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눈과 귀와 몸으로 스치는 것들에 대해서 적어본다. 적기 전에 미리 호러블 하거나 낙관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일과 생활에 비관하지는 않지만 낙관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행복을 좇지도 않는다. 행복 노동자보다는 덜 불행하면 그만이다. 라는 게 언제나 나의 입장이다.


요즘은 속보라는 말에 무뎌졌다. 속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속보다. 속보가 매일 같이 뜨는, 요즘 같은 시기가 또 있었을까. 매일 기가 막히는 사건사고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것에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많아졌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런 거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근간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속보는 5, 6년 전 그때에도 인터넷이나 와이파이가 발전해 있었지만 매일 속보가 터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속보가 현관문 앞에 버려진 피자집 전단지처럼 보이는 건 요즘이라서 가능하지 싶다.


도대체 개를 왜 트럭에 매달아서 달리는 것이며 어째서 얼어붙은 호수에 묶어 두는지. 소시지에 낚싯바늘을 넣어서 공원에 뿌려 놓는지, 얼마나 비정상적인 인간이기에 이렇게 하는 걸까. 이런 인간들에게 법이라는 건 어째서 관대하기만 한 것일까.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법이 제대로 심판을 못하니까 슈퍼 빌런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악질 범죄자들에게 법의 효력이라는 건 제대로 닿지 않는다. 나는 구치소에서 2년 동안 근무를 해서 잘 안다. 출소를 할 때 다음 주에 또 올게, 하며 나간 재소자는 어김없이 그때에 다시 들어온다. 마블의 미드 시리즈 중 루크 케이지를 보면 “언제 법이 우리 편에 선 적이 있어요?”라고 루크 케이지가 말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이제 속보를 밥 먹다가 봐도 그저 광고처럼 보게 된다. 수잔 손탁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엘리베이터 안에 보통 층수 버튼이 문쪽에 있고, 또 벽면 쪽에도 층수 버튼이 있다. 내가 일하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는 3기가 가동하는데 한 엘리베이터는 야외가 다 보이는 통유리라 한쪽에만 층수 버튼이 있다. 그런데 층수 버튼을 누르고 계속 그 앞에 바짝 붙어 있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걸까. 문제는 다른 층수를 누르려고 좀 비켜달래도 마치 이스터 석상처럼 그 앞에 꼭 붙어 있다. 참 알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11층 버튼이 있는 자리에 늘 침이 말라 붙어 있었다. 매일 저녁에 거기에 침을 뱉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주의, 경고를 해도 변함없이 가래를 뱉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그 아주머니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 아주머니의 자식들이 사죄를 하고 어느 날부터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게 한 6개월 정도 지속됐다.


이건 코로나 전의 이야긴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에는 안에 있는 사람이 먼저 내린 다음에 올라타는 게 보통 엘리베이터의 예절 같은 것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면 내리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후다닥 타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한 두 명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일하는 건물 꼭대기층에 한 번은 다단계 회사가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문이 열리니까 우르르 타기에 저, 저 좀 내리고;; 까지 말했지만 그냥 삐, 소리가 날 때까지 타버린다. 할 수 없이 꼭대기까지 그대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일하는 건물 같은 층에 가끔 이야기를 하는 사장님이 있는데 몹시 착하다. 사람들에게 싹싹하고, 삭삭하다가 맞는 말인가. 아무튼 좋은 사람인데 나에게 이런저런 공구가 많아서 자주 빌려 달라고 한다. 그래서 빌려주면 함흥차사다. 보통 일주일 정도 그냥 가지고 있다. 내가 사용할 일이 없어서 굳이 달라고 하지는 않는데 한 번 빌려 가면 바로 돌려주지 않는다. 특히 줄자 같은 경우는 꽤나 좋은 물건이라 이건 누구에게도 빌려주기 싫은데 빌려가서 쓰고 나면 자신의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버린다.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달라고 하면 어떤 재스처나 소리도 없이 꺼내서 준다. 그게 아마도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스타일인 것 같다. 스타일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천성이나 성격은 후천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스타일은 누군가 앞에서 나타나는 관념이라 쉽게 바뀔 수가 없다. 하지만 빌려간 물품을 쓰고는 바로 돌려주었으면.


조깅을 하다 보면 군데군데 산스장 같은 곳에서 몸을 푸는데, 공중화장실이 1분 정도만 걸어가면 닿는 저곳에 있는데 그냥 산스장 근처에서 소변을 보는 아버님'들'이 있다. 웃긴 건 이렇게 오줌을 갈겨 놓으면 여름이 되면 거기서 오줌 지린내가 심하게 난다. 폭염인 날에는 더없이 지독하다. 아이씨 욕이 정말.


오전에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 길목에는 아주 좁은 골목을 하나 통과한다. 둘러가도 되지만 그 골목이 좋아서 내내 거기로 다니고 있다. 골목은 사람 3명이 지나가면 꽉 차는 그 정도. 그런데 오전 시간에 느닷없이 근처 휴대폰 대리점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있다. 3명이서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나면 그 밑에 가래와 침이 홍수를 이룬다. 전자담배를 피우는데도 그렇게 가래와 침을 단전에서 끌어올려 뱉어야 한다니.


그래도 늘 복잡한 주차장에 비상식적으로 주차하는 인간은 아직 못 만났고, 층간소음 문제도 없고, 쓰레기를 내 앞에 버리는 인간도 없고, 빌려간 물건을 일단 다 받았고, 대기가 오염되고 있지만 방독면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고,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되지도 않았고, 소음 때문에 모두가 보청기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서 총을 구입하여 쏴대지도 않고, 지하자원의 고갈은 좀 시간이 남아있다.

조깅을 하면서 매일 보는 풍경인데 작년 이맘때와 똑같고, 3년 전 이맘때와. 5년 전 이맘때와 똑같다. 변화가 없다. 늘 이 구도에 이런 모습이다. 하지만 매일 다르다. 매일 바람이 다르고 구름이 다르고 반영이 다르다. 색감이 다르고 듣는 노래가 다르다. 달리다가 중간에 스쾃을 하는데 할 때마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이 정도면 이제 괜찮지 않아?라고 할 법도 한데 할 때마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고, 플랭크는 할 때마다 중력의 힘을 너무나 느낀다.

가로등과 가로등 밑을 지나치는 사람과 벤츠와 강건네 아파트 단지와 인공광원과 작은 자연광의 별빛이 만들어낸 이런 사진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기묘하게도 다양한 컬러로 채색되어있지만 쓸쓸하고 고독하다.

한파였던 날이었는데 고양이가 야외에 나와서 웅크리고 있다. 길고양이는 늘 시선을 두게 만든다. 저들은 이렇게 추운 날 어디서 몸을 말고 잠이 드는 걸까. 고양이의 일생은 70%가 느슨한 잠으로 보내는데 이렇게 추워서야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일단 생존을 헤야 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인간보다 나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작은 심장이 팔딱팔딱 빨리 뛰고 있다. 우리도 힘낼 테니 닝겐도 힘을 내봐,라고 한다. 고양이나 인간이나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디고 있다. 어디서 얼마나 잘 견디는지가 요즘의 관권이다.

이 도시는 95년도에 광역시가 되고 난 이후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과 집은 전부 철거를 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도시 전체가 30년에 걸쳐 리모델링되어서 낡고 보기 싫은 옛것들은 다 사라져 간다. 그래도 아직 구석으로 가면 지는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 이런 대비를 보는 건 언제나 좋다. 왜냐하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이런 곳을 많이 사진으로 남겨두었는데 이제는 그곳에 전부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으로만 남아있어서 아 이곳에 이런 집이 있었지, 하게 된다. 이 집도 허물 이지기 일보직전이다. 공포 유튜버들은 어서 출동해서 귀신 영상을 촬영하라고.

그렇게 돌아서 오다 보면 여기 동네도 예쁜 곳이 많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3월부터 겨울이 오기 직전까지 도로를 막고 매주 주말에 축제가 열린다. 축제는 다양하며 오래되어서 꽤나 즐길거리가 많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설치해 놓은 인공조명이 밤이면 반짝이지만 거리는 쓸쓸하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매일 저녁 복적 거리는 도로인데 언젠가 그런 모습을 또 보겠지.

이곳도 아직 골목이 남아있다. 80년대 지어진 집들이 데면데면 붙어있다. 80년대 2층 집에 산다고 하면 와 잘 사는 집 아들내미네, 같은 말을 들었다. 이층의 방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열심히 연애편지를 쓰고 방황했던 아이들은 지금은 다들 어른 중의 어른이 되어 있겠지. 그리고 명절에나 집을 한 번 찾을지도 모른다. 집의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 중고등학생이 되어서 그 옛날을 추억하고. 골목에서 친구를 큰 소리로 부르면 누군가가 야 이놈아 시끄럽다! 며 더 크게 소리치고. 골목에 기대어 친구를 기다리던 시간은 아직 골목에 그대로 있는 것만 같겠지.

그렇게 영차영차 달려서 들어오면 하루의 달리기가 끝이 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매일 느끼는 감촉은 다르기 때문에 조금은 특별하다. 오늘은 플랭크를 하면 몇 분부터 몸이 떨릴까, 이런 생각을 달리기 전에 한다. 좀 웃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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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소비가 줄어들어 작년 한 해 1인당 쌀 소비가 57킬로그램이라는 기사가 났다. 누군가의 댓글에서 ‘물론 힘을 내는데 탄수화물이 꼭 필요하지만 농경시대였던 과거와 달리 현재 시대에선 그렇게 힘을 써야 할 일이 많이 줄어든 게 사실임. 중략. 결론은 옛 말에 하루 세끼 먹어야 건강하다는 말은 농경시대에서나 통용되는 말임’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제 일반 대중의 의식이나 눈높이도 전문가만큼 수준이 높아졌다. 지난번에도 쌀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를 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2403


농사만 짓던 농경시대에서 곡기로만 배를 채우던 생활을 했는데, 곡기에서 맛이라는 것이 빠져 있으니까 장을 담갔다. 그래서 장에 찍어 먹고 곡기에 올려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국이 등장했고. 그런 구조가 거의 1970년, 80년대까지 내려온다. 사람들이 대체로 몸을 많이 움직였다. 노동의 보상을 밥으로 했고, 평일의 위로를 주말의 회식으로 받았다. 석탄을 캐고 지금의 초고도화 기업들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쌀을 많이 소비할 수밖에 없다.


회식의 기본은 다 같이 둘러앉아서 같이 먹는다. 그리고 회사들은 대부분 ‘가족 같은 회사’라는 분위기를 앞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족도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서로 보기 싫고 짜증이 나기도 하는데 회사에서까지 가족 같은 분위기를 내세워 끊임없이 부려 먹었다. 그 관습이 내려오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끊거나 잃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뉴스에서도 한 기업에서 발가벗기고 따돌리고 괴롭혀서 목숨을 끊은 사실이 밝혀졌다. 가담했던 사람들이 책임을 느끼고 회사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그게 해결책일까. 아직까지 가족처럼 연결되기를 바라는 회사가 얼마나 많을까.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구조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렇게 둘러앉아서 식사를 하는 습관이 우리에게 오랜 전통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70년대부터는 전통 한정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가격은 비싸지만 ‘전통'이 들어가기에 행사 때에는 꼭 가서 한 번 먹어야 하는 음식 또는 음식점처럼 여겨졌다. 똑같은 쌀밥 한 그릇인데 전통이라는 말을 내세워 음식을 파는 식당은 그 한 그릇의 가격 또한 비싸다. 그동안 우리는 전통이라는 말에 매몰되어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집안의 대소사가 있으면 우리는 전통 한정식 집으로 어른들을 당연하게도 모시고 갔다. 전통 한정식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음식을 파는 식당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이 많이 나온다. 입이 벌어지고 눈이 호강을 한다. 어떤 음식부터 젓가락을 대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일류 요리사가 요리를 내놓은 레스토랑만큼 비싸다.


그렇다면 정말 전통 한정식이 이랬을까. 도대체 전통이라는 건 무엇이며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을 전통이라고 해야 할까. 옛 그림 중에 직자 미상의 ‘선묘조제재경수연도’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3, 4년 정도 지난 후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의 내용은 전쟁을 치르고 난 후 그들의 부모를 연회에 초청하여 왕이 대접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을 잘 뜯어보면 음식을 하는 장면도 보이고, 음식을 먹는 장면 또 음식을 나르는, 서빙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음식을 만드는 이들은 궁에서 음식을 만드는 대령숙수들이다. 조선시대 궁중의 남자 조리사를 대령숙수라 하는데 그들이 궁에서 대부분 요리를 했다. 당시 유교문화였던 궁에서는 일 년에 제사가 170회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 많은 제사를 지내야 할 식재료를 이고 지고 나르고 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여자의 힘으로 불가능했다. 식재료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양도 양이지만 170회마다 그래야 하니 힘이 좋은 대령숙수들이 조리와 요리를 했다. 요즘에도 고기를 나르고 납품하고 배달하는 건 대체로 남자들이 한다. 그러다 보니 수라간에 들어가는 남녀 비율이 16대 1 정도로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대장금에서는 여자들이 궁의 요리를 전담했지만 드라마를 위해서 허구의 요소가 짙었지 싶다.


또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겸상이 없다. 모두가 독상이다. 각각 밥상을 따로 받는다. 그림을  보면 그렇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밥상 위에 밥그릇이 세 개나 네 그릇 정도 놓여 있다. 궁에서 내오는 음식이라고 해서 사치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밥을 먹으면 뜨거운 음식은 뜨거울 때 먹을 수 있고 시원한 음식은 시원할 때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릇이 비면 서빙을 보는 사람들이 밥을 먹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비어있는 그릇을 가져가고 다시 음식을 내어 준다. 프랑스의 상차림이 보통 그러하고, 유명한 셰프가 하는 식당에서도 요리는 하나씩 천천히 나온다. 프랑스의 저녁은 대체로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다. 음식을 느끼고 음미하며 길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이 긴 시간 매일 이야기할 거리가 없으니까 책을 많이 읽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여봐요, 그건 너무 옛날이잖소.라고 할지도 모른다. 전통이란 그런 것이지만, 그렇다면 가장 최근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을 보자.

대한제국의 고종의 상차림이나 연회 그림을 보면 서양 음식과 한국 음식이 상 위에 같이 놓여 있는 경우도 있고 서양의 음식으로만 채워진 경우도 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은 러시아에서 맛있게 마셨던 와인을 식탁에 자주 올렸다고 한다. 다 같이 모여 있되 상은 1인 독상 체재다. 똑같은 음식이 개인에게 각자 주어졌다. 전통 한정식 식당처럼 상 위에 여러 음식을 올려놓고 한 그릇에 여러 젓가락이 들어가는 경우는 없었다.


코로나 이전 티브이 예능 방송을 보면 전국으로 다니면서 한정식이라며 어마어마한 상차림을 많이 보여줬다. 그건 어떻게 봐도 이상하지만 방송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아야 했다.

이 그림에 가까운 사진은 많이 봤을 텐데, 당시 서민의 밥상이라며 이렇게 먹었다고 알리고 있다. 입이 벌어질 정도의 양이 담긴 밥그릇이지만 아마도 사진 촬영을 위해 큰 그릇을 놓고 연출했지 않았나 싶다. 이는 무엇을 알리려는 것인가 하면 아마도 쌀 문화권의 식탁에서 주인공은 반찬보다는 밥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최초의 얘기로 돌아가서 예전에는 쌀을 많이 먹어도 몸을 많이 움직여서 일을 했기에 살이 찌지 않았다. 쌀 소비가 활발했고 7, 80년대는 또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다. 그런데 현재는 쌀 소비가 엄청 줄었지만 쌀은 또 비싸고 논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돈을 벌지 못해 울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링크를 걸어 놓은 아티카 코마치에 대한 이야기에서 도정을 바로 한 쌀을 먹으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살이 찌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도정을 바로 한 후의 쌀을 먹을 수 있는 구조에 놓여있지 않다.


쓸데없는 말이지만 전통이라는 말이 음식에만 붙지 않는다. 전통민속춤이라고 알고 있는 승무는 스님들의 전통 춤이 아니다. 스님이나 비구니에게는 춤이 없다고 한다. 이 춤이 생긴 지가 70년대다. 문화재로 인정을 받아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전통적인 춤은 아니다. 그래서 승무를 소개할 때 전통민속춤이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김덕수 사물놀이도 전통놀이로 알고 있지만 이는 김덕수가 만든 사물놀이다. 김덕수가 만든 사물놀이는 국가에서 인정을 받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도 1980년에 김덕수 외 몇 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놀이다.


더 쓸데없는 말이지만 예전에 미국의 비건 대표의 닭 한 마리 요리가 한창 뉴스를 장식했다. 아내가 닭 한 마리 요리를 좋아해서 한국에 왔을 때 레시피를 전수받기도 했다면서 한국을 사랑하는 비건 대표, 라는 식으로 비쳤다. 요컨대 파스타를 너무 좋아하는 한국인이 있다고 치자. 파스타를 얼마나 좋아하냐면 매일 파스타를 해 먹었다. 밖에서도 파스타를 사 먹고 집에서마저 파스타를 해 먹었다. 파스타는 이탈리아 현지에서 요리하는 방식에 따라 맛이 천 가지가 넘는다. 면의 모양이나 굵기, 삶는 정도,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 정도로 파스타를 한식보다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한국인이 이탈리아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파스타를 좋아하는 것이지, 파스타를 좋아해서 먹는다 해서 그 나라까지 꼭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폰이 너무 좋아 아이폰 3부터 지금까지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지만 미국을 사랑하냐면 그건 별개의 문제다. 심지어 미국인 남편과 살아가고 있지만 미국을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네버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에게 쌀이라는 건 생활에 밀접한 것 중에 하나다. 이런 밀접한 것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역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누가 잘못을 한 것인지, 어디에서 잘못이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 안다고 해서 뭔가가 바뀔 수 있을까. 이제 곧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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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아니 하루키가 입었던 티셔츠 예찬론까지 읽어야 해? 했지만 막상 책을 펴 들고 보다 보면 그래, 그래 이거야 하루키 일상은 이거지요. 하게 된다.


특히 까마귀가 공격해 오는 이야기에서는 역시 큭큭하게 된다. 자신을 싫어하는 문예평론가가 까마귀로 태어나서 괴롭힌다느니, 또 퀸시 존스와 나란히 앉아있는데 퀸시 존스가 “나는 말이지 마츠다 세이코의 앨범도 프로듀서 했지”라면서 자랑을 늘어놓는데, 하루키는 속으로 그보다 더 자랑할 게 있을 텐데 흠, 하는 부분은 그래 역시 읽는 재미가 있어요. 하게 된다.


마츠다 세이코는 ‘푸른 산호초‘를 불러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는데 현재 마츠다 세이코의 영상이 올라온 유튜브에서는 한국인들이 댓글 파티를 하고 있다. 이 노래는 아마 앞으로 11년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좋아서 주야장천 들을 것이다. 과즙미 터지는 얼굴과 시원시원한 긴 팔다리를 흔들며 부르는 푸른 산호초는 정말 최고. 예전에 하루키 그림을 그리면서 마츠다 세이코의 그림도 그려서 옆에 집어넣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키는 마츠다 세이코처럼 프로듀서화 된 가수들은 썩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마츠다 세이코는 퀸시 존스보다는 박진영이 존경해 마지않는 마법의 손 ‘데이빗 포스터’의 손을 거쳐 두 장의 앨범을 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암튼 마츠다 세이코의 헤어스타일은 한국을 비롯해서 온 아시아 지역의 여자 연예인들은 다 따라 했고 마츠다 세이코의 얼굴을 닮은 연예인을 발굴하는 게 큰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마츠다 세이코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예명인데 여러 설이 있지만 그 당시 일본 바블 경제의 중심에 있던 마츠다 사와 세이코 회사의 이름을 합쳐서 마츠다 세이코가 되었다는 게 가장 믿음직하다.


마츠다 세이코는 승승장구하다가 남성편력으로 서서히 배경으로 물러난 가수에 속한다. 그럼에도 인기는 식지 않고 지금도 영화에도 나오고 노래도 부른다. 마츠다 세이코의 가장 안타까운 건 그녀처럼 되고 싶었던 그녀의 딸 칸다 사야카가 35살이라는 나이에 한 달 전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 배경에는 남자 친구가 너 같은 건 죽어, 죽으면 모두가 좋아하지 않겠어, 같은 이야기가 가장 유력한 배경으로 떠오른다. 엄청난 엄마의 벽을 넘지 못한 딸의 죽음이 안타깝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하루키도 아이가 태어났다면 아마 아버지의 그 엄청난 재력과 재능에 자기도 모른 채 눌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장편 소설에는 여자아이가 늘 등장한다. 유키, 메이, 후카에리, 스미레, 키키 등. 그 모든 캐릭터가 하루키의 딸이 소설 속에서 조금씩 커가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조금씩 하루키의 어떤 면을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인별그램에 올린 내용이고 여기부터는 이곳에만 올리는 글이다. 당연하지만 하루키의 티셔츠 에세이를 보고 나면 어김없이 따라 하게 된다. 요즘에는, 그러니까 근 몇 년 동안에는 무지 티셔츠나 아디다스의 반팔 티셔츠를 입는다. 이유가 확실한데 아디다스는 비록 운동복이기는 하지만 디자인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기능성이라 여름에 확실한 존재를 뽐내는데, 그대로 입고 일을 하다가 저녁이 되면 이제 한 번 달려볼까, 라며 그대로 조깅을 할 수 있어서 무지 티셔츠나 아디다스 티셔츠를 주로 입는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태어나서 단추가 달린 남방이나 카디건 같은 건 입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입지 않았다. 선물로 받아서 어쩔 수 없이 한 두 번 입어본 경우는 있지만 내가 나의 주머니를 열어 돈을 꺼내서 단추가 달린 옷을 사 본 적인 없다. 그러고 보면 구두도 신어 본 적이 없다. 아니 여봐요, 그럼 구두를 신고 가야 할 장소에는 어떡합니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때는 검은 운동화를 신고 가면 된다. 그래서 검은 운동화 하나는 늘 저 구석이 있다. 정장을 입어야 할 때에도 안에 검은색 무지 티셔츠를 입는다. 넥타이를 맨 적이 없고 구두를 신어 본 적이 없다. 구두를 처음에 한 번 신었을 때 뭐야? 이런 걸 신고 다녀야 한다고? 그 뒤로 구두는 안 신었다. 구두를 신고 열심히 다니는 회사원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고 올리지 않은 티셔츠도 몇 장 있다. 마돈나가 프린트되어 있는 티셔츠도 있고 하와이안에게 받은 비키니 여인의 프린트가 되어 있는 티셔츠도 있지만 올리지는 않았다. 티셔츠를 음식에 비유를 하자면 라면과 비슷하다. 라면 안에 뭘 집어넣어서 먹어도 맛있듯이 어떤 옷에도 티셔츠는 어울린다. 또 장소에 방해받지도 않는다. 잠을 잘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바닷가에서 맥주를 마실 때에도 다 어울린다.


티셔츠는 하루키의 말처럼 새것보다 입고 또 입어서 목 라운드가 늘어난 티셔츠가 좋다. 그게 더 멋진 스타일에 가까운 것 같다. 과하지 않게 목 라운드가 늘어난 티셔츠를 다른 옷과 매치해서 입고 나온 사람을 보면 꽤나 멋지게 보인다. 이 정도로 끄떡없으니까 너도 열심히 해봐,라고 티셔츠는 말한다. 빳빳한 새것의 냄새는 없지만 이미 여러 전투의 경험을 한 것 같아서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독보적인 향이 있다.


사람들은 티셔츠가  낡아서 해질 때까지 입지는 않는다. 옷을  입게 되는 경우는 사이즈가 작아졌거나 혹은 커졌거나(이런 경우는  없지만) 싫증이 났거나. 그런 경우일 뿐이다. 낡아서  해져서  입는 경우는 없는데  같은 경우 몇몇 티셔츠는 완전 낡아서  해져서  이상 입을  없는 지경이  것도 있다. 최초 도대체 티셔츠는 얼마나 입을  있을까. 그래서  10년을 조깅을 하면서 입고, 평소에도 입고. 땀을 흘리며 달리고 하다 보니 겨드랑이 부분부터 낡아서 해지기 시작했다. 거기부터 너덜하게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서 서서히 앞부분에도 구멍이 숭숭 나더니 색이  빠지고 완전히 낡아버린다. 티셔츠는 뭐랄까 새것이라는 느낌이 오래가지 않는 이상한 옷이지만 입을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드는 옷이다. 뭔가 음식 찌꺼기가 묻는 것에도 다른 옷에 비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런 옷을 마음껏 입을  있으니 그렇지 못한 것보다 얼마나 괜찮은 삶인가. 이런 말을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하면 , 웃기시는군, 같은 표정을 짓지만.

하루키처럼 프린트되어 있는 문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설명충이 되고 싶지만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이렇게 대충 보면 무한사랑이나 행복 같은 문구가 보이니까 이상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티셔츠는 입으면 예쁘기는 한데 몸에 착 달라붙어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실 때는 피해야 한다. 이 티셔츠는 검은색처럼 보이지만 진한 남색이다.


이 티셔츠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힙스럽다. 가방을 메거나 외투를 입어버리면 뒷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한때는 뒷모습이 예쁜 티셔츠를 꽤나 찾아다녔던 것 같다. 심지어는 서울까지도 서슴없이 가서. 주로 가을용 티셔츠로 입고 그대로 반바지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열심히 달렸는데 아직도 프린트가 벗겨지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티셔츠에 초현실 그림이 박혀 있으면 또 혹하게 된다. 색상도 쥐색 같아서 아주 마음에 든다. 누군가 어? 이 그림 마음에 드네요, 라면서 다가와 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지 않죠. 문득 생각이 난 거지만 나에게는 메탈리카, 본 조비, 너바나가 프린트되어 있는 티셔츠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어느 날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티셔츠로 인생을 배우는 나.


이 티셔츠는 라이더에 어울리는 옷이다. 섹시라는 글자도 보이고 런던도 보이고 오토바이도 보이고 소매 끝에 자크로 달려있어서 입고 있으면 마치 슈트를 착용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티셔츠도 뒷모습에 더 멋진 프린트가 있다. 보이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뒷모습에 왜 집착을 했을까. 싶다가도 뒷모습이 멋진 걸 안다는 걸 달력의 뒤편의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혼자서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티셔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 주위에 옷가게가 많고 사장님들과도 이야기를 꽤 하는 편인데 다 여자 옷이다. 그러고 보면 티셔츠도 남자보다 여자 티셔츠가 예쁜 건 더 많고 아 저 티셔츠는 입고 싶은데 하는 것도 있다. 나처럼 패션 테러분자도 옷 이야기를 하면 주절주절 할 말이 많은데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만의 스타일과 철학에 절로 고개가 끄덕거리게 된다. 여러분의 티셔츠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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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30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목이 늘어진 까만 티셔츠를 버렸더라구요.
한 10년 넘게 입었던 것 같은데 작년에 입으려고 찾았더니
없더라구요. 요즘은 버린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없어 찾을 수 없게되야 비로소 내가 버렸나 보다해요.ㅠ
제가 살집이 있는 스탈이라 주로 진한 색깔의 셔츠를 좋아하죠.ㅎ

와, 근데 애인이 그런 말을 한다고 죽냐.ㅠ
그래서 말조심을 잘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별 뜻없이 하는 말도 어떤 사람한테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일이거든요.
그 애인도 정말 죽길 바라서 했겠습니까요.

그림 독특하고 귀엽습니다.ㅎ
명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교관 2022-01-31 12:03   좋아요 1 | URL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늘 가스라이팅을 당해 왔던 거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일본의 엘사 더빙을 하면서 겨우 물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이러쿵 저러쿵 가십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자신의 고통과 힘듦을 남자친구에게서 위로를 받으려 했는데 남자친구라는 놈이 늘 그렇게 가스라이팅을 해 온 거죠 ㅋㅋ 한 번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보통 극단적 선택은 하지 않아요.

스텔라님도 명절 행복하게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ㅎㅎ 저는 명절이나 평일이나 똑같아서 ㅋㅋㅋ
 

타임


시간이라는 주제로 예전에 작업을 한 번 해본 사진 중에 하나다. 이 사진은 디지털이지만 만약 초현실 사진의 대가 ‘제리 율스만’이라면 필름으로 다중노출을 하여 촬영하여 그 필름에 또 다른 필름을 올리고,, 암튼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초현실 사진을 만들었겠지만 나는 그저 포토샵으로 휙휙 작업을 해서 액자에 맞게 출력을 했다.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을 보면 시계가 녹아내리고 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우리의 의문점이며 과제이며 당면한 현실이다. 시간의 흐름은 개개인마다 다르고 그 시간이 되었을 때 바라보는 방향 또한 다 다르다. 이 세상에서 순수한 것이 제일 무서운데, 요컨대 자연재해도 순수한 것에 해당이 되고, 아이도 순수해서 깔때기 없이 말을 하니까 무섭다. 하지만 이런 순수한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시간이다. 시간이란 과학적으로의 접근은 거의 불가능하니 대체로 철학 또는 예술의 힘을 빌려 시간에 다가서는 노력을 해왔고, 하고 있고, 계속할 것이다.


마블 시리즈 중에 가장 재미가 떨어졌던 이터널스에서도 좋았던 점 하나를 꼽자면 초반에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이 나온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든다. 노래의 초반에 시계 초침 소리, 시계 종소리가 나오며 둑닥둑닥둑닥 하더니 웅장한 베이스가 디링 하며 시작한다. 이 부분이 가장 소름 돋도록 멋진데 이터널스에서 과감하게 사용했다. https://youtu.be/r8zsNX-vPD0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이 음악적으로 왜 좋은지 전문가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은 잡아당기는 흡입력이 굉장하다. 핑크 플로이드를 처음 들었을 때가 학창 시절이었는데 그때는 열심히 헤비 한 음악을 듣고 있을 때였고 누군가를 향해 공격을 하고 싶었던 와중에 들어서 그런지 핑크 플로이드의 연주와 노래는 마치 나에게 하나의 길잡이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 연주를 듣고 가슴이 벅차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핑크 플로이드는 그 어려운 걸 해내더라고. 요즘은 유튜브로 라이브를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우리나라 말로 도대체 몇 년을 해 먹는 거야? 하지만 더 해 먹었으면 좋겠는데. 전 세계에서 활동을 가장 길게 하는 그룹 중에 단연 꼭대기에 있지 않을까.


고등학교 암실 구석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을 들으며 벽에 머리를 대고 노래와, 나와, 학창 시절과 시간에 대해서 한 10초 정도는 고민을 한 것 같다. 시간을 돌리는 영화도 수없이 많이 나왔다. 그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영화는 우디 알렌의 ‘미드나잇 인 파리’다. 작가였던 주인공 길은 자정이 되면 쟁쟁하던 극작가들이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를 다니고 와인을 마시는 곳으로 시간여행을 가게 된다.

파리의 명품을 바라는 이레즈와 빗속의 파리를 걷고 싶어 하는 길은 서로 다르다. 일본의 5분 드라마 ‘오늘의 네코무라 씨’을 보면,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서 산후조리를 했던 코유키가 이런 대사를 한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결혼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좋아해서 결혼한 사람들이 서로를 계속 좋아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 여하튼 길과 이레즈는 서로 다른 점 때문에 끌렸지만 그 이유로 헤어지게 된다.


영화 속에는 스콧 피츠 제럴드와 헤밍웨이, 저 위에서 잠시 언급한 살바도르 달리도 막 나온다. 거트루트에, 그녀의 애인이자 뮤즈인 엘리스도 너무 비중 없이(웃음) 아무렇지 않게 휙 나온다. 등장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다른 점이 있지만 우디 알렌 감독이 전부 한 곳에 집결시킨다. 왜? 영화잖아? 어려울 것 없잖아? 주인공 길이 과거로 가는 마당에. 이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부록이랄까. 미술관 가이드 역으로 칼라 브루니가 나오는데 다 알고 있듯 가수, 배우이자 그 남자의 여인이다.

길과 이레즈가 폴 커플과 걸었던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은 아주 아름답다. 원래 베르사유는 루이 13세가 사냥용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지만, 14세로 넘어오면서 건물은 증축을 감행하고 명령에 의해 대정원을 착공하게 된다. 죽기 살기로 거대 정원을 가꿨다. 베르사유 궁에는 많은 방이 있다. 그중에 유명한 방이 ‘거울의 방’이다. 영화 후반부에 길을 미행하던 장인의 끄나풀이 시간이 후퇴한 베르사유 궁으로 가게 되는데, 하필 거울의 방에 떨어져 막 헤매게 된다.


거울의 방이 가장  드러나는 영상은 2011년쯤인가 샤를리즈 테론의 자도르 디올의 광고였다. 티브이판 짧은 버전이 있고 풀버전이 있는데 풀버전을 보면 거울의 방을 통과하면서 그간 디올 사랑했던 세기의 배우들을 그래픽으로 살려낸다. 대역이 아니라 그래픽으로 살려냈다. 그레이스 켈리와 샤를리즈 테론이 살짝 입맞춤을 하고 메릴린 먼로가 자도르 디올의 향수를 들고 기쁨에 젖은 모습도 보인다.


광고 속에는 허리를 강조하고 코르셋처럼 허리끈을 묶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크리스천 디올의 특징이었다. 사치의 대명사로 오로지 귀족들만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주름과 치마의 꽃으로 무장을 했다. 샤넬은 이런 귀족들의 스타일이 싫어서 검은색과 흰색의 조화로 몸을 조이지 않는 옷을 디자인했다. 샤넬은 어릴 때 수녀원에서 자랐기에 수녀들을 엄마, 언니로 생각했다. 디자이너가 되었어도 수녀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무의식 중에 디자인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샤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자. 지금 하는 이야기보다 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암튼 귀족들의 사치라고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았지만 크리스천 디올은 꾸준하게 인기를 얻어 간다. 최근(이라 해도 근 10년)에는 모나코에서 왕가의 공식행사 때 샤를린 왕비가 디올의 의상을 입고 있다. 재미있는 건 수영 선수 출신의 샤를린 왕비의 얼굴이 샤를리즈 테론의 얼굴과 닮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광고업계가 준비하는 과정? 노력을 보면 소름 돋지? 샤를리즈와 닮은 샤를린 왕비는 그레이스 켈리와 자주 비교되었다.

https://youtu.be/_SrwvtAhxbE 샤를리즈 테론의 거울의 방에서 촬영한 디올 광고 영상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서 길이 과거로 가서 콜 포터를 만난다. 맙소사. 콜 포터를 보고 비틀어진 코가 한번 더 비틀어지고(주인공 오웬 윌슨의 코, 다 알죠?)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에게 이끌려 다른 술집으로 간다. 피츠 제럴드의 역작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면 제일 첫 장에 ‘다시 젤다에게’로 포문을 연다. 1920년대에 피츠제럴드는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글쟁이였다. 출판사들은 그의 글을 내고 싶어 안달했고, 피츠제럴드는 그런 미국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영화 속에는 우리의 로키 형, 톰 히들스턴이 피츠제럴드다.


피츠제럴드의 실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척 잘생겼다. 톰 히들스턴도 그러하고. 육군 소위로 장교복을 입고 있는 피츠제럴드의 외모는 누구나 반할 만큼 멋있었다. 하지만 1차 대전이 끝나고 군복을 벗어버리자 피츠제럴드는 한낱 볼품없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광고 회사를 다니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성적 하락으로 중퇴를 하고 광고 문구를 만들면서 꾸준하게 소설을 썼다. 하지만 그의 글은 출판사에서 언제나 퇴짜를 맞았다. 그런 생활을 하던 그의 눈앞에 일생에 한번 사랑에 빠질만한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 여자가 바로 조지아 주와 앨라배마 주에서 가장 미인인 ‘젤다 세이’였다.

젤다는 발랄했고 기가 세고 승부욕이 강했다. 무엇보다 예뻤다. 젤다도 피츠제럴드를 사랑했지만 가난한 남자와 사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녀는 명문가 집안의 딸로 부족함 없이 자랐고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젤다는 가난한 삶을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는 젤다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피츠제럴드가 그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글밖에 없었다. 젤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런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서 피츠제럴드는 세상이 놀랄만한 글을 써야 했다. 아아 사랑에 목숨을 건 스콧,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한다. 오직 글만이 자신을 내보일 수 있었던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오로지 젤다를 얻기 위해 글을 썼다. 그녀는 피츠제럴드를 사랑했지만 별 볼일 없는 피츠제럴드와 약혼을 파기한다. 그만큼 젤다는 냉정하고 현실에 가까운 여자였다. 피츠제럴드는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두려움에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죽어라 글을 썼다.


고통 끝에 펴낸 자신의 첫 소설 ‘디스 사이드 오브 파라다이스’ 덕분에 젤다가 출판 일주일 후에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다. 젤다 역시 글쟁이였다. 당시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이 그냥 개츠비였는데 ‘위대한’을 삽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젤다와 출판사의 권유로 ‘위대한’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은 디카프리오가 연기했던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봐도 나온다. 그렇게 펴낸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에 가까웠다. 팔리지 않았다. 피츠제럴드는 경제적 궁핍 속에 시달려야 했지만 2차 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붐이 일었다. 시기가 맞았던 것이다. 바로 군인들 자신의 모습이 개츠비에 투사되었기 때문이었다. 1925년에 2만 부에 거친 책이 군인들 덕분에 15만 부가 넘어 팔리게 되었다. 비평가들은 개츠비에 대해서 호평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50년대의 미국에 있는 고교에서는 필독 도서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 전 세계가 사랑하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의 점화가 바로 ‘위대한 개츠비’가 되었다. 젤다를 완전히 자신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젤다가 원하는 파티를 매일 열었고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젤다가 원하면 그는 다 들어주었다. 매일 파티를 즐기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젤다가 떠나갈 것이기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젤다와 남편인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로 성공을 거두자 명실상부한 뉴욕의 셀러브리티 커플로 알려진다. 톡톡 튀고 독립심이 강하고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그녀를 당시의 미디어와 사람들은 추앙했고 사랑했다.


젤다는 그런 삶을 더욱 사랑했고 옆에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가 늘 지켜봐 주었다. 도취될 수밖에 없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여자가 늘 웃고 있었다.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가 빠져 들었고 연일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여 술과 문학과 재즈를 즐겼다. 영원할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이 모든 생활이. 파티가 지속되고 개츠비 이후에 개츠비만 한 글이 안 나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피츠제럴드의 절친 헤밍웨이가 파리의 한 파티장에서 피츠제럴드를 찾아간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술잔을 한 손에 쥐고 상류층의 복장을 하고 포마드로 단정하게 머리를 넘긴 피츠제럴드를 찾은 헤밍웨이는 “이봐, 자네. 요즘 괜찮은가?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러자 피츠제럴드가 “이보게 친구, 잘 보게. 이것이 삶이라네.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자 한잔하고 가게나”라고 상상해서 써봤다. 암튼 이런 장면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잘 나온다. 절친이었던 헤밍웨이가 왔음에도 예전 같지 않았다. 변해있었던 것이다. 헤밍웨이는 후에 그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그의 옆에 있는 젤다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가 그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피츠제럴드와 젤다는 돈을 물 쓰듯 썼다. 술을 마시면 언제나 만취였고 호텔의 분수에 뛰어들었고 신문의 일 면을 장식했다. 연일 열리는 파티와 파티 사이에 써 내려간 단편은 거액으로 출판사에 팔려 나갔다. 피츠제럴드의 이 모든 행동과 삶은 오로지 젤다를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젤다와 개츠비 속의 데이지를 욕하지만 젤다는 피츠제럴드의 한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의 눈과 촉은 젤다를 향해 있었고 그녀가 움직이면 그의 촉도 같이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세 시간이 걸리는 곳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가 바라는 옷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서 선물하지 않았을까. 투정을 부리면 받아줬을 것이고 눈물을 흘리면 안아줬을 것이고 매일 밤마다 그녀의 귀에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젤다의 사진을 보면 헤어 스타일이 독특했고 의상도 화려했다. 당시에 가장 핫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부족함 없이 돈을 쓸 수 있었다. 누구나 원하고 바라는 삶일지도 모른다. 부족한 것 없는 집안에서 철없이 자란 여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하지만 죽을 때까지 철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대로 꽤 멋지고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서 코유키의 대사처럼 좋아하는 사람끼리 결혼해서 계속 좋아하기는 어렵다. 젤다와 피츠제럴드의 방탕하고 호화로운 생활은 십 년 만에 비극을 맞이한다.


미국은 29년에 대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피츠제럴드의 소설도 파국을 맞이하며 끝을 맺게 된다. 대신 미국의 문학적인 영웅을 새롭게 맞이하는데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였다. 문학의 사조가 바뀌었고 피츠제럴드의 글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헤밍웨이가 글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며 총구멍을 자신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한 것에 비해 피츠제럴드는 어두운 곳에서 죽을 때까지 글을 썼다. 설령 말년에 쓴 글이 왕년의 글을 넘어서지 못하더라도 글쟁이의 본분을 잊지 않은 쪽은 피츠제럴드가 아닐까.


젤다는 몰락한 이후 자신의 퇴락해가는 모습에서 우울증에 시달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이 있었고 머리카락은 힘이 없어서 더 이상 이전처럼 예쁘게 말리지 않았다. 늙어가고 힘 빠진 모습에서 우울해지는 여자가 어디 젤다뿐이겠는가. 할머니에게 “곱게 나이를 드셨네요”라든가 “예쁘게 늙었네요”같은 말을 집어치우자. 나이라든가 늙었다는 말을 빼고 하자. 할머니라도 예쁘고 싶고 곱고 싶으니까.


젤다는 자신의 문학 실력을 살려 책도 내려고 했지만 다른 곳만 쳐다보는 출판사들 뿐이었다.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과정을 피츠제럴드가 소설에 그대로 사용을 해버린다. 그 사실로 인해 젤다의 병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깊은 배신을 받았다. 젤다의 일기와 편지들은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 그대로 남아있을 뿐 젤다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우울은 너무나 깊고 컸다. 자신을 추앙했던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면 수군거렸고 손가락질을 했다.


저기 젤다가 지나가, 저 여자 매일 밤새도록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진탕 마시고 담배도 지폐에 불을 붙여 피웠대, 그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 좀 도와주지 말이야, 이젠 볼품없는 얼굴이 되었군, 남편의 글도 이젠 한물갔대나 봐, 남편은 젤다의 퇴락해가는 이야기를 소설에 섰대, 불쌍하구만.


만약이지만 젤다가 피츠제럴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데이지처럼 톰 뷰캐넌 같은 남편을 만나서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더라도 수면 위에서 평탄하게 살아갔을까. 1940년에 피츠제럴드가 죽고 정신병원을 오가던 젤다는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정신병원의 화재로 인해 3월의 봄날에 그녀는 남편 곁으로 가버린다. 그런 젤다와 피츠제럴드의 최고 정점의 모습이 영화 속에 나온다.

어디까지 했지? 아 그래, 그래서 주인공 길이 젤다와 피츠제럴드에 이끌려 다른 술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저기 보이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깃털을 달고 춤을 추는 댄서가 보이는데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춤꾼, 퍼포먼스의 대가 ‘조세핀 베이커’다. 조세핀은 늘 저런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조세핀의 얼굴을 잘 뜯어보면 참 예쁜 얼굴을 가졌다. 웃는 모습도 아기처럼 아주 해맑다. 하지만 그녀는 춤을 추며 퍼포먼스를 위해 얼굴을 늘 변형시키거나 일그러트렸다. 마치 우리나라 춤의 인간문화재 공옥진 여사처럼 말이다.

우디 알렌이 왜 조세핀 베이커를 영화에 넣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조세핀 베이커 역시 빌리 홀리데이만큼 파란만장하고 아픈 삶을 살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식모살이를 하다 13세에 길거리 댄서로 데뷔를 하면서 2년 후 세인트루이스 합창단 보드빌 쇼의 단원으로 본격적인 예술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조세핀을 일컫는 호칭은 ‘블랙펄’이다. 헤밍웨이의 극찬을 받으며 조세핀은 애칭대로 블랙펄의 위용을 떨친다. 프랑스로 건너가서 펼진 조세핀의 공연은 예술의 본거지인, 1920년 대의 프랑스에 문화적 충격을 알렸다. 미국 태생인 조세핀이 어떻게 프랑스인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을까.


조세핀도 샤넬처럼 전쟁과 첩보원 역할을 해야 했다. 조세핀이 죽었을 때 프랑스에서 미국인이었던 조세핀에 대해서 국장처럼 장례식이 치러졌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군악대가 동원되었고 그녀는 프랑스인들에게 영원한 블랙펄로 남았다. 조세핀의 일대기를 알아서 인지 영화 속에 잠깐 등장하는 조세핀이지만 감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멍하게 앉아있는 길은 작가이니 아마도 조세핀을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 맙소사, 세상에, 조세핀 베이커잖아? 같은 표정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길의 표정이 그렇다.


길이 입을 벌리고 조세핀의 춤을 본 다음 날, 헤밍웨이와 함께 거트루트 스테인의 집으로 간다. 스테인의 집에서 문이 열리고 헤밍웨이가 안녕! 엘리스!라고 한다. 엘리스는 가벼운 인사로 대답하고 장면이 바뀐다. 아주 잠깐 등장하는 엘리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잠시 스쳐가 버린 엘리스는 미국 작가 거트루트 스테인(거츠)의 비서이며 거츠의 동성 애인이기도 하다. 거츠는 평론가로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검토했다. 그중에는 주인공 길의 작품도 검토를 한다. 작품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애인이자 작가인 엘리스와 많은 것을 공유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거츠의 손을 거쳤다. 거츠는 헤밍웨이가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또 헤밍웨이는 당시의 문화를 교류했던 피카소, 모네, 조이스와 에즈라 등 작가들과 영화감독을 존경했다. 그중에서 거츠가 단연 독보적이었다. 거츠의 옆에는 조력자 엘리스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사랑했다.

거츠와 엘리스가 운영했던 토클라스의 문학 살롱에는 많은 작가들이 모여들어 문학적 교류를 나누었다. 그 살롱이 영화 속에 보이는 저 집이다. 여기 살롱을 찾은 작가들로 티에스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이 이 커밍스, 제임스 조이스, 폴 발레리, 마르셀 프루스트, 장 콕도 등이 있다. 이들은 세계문학의 흐름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충을 이곳에서 주도했다.


왜 미국 작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을까.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지금까지도 너무 길게 적어 버렸다. 도대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디로 막 튀어 가버리는지도 모르게 미친 것처럼 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시계의 초침은 느리게 지나가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멈추거나 쉬는 시간을 가지지만 시간은 그 시간마저 쉬지 않고 이동을 한다. 인간의 심장 역시 쉬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 뛴다. 아무튼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했다. 시간 여행을 한 미드나잇 인 파리는 너무 재미있고, 쟈도르 디올 속에 등장한 그레이스 캘리는 너무 예쁘고, 우리는 시간의 문학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완성해가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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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병실 생활을 할 때 내가 본 것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건 나의 착각인지, 아니면 기억이 왜곡된 것인지, 병실생활로 인해 피곤한 탓인지 잘 설명할 수는 없다. 허나,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서 오 분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대학병원이 있으면 편리하다. 여러모로 시간과 차비 같은 것이 절약이 된다. 덕분에 간병인을 따로 부리지 않고도 어머니가 낮에는 병간호를 하고 내가 일을 마치면 야간에 아버지를 돌봤다. 사실 야간에 병간호를 딱히 해야 하는 건 없다. 밤이 도래하면 가래소리가 들끓는 내과병동도 고요한 잠의 세계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상이 있으면 간호사를 호출하면 된다. 실지로 내가 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아버지의 똥오줌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비닐장갑을 끼고 기저귀를 갈았지만 언젠가부터는 장갑이 귀찮아서 그냥 맨손으로 하게 되었다. 손에 똥이 묻으면 세면장에 가서 씻으면 그만이었다. 일반적으로 손에 똥이라는 게 묻으면 더럽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고, 반복이 되면 무뎌져서 그저 씻으면 그만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병실은 6인실이었다. 인원이 더 많은 병실이 있었지만 6인실에 입실했다. 대학병원에 아버지가 입원을 하고 좋은 점이라면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샤워실에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시간을 들여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서 샤워를 하고 나면 어떤 불행한 생활을 하더라도 조금은 괜찮아진다. 샤워실도 크고 예열도 필요 없이 바로 뜨거운 물이 나와서 집에서 씻지 않고 병원에서 샤워를 매일 할 수 있었다. 대중 목욕탕에 가지 않는 나로서는 집에서 겨울에 샤워를 할 때에는 보일러가 예열을 해야 하니 바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서 늘 별로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병실생활을 하고 나서부턴 집에서 샤워를 할 시간도 없었다. 집에 오면 잠들기 바빴다.


아버지가 잠이 들고 병실의 숨소리도 잦아들면 나는 밤 11시가 넘어 샤워실에서 샤워를 했다. 그 시간 이후로는 샤워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떤 날은 자정이 넘어서 샤워를 하기도 했고, 새벽 두 시에 샤워를 하기도 했다. 그 큰 샤워실에 혼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면 힘든 것도, 괴로운 것도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잊을 수 있었다. 이 혹독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느낌,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물은 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다. 그래서 매일 늦은 밤에는 샤워를 했다.


샤워실은 세면장과 붙어 있었다. 환자와 가족들은 보통 20시까지 세면장과 샤워를 하느라 분주하다. 또 어머니와 교대를 하고 병실을 나설 때가 오전 7시나 8시쯤인데 그때에도 북적인다. 그러니까 세면장과 샤워실에는 거의 환자와 가족들로 붐빈다. 거기에는 대형 냉장고가 있어서 가족들이 집에서 들고 온 밑반찬들이 그 속에 가득 들어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그런 공간이 밤이 도래하면 누구도 없다는 게 참 신기했다. 마치 도심지 한복판을 보는 것과 비슷했다. 밤의 도심지는 인파로 북적이다 새벽이 되면 황폐해지는 모습처럼 말이다.


6인실의 병실에 동안 병실에는 환자들이 속속 교체되었다. 환자 가족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환자가 점점 악화될수록 가족들의 얼굴도 굳어가거나 환자가 쾌유되어서 퇴원을 할 때는 가족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가족들은 환자가 조금씩 몸이 나아갈수록 서로 환자의 아픔에 대해서 공유했다. 병실생활을 오래 한 가족들은 신입 간호사보다 더 잘 안다. 수치나 환자를 드는 방법이나 그런 것에 대해서 수간호사 급이다. 환자가족들은 어떤 식으로 아프고 심각해지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생활이 일 년이 넘어가니 나는 지쳐갔다. 매일 밤 간이침대에 몸을 겨우 욱여넣어서 잠이 들었다가 아버지의 신음 소리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야 했다. 그래서 오전에 어머니와 교대를 하고 집에 가면 그대로 뻗었다. 그리고 알람 소리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일하러 갔다가 저녁에 병원에 와서 밤이 되면 샤워를 하며 피로를 조금이나마 잊으려고 했다.


그래서일까, 하루 밤에 샤워를 두 번씩 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상식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게 있다. 왜 하루 밤 사이에 병원에서 샤워를 두 번이나 하냐고 물어도 딱히 언어로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하루 밤 사이에 두 번이나 샤워를 하는 걸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잠이든, 늦은 밤에 샤워를 했기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요한 밤에 샤워실에 들어가 손잡이만 돌리면 뜨거운 물이 과감하게 콸콸 나온다. 틀자마자 나오는 뜨거운 물이 머리를 타고 다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기분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행복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매일 매시간 속에서 오직 샤워만이 유일하게 느끼는 해방감이었다. 나는 씻는 건 담배연기만큼이나 싫어하는데 샤워는 좋아했다.


아버지도 낮동안 병마와 싸우느라 피곤했던지 일단 잠이 들고 나면 아픈 고통도 잠에 잠식되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동안 잠시 세상사를 잊을 수 있으니까 샤워를 하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났다. 당시에는 샤워를 하는 게 병간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힘든 것들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이 순간이 곧 지나가리라 빌었지만 참으로 끝이 보이지 않았었다.


샤워를 하면서 양치질도 두 번씩 했다. 나는 어쩌면 아버지의 병간호가 힘들어서 샤워를 하는 동안 큰 이벤트가 일어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 생각이라는 게 어디까지가 정확한지 모호하게 된다.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정신에서 힘이라는 것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샤워를 하는 동안 간호사들이 나를 찾고 난리가 났다. 아버지의 보호자인 내가 자리에 없어서 잠이 든 아버지가 폐에 찬 가래를 뱉지 못해서 일이 난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체크를 하고 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간호사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내가 자리에 없어서 아버지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


새벽에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않을 수 있다. 내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을 미지의 힘이 다가와 그 생각을 뽑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안 할 수 있다. 샤워를 하는 동안 걱정도, 고민도 조금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샤워를 하는 동안 아버지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샤워가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에 도달했다.


아버지는 치료실로 옮겨져 폐에 찬 가래를 기계로 빼냈다. 아버지는 다시 병실로 옮겨졌다.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을 한 손으로 번쩍번쩍 들던 아버지는 더 이상 없어졌다. 나는 그 뒤로 새벽 샤워를 자제했다. 아직 사람들이 샤워실과 세면장을 이용할 시간에 나도 씻었다. 샤워는 하지 않았다.


간혹 친구들이 병문안을 오면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니 샤워나 하고 가라고 했다. 사실 병문안을 와도 병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음료수나 먹을 걸 사 와도 아버지는 못 드시고 나도 먹을 생각이 없고, 그러다 보면 먹는 건 전부 병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밖에 없다. 굳이 뭔가를 사들고 와야 한다면 기저귀가 가장 필요하니 그걸 사 오라고 했다. 그게 가장 필요한 물품이었다. 드라마에서는 과일 바구니 또는 꽃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가지만 쓰레기만 많이 나오고 별로였다. 그래서 친구들이 일을 마치고 밤에 병문안을 오면 샤워나 하고 가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면 처음에는 뭐야? 샤워라니?라고 하던 녀석들도 나의 손에 이끌려 샤워장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난 다음에는 가끔 병원에 와서 샤워를 실컷 하고 집에 가곤 했다. 집에 가서 겉옷을 벗고 그저 따뜻한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푹 잠이 들면 된다.


밤새 병원에 있는 나에게 연락을 하고 와서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샤워실에 제한은 없었다. 새벽의 어느 시간이고 간에 들어가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면 된다. 자기 몸을 닦을 수건만 들고 오면 된다. 나도 모두가 잠든 새벽에 샤워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야간에 샤워를 하는 걸 참았다. 친구들도 가끔 병원에 들러 샤워를 하는 것은- 일을 마치고 곤죽이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면 그대로 뻗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매일 뜨거운 물을 틀어서 샤워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병원에 오면 큰 샤워장에서 콸콸 나오는 뜨거운 물에 비누칠을 해서 샤워를 하면 된다. 집에서 씻는 거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다. 게다가 집에서처럼 샤워를 한 다음 바닥이나 벽면에 튄 비눗물을 닦아내지 않아도 된다.


꺼져가는 병원 복도의 어둠을 보는 것이 나는 좋았다. 복도 끝이 어둠으로 물들면 그 속에 갇혀 몸이 조금씩 어둠에 먹히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은 살아있어서 몸을 움직일 줄 안다. 그리고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면 조금씩 다가와 나를 머리부터 먹어치우는 것이다. 그 기분이 기이하지만 아주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기분과 흡사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이 데일 정도보다 조금 덜 뜨거운 물, 그래도 아주 뜨거워 살갗이 벌겋게 익어버릴 정도의 뜨거운 물에 몸이 잠식당하는 그 묘한 기분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한 번 적어야지 생각했다. 샤워를 하면서 이 큰 공간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샤워라면 매일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복도가 어두워지고 아버지가 잠이 들고 병실이 조용해지면 나는 샤워실에 가서 샤워를 했지만 아버지의 그 일 이후 나는 샤워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 초였다. 밖이었으면 일을 끝내고 친구들과 연탄길(이라고 하는 단골 고깃집. 고기를 연탄에 구워 먹는다)에 들러 수다를 떨며 한 잔 할 시기였다. 불과 1년 전에는 그렇게 즐겁게 연말을 보냈는데, 같은 생각에 젖어들었다.


친구 녀석이 연락이 왔다. 샤워를 좀 하러 가도 되냐고. 나는 내 병원도 아닌데 마음대로 와서 샤워를 하라고 했다. 그 녀석이 사는 집은 병원이 있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반대편으로 끝까지 가서 내리는 정류장이 있는 곳이다. 아주 동떨어진 곳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집에서 부모님이 하던 청과물 장사를 이어받아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이 병원에 온다는 건 일부러 오거나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오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그 녀석은 장사가 생각만큼 되지 않아 그 자리에 식당을 차리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평생 그 일을 해 오신 부모님과 의견이 대립했다. 고민이 많아 보였다. 자주 그 얘길 했는데 그 고민을 말하러 오는 김에 샤워나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어두워진 병실의 간이침대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잠이 들고 침실의 다른 환자들 역시 잠이 들었다. 병실의 환자 가족들 역시 피곤에 지쳐 속속 잠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깊은 잠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편안한 척해도 불안과 두려움, 고민이 쌓여 잠의 질까지 앗아간다는 걸 나는 안다. 나도 친구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꿈을 꾸지는 않은 것 같다.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기에 고개가 꺾여 목이 아파서 눈을 떴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이상하다, 왜 녀석이 안 오지. 그렇게 생각을 하며 폰을 보니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어서 샤워만 하고 돌아가겠다는 문자였다. 10분 전에 들어온 문자였다. 나는 일어나서 샤워장으로 갔다. 아버지의 6인실이 샤워장에서 가장 가까운 병실이었다. 누군가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실 문 밖에서 조용히 친구를 불렀다. 친구는 샤워를 하면서 대답을 했다.


복도 벤치에 앉아 친구를 기다렸다. 친구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서 김을 폴폴 풍기며 나왔다. 시원해 보였다. 겨울에 느끼는 시원함은 샤워만 한 게 없다.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눴다. 늦은 밤, 이른 새벽, 대학병원 복도라는 묘한 공간감 때문인지 평소에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 속에는 낙관적이지 못한 이야기도 많았다. 나는 친구의 힘든 것들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결국 내가 처한 입장만을 열거하게 되었다. 피곤하고 힘들고 지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내일이 이 지옥 같은 생활의 마지막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말을 했다. 친구는 묵직한 모습으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친구는 대뜸 그랬다. 가치가 있나? 호전된다는 보장이 없이 생명연장이 가능해졌을 때 일 년 정도 지나면 휠체어를 타고 누군가 밀어야만 이동이 가능하고 누군가 씻겨줘야 하는데, 무엇보다 본인이, 당사자가 주위에 짐이 된다는 고통을 끊임없이 가지는데 가치가 있나 하는 거야. 나는 그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족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아버지를 살리는데 가치라든가 생명연장이라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시스템에서 부품이 하나 나가면 곧바로 또 다른 부품으로 교체되듯 지금 당장 어딘가 허물어지면 그걸 메워야 했다. 레지던트는 나날이 나를 불러 이런 이벤트가 일어났을 때 관 삽입부터 해서 가격과 시간에 대해서 타협을 요구했다. 나는 친구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 시가 넘었다. 친구는 일어나서 가야겠다며 나에게 잘 있으라고 했다.


내일은 다 잘 되겠지. 라며 친구는 돌아갔다. 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봤다.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건 새삼 처음인 것 같았다. 뒷모습이라는 건 보여주지 않으려 하거나 잘 보지 않게 된다. 거울을 봐도 거울에 비친 나의 정면을 보려고 하지 뒷모습을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친구에게 왜 이 먼 곳까지 샤워를 하러 왔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내일이라도 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날 밤은 거의 잠들지 못했다. 간이침대로 와서 눈을 붙였지만 생각이 끊이지 않고 이어 붙어서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았지만 눈을 뜬 느낌. 잠이 들었지만 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어머니와 교대할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조금 일찍 왔다.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집에 와서 이불 위에 그대로 뻗어 잠들어 버렸다. 두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갔다. 전기면도기로 대충 수염만 깎고 더러운 얼굴에 그대로 로션만 바르고 집을 나섰다. 오후가 되어서 친구에게 어제 잘 들어갔냐고 문자를 보냈다. 친구는 바쁜지 답장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문자가 왔다. 문자는 황당했다. 친구는 어제 병원에 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문자로 병원이 있는 이곳에 무슨 일이 있어서 왔다가 샤워만 하고 갔냐니까 친구는 이쪽으로 올 일이 없다고 했고, 무슨 샤워를 하러 병원까지 가느냐고 했다. 주말에 병원에 갈 테니까 아버지 병간호나 잘하라고 했다.


나는 밤에 도대체 누구와 이야기를 한 것일까. 나의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기억이다. 꿈이거나 허상이라고 하기에는 감촉과 느낌이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정말 내가 친구와 이야기를 했는지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의 대변에서 장기가 딸려 나온다고 했다. 곧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수속 절차를 밟고 장례식장을 잡고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고, 누군가 죽으면 그 뒤에 따르는 서류가 많다. 서류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곡차곡 앞에 나타난다. 그걸 정리하고 수순을 밟는데 시간이 걸린다.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오면 인사를 하고 부의금을 계산하고. 내내 혹독하게 춥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은 몹시 날이 포근했다.


후에 생각해보면 내가 친구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힘듦 때문에 그만 아버지에게 이벤트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그 말을 친구에게 하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버지가 병이 호전되어서 퇴원을 한다고 해도 다시 원래의 제대로 된 생활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것과 살아있는 것은 다르다. 살고 있되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안다.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그런 말을 할까. 하지만 고통이라는 건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다. 죽으면 아프다던가, 슬프다던가 미칠 것 같은 두려움조차 느낄 수 없다. 고통을 매일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 느끼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닐까.


내가 대화를 했다고 착각하는 그 친구는 지독하게 어두운 어둠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데리고 가기 전에 나에게 먼저 와서 나의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염탐을 하고 관찰해서 빌미를 주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하게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건 어떤 식으로든 모두에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 수는 없다. 아버지의 죽음은 적어도 나에게 어떤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죽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수는 없다. 샤워실에서 만난 것은 친구가 아닌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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