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시애틀 1호점에서 구입한 스벅 텀블러가 있다. 별다른 건 없고 로고와 사이렌의 모습이 지금과 좀 다르다. 그래서 스벅 텀블러에 빠진 사람들은 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바닷가에도 스벅이 있어서 일 년 정도는 오전에 거기서 커피를 마셨다. 이른 아침에 가면 좋다. 바가 있는데 사람도 별로 없어서 바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며 매니저와 가끔 나오는 음악이나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며 이야기도 하고.


매니저도 스벅 1호점의 추억이 있어서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주며 추억담을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가 있던 스벅도 리모델링에 들어가고, 코로나도 오고, 이래저래 기분도 그렇고 해서(웃음) 안 가게 되었다. 시애틀 스벅에는 와인도 잔 술에 담아서 파는데 한국은 아직 카페에서 술은 팔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텀블러에 커피도 담아 마시고, 물도 담아 마시고, 맥주도 담아 마시고, 시고르자브종 와인도 담아서 마신다. 그래서 카페에 갈 때 텀블러에 와인을 사부지기 부어서 커피를 주문해서 같이 마시기도 한다. 아니면 제임슨을 부어서 커피와 함께 홀짝이기도 한다. 일행은 처음에는 커피에 무슨 위스키냐고 하지만 제임슨은 끝 맛이 캐러멜 맛이라 아주 좋다. 그리고 커피에 타 마시면 커피 맛도, 제임슨 맛도 확 끌어 오른다.


제임슨을 커피에 타 마시는 건, 마블 미드 시리즈에 데어데블이나 루크 케이지에서도 경찰들이 그렇게 마시는 모습이 왕왕 나온다. 데어데블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시리즈가 끝나고 뭔가 아쉬웠는데 멧 머독이 이번 스파이더맨에 나왔다.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미드 마블 시리즈는 뭐니 뭐니 해도 퍼니셔가.....


나는 심지어 텀블러에 어묵 국물도 받아 마신다. 그게 묘미다. 어묵 국물은 정말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시원하고 맛있다. 어묵 국물에 국수를 아직 말아먹어 보지 못했다면 오늘 당장 그렇게 먹어보기 바랍니다. 요즘은 로컬카페에서 텀블러에 커피를 받아 마신다. 커피 천오백 원, 샷을 추가하면 이천 원이다. 나는 항상 샷을 하나 더 넣어서 마신다. 7잔을 마시면 쿠폰 적립으로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사람들 대부분이 쿠폰을 애용하고 이 쿠폰은 여기 로컬 카페에서만 가능하다.


매일 하는 것들이 있다. 분명 의지로 움직이는데 습관이 되어 버려 마치 무의식적 행동처럼 한다. 요컨대 팬티를 입을 때 왼쪽 다리부터 밀어 넣는다던지, 일어나서 잠결에 좀비처럼 걸어서 변기에 앉는다던지, 이불 끝을 침대 끝에 맞춘다던지, 그리고 비슷한 시간에 같은 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시는 것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2021년에도 지치지 않고 습관적 무의식으로 매일 했던 것이 커피를 마시는 것, 그리고 매일 한 시간 이상씩 조깅을 했고, 매일  일정량의 글을 적었고, 매일 한 끼를 먹었다. 조깅은 사실 4일을 못 뛰었으니 361일을 달렸기에 매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상주는 것도 아니니 그냥 매일 달렸음,으로 하겠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내어 글을 쓰고 책을 좀 읽었다. 그리고 한 끼를 챙겨 먹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조깅을 하는 건 시간이 날 때 하는 것들이 아니다. 어떻든 내 일상에서 시간의 틈을 벌려, 시간을 내어서 해야 한다. 그래야만 '매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매일 습관적으로 하는 이런 것들이 하나씩 모여 문명을 이룬다. 문명이란 그런 것이다. 떼놓고 보면 보잘것없고 허무하고 허망할 것 같아도 조금씩 퍼즐처럼 들어맞아 인류의 문명이라는 체재와 양태(樣態)를 이룬다.


여하튼 매일 커피를 오전에 로컬 카페에서 한 잔 마신다. 나는 늘 아무 생각이 없다가 대체로 쿠폰이 3개가 쌓이면 사장님이나 직원(따님)이 이번에는 쿠폰으로 해드릴게요, 라며 알아서 해준다. 왜냐하면 쿠폰은 한 달 안에 사용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멸되고 만다. 쿠폰으로 마실 때는 오백 원만 내면 된다. 나는 샷을 추가하기 때문에.


어제도 늘 그렇듯이, 그제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아침에 커피를 한 잔 받아 마시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 한 아주머니(50대 정도)가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매장 안에서 주문하지 않고 밖으로 난 카운터로 주문을 한다. 아주머니는 선캡에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주문을 하면서 자신이 쿠폰을 하나 사용할 것이 있어서 그걸로 하겠다고 했다.


직원이 아주머니에게 전화번호를 앞에 보이는 태블릿에 입력을 해 달라고 했고 아주머니가 폰 번호를 입력했다. 직원은 쿠폰으로 적립이 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이상하네, 하나가 있는데. 라면서 쿠폰은 소멸이 되는지 물어봤다. 직원이 한 달 이내로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에 그런 문구를 안내했다. 그리고 직원은 주방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와 나의 음료와 앱으로 배달 주문이 들어온 음료를 만들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 아주머니는 직원을 불렀다. 나는 한 달 안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며 쿠폰으로 사용해야 할 커피 한 잔이 없어진 건, 여기 직원들과 카페 측의 잘못이 아니냐고 했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이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커졌다. 카랑카랑하고 높아졌다. 화를 내는 것이다.


여기 카페 측에서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아주머니는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주위 상가 사람들이 무슨 일이지? 라며 한 둘 씩 모여들었다. 아마 본인이 말을 하면서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직원은 그다음부터 멘붕이다. 일단 아주머니에게 직원이 하는 설명은 전혀 통하지 않았고 하필 사장님-엄마도 카페에 없었다. 당황하니 준비해야 할 음료를 제때에 준비하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그 뒤에 오는 손님들은 주문도 하지 못할 정도로 카운터에 붙어서 쿠폰 사용에 대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기다리다가 그냥 가버리는 손님도 있었다. 나에게 쿠폰이 있다면 아주머니에게 줬을 텐데 나도 쿠폰을 다 써버린 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내 커피가 나와서 나는 받아서 돌아왔다. 뒤돌아보니 나무에 매미가 붙은 것처럼 바짝 달라붙어 직원을 쏘아붙였다. 그 불똥은 말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까지 튀었다.

 

이 죽일 놈의 쿠폰 적립. 이게 뭐라고. 예전에 그런 말이 있었는데, 전통시장에서 콩나물의 가격 200원은 죽으라 깎으려 하면서 백화점에서는 정가 다 주고 산다는 이야기. 이렇게 너의 기분이나 입장이 망가지더라도 나는 해야 할 말은 하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너무 낮추는 경우도 있다.


사진을 찍으면 자신의 얼굴을 보며 푸념과 한탄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얼굴이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너무 못생겨서 사진이 안 나온다느니, 이렇게 못생겨서 어떡하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나이가 들지도 않았는데 나는 늙어서, 나는 너무 늙어 버려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 모든 말 끝에 자신을 엄청 낮추어서 말한다. 마치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존재처럼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상대방에게 자기를 격하게 낮추어서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타인에게는 자신이 한 말보다 나은 말을 듣게 되니까 그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으려고 하는 것 같다. 자기 자신을 더없이 낮춰서 말을 해버리니까 상대방이 “아이구 아닙니다. 늙었다니요. 이렇게나 피부도 좋고 예쁜뎁쇼" 같은 말을 듣고 안 그런 척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주위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다. 처음 보거나 얼굴을 모르는 sns상에서 주로 그런다. 아닐 것 같지만 인터넷 상은 오프라인보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무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굴을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팔로워들에게 자기 자신을 격하게 낮춰서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들은 그보다는 높게 말을 하니까 띄워주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에, 또 주위 사람이 내가 그렇다는 걸 아는 걸 본인도 알기에 주위에는 그러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애가 강한 것일까, 자존감이 높은 것일까.

텀블러 하면 추억들이 몇 개 있는데, 극장을 좋아해서 극장에 자주 갔다. 그리고 타지방으로 여행을 가면 그 지방의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여행 중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일상에서 극장에 가는 것보다 일탈 속 확실한 재미가 있다. 영화를 보고 상영관 밖으로 나오면 극장의 모습에서 아아 맞다, 우리는 여행 중이었지, 라며 영화에 빠져서 마치 일탈 속이라는 걸 잊고 있다가 다시 알게 된다. 그 때문에 여행이라는 기분이 두 배는 더 든다.


극장에서 파는 음료와 음식물 이외에 못 먹게 하던 때가 있었다. 보통 집에서 영화를 볼 때는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보는 재미가 있다. 극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텀블러에 맥주와 소주를 적당히 섞어서 팝콘 통에 생라면을 부셔서 넣어서 들고 가서 왕왕 먹으며 영화를 봤다. 사람들이 잘 없을 시간에,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영화(지만 우리는 좋아하는-이를테면 ‘존 말코비치 되기’라든가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같은)를 보면서 소맥을 홀짝이며 생라면을 먹으며 영화를 본다.


극장에서 생라면을 먹는 묘미는 와그작 씹어 먹기보다 입 안에서 살살 녹여 먹는다. 그런 맛이 있다. 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맛. 살살 녹이면 이와 이 사이에 스프의 그 맛이 침으로 묽어질 때 라면도 흐믈흐믈하게 된다. 영화를 본다. 소맥을 마신다. 완벽한 영화보기다. 우리는 보통 자리를 잡을 때 뒤쪽 사이드를 잡는다. 중간보다 영화보기가 더 좋은 것 같다. 그리고 팝콘과 생라면을 같이 섞어서 먹어도 맛있다. 말 그대로 단짠단짠의 매력덩어리다. 텀블러가 습관적 무의식이 되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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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인가, 4학년인가.

초봄의 어느 날.

부는 바람에 아직 쌀쌀함이 깃들어 있어서 기분 좋은 날,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오는데 하늘이 하늘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유주의 말처럼 햇살이 바삭바삭했고,

하늘은 사랑의 열병을 앓던 미술가가 아픔 끝에 그려놓은 하늘처럼 보이던 날,

처음으로 독감에 걸렸다.


입안이 이내 마르기 시작했고 독감에 몸이 점점 침잠되어 갔다.

뜨거운 물에 푹 삶긴 시금치처럼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다간 몸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약 기운에 세상인지 아닌지 구분도 가지 않고 눈을 잠시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반복.


엄마는 나를 안고 죽을 쑤어 숟가락으로 떠 입안에 넣어 주었다.

입안에 퍼지는 간장 맛의 부드러운 죽의 느낌.

음식을 넘기는 쾌락이라든가 맛은 느낄 수 없었다.

본능의 기운도 발휘되지 않았다.

그저 인후를 통해 연하게 죽이 내려가는 느낌 그것뿐이었다.


 보드라운 엄마의 품.

 엄마의 희미한 냄새.


 어린 동생에게 늘 엄마를 빼앗겼는데 모처럼 엄마를 오롯이 독차지했다.

독감이 계속 이어졌으면, 나는 마냥 아이가 되어 눈을 반쯤 뜨고 나직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


주사 맞았으니까 죽 먹고 약 먹고 나면 나을 거야.


나는 배태한 것처럼 엄마의 품에 안겨 소록소록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 파랗게 질린 하늘 밑에서 코로나 예방 접종 후 어머니는 근육통과 소화불량으로 마냥 아이가 되었다.

이틀 만에 조금 나아진 어머니는 소화가 안 되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며 닭죽이 생각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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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도에서 동네를 담으면 마치 한국의 어촌이 아니라 꼭 일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풍경처럼 보인다. 나는 아파트에 살지만 밑으로 조금만 영차영차 달려오면 바닷가가 나온다. 매일매일 바닷가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건 매일 변하는 바다의 흐름을 볼 수 있어서 어쩌다가 보는 바다보다는 훨씬 ‘재미’ 있다.


저기로 가면 바닷가인데 해안이 타원형으로 대략 500미터 정도의 작은 백사장이 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해안을 따라 있는 수많은 해수욕장이 있지만, 뭐랄까 국가의 등록? 아니면 인정? 받은 해수욕장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등록이 되어 있는 해수욕장은 시즌에 돌입하면 국가에서 고운 백사장을 깔아주고 정비를 해주는 것으로 안다. 해운대도 시즌에 돌입하기 전에 엄청난 규모의 모래가 백사장에 깔린다.

여기도 6월부터는 아주 분주하다. 아, 오늘부터 좀 덥군, 하며 땀이 흐르는 어느 날 포클레인이 여러 대 등장하여 논을 갈듯 해안을 갈아엎고 모래를 깔고 다지고, 소나무와 야자수를 정돈하고 해안을 깨끗하게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여러 개의 공영주차장 중에 한 곳의 공영주차장이나 텐트를 펼치는 곳은 무료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가다 중간 쯤 해안에서 그 앞의 퍼브와 카페까지 10미터도 안 된다. 그래서 여름이면 해안에서 덱체어를 깔고 맥주를 마시다가 수영복을 입은 채로 카페로 들락날락한다. 바닷가이니 당연하게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수영복을 입은 채로 편의점에 들어가고 앉아서 라면을 먹고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는 것이 여름의 해변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구에서는 10년 전부터 해안의 주택과 해안 거리를 정비에 들어갔다. 제주도처럼 거대한 야자수를 계획하며 야심 차게 스무 종의 야자수와 소철을 심었지만 10년 동안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뿌리를 박고 제주도만큼 무럭무럭 자라지 못한 것이다. 해안에 가득하던 소나무를 뽑고 야자수를 심었다가 자라지 못하는 여러 종의 야자수를 빼고 다시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기를 몇 년이 흘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영화 속 외국의 해변은 보기 좋긴 하다. 시원한 차림의 사람들과 바다가 보이는 퍼브에 앉아서 피나콜라다 같은 걸 마시며 석양을 보고 지는 해가 야자수에 가려져 있는 모습들. 하지만 꼭 그런 모습을 따라 해야만 할까. 소나무를 흔히 볼 수 있어서 별로라고 생각하겠지만 소나무도 종류가 많고 소나무도 소나무 나름의 멋을 가지고 있어서 여기 해안가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나무를 전부 흰머리 뽑듯 뽑아서 거기에 야자수를 심어 10년이 지나는 동안 야자수는 야자수대로 상처를 받았다.


거대 제조회사 때문에 외국인과 그들의 가족이 살고 있어서 여름이면 외국인들이 아주 많이 해변에 나온다. 그들은 대체로 5월 말부터 훌렁훌렁 벗고 해안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그들은 몸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따지지 않는다. 늘어진 뱃살은 늘어진 대로 드러내고 아이구 오늘 햇살이 참 좋구만. 하며 누워서 책을 읽거나 맥주를 마신다.


저녁이면 퍼브에 모여들어 사부작사부작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홀짝인다. 모두가 이때만큼은 즐겁고 행복하다. 이상하지만 영국인들이 많이 오는데 그런 날에는 우리도 술이 되어서 오아시스를 크게 튼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스탠 바이 미’를 크게 부르면 도미노가 되어 모두가 스탠 바이 미를 부른다.


야, 너 이 노래 어떻게 알아?

야, 아마 내가 너 보다 너의 나라 노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걸.

하며 우리와 영국 사람들이 또 한데 뭉쳐서 비틀스 이후 블러, 스웨이드, 버브 따위를 주절주절 이야기한다. 불과 몇 년 전인데 매일 축제 같은 일들이 여름에는 펼쳐졌다. 지금은 제조업이 기울면서 그 많던 외국 기술자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고 코로나가 덮치면서 이런 분위기는 전부 소멸했다.

바닷가를 도는데 선거철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상반된 사람들이 이쪽저쪽에서, 그래 어디 두고 보자 식으로 대치를 한다. 이전에도 선거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세대별로, 나이대로, 성별로 양극으로 갈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각자 진영에서 자주 듣는 말이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이다. 요즘에 이 말처럼 듣기가 별로인 말이 있을까 싶다. 정의는 이기는 게 맞다. 그러려면 정의는 이긴다고 말하는 쪽? 단체? 조직이 정의로워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 단체는 그 반대에 있는 단체는 정의롭지 않다고 정의해버린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들이 타인에게는 잘못된 것일 수 있고, 내가 좋다는 하는 것을 타인은 싫어할 수 있고, 내가 하는 말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볼 수 있는데 근래에 ‘정의는 이긴다’고 말하는 쪽은 전혀 그런 분위기는 없다. 나와 다르면 안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정의니까 우리가 이긴다, 라는 식이다. 모두가 말 끝에는 정의가 이긴다는 말로 마무를 해버린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이 말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말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와 같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사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라고 하는 교집합 속의 개개인은 자꾸 바뀌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밀려 나갔기에 새로 들어온 책임자는 당연하게도 그 책임을 이전 책임자에게 떠 맡기고, 떠난 책임자는 지금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의 합당한 사과나 처우를 받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정의는 이긴다는 말이 요즘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들리는 것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얼버무리는 말로 끝을 맺으면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 구독자들, 팬들이 그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집결한다. 모호한 끝맺음은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 정의는 이긴다고 하는 말에, 그 정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인지는 의문이 든다.


사실 내가 바라는 대통령, 정당이 집권당이 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집권 5년 동안 꽃밭에 호황기를 누릴 수는 없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다. 어느 나라던, 어느 정당이든, 누가 대통령이 되었던 늘 그랬다. 내가 바라지 않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야당이 되어야 집권을 잘 못 했을 때 욕이라도 실컷 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자신이 원하는 정당이 집권당이 되었는데 제대로 못했을 때 반대쪽만큼 욕을 시원하게 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게 된다. 정치는 마약과 같아서 내가 믿는 정치인과 정당이 잘못되어서 무너지면 다른 정치인을 응원하면 되는데 대부분 그 정치인을 따라 같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내가 바라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여당이 되었을 때 축배를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내가 바라는, 편드는 당이 집권당이 되어서 정책의 구멍이 나서 내가 불이익을 당해도 쉽게 욕을 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는 내가 바라지 않는 쪽이 대통령이 되고 집권당이 되었을 때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실컷 욕이라도 하고, 요즘은 그것으로 구독자가 모여들어 수익도 올릴 수 있다. 일반인들 대신에 욕을 실컷 해주니까 구독자들이 우르르 몰리게 된다. 반사이익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같은 교집합 속에서도 정권이 바뀌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계속 욕을 하고 수익의 달콤한 맛을 계속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집합 속의 사람들이 서로 물어뜯고 이렇게나 깔아뭉개고 있는 현실이 요즘이다. 질 좋은 대결구도를 보는 건 어쩐지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진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라는 말은 참 허울 좋은 말이다. 정의는 이긴다고 말할 때 그 정의가 정말 정의인지 사람들에게 확인을 시킨 다음에 그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안 된다면 사람 이름을 ‘정의’라고 지어라. 그리고 격투기나 권투 같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링 위해서 맞붙어 이겨라. 그러면 정의는 이긴다가 된다.

바닷가를 돌고 나서 영차영차 열심히 달리면 현대 백화점이 나오는데 그 주위가 전부 호숫가다. 아마 우리나라 백화점 중에 월요일에 쉬고 노조가 있는 백화점은 여기 현대 백화점만 그런 걸로 알고 있다. 소문에는 백화점을 증축(인지 신축인지 모르겠다. 원래 오래전부터 있던 현대백화점 자리에 허물고 새로운 현대 백화점을 지었다)할 때 다른 지역의 거대한 백화점처럼 짓지 말고 그 주위의 조경에 신경을 쓰자,라고 해서 6층? 7층 정도로 짓고 그 일대가 이렇게 호수다. 그래서 볕이 좋은 날에는 여기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기가 너무 좋다. 근처에서 칼스버그를 사 와서 홀짝이며 소설을 읽는 그 맛이 있다. 하지만 역시 코로나 이후에는 모든 것이 멈췄다.  


밑으로는 예전의 바닷가 사진들

최애 맥주 칼스버그


여름의 바닷가 퍼브는 늘 이렇게 북적였다


문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금요일 저녁에는 늘 파티다


여름에는 모히또를 마셔줘야지


퍼브에서 책 읽는 사람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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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자영의 이 한 마디가 자영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리고 자영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투영된, 이 세상에 없을 법한 있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서 너무 비현실적이다. 이는 2시간 30분이나 되었던 영화 ‘미드나잇 버스’를 볼 때와 비슷하다. 결은 다르지만 느낌은 비슷하다. 미드나잇 버스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재미라고는 세상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재미가 없는데, 그런데 너무 재미있게 봐버렸다. 그저 보다 보니 인간관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좋다. 영화는 마치 나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밀어주며 그래, 기대고 싶으면 기대도 좋아. 괜찮으니까.라고 해주었다. 너무 하릴없이 흐르는데 그 사이사이에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인간 속에는 ‘나’라고 존재가 있다.


이 ‘연애 빠진 로맨스’가 그렇다. 남녀 연애 이야기인데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직면에 청춘 남녀의 이야기가 너무 적나라하다. 처한 상황이며, 내뱉는 언어며, 사상, 생각이며 모든 것이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서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한번자영’과 ‘빠구리’가 나누는 대화를 나의 주위는 하지 않는다. 편협한 나의 입장에서 이런 대화는 영화적 허용으로 가능하다고 생각이 들뿐이다. 영화의 대사는 ‘멜로가 체질’의 영화 버전이라는 생각이다. 속에 있는 말을 가까운 사람에게 하지만 이렇듯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언어로 구사하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서 박우리(빠구리)가 함자영(한번자영)과의 경험을 바탕으로 칼럼을 쓰지만 영화를 보면 그 반대적 개념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소설을 써놓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세상에 튀어나온 캐릭터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렇다.


로맨스 영화가 대체로 로코물로 빠지는데 이 영화는 그 길을 버리고 현실적인 감정을 다룬다. 영화는 상황보다는 대사가 그들을 대변한다. 마치 오래 전의 비포 선 셋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두 사람은 만나서 술을 마시며 쓸데없지만 쓸모없지는 않은 이야기를 엄청나게 한다. 이는 곧 이야기를 하려면 만나야 하고 그리고 마주 보고 앉아서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 요즘 이렇게 하기가 더없이 멀어져서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마음에 든다.

대화는 끊임없이 빠구리 얘기와 소중이 얘기와 직설적인 문제를 논한다. 그 사이에 사랑과 연애는 빠져있다. 영화는 분명 현실적인 감정을 대사로 전부 토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주를 7병이나 마신 자영은 너무 예쁘고 볼 빨간 사춘기의 안드로이드처럼 세상에 없을 법한 인물처럼 보인다. 뭐야 보통 이렇게 마시면 남자건 여자건 찰흙을 벽에 던져 흘러내리는 얼굴인데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어차피 로코가 아닌 연애가 빠진 로맨슨데 개판으로, 더 망가져도 되잖아.

그러는 와중에 자영이 하는 말, 맨 처음 저 위에서 한 말 “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외로우니까 만나는 거지”라는 말을 들으면 현대인에게 너무나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이면 당연히 외롭다. 그런데, 옆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자영이 한 말을 유튜브 ‘1분 과학’의 말을 빌려 다시 해 보면.



과학자들이 환각제를 먹은 사람들의 뇌를 스캔을 하니 뇌가 엄청나게 활성화가 되어서 반짝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특정 부분이 비활성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부분이 DMN이라는 부분인데 디폴트 디멘션 어쩌고, 이 부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활성화가 된다. 나의 과거, 나의 미래, 나의 사랑, 나의 어떤 것,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활성화가 된다. 기능적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느낄 때 여러 감각으로 느낀다. 이 감각들이 우리 몸속에서 전기신호로 바뀌어서 뇌 속으로 들어오는데 그 전기신호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잘 구분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DMN 부분이다. 그런데 환각제를 먹으면 이 DMN이라는 부분이 꺼져 버린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부분도 뇌에서 사라지게 된다. 즉 자아가 소멸된다. 그래서 환각제를 먹은 사람들은 기존의 모습에서 벗어난다. 자아가 꺼져 버려서 그렇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이 DMN이라는 부분이 비활성화되어 있다. 어린이도 자아가 꺼진 상태에 가깝다. 어린이들은 나는 뭐가 좋아,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어린이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 교과니는 이게 좋아, 교과니는 여기에 갈래,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자아를 통해서 본다. DMN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렇다자아가 있기 때문에이성적으로 본다우리의 원점은 자아다원점을 그려놓고 세상을 보기 시작하니까 착한 사람나쁜 사람좋은 사람 같은 구분을 지어서 보게 된다그런데 사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착하거나 나쁘거나 하는  우리가  만든 것이다 ‘라고 하는 원점에서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안에 들어갈 사람들을 구분해서 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착한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사람은 여기에 넣고 사람은 저기에 넣어서 구분을 한다그리고 나의 잣대로  사람은  착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지정해버린다.


그런데 DMN이 비활성화가 되면 그런 구분이 없어진다. 즉 자아가 없어지면 이런 잣대가 소멸한다. 이는 사람에게만 경계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 물건, 자연으로 확대된다. 평소 같지 않게 하늘이 너어어어어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하늘이나 꽃이 제아무리 많아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늘을 보면서 막 울고, 눈물을 흘리며 아름답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르메스를 보면 감동을 한다. 하지만 DMN이 비활성화가 되면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사라진다. 선입견이 없어지기 때문에 하늘이 말도 못 할 정도로 감동으로 다가온다.


환각제를 하지 않아도 비활성화되어 있는 어린이를 보자. 어린이는 선입견이 없고 욕심이 없고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다. 하루하루 모든 것이 신기하고 질문이 많다. 왜 달이 나를 계속 따라오는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부른 배를 부여잡고 있는 엄마와 형아 사진을 보며 왜 나는 잡아먹었냐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친다. DMN가 비활성화가 되어 있어서 그렇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런데, 그런데

어린이를 벗어나 찌든 생활을 하는 어른이라도 비활성화되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게 바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영이 술에 취해, 하는 대사에 접근할 수 있다.


진짜 사랑이라는 건 나보다 상대방을 더 위하고 중요하게 생각할 때를 말한다. 진짜 사랑이라는 건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엄마는 자신보다 아이가 훨씬 더 소중하고 아이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엄마와 아이의 사랑에는 엄마라는 자신은 개입하지 않고 아이만을 생각하는 사랑을 하게 된다. 이게 가능하다. 아이가 기뻐하면 내가 기쁘고, 아이가 슬퍼하면 내가 슬프고, 심지어 말도 안 되지만 아이가 아프면 내가 아프기도 한다. 즉 엄마의 자아, ‘나’라는 영역이 아이에게 확장이 된 것이다. 엄마들이 아이를 낳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하는데, 이는 엄마의 세상이 그 아이까지 확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인끼리 이런 사랑이 가능하지 않는다. 예쁘고 착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지만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쁘고 착한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 잣대로 구분해서 카테고리에 넣은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그 이미지가 깨지면 그 사람이 싫증 나고 미워지고 심지어는 헤어지기도 한다.


아마 똘아이 같은 영화 속 자영은 이미 첫사랑을 사랑하면서 배신을 두 번이나 당하며 이 모든 것을 유전자처럼 습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이 빠진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관계만으로도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안 외로운 사람이 어딨냐고 자영이 술에 취해 말한다. 인간이란 한 이불에 같이 들어도 결국 잠은 혼자 들어야 하는 외로운 존재다. 혼자서는 외롭다. 당연하지만. 그러나 옆에 사랑하는 이가 있어도 외롭다면 이는 인간이 풀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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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숟가락 떠먹으니 미미하게 장어의 비린 맛이 끝에 맴돌았다. 묘하지만 그 맛이 좋다. 민물생선의 그 미미한 비린 맛은 평소에 잘 맛볼 수 없기 때문에 어쩌다가 먹게 되면 그 맛을 음미한다. 말 그대로 비린내를 음미하게 된다. 이런 미미한 비린 맛은 늘 먹는 음식의 맛에서 벗어났기에 먹을 수 있을 때는 음미한다. '음. 미.' 하는 것이다. 맥주도 벌컥벌컥 마시기보다 음미하는 게 더 맛있게 느껴진다. 기묘하지만 음미 속에는 음식의 맛 그 이외의 것도 맛볼 수 있다.


장어탕은 옆집에서 먹어보라고 준 것이다. 옆집 아주머니는 요리를 잘한다. 식당에나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집에서 직접 한다. 뚝딱 뚝딱 잘 도 한다. 웍도 없는데 탕수육 같은 것도 곧잘 만든다. 육개장도 집에서 재료를 가지고 다 만든다. 장어탕도 장어를 직접 손질해서 장어탕을 만든다. 전문가도 아닌데 이 정도로 비린 맛을 잡아낸다. 옆집 아주머니는 일을 하고 돌아오면 매일 지치지 않고 요리를 한다. 어떤 날은 선지 해장국을 만들어서 한 냄비를 얻어먹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이렇게 국이나 탕 종류의 요리를 주로 하는 이유는 소주를 마시기 위함이다.


매일 소주를 마시는데 빈속에 마실 수 없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술을 너무 마셔서 병원에서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정신진료도 받아야 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하지만 아주머니는 속에서부터 점점 피폐해져 갔다.


아주머니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엄마를 위하는 아들이었다. 남편은 굴지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세 명이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그 시간이 행복이라는 걸 당시에는 잘 느낄 수 없었다. 행복이란 늘 순간이며, 행복은 늘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추상적이며 손에 들어왔다 싶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 있다.


인사성이 밝은 아들은 동네 어른들을 보면 인사를 하고 공부도 잘하고 똘똘한 얼굴로 잘 컸다. 여기까지 읽고 아들이 반전을 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들은 끝까지 저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갑니다. 반전이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거 미리 알려드립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전교에서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담임은 과학고에 보내자고 했다. 아주머니는 너무 기뻤다. 아들이 과학고에 가고 싶어 했다. 과학고에 다니려면 집에서 떨어져서 기숙사나 그 근처에서 다녀야 했다. 여기에는 과학고가 없기에 아들을 기숙사에 보내기로 했다. 아들은 고등학교 3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방학에도 자주 집으로 오지 못하고 명절에나 되어야 오곤 했다. 아들은 과학고 내에서도 성적이 좋아서 카이스트에 진학이 되었다.


카이스트에 합격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시던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아들은 카이스트에서도 연구에 몰두해서 교수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입대를 하게 되었다. 충성. 아들이 군대에 갈 때 아주머니는 눈물을 보였다. 아들이 군대에 가고 나니 새삼 집이 텅 빈 것 같았다. 남편의 퇴직도 이제 1,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들은 휴가를 받으면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일이 주 정도 되는 휴가기간에 며칠씩 학교에 가서 필요한 무엇을 잠시 하고 왔다. 휴가에서도 연구에 관한 무엇을 하고 왔다. 아주머니는 그런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아들은 시간이 갈수록 연구하는 게 재미있었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이후에는 더 학구열에 불타올랐다. 그럴수록 집으로 오는 간격이 길어졌다.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조금씩 아주머니는 아들과 멀어진다는 느낌을 절실하게 받는다. 학교 마지막 학기에 남편은 퇴직을 하고 타지방으로 일을 하러 가면서 집에는 아주머니만 남게 되었다. 아들이 졸업하기만을 기다렸다. 졸업을 하면 집으로 돌아오리라 기다렸다. 하지만 아들은 졸업하면서 미국으로 박사를 따기 위해 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교수들의 추천을 왕창 받았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아들은 집으로 와서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옆에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지만 깊은 주름이 눈에 띄었다. 아주머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깜깜한 집의 불을 켜야 한다. 누군가 집에서 반겨주거나 있지 않다. 아주머니가 요리를 해서 나에게 주는 이유는 내가 잘하는 장점을 살려 졸업사진을 가지고 벽시계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집에서 자신을 반겨주는 건 이 시계밖에 없다며 나에게 늘 고맙다며 탕이든 찌개든, 요리를 하면 이렇게 늘 먹으라고 준다. 어떤 요리는 요리를 해서 덜어서 주는 게 아니라 그 요리를 그대로 주는 경우도 있다. 요리를 왕창 해서 아주머니는 먹지 않고 나에게 먹으라고 준다. 그런 요리를 음미하면 짜지 않으면서 짜고, 달지 않은데 달다.


아주머니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가끔 아주머니의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이상해졌다느니 대꾸도 안 한다느니. 어느 날은 아주머니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담배냄새가 몸에서 많이 났다. 넓은 공간에서 피우는 것이 아니라 좁고 갇힌 공간에서 재빠르게 피워야만 나는 냄새.


장어탕 잘 먹었습니다.


시래기를 넣었는데도 비린내를 못 잡았어.


아니에요, 제 입에는 아주 좋았어요.


또 요리하면 먹어 줄 거야?


제가 언제 안 먹었던 적이 있어요? 너무 맛있게 잘 먹었는걸요.


아주머니는 언젠가부터 만나면 하던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시래기를 만나 뜻밖의 상승작용을 한 장어탕 덕분에 추운 겨울이 따뜻해졌다. 오늘은 해가 떴지만 냉기에 햇빛이 먹여버린 날이다. 이런 날이 겨울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오전인데도 글씨가 선명하게 쓰일 것 같은 입김이 새하얗게 나오는 날이다. 후 하. 일부러 입김을 내 본적이 언제였더라. 어떤 음식에는 남모를 사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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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09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유, 빈둥지증후군요. 어쩌나...
어떤 분이 하는 음식엔 그런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무결점에 가까운 자식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네요.ㅋ
웃프네요.ㅠ
그 아주머니 마음을 다 잡고 새로운 뭔가를 붙드시면 좋을 텐데,..
물론 교관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습니다만
그냥 차선인 것 같기도하고...

교관 2022-01-10 12:25   좋아요 1 | URL
아주머니는 미용실을 하시는데, 앞으로는 괜찮아지겠죠. 그럴거라 생각합니다 ㅎㅎ 아들이 결혼을 하면 또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도 모르고 ㅎㅎ 감사합니다. 스텔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22-01-10 14:25   좋아요 0 | URL
아유, 제가 교관님께 새해 인사를 안 했군요. 교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바라는 소망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 고맙습니다.🤗

얄라알라 2022-01-09 1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장어로 국도 끓이는 구나...하며 별 생각 없이 읽다가
아주머니께 나는 담배 냄새 문장에서 슬픔이 확 올라오네요. 저도 stella. K님 표현처럼 웃프다 해야할지...슬픔이 더 큽니다.

교관 2022-01-10 12:27   좋아요 1 | URL
슬픔은 늘 가까이 도사리고 있다가 틈이 보이면 그 틈으로 잘도 기어 들어오는 것 같아요 ㅎㅎ 얄라알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 코로나가 빨리 끝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