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내가 중학교 때쯤 되어 야구 오락이 나왔다. 스포츠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오락도 그런 쪽으로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 야구오락은 워낙 중독성이 강해 학교만 파하면 오락실로 달려가곤 했었다. 내 성적이 갑자기 곤두박질친 이유 중 3할은 그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팀을 모델로 했던 그 오락은 실제 상황과 비슷하게 세이부 라이언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가장 강했다. 하지만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소위 용병이라 부르는 외국인 선수를 어떻게 뽑느냐는 것. 2인용을 할 땐 각각 두명씩의 외국인선수를 고를 수 있었고, 대부분이 타자를 뽑았다. 그 타자들은 쳤다하면 거의 홈런을 쳤으니까. 투수들은 다 마구를 던졌는데 200킬로의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 공이 활활 타오르는 투수, 공이 크게 원을 그리는 투수 등이 있었지만 그 효력은 1이닝밖에 지속되지 않았기에 투수를 뽑는 건 그다지 실익이 없었다.

메이져리그 야구를 열심히 보다보니 그 오락 생각이 난다. 특히 외국인선수들과 닮은 선수들이 메이져리그에 몇명 있는 것 같아 한번 써본다.

-외국인선수 중 가장 선호되는 선수가 있었다. 매우 뚱뚱하지만 타율이 4할9푼9리에 홈런이 50개이고, 게다가 발도 무지하게 빠른 최고의 선수였다. 그 선수는 꼭 데이비드 오티즈를 닮았다. 올시즌 홈런을 마흔세개나 때렸고, 타점도 130점에 육박하며 전성기를 누리는 오티즈는 매니 라미레즈와 함께 보스톤을 이끌고 있는데, 오락과 다른 점은 그가 왼쪽타자라는 점, 흑인이고 발이 그리 빠른 선수가 아니라는 점 등이지만, 파괴력이라든지 타석에서 압도하는 포쓰는 거의 비슷하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오티즈를 닮은 선수를 빼앗긴 경우, 검은 피부의 외국인타자가 2순위로 뽑혔다. 타율이 4할8푼2리에 홈런 숫자도 꽤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선수는 여러모로 블라디미르 게레로를 빼닮았다. 어느 공이나 다 친다는 점, 쳤다하면 장타가 나온다는 점, 그리고 흑인이라는 점 등이 닮은 점이지만 외국인선수가 좌타자인 데 반해 게레로는 우타자란 게 다른 점이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선수 중 키가 무지하게 크고 빼빼마른 선수가 있었다. 키가 큰만큼 달리기도 잘하고 수비력도 좋은데, 타격이 외국인 선수 중 쳐진다는 게 문제. 이 선수는 꼭 엘에이 다저스의 제이슨 워스를 닮았다. 타율도 별로 안좋으면서도  트레이시 감독의 신임을 희한하게 받고 있는 워스는 키가 2미터에 달하는 장신. 몸매도 그렇지만 타력이 형편없다는 점 등이 둘의 닮은점이다. 게다가 워스는 발도 그리 빠른 선수가 아니다.

-키가 작고 머리는 커서 삼등신인 선수가 있다. 발이 무지하게 빠르고 장타력도 꽤 있는 편이지만, 배트가 짧아서 바깥쪽 볼에 쥐약이다. 이 선수는 누굴 닮았을까. 애틀란타의 라파엘 퍼칼과 판박이가 아닐까.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작년 플레이오프에서 결승 3점 홈런을 치기도 했던 퍼칼, 그를 보면 1번타자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공을 던지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마구 투수는 존 스몰츠를 생각나게 한다. 부상으로 2년간 마무리투수를 했긴 하지만, 스몰츠는 역시 선발체질. 94년인가 24승을 하면서 싸이영상을 탈 때 스몰츠는 거의 언히터블이었다. 오락에서도 불이 타는 공을 던지면 어느 타자도 그 공을 치지 못했다. 올시즌 스몰츠는 선발로 복귀, 3점 이하의 방어율에 14승을 거두며 애틀란타를 지구우승으로 이끌고 있다.

-공을 던지면 공이 원을 그리며 날라가고, 타자들은 속수무책인 마구투수. 그는 꼭 보스톤의 팀 웨이크필드 같다. 시속 60마일대에서 형성되는 너클볼에 타자들은 헛스윙을 연발하며, 삼진을 당하고 들어갈 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올시즌 15승을 올린 웨이크필드는 양키스전 완투승을 비롯해 최근 4경기를 전부 완투 비슷하게 던지는 괴력을 발휘했는데, 사실 너클볼은 던지는 데 힘이 안들어 15회까지도 던질 수 있을 듯하다. 메이져리그에서 너클볼로 일가를 이룬 웨이크필드, 그 비법을 혹시 전자오락에서 배운 건 아닐런지.

친구들과 그 오락을 많이 하곤 했었는데 특히나 제훈이는 내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제훈이와 다시 만나서 야구오락을 할 수 있는 그날이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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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는 박찬호(물론 전성기의 찬호를 말한다)만큼 위력적인 볼을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다만 찬호보다 제구력이 좀 더 뛰어난 게 장점이라면 장점. 하지만 김선우에게는 그 유일한 장점을 상쇄시킬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는 지나치게 소심했다. 타자와 맞서기보다는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하다 볼넷을 남발했으니, 공의 위력도 없는 애가 스트라이크도 못던지면 어떻게 아웃카운트를 잡는단 말인가. 연습투구는 잘하는데 마운드에만 서면 덜덜 떨었고, 보스톤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2002년, 라이벌이자 웬수(한번 싸운 적이 있다)인 토모 오카를 쫓아 몬트리올(현 워싱턴)에 온 그는 약팀이니만큼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줄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시즌 막판 선발로 등판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대로 잘 던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심각한 문제를 또하나 노출하는데, 그건 바로 왜소한 체격답게 체력이 약하다는 거였다. 4회까지 잘 막고한회만 더 막으면 승리투수가 되는 시기에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이유로 마운드를 내려와야 할 경우가 두번이나 있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완봉 직전까지 갔다가 그런 모습을 또 보였기에,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선발보다는 중간계투가 더 어울리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올 시즌에도 승리를 목전에 둔 4회 투아웃에 부상으로 마운드를 내려가는 일이 한번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품었던 2003년, 라이벌인 오카가 풀타임 선발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는 마이너에서 시즌을 시작하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열심히 하니 결국 기회가 왔다. 하지만 그는 모처럼 찾아온 그 기회를 날리고 말았는데, 나도 TV로 봤던 그 경기에서 김선우는 정말 해도 너무했다.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하다 볼넷을 내주고, 결국 만루를 만들어주고. 프랭크 로빈슨 감독은 1회부터 거구를 이끌고 마운드에 올라가야 했다. 1회를 1실점으로 비교적 잘 막았지만, 2회도 같은 패턴으로 실점을 거듭하자 감독은 가차없이 김선우를 내렸고, 기자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 "걔가 투수냐. 그런 애가 메이져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 언론들은 말이 심했다고 난리를 쳤지만, 내가 감독이어도 그랬을 것 같다.

그 후 2년간은 김선우의 시련기였다. 그를 나쁘게 본 감독 밑에서 있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중간계투로 내보냈다 갑자기 선발로 던지게 하고, 잘 던지는데 4회에 빼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오카가 감독에게 밉보여 밀워키로 갔지만, 그의 자리는 영 불안했다. 그랬던 선우가 콜로라도로 오게 된 것은 새로운 기회였다. 애런 쿡과 김병현을 제외하곤 선발진의 방어율이 다들 5점대인 개판 일보직전의 마운드,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현재 5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구위는 1, 2선발급은 결코 아니다. 구속이 과거보다 빨라졌고, 90개를 넘겨도 스피드가 변함이 없을 정도로 스태미너도 향상되었지만, 풀타임 선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는 타자들을 피하는 소극적인 투구에서 벗어나 직구로 정면승부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허들 감독의 눈에 들었고, 투구수 관리를 잘해가며 5이닝, 6이닝을 버텨줌으로써 심심치 않게 승리를 따내고 있다. 인터넷에 의하면 허들 감독이 남은 경기에서 김선우의 선발출장을 보장했다는데, 그렇다면 3-4경기 정도에서 더 선발로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경기에서 제발 좀 잘 던져서 내년 시즌에는 선발로 한시즌을 시작했으면 한다. 선발로 남느냐 마느냐를 놓고 시즌 내내 서바이벌 게임만 하고 있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니까 답답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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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박찬호가 풀타임 선발이 되었을 때, 내 관심은 오직 박찬호가 잘하나 못하나였다. 그가 잘하면 재미있는 경기고 못하면 아닌 거였다. 이듬해부터 메이져리그 중계권은 인천방송으로 넘어갔고, KBS와 달리 방송에 내보낼 콘텐츠가 부족했던 인천방송에서는 박찬호가 안나온 경기도 시시때때로 중계해 줬다. 그 경기들을 보면서 난 메이져리그의 재미를 느꼈고, 지금은 거기서 뛰는 선수 대부분을 알아볼 정도의 팬(매니아라고 하긴 부족하다)이 되었다. 그때 알았다. 박찬호가 나왔을 때는 야구 경기의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는 걸. 박찬호 한사람에게 매몰되어 수많은 멋진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웬일인지 겁나게 일찍 일어난 오늘, 일어난 김에 맨유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봤다. 경기 시작 15분께부터 봤으니 거의 다 본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수시로 "박지성이 나왔으면" 하고 바라는 거다. 솔직히 난 그게 짜증이 났다. 박지성이 나오면 더 좋겠지만, 못나오더라도 다른 유명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럼에도 중계팀은 아주 집요해, 전반전에 수비수 하나가 부상으로 실려나가니까 "아, 이런 식이면 박지성이 뛸 수도 있겠네요"라며 반색을 하고, 나중에 루니가-그 유명한 웨인 루니 말이다-어이없는 행동으로 퇴장을 당하자 "체력이 좋은 박지성같은 선수가 들어올 수도 있겠다"고 한다. 박지성이 뛸 수만 있다면 "다른 선수의 불행은 곧 우리의 행복"이 된다는 그런 심리는 스포츠기자들로 하여금 박지성의 라이벌 크리스티얀 호나우두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박지성에게 기회가 왔다"는 반윤리적인 말까지 하게 만들었다. 중계팀의 바람대로 박지성은 후반 10분을 남기고 교체투입되었지만, 루니의 퇴장공백을 메우느라 오버를 한 맨유 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된 탓에 이렇다할 챤스를 잡지 못한 채 경기가 끝나고 만다.

박지성이 명문구단인 맨유에 갔을 때, 치열한 주전경쟁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긱스나 호나우두에 비해 박지성이 아직은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맨유를 택한 모험정신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박지성은 충분히 해낼 능력을 가진 선수다. 문제는 언론과 팬들이다. 그가 영국에 간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주전에서 탈락하느니 하면서 그의 출전에만 촛점을 맞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2003년 네덜란드에 갔을 때, 바로 주전 자리를 꿰찬 이영표와 달리 박지성은 후보였다. 포루투칼과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넣었던 그가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열심히 한 결과 박지성은 당당한 주전이 되었고, 챔피언스리그의 활약에 힘입어 특급선수 부럽지 않은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프리미어리그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고, 챔피언스리그까지 합치면 남은 경기는 아직도 많다. 그 과정에서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며, 문제는 오히려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는가이다.

박찬호가 메이져리그를 우리 안방으로 가져왔듯이, 박지성은 축구팬들로 하여금 꿈에서나 그리던 프리미어리그를 볼 수 있게 해줬다 (그전에도 중계를 안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매주마다 보게 된 건 그의 공로다). 박지성이 나오면 더 좋겠지만, 안나오면 안나온대로 경기 자체를 즐겼으면 좋겠다. 그게 프리미어리그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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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9-1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유의 경기를 보는것만으로도 흥분됩니다. 무엇보다 공수의 빠른 전환과 엄청난 압박이 압권이더군요. 저도 박지성이 나오기를 내심 바라지만 반니, 루니, 긱스, 호나우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더군요. 프리미어리그의 중계활성이 극심한 수준차를 보이는 K 리그의 위축을 가져오는 것은 좀 안타깝네요.

날개 2005-09-1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가 축구광이라 꼬박꼬박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본다지요.. 전 옆에서 그냥 슬쩍~ 근데, 울 나라 경기와는 달리 무지하게 박진감이 있더군요..

니콜키크더만 2005-09-1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아, 부군께서 축구광이시군요! 날개님도 축구 웬만큼 좋아하시죠? 원래 축구는 같이보면 더 재밌잖아요
잉크냄새님/님은 참 바람직한 팬이시군요. 전 루니의 플레이에 매료되었었는데, 오늘 퇴장은 좀 아쉽더라구요. 그리고 프리미어 때문에 케이리그가 죽는 건 저 역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메이져리그 때문에 국내야구가 몇년간 죽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케이리그도 다시 살아날 겁니다.
 

이미 물건너간 얘기니까 이제는 해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우리 소장이 부소장과 어디론가 갔다오는 일이 잦았다. 그런 일이 없던 건 아니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갔다오고 나면 소장의 얼굴에 근심걱정이 많은 듯했다. 속으로 난 ‘바람 피운 거 들켰나?’라는 생각부터 ‘뭔가 큰 한탕을 하려나’까지 다양한 생각들을 했지만, 소장도 부소장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한달쯤 그러다가, 부소장이 우리를 데리고 술을 산 적이 있다. 소장과 달리 부소장은 삼겹살 같은 걸 사도 “마음껏 먹으라”고 해주는 후덕한 사람이라 허리띠를 풀고 양껏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난 그날 고기를 별로 먹지 못했다. 부소장이 해주는 얘기가 참으로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모 기관에서 자기들 소유로 된 땅을 가지고 있다. 그 땅은 위치로 봐서는 노른자위지만 그린벨트로 묶여있어서 별 소용이 없는 땅이었다. 그런데 힘이 있는 공무원들이 몇단계를 거쳐서 그 땅의 그린벨트를 풀고자 했다. 현재 시세만 해도 200억에 달하는 그 땅은 그린벨트가 풀린다면 최소한 1,000억은 될 터였다. 근처 땅의 시세를 부동산업자들에게 문의한 결과도 그 가설을 입증해 줬다. 그들의 제안은 우리가 그 땅을 300억에 사고, 그 후에 그린벨트를 풀어주겠다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현금 70억. 그것만 준다면 우리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릴 수가 있다. 당연히 하겠다고 할 거지만 그게 불법인 것이 문제다. 이게 새나가기만 한다면 그들은 물론 우리 소장도 쇠고랑을 차야 할 터였으니까, 고민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소장은 할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700억이면 부채 다 갚고 사업도 정리한 채 편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그쪽에서는 300억이 들어있는 통장 사본을 요구했다. 회사와 건물을 잡히고 대출을 받고 어쩌고 하면 300억은 마련할 수 있단다(능력도 좋지). 그런데, 그쪽에서는 사본에 소장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걸 요구했고, 소장은 이름은 가리고 주겠다고 버텼다. 우습게도, 거기서 협상이 결렬됐다. 그 뒤 소장은 한동안 멍한 상태였고, 우리한테 히스테리를 부린 것도 상당부분 그 탓이라는 게 부소장의 설명이다. 물론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사장의 성격은 결코 좋지 않았기에, 부소장이 소장한테 밥을 몇 번 얻어먹은 게 아닌가 의심이 갔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안하기 잘했다. 700억이란 돈이 큰만큼 위험성이 너무도 컸다. 몇단계를 거치는 허가과정에서 잘못될 수도 있고, 우리 소장 이전에 접촉한 사람(아마 있을 것이다)이 밀고할 수도 있다. 그랬다면 난 영락없이 직장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700억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삼겹살을 먹지 못하게 할만큼 매력적이다. 우리 소장 말고 다른 누군가가 그 돈을 차지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더더욱 안타까워진다. 부소장 말로는 아직까지 그곳의 그린벨트가 풀리지 않았다는데, 앞으로는 신문을 볼 때 그린벨트가 풀렸다는 기사만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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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9-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기일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저런 류의 기사 많이 나잖아요...ㅡ.ㅡ

2005-09-13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콜키크더만 2005-09-13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사기는 결코 아니라는 게 부소장의 말이네요. 물론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일이 성사되고 난 뒤, 즉 그린벨트가 해제된 뒤에 돈을 건내는 거니 사기는 아닐 겁니다.

잉크냄새 2005-09-1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읽은 가장 큰 액수입니다.

니콜키크더만 2005-09-15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하핫, 그런가요? 조 단위 쓰신 분이 아직 없나보군요
 

 

5억짜리 일감이 있었다. 관공서 일인데, 늘 거래하는 회사에서 우리에게 하청을 준 것. 그 공사를 얻기위해 로비도 꽤 했고, 일이 성사된 다음에는 그런 거래에서 당연히 줘야 할 커미션을 그 회사 사람들에게 지급했다. 술자리에서의 향응도 당연히 뒤따랐고.

날 포함해서 우리 직원들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설계가 다 되었을 시점에서, 그 관공서가 추진하던 일을 없던 걸로 하기로 했다. 예산이 안나와서 그랬는지 높은 분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난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했던 일들이 다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 이 경우 우리는 잘해야 원래 받기로 했던 돈의 20-40%밖에 챙기지 못한다.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이 일을 위해 찔러 준 커미션과 향응은 모두 헛것이 되버렸다. 이 경우 “미안하니까 그때 받은 로비자금과 커미션을 돌려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런 나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이 바닥에서 버티지 못할 테니까.

돈을 받을 길이 없는 건 아니다. 소송을 하면 된다. 하지만 그 회사와 오랜 기간 거래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감히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다. 그저 술이나 마시면서 쓰린 속을 푸는 수밖에. 일년에 한번 정도 일어나는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사기를 땅 끝으로 이끌지만,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게 아니겠는가.

가끔은 건축주들이 말썽을 부리는 수도 있다. 건축이라는 건 땅 위에 구조물을 세우는 건데, 그걸 무슨 초등학생들이 공작시간에 만드는 집 같은 걸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는 건물을 지어 달라고 한다. 최근에 만난 건축주는 호수 옆에 건물을 세운다면서 돌고래 모양의 건축물을 요구해 애를 먹였다. 건축의 최대 사명은, 최소한 나는, 튼튼하게 짓는 거라고 생각한다. 모양은 그 다음이며, 아름다움을 위해서 안전을 희생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 건축주는 돌고래를 거듭 주장했는데, 정 그렇게 돌고래가 좋으면 집 안에 돌고래를 한 마리 키울 일이지 왜 우리를 괴롭히는가. 그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한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짜증나는 시간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는 우리에게 일을 안맡기기로 했지만, 내가 알기에 그를 위해 돌고래 건물을 지어줄 사람은 이 땅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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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9-1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축일 하시는군요..^^
에.. 근데, 돌고래 모양 진짜로 안되나요? 흐흐~

니콜키크더만 2005-09-1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날개님 안녕하세요. 기린 모양은 되는데 돌고래는 좀 힘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