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눈과 귀와 몸으로 스치는 것들에 대해서 적어본다. 적기 전에 미리 호러블 하거나 낙관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일과 생활에 비관하지는 않지만 낙관하지도 않는다. 반드시 행복을 좇지도 않는다. 행복 노동자보다는 덜 불행하면 그만이다. 라는 게 언제나 나의 입장이다.


요즘은 속보라는 말에 무뎌졌다. 속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속보다. 속보가 매일 같이 뜨는, 요즘 같은 시기가 또 있었을까. 매일 기가 막히는 사건사고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것에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많아졌다. 인터넷이 발달해서 그런 거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근간의 매일같이 쏟아지는 속보는 5, 6년 전 그때에도 인터넷이나 와이파이가 발전해 있었지만 매일 속보가 터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속보가 현관문 앞에 버려진 피자집 전단지처럼 보이는 건 요즘이라서 가능하지 싶다.


도대체 개를 왜 트럭에 매달아서 달리는 것이며 어째서 얼어붙은 호수에 묶어 두는지. 소시지에 낚싯바늘을 넣어서 공원에 뿌려 놓는지, 얼마나 비정상적인 인간이기에 이렇게 하는 걸까. 이런 인간들에게 법이라는 건 어째서 관대하기만 한 것일까.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법이 제대로 심판을 못하니까 슈퍼 빌런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악질 범죄자들에게 법의 효력이라는 건 제대로 닿지 않는다. 나는 구치소에서 2년 동안 근무를 해서 잘 안다. 출소를 할 때 다음 주에 또 올게, 하며 나간 재소자는 어김없이 그때에 다시 들어온다. 마블의 미드 시리즈 중 루크 케이지를 보면 “언제 법이 우리 편에 선 적이 있어요?”라고 루크 케이지가 말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이제 속보를 밥 먹다가 봐도 그저 광고처럼 보게 된다. 수잔 손탁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엘리베이터 안에 보통 층수 버튼이 문쪽에 있고, 또 벽면 쪽에도 층수 버튼이 있다. 내가 일하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는 3기가 가동하는데 한 엘리베이터는 야외가 다 보이는 통유리라 한쪽에만 층수 버튼이 있다. 그런데 층수 버튼을 누르고 계속 그 앞에 바짝 붙어 있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걸까. 문제는 다른 층수를 누르려고 좀 비켜달래도 마치 이스터 석상처럼 그 앞에 꼭 붙어 있다. 참 알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11층 버튼이 있는 자리에 늘 침이 말라 붙어 있었다. 매일 저녁에 거기에 침을 뱉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주의, 경고를 해도 변함없이 가래를 뱉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그 아주머니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 아주머니의 자식들이 사죄를 하고 어느 날부터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게 한 6개월 정도 지속됐다.


이건 코로나 전의 이야긴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에는 안에 있는 사람이 먼저 내린 다음에 올라타는 게 보통 엘리베이터의 예절 같은 것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면 내리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후다닥 타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한 두 명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일하는 건물 꼭대기층에 한 번은 다단계 회사가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문이 열리니까 우르르 타기에 저, 저 좀 내리고;; 까지 말했지만 그냥 삐, 소리가 날 때까지 타버린다. 할 수 없이 꼭대기까지 그대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일하는 건물 같은 층에 가끔 이야기를 하는 사장님이 있는데 몹시 착하다. 사람들에게 싹싹하고, 삭삭하다가 맞는 말인가. 아무튼 좋은 사람인데 나에게 이런저런 공구가 많아서 자주 빌려 달라고 한다. 그래서 빌려주면 함흥차사다. 보통 일주일 정도 그냥 가지고 있다. 내가 사용할 일이 없어서 굳이 달라고 하지는 않는데 한 번 빌려 가면 바로 돌려주지 않는다. 특히 줄자 같은 경우는 꽤나 좋은 물건이라 이건 누구에게도 빌려주기 싫은데 빌려가서 쓰고 나면 자신의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버린다.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달라고 하면 어떤 재스처나 소리도 없이 꺼내서 준다. 그게 아마도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스타일인 것 같다. 스타일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천성이나 성격은 후천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스타일은 누군가 앞에서 나타나는 관념이라 쉽게 바뀔 수가 없다. 하지만 빌려간 물품을 쓰고는 바로 돌려주었으면.


조깅을 하다 보면 군데군데 산스장 같은 곳에서 몸을 푸는데, 공중화장실이 1분 정도만 걸어가면 닿는 저곳에 있는데 그냥 산스장 근처에서 소변을 보는 아버님'들'이 있다. 웃긴 건 이렇게 오줌을 갈겨 놓으면 여름이 되면 거기서 오줌 지린내가 심하게 난다. 폭염인 날에는 더없이 지독하다. 아이씨 욕이 정말.


오전에 커피를 투고하러 가는 길목에는 아주 좁은 골목을 하나 통과한다. 둘러가도 되지만 그 골목이 좋아서 내내 거기로 다니고 있다. 골목은 사람 3명이 지나가면 꽉 차는 그 정도. 그런데 오전 시간에 느닷없이 근처 휴대폰 대리점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있다. 3명이서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우고 나면 그 밑에 가래와 침이 홍수를 이룬다. 전자담배를 피우는데도 그렇게 가래와 침을 단전에서 끌어올려 뱉어야 한다니.


그래도 늘 복잡한 주차장에 비상식적으로 주차하는 인간은 아직 못 만났고, 층간소음 문제도 없고, 쓰레기를 내 앞에 버리는 인간도 없고, 빌려간 물건을 일단 다 받았고, 대기가 오염되고 있지만 방독면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고,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되지도 않았고, 소음 때문에 모두가 보청기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서 총을 구입하여 쏴대지도 않고, 지하자원의 고갈은 좀 시간이 남아있다.

조깅을 하면서 매일 보는 풍경인데 작년 이맘때와 똑같고, 3년 전 이맘때와. 5년 전 이맘때와 똑같다. 변화가 없다. 늘 이 구도에 이런 모습이다. 하지만 매일 다르다. 매일 바람이 다르고 구름이 다르고 반영이 다르다. 색감이 다르고 듣는 노래가 다르다. 달리다가 중간에 스쾃을 하는데 할 때마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 이 정도면 이제 괜찮지 않아?라고 할 법도 한데 할 때마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고, 플랭크는 할 때마다 중력의 힘을 너무나 느낀다.

가로등과 가로등 밑을 지나치는 사람과 벤츠와 강건네 아파트 단지와 인공광원과 작은 자연광의 별빛이 만들어낸 이런 사진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기묘하게도 다양한 컬러로 채색되어있지만 쓸쓸하고 고독하다.

한파였던 날이었는데 고양이가 야외에 나와서 웅크리고 있다. 길고양이는 늘 시선을 두게 만든다. 저들은 이렇게 추운 날 어디서 몸을 말고 잠이 드는 걸까. 고양이의 일생은 70%가 느슨한 잠으로 보내는데 이렇게 추워서야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일단 생존을 헤야 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인간보다 나은 심장을 가지고 있다. 작은 심장이 팔딱팔딱 빨리 뛰고 있다. 우리도 힘낼 테니 닝겐도 힘을 내봐,라고 한다. 고양이나 인간이나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디고 있다. 어디서 얼마나 잘 견디는지가 요즘의 관권이다.

이 도시는 95년도에 광역시가 되고 난 이후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과 집은 전부 철거를 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도시 전체가 30년에 걸쳐 리모델링되어서 낡고 보기 싫은 옛것들은 다 사라져 간다. 그래도 아직 구석으로 가면 지는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 이런 대비를 보는 건 언제나 좋다. 왜냐하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이런 곳을 많이 사진으로 남겨두었는데 이제는 그곳에 전부 새로운 건물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진으로만 남아있어서 아 이곳에 이런 집이 있었지, 하게 된다. 이 집도 허물 이지기 일보직전이다. 공포 유튜버들은 어서 출동해서 귀신 영상을 촬영하라고.

그렇게 돌아서 오다 보면 여기 동네도 예쁜 곳이 많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3월부터 겨울이 오기 직전까지 도로를 막고 매주 주말에 축제가 열린다. 축제는 다양하며 오래되어서 꽤나 즐길거리가 많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설치해 놓은 인공조명이 밤이면 반짝이지만 거리는 쓸쓸하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매일 저녁 복적 거리는 도로인데 언젠가 그런 모습을 또 보겠지.

이곳도 아직 골목이 남아있다. 80년대 지어진 집들이 데면데면 붙어있다. 80년대 2층 집에 산다고 하면 와 잘 사는 집 아들내미네, 같은 말을 들었다. 이층의 방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열심히 연애편지를 쓰고 방황했던 아이들은 지금은 다들 어른 중의 어른이 되어 있겠지. 그리고 명절에나 집을 한 번 찾을지도 모른다. 집의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 중고등학생이 되어서 그 옛날을 추억하고. 골목에서 친구를 큰 소리로 부르면 누군가가 야 이놈아 시끄럽다! 며 더 크게 소리치고. 골목에 기대어 친구를 기다리던 시간은 아직 골목에 그대로 있는 것만 같겠지.

그렇게 영차영차 달려서 들어오면 하루의 달리기가 끝이 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매일 느끼는 감촉은 다르기 때문에 조금은 특별하다. 오늘은 플랭크를 하면 몇 분부터 몸이 떨릴까, 이런 생각을 달리기 전에 한다. 좀 웃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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