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는 박찬호(물론 전성기의 찬호를 말한다)만큼 위력적인 볼을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다만 찬호보다 제구력이 좀 더 뛰어난 게 장점이라면 장점. 하지만 김선우에게는 그 유일한 장점을 상쇄시킬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는 지나치게 소심했다. 타자와 맞서기보다는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하다 볼넷을 남발했으니, 공의 위력도 없는 애가 스트라이크도 못던지면 어떻게 아웃카운트를 잡는단 말인가. 연습투구는 잘하는데 마운드에만 서면 덜덜 떨었고, 보스톤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2002년, 라이벌이자 웬수(한번 싸운 적이 있다)인 토모 오카를 쫓아 몬트리올(현 워싱턴)에 온 그는 약팀이니만큼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줄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시즌 막판 선발로 등판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대로 잘 던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심각한 문제를 또하나 노출하는데, 그건 바로 왜소한 체격답게 체력이 약하다는 거였다. 4회까지 잘 막고한회만 더 막으면 승리투수가 되는 시기에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이유로 마운드를 내려와야 할 경우가 두번이나 있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완봉 직전까지 갔다가 그런 모습을 또 보였기에,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선발보다는 중간계투가 더 어울리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올 시즌에도 승리를 목전에 둔 4회 투아웃에 부상으로 마운드를 내려가는 일이 한번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품었던 2003년, 라이벌인 오카가 풀타임 선발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는 마이너에서 시즌을 시작하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열심히 하니 결국 기회가 왔다. 하지만 그는 모처럼 찾아온 그 기회를 날리고 말았는데, 나도 TV로 봤던 그 경기에서 김선우는 정말 해도 너무했다.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하다 볼넷을 내주고, 결국 만루를 만들어주고. 프랭크 로빈슨 감독은 1회부터 거구를 이끌고 마운드에 올라가야 했다. 1회를 1실점으로 비교적 잘 막았지만, 2회도 같은 패턴으로 실점을 거듭하자 감독은 가차없이 김선우를 내렸고, 기자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 "걔가 투수냐. 그런 애가 메이져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 언론들은 말이 심했다고 난리를 쳤지만, 내가 감독이어도 그랬을 것 같다.

그 후 2년간은 김선우의 시련기였다. 그를 나쁘게 본 감독 밑에서 있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중간계투로 내보냈다 갑자기 선발로 던지게 하고, 잘 던지는데 4회에 빼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오카가 감독에게 밉보여 밀워키로 갔지만, 그의 자리는 영 불안했다. 그랬던 선우가 콜로라도로 오게 된 것은 새로운 기회였다. 애런 쿡과 김병현을 제외하곤 선발진의 방어율이 다들 5점대인 개판 일보직전의 마운드,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현재 5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구위는 1, 2선발급은 결코 아니다. 구속이 과거보다 빨라졌고, 90개를 넘겨도 스피드가 변함이 없을 정도로 스태미너도 향상되었지만, 풀타임 선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는 타자들을 피하는 소극적인 투구에서 벗어나 직구로 정면승부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허들 감독의 눈에 들었고, 투구수 관리를 잘해가며 5이닝, 6이닝을 버텨줌으로써 심심치 않게 승리를 따내고 있다. 인터넷에 의하면 허들 감독이 남은 경기에서 김선우의 선발출장을 보장했다는데, 그렇다면 3-4경기 정도에서 더 선발로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경기에서 제발 좀 잘 던져서 내년 시즌에는 선발로 한시즌을 시작했으면 한다. 선발로 남느냐 마느냐를 놓고 시즌 내내 서바이벌 게임만 하고 있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니까 답답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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