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박찬호가 풀타임 선발이 되었을 때, 내 관심은 오직 박찬호가 잘하나 못하나였다. 그가 잘하면 재미있는 경기고 못하면 아닌 거였다. 이듬해부터 메이져리그 중계권은 인천방송으로 넘어갔고, KBS와 달리 방송에 내보낼 콘텐츠가 부족했던 인천방송에서는 박찬호가 안나온 경기도 시시때때로 중계해 줬다. 그 경기들을 보면서 난 메이져리그의 재미를 느꼈고, 지금은 거기서 뛰는 선수 대부분을 알아볼 정도의 팬(매니아라고 하긴 부족하다)이 되었다. 그때 알았다. 박찬호가 나왔을 때는 야구 경기의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는 걸. 박찬호 한사람에게 매몰되어 수많은 멋진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웬일인지 겁나게 일찍 일어난 오늘, 일어난 김에 맨유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봤다. 경기 시작 15분께부터 봤으니 거의 다 본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수시로 "박지성이 나왔으면" 하고 바라는 거다. 솔직히 난 그게 짜증이 났다. 박지성이 나오면 더 좋겠지만, 못나오더라도 다른 유명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럼에도 중계팀은 아주 집요해, 전반전에 수비수 하나가 부상으로 실려나가니까 "아, 이런 식이면 박지성이 뛸 수도 있겠네요"라며 반색을 하고, 나중에 루니가-그 유명한 웨인 루니 말이다-어이없는 행동으로 퇴장을 당하자 "체력이 좋은 박지성같은 선수가 들어올 수도 있겠다"고 한다. 박지성이 뛸 수만 있다면 "다른 선수의 불행은 곧 우리의 행복"이 된다는 그런 심리는 스포츠기자들로 하여금 박지성의 라이벌 크리스티얀 호나우두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박지성에게 기회가 왔다"는 반윤리적인 말까지 하게 만들었다. 중계팀의 바람대로 박지성은 후반 10분을 남기고 교체투입되었지만, 루니의 퇴장공백을 메우느라 오버를 한 맨유 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된 탓에 이렇다할 챤스를 잡지 못한 채 경기가 끝나고 만다.
박지성이 명문구단인 맨유에 갔을 때, 치열한 주전경쟁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긱스나 호나우두에 비해 박지성이 아직은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맨유를 택한 모험정신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박지성은 충분히 해낼 능력을 가진 선수다. 문제는 언론과 팬들이다. 그가 영국에 간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주전에서 탈락하느니 하면서 그의 출전에만 촛점을 맞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2003년 네덜란드에 갔을 때, 바로 주전 자리를 꿰찬 이영표와 달리 박지성은 후보였다. 포루투칼과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넣었던 그가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열심히 한 결과 박지성은 당당한 주전이 되었고, 챔피언스리그의 활약에 힘입어 특급선수 부럽지 않은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프리미어리그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고, 챔피언스리그까지 합치면 남은 경기는 아직도 많다. 그 과정에서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며, 문제는 오히려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는가이다.
박찬호가 메이져리그를 우리 안방으로 가져왔듯이, 박지성은 축구팬들로 하여금 꿈에서나 그리던 프리미어리그를 볼 수 있게 해줬다 (그전에도 중계를 안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매주마다 보게 된 건 그의 공로다). 박지성이 나오면 더 좋겠지만, 안나오면 안나온대로 경기 자체를 즐겼으면 좋겠다. 그게 프리미어리그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