이 없었다면 그저 숲으로 보일 것이다.


고양이 굴비는 집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햇살이 창으로 내려오면 잠시 해가 닿는 부분에 앉아서 해를 쬔다. 고양이 종류는 모른다. 강변에서 젤리 비를 맞고 덜덜 떨고 있는 걸 상자에 넣어서 데리고 왔다. 젤리 비를 피부에 맞아서 동물병원에는 데리고 가지 않았다. 집에 두고 후에 죽으면 묻어줄 요량이었는데 굴비는 아직 씩씩하게 살아있다.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고양이 사료도 사지 않았다. 내가 먹는 음식을 조금 떼서 줄 뿐이었다.


개도 한 마리 있다. 역시 젤리 비를 맞았고, 주인에게 버려졌다. 개에게는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 고양이는 이름이 막 떠올라 지어지는데 개는 그렇지가 않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고양이는 물수제비 같은 느긋한 면모가 있어서 이름이 바로바로 떠오르는데 개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이 먹지 않는 아이 같아서 어울리는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개는 젤리 비를 맞아서 아픈 것보다 주인에게 버림받아서 굶주려 아파하는 걸 데리고 왔다. 개도 젤리 비의 징후가 아직 안 보인다. 눈동자가 회백색으로 변하거나 피부가 젤리화 되지 않았다. 개는 푸들과 흔히 발바리라 불리는 개의 교배종이다. 나는 개와 굴비 덕분에 말이라는 걸 하고 산다.


젤리 비가 처음 내리던 날 그녀는 나를 만나러 오고 있었다. 그날 그녀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내가 고집을 부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눈이 회백색으로 변한 그녀가 내가 잠이 들면 문 너머에서 나를 몇 시간이고 본다. 매일 그런 꿈에서 깨어난다. 처음 젤리 비를 맞고 병원에 들어간 사람들은 실험쥐처럼 이것저것 주사를 맞고 바늘에 찔렸다.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봐야 했다. 살려달라는 말을 하던 그녀가 제발 죽여 달라고 했다.


굴비가 와서 내 얼굴을 핥았다. 개가 내 다리 위에 얼굴을 올리고 잠을 자고 있다. 문득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일어나서 굴비와 개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 그게 나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나는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 대신 내가 죽어야 했다.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을 거니는 기분으로 매일을 보냈다. 세상의 공포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라는 생각, 고독하고 외로움에 짓눌리는 무게가 너무 힘이 들어 칼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바그너의 음악을 크게 들었다. 그럴 때마다 젤리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길 바랐다. 야옹, 하는 굴비의 소리가 들렸다. 밥을 챙겨 줘야 한다. 건멸치와 유당이 제거된 우유와 물을 준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단백질 덩어리를 조금 잘라주고 개에도 비슷한 식사와 함께 돼지고기를 삶아서 주고 있다. 개에게도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개의 이름을 지으려고 하면 그녀의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정치인들은 양극화가 되어 젤리 비를 피할 수 있는 도시의 돔 형성화에 열을 올려 선거권을 쟁탈하려고 했다. 젤리 비의 원인보다는 회피하여 당장 표를 얻는 것에 급급했다. 휴대전화 재난 알림이 떴다. 젤리 비를 피해 들어간 한 종교시설에서 교주에 의해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해오다가 젤리 비를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교주의 신묘한 힘을 믿는다며 모두가 젤리 비가 내릴 때 그대로 맞고 처참하게 죽었으니 그 일대에 가지 말라는 뉴스가 떴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종교시설 광장에서 젤리 비를 맞고 그대로 젤리화 되어서 반은 하체가 젤리처럼 녹아서 지하로, 땡으로 흘렀다. 이에 정부는 산에 위치한 종교시설을 점검한다고 했다. 젤리 비가 내린 후에는 땅이 빨리 마르지 않았다.


라는 소설을 쓰며 세계관 형성에 혼자서 신나고 있는데, 옆에서 먼저 쓰던 거 마저 적으라고 한다. 맞다 먼저 쓰던 게 있었다. 자신을 잃어가는 이야기다. 젤리 비만큼 스펙터클 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점점 잃어버리는 이야기다. 어느 날 엔진오일이 다 됐다는 불이 들어와 점검하러 가니 엔진오일을 간지가 일 년이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동안 문자를 받고 와서 케어를 받았는데 그럼 그건?라고 하니 정비소에서 뭔가를 두드리더니 그런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문자 창을 열어보니 정비소에서 문자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분명히 5월까지 문자가 와서 이곳에서 정비를 받았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그러면서 정보가 하나씩 사라져서 식당에 들어가려고 큐알코드를 찍으려고 해도 오류가 떠서 결국 밥을 먹지 못하고, 편의점에도 들어가려 하지만 이제 전부 큐알코드를 찍어야 하는데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팔로워들에게 메시지를 넣어도 답이 없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와서 나의 신용카드(개인적으로 저는 카드가 하나도 없습니다만)가 전부 정지되었으니 사용이 불가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면서 자신을 잃어가는 이야기다.


거리두기가 강화된 지금 상상이나 하고 글이나 신나게 적읍시다. 돈도 들지 않고 재미는 가장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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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이 미즈마루를 검색하면 내 글이 제일 처음으로 나온다. 그게 누구야? 안자이? 뭐? 마루?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 혼자서는 괜히 큭큭 거리며 뿌듯하다. 우리끼리만 아는 뭐 그런 게 있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알아서 좋은 그런 거 말이다. 


하루키는 그간 유명한 삽화가들과 같이 소설과 에세이를 펴냈다. 독일의 삽화가 카트 맨쉬크와 함께 펴 낸 이상한 도서관, 잠, 빵가게 시리즈가 있다.


또 오하시 아유미라는 40년에 태어나 64년 주간 [헤이본 펀치]의 표지 일러스트로 데뷔한 작가와 함께 펴낸 에세이 시리즈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하루키 하면 안자이 미즈마루 씨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점, 선, 면으로 그려진 무표정의 하루키를 보는 재미가 너무 좋다.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안자이 미즈마루 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중에는 숙떡숙떡 거리는 이야기도 있어서 재미있다. 술을 좋아하네, 여자만 있으면, 같은 농담을 제대로 했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본명은 와타나베 노보루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와타나베, 와타나베 노보루, 와타야 노보루는 하루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일단 노르웨이 숲의 주인공 녀석의 이름도 와타나베다.


태엽 감는 새에서 주인공 오타다 도루의 아내의 오빠 이름도 와타야 노보루다. 아주 경멸하는 인간으로 나온다. 큭큭. 고양이 이름으로 와타나베 노보루가 나올 때도 있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단편 ‘코끼리의 소멸’에서도 사육사 이름이 와타나베 노보루이고, 단편 ‘패밀리 어패어'에서도 여동생의 애인 이름이 와타나베 노보루다.


미즈마루 씨를 생각하면 호이,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인데 소설 속의 와타나베 노보루는 꽤나 심각하거나 아주 철두철미한 인간미가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여러 소설에서 다른 캐릭터의 같은 이름들이 나오면 반갑기도 해서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일큐팔사에서 덴고를 감시하며 묵직하게 등장해서 묵직하게 죽음을 맞이한 우시카와는 태엽 감는 새에서도 주인공 오카다 도루를 감시하고 와타야 노보루의 뒷일을 봐준다. 거기서 살아남아서 일큐팔사까지 간다. 그런 보이지 않는 연결을 하면서 하루키의 세계에 매료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말하는 단편의 정수, 하루키의 ‘토니 타키타니’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들어온 만큼 뺐는데 그 공백이 빼기 전보다 더 커져버린 인간의 상실을 말하는 영화. 감독은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해 같은 공간에서 실내장식을 다 뜯어서 바꿔가며 촬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키의 그 상실에 대한 분위기를 끌어내기 위해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맡았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인데 영화는 기가 막히게 좋다.


호텔 풀사이드의 고요한 수면 같은 단편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름은 어이없게도 하루키가 하와인가, 해변에서 아내와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한 잡화점에 들어가서 거기의 티셔츠 하나를 들었는데 티셔츠 앞에 ‘토니 타키타니’라는 글자가 프린트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저 그 이름이 떠올라서 소설의 제목과 내용이 되었다고 한다.


미즈마루 씨는 42년에 태어났다. 일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학과를 거쳐 광고회사와 출판사에서 아트디렉터로 탄탄한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가 38세에 독립을 하게 된다.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대충 그리는데 마음을 다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하루키의 에세이에도 잘 나온다. 뭐든 쉽게 대충대충 거려대는 미즈마루 씨가 미워서 하루키는 어느 날 이거 그려봐라, 저거 그려봐라, 흥, 하며 쫄래쫄래 협박 겸 부탁을 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책도 있는데 제목이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다. 슬슬 그림의 대가라는 타이틀이 너무나 재미있고 사랑스럽고 딱이다. 게다가 이런 타이틀은 멋지며 존경스럽다.


“매력적인 그림이란 그저 잘 그린 그림만이 아니라 역시 그 사람밖에 그릴 수 없는 그림이 아닐까요. 그런 걸 그려가고 싶습니다”라고 미즈마루 씨는 말했다. 미즈마루 씨를 말하면 하루키가 딸려 나오고, 하루키를 언급하면 미즈마루 씨가 어어 나는 왜? 하면서 질질 끌려 나온다. 아쉽게도 미즈마루 씨는 14년도에 고인이 되었다. 더 이상 미즈마루 씨의 슬슬 그림을 볼 수 없지만 그간 사람들을 점, 선, 면의 세계로 풍덩 빠지게 한 것만으로도 좋다. 안녕 미즈마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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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19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즈마루씨의 두부그림을 좋아합니다 ~

교관 2021-12-20 11:38   좋아요 1 | URL
이제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워요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