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오른손투수가 던지는 변화구 중 슬라이더라는 게 있다.
던지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투수 손을 떠나고 나면 똑바로 날아가다 점점 왼쪽으로 휜다
오른쪽 타자라면 공이 오다가 점점 멀어지니 치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야구광이셨던 아버지는 늘 나한테 “슬라이더같은 사람이 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열세살 무렵엔 선동렬이 136킬로짜리 슬라이더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난 아버님이 선동렬같이 훌륭한 선수가 되라고 말씀하신 줄 알았다.
하지만 왜 하필 슬라이더일까?
선동렬이 던지던 155킬로짜리 직구가 아니라?
그 뜻을 아버지한테 여쭤보려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끝내 여쭙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대충 끼워맞춘다면
그건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좌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가 처음 투표한 것은 1992년 총선거였다.
그때 난 당연히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를 했다.
1997년에는 외환위기를 불러왔음에도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했다.
그러다 노무현이 나왔던 2002년 선거에서
난 처음으로 민주당을 찍었다.
나랑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게 그에게 투표하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노무현이 주창했던 가치들에 공감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고 스스로 생각해 본다.
이렇게나마 정치에 관심을 갖고 나니 더 이상 1번을 찍을 수가 없었다.
탄핵의 여파가 있던 2004년 총선 때는 당연히 2번을 찍었고
2007년에도 그랬다.
그리고 2008년 총선 때부터 진보신당으로 넘어갔다.
두달 전(이지만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지방선거 때도 난 진보신당을 찍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살펴본다면 보수적인 1번에서 진보적인 5번(혹은 4번)으로 점점 휘어지고 있으니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슬라이더처럼 사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4대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은평을에 장상씨를 공천한 민주당 역시 일말의 기대조차 걸 수 없는 정당임이 확인됐다.
사실 난 몇 년 전부터 어렴풋이나마 이걸 알고 있었지만
그놈의 사표방지 심리 때문에 일찍이 왼쪽으로 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는 “민노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는 협박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사표가 되더라도 내 소신을 펼치기로 했다.
아버님, 저는 지금 슬라이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근데 요즘 미국 투수들은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던지더군요.
제 삶이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