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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평점 :
권터 그라스가 쓴 양철북은 노벨상을 탄 유명작가의 특징적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난해한 문체, 뭔가 심오한 사상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그러나 뭔지는 모르겠는 난해한 내용 등등. 평소의 삶이 그런지라 심각한 것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난 무려 20여일간 사투를 벌인 끝에 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는데, 느낌을 말하라면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중요한 건 '다 읽었다'는 것.
그라스가 이 책을 출간한 건 1959년인데 노벨상을 받은 건 1999년, 무려 40년만이다. 요즘 와서야 이 책의 문학적 가치가 재평가된 것일까? 그게 아니다.
[그라스가 활동한 시기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때였고... 그런 와중에 좌파적 성향에 기울어 있는 그라스의 손을 들어 준다면 본의 아니게 사회주의권 세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바가 될 테니 한림원으로서도 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가 완전히 몰락해 체제에 위협이 전혀 되지 않는 90년대에 그라스가 상을 탔다는 것이다. 노벨상도 이렇게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인가보다.
"<양철북>을 이제 읽냐? 난 중학교 때 읽었다"고 말하는 회사동료 P에게 물어봤다.
"너 오스카가 왜 성장을 안한 줄 알아?"
P의 대답, "어른들의 부조리를 보고 어른이 되기를 포기한 거지"
과연 그럴까. P에게 다음 구절을 보여주자 그는 매우 민망해하면서 “그게 그거잖아!”라고 우겨댔다.
"나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사나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긴 채 장사꾼이 되어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84쪽)"
참고로 그라스가 자라지 않는 오스카를 모델로 한 건, 그 당시 잔뜩 뒤틀린 독일 사회를 표현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단다. P를 보면서 회의에 빠지게 된다. 읽으면 뭐하나. 나중에 기억도 못할 텐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읽었다'는 걸 자랑할 수 있다는 것 말고 어떤 유용성이 있는 걸까.
이 책에 담긴 심오한 사상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을 얘기하겠다. 난장이인 오스카가 여러 여자에게 소위 '껄떡거리는' 장면에서 난 맘이 그리 좋지 않았다. 비단 이 책에서뿐 아니라, <고양이를 부탁해>란 영화에서 뇌성마비를 앓는 애가 자신의 소설을 타이프쳐주는 배두나를 좋아하는 장면에서도 맘이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 난장이나 뇌성마비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고, 내가 이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그러는 게 당연한 건데. 하지만 난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좋아하는 장면만 나오면 맘이 불편한 걸까. 장애인은 장애인만 사귀어야 한다고 머릿속에 박혀있는 탓일까. 말로는 "장애인을 사랑하자"고 하지만, 난 장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라고 말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아닌, 그저 동정하고 불쌍히 여겨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머리와 가슴의 괴리, 그게 내 참모습이다. 그래서 난 장애인들이 특수학교에 격리되는 걸 반대한다. 어려서부터 내가 장애인들과 어울려 지내고,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면 이렇게 비뚤어진 인간으로 자라지 않았을 텐데.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삶을 그린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것도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장애인이 얼마나 활동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 바, 대부분의 장애인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지하철 역에서 장애인이 떨어져 죽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는 한국 사회는 그래서 야만적인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