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아 양념통닭


그래, 카나리아 통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는 몇 군데의 아지트 같은 곳이 있었다. 그중에 한 곳이 카나리아 치킨집이었다. 구역전 시장의 입구에 있는 치킨집으로 합기도를 다니다가 형들을 따라 들어가게 되면서 생맥주와 치킨의 조합을 알아 버렸다. 그 후 우리는 지치지 않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카나리아 통닭집에서 모여 양념통닭을 뜯으며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지치지 않는 것에는 정말 지치지 않았다. 열심히 했다.


합기도 도장에 다니게 된 것은, 사진부였는데 암실에서 선배들에게 혼나고 정리를 하고 늦은 밤 집으로 오는데 깡패 3명을 만났다. 있는 돈을 달라던 깡패, 같지 않은 양아치들. 골목이었고 가로등도 없는 그런 으스스한 골목에서 맞닥뜨렸다. 나는 돈이 없는 대신 카메라가 있었다. 늘 들고 다니던 카메라. 그 카메라를 지키지 위해 고슴도치처럼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누구나 집 장롱 속에 있는 카메라. 아버지의 카메라. 아버지는 이 카메라로 어린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많이도 담았다. 가난해도 사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아버지, 의 카메라는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그때 지켜낸 올림푸스 카메라를 아직도 들고 다닌다.


자고 일어났더니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고 며칠 지나니 부어서 동그란 얼굴 한쪽이 네모네모가 되어있었다. 합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속상했던 어머니가 도장에 보내주었다. 합기도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척도가 되었다. 대신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21시까지 자율학습. 합기도 도장 22시 도착. 한 시간 정규 발차기. 01시까지 발차기 연습 겸 놀다가 집으로 와서 그대로 뻗음. 학교에서도 뻗음. 점심시간에도 밥만 먹고 뻗음. 쉬는 시간 뻗음. 한문 시간 뻗음. 불어 시간 뻗음. 자율학습시간에 이어폰으로 음악 들음. 22시 도장 도착. 01시까지, 반복, 반복. 하지만 합기도는 너무 재미있었다.


어느 날 옆을 보니 어랍쇼, 친구 녀석들까지 합기도에 합류. 같이 발차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전부 하얀 띠를 매고 열심히 발차기를 했다. 우리는 아니지만 특훈이라 불리는 특수 훈련반에도 끼여 주말에는 요즘 조깅을 하는 강변으로 가서 강바닥에 그대로 낙법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죽기 살기로 했던 것 같다. 여름이라 아스콘이 이글이글한데 맨발로 구보를 하고 며칠 지나니 발바닥이 전부 벗겨졌다. 관장님은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학교 밖에서 듣는 칭찬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 합기도에 같이 다니는 형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이 카나리아 통닭집이었다. 토요일 저녁 맥주는 꿀맛이고, 양념 통닭은 튀겨서 바로 양념을 입혀 그대로 바로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통닭은 식어도 맛있다지만 뜨거울 때 먹는 그 맛이 있다. 단짠단짠처럼 뜨거운 양념치킨을 입에 넣어 후후 하며 먹고 차가운 생맥주를 들이켜는 맛. 그리하여 우리의 단골집이 되었다. 3년을 그렇게 일주일에 몇 번씩 다녔다.


카나리아 통닭집 구조를 설명하자면(잘 안 되겠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네 치킨집처럼 문 바로 옆에서 닭을 튀긴다. 그리고 카운터도 겸한다. 거기서 양념도 비빈다. 그런 바를 지나 들어가면 테이블이 3개가 있는 작은 홀이 나온다. 두세 평 정도로 작다. 홀에는 작은 어항이 있고 그곳에는 금붕어가 세 마리인가 있다. 어항 속 금붕어를 보는 재미가 있다. 구피나 열대어를 키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어항 속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저 보게 된다. 세상에는 그렇게 그저 보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기쁨을 준다. 그렇게 멍 하게 보고 있으면 맥주가 나온다. 앉는 소파는 싸구려 가죽으로 덮인 소파인데 쿠션감이 좋고 편안하다. 누군가 술이 되어서 한쪽을 쥐 파먹듯 뜯어 놨다.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솜을 끄집어내는 재미를 아는 녀석들은 자꾸 그 자리에 앉으려 한다.


자주 가다 보니 생일을 전부 카나리아 통닭집에서 하게 되었다. 인원이 많으면 주인아저씨와 아줌마는 방을 내주었다. 홀의 테이블이 있는 곳에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안방이 나오는 그런 구조다. 방이 두 개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 대략 8, 9명 정도가 밥상을 놓고 빙 둘러앉아서 양념통닭과 후라이드 몇 마리씩 놓고 맥주와 함께 케이크에 불을 붙여 생일파티를 했다. 그리고 케이크는 반이나 잘라 카나리아의 7살 아들내미에게 덜어 주었다. 귀여운 녀석으로 우리는 그 녀석의 사진도 찍어서 인화를 해주고 액자도 만들어 줬다. 그러면 주인아주머니가 너무 좋아했다. 생일을 하면 통닭 이외에도 주인아주머니가 만든 잡채나 요리도 해줬다. 그래서 안 갈 수가 없었다. 우리와 교류를 했던 XX여고 문예부 애들은 아들내미에게 그림책도 주고, 동화도 읽어 주면서 아들내미와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인집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우리가 오면 몹시 좋아했다. 아들내미는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아서 노는 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 도대체 공부는 지지리도 하지 않았구나.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조카나 동네의 친한 초딩들에게는 이왕 하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 엄마 아빠를 보면, 사는데 수학이니 자연과학이니 물리 같은 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혹시 이런 질문받아본 사람이 있을까. 공부한 거 생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왜 열심히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1차적인 도움은 없을지 모른다. 수학이라든가, 그러니까 우리가 살면서 사인이니 코사인이니 근의 공식 같은 것들은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놀고 싶어도 참고 앉아서 수업을 듣고 책을 보는 훈련을 하게 된다. 어른이 되면 일을 해야 하는데 사회에서 일을 하게 되면 공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하기 싫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초등 6년, 중고등 6년, 대학교 2년에서 4년, 의대라면 좀 더 해서 6년 정도 하면서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도망가고 싶어도 앉아서 했던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 훈련의 결과가 생활에 나온다. 일을 하다가 도망가고 싶다고 나 오늘 안 할래, 하며 놀러 가버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특히 창작을 하는 일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매번 창작이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에 글을 쓰던, 그림을 그리던, 작곡을 하던, 그 어떤 창작을 할 때 엉덩이를 붙이고 그 일에 매달려야 한다. 그 훈련을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면서 습득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한 사람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더 집중적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다. 그걸 확장하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나의 실패 아닌 실패는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시절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와는 등을 지고 지낸 것 같다. 공부는 못해도 된다지만 나는 이왕 하는 공부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낫다고 본다. 성적이 안 좋으면 어때. 그 말도 맞지만 이왕 성적으로 나를 보여야 한다면, 학창 시절에 성적이 좋은 게 낫다고 본다. 그리고 양념 치킨을 좋아하는 시기도 딱 그때뿐이니까 먹을 때는 맛있게 먹자.


근래에 조깅을 하고 오다가 카나리아가 있던 그곳으로 돌아왔다. 건물은 아직 있지만 폐허가 되어 있었다. 언제 허물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질지 모른다. 카나리아는 졸업 후에도 계속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 시간 훌쩍 지나서 가보니 카나리아는 사라졌다. 형태가 있던, 형태가 없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진다. 그러면서 점점 이 세계에서 카나리아 치킨도 하나둘씩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도 검색을 해보면 아직도 구석구석에서 열심히 양념을 바르고 후라이드를 튀기는 카나리아 치킨집이 있다. 힘내 주십시오. 아무래도 우리는 그때 그렇게 먹은 카나리아 양념치킨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