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쿠르니코바라는 선수가 있었다. 81년생, 이제 겨우 25세인 젊은 선수를 과거의 인물로 묘사하는 이유는 최근 몇년간 테니스코트에서 그녀의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빼어난 미모로 테니스계에 돌풍을 일으킨 쿠르니코바는 구름관중을 몰고다니는 최고의 스타였다. 하지만 미모에 비해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단 한차례의 그랜드슬램우승도, 심지어 투어대회 타이틀도 차지한 적이 없다. 관중들은 그녀가 서비스를 넣을 때마다 휘파람을 불면서 환호했지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테니스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은 그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5년 전 윔블던 결승에 오른 나탈리 토지아란 선수는 여자 선수들을 실력이 아닌 외모로 평가하는 테니스계의 현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지만, 안예쁜 축의 대표적인 선수였던 토지아의 말에 아무도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최고랭킹이 10위 내외였을 정도로 이류에 불과했던 쿠르니코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돈을 버는 테니스 선수였고, 본업보다는 모델로, 그리고 러시아 하키선수 등 숱한 남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녀의 몰락은, 내 생각이지만, 사라포바의 등장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17세의 나이로 2년 전 윔블던에서 우승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사라포바는 미모 면에서 전혀 쿠르니코바에 뒤질 게 없었으며, 세계 제일의 테니스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테니스의 인기가 더 높아진 이유이기도 한 사라포바의 등장에 쿠르니코바는 점차 빛을 잃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오직 '사라포바'의 들러리를 설 때만 불려졌다. 이런 식으로.

'샤라포바는 현재 세계랭킹 1위의 실력에다 183㎝의 큰 키, 빼어난 외모로 안나 쿠르니코바의 뒤를 이어 코트 안팎에서 구름관중을 몰고다니는 세계 스포츠계의 대표적인 매력녀다'(해럴드뉴스 2005.09.01)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가 몰락한 선수의 마음은 어떨까. 사라포바와 자주 비교되던 시절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기자: 사라포바는 쿠르니코바처럼 되지는 않겠다고 했는데요
쿠르니: 그녀가 그런 뜻으로 말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기자: 사라포바는 "쿠르니코바 선수처럼 부업에만 몰두하다 테니스는 팽개치는 선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쿠르니: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가 없네요.
그때 쿠르니코바가 얼마나 안되어 보였는지 모른다.

쿠르니코바의 외모는 테니스선수로서야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일류 모델에 비하면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그녀가 테니스를 친 게 바로 그런 프리미엄을 노린 게 아닌가 싶은데, 하여간 실력과 외모를 모두 갖춘 사라포바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그녀에게 열광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네이버로 쿠르니코바를 검색해 봤더니 여러 기사가 뜬다. 스토커에게 시달렸다는 얘기, 엔리케 이글리시아스와 결혼을 했는데 알고보니 가짜였다는 얘기... 사라포바는 미모이고 같은 러시아선수라는 이유로 쿠르니코바와 자신을 비교하는 걸 무진장 싫어하면서 '제2의 쿠르니코바로 부르지 말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했다. 점점 뜸해지는 쿠르니코바의 기사 건수로 보건대, 쿠르니코바가 팬들의 뇌리에서 잊혀질 날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외모가 중시되는 시대이긴 해도,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쿠르니코바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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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9-2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본 가장 매력적인 여자 테니스 선수는 가브리엘라 사바티니 였어요. 슈테피 그파프, 모니카 셀레스 등과 자웅을 겨룰때가 가장 재미있었던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쿠르니코바는 별로였는데...ㅎ

니콜키크더만 2005-09-2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바티니! 아주 훌륭한 선수였죠. 그 선수 정도만 성적을 내줬어도 쿠르니코바가 이렇듯 몰락하진 않았을 거예요.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도 그 당시 활약했던 선수죠. 하지만 이들 모두 그라프에 비하면 한수 아래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때 테니스는 그래서 별 재미가 없었어요. 모니카 셀레스만 다치지 않았어도 좋았을텐데.
 

사라포바와 비너스가 온다고 MBC에서 그 난리를 치더니만, 경기가 한창 진행중일 때 중계를 끊는다. 나야 뭐 초반에 조금 보다 말았고, 집에 MBC ESPN이 나와서 별 문제는 없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는 열받을만 했다.

하지만 너무 열받을 건 아니다. 사라포바와 비너스는 프로선수고, 받은 돈만큼 둘이서 최선을 다한 걸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타이틀이 걸려있지 않은 대회다 보니 평소 둘의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까지는). 범실이 너무도 잦았고, 랠리를 오래하기보다는 한방에 끝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다할 테니스대회가 없는 우리나라이니만큼 그 둘의 입국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경기장에 직접 가야 했다. TV와 달리 테니스 경기를 직접 가서 보면 뭐가 달라도 다르니까. 하지만 수준높은 경기에 눈이 맞춰진 팬들이 TV로 그 맥빠진 경기를 지켜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올시즌 윔블던에서 둘이 격돌한 장면을 보여주는 게 훨씬 나았다. 숨막히는 그 대결은 테니스에 대해 오늘 경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 줬을 테니 말이다.

심판의 콜이 전반적으로 늦었다는 것 역시 경기의 질을 저하시키는 주범이었고, 승리상금으로 내건 2만달러도 100만달러의 우승상금에 익숙한 비너스에게 별 의미가 없었을 것 같다. 이 경기가 테니스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그나마 위안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별로 그런 것같지 않아 안타깝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럴사한 테니스 대회가 열리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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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9-2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잘 보내셨어요? 부산(?) 내려갔다 오시었나요?
받은 돈만큼 둘이서 최선을 다한 걸ㅋㅋㅋ
저도 어제 봤는데...무척이나..설렁설렁 경기를 하두만요...특히 포바언니..

니콜키크더만 2005-09-20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안녕하세요? 부산에는 1박2일로 다녀왔어요. KTX라는 걸 타구요^^ 열아홉살인 사라포바를 포바언니라고 하는 걸 보니 혹시 십대신가봐요^^

icaru 2005-09-2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하하...다 아심서~

잉크냄새 2005-09-2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프 강국을 선도하는 한국의 낭자군단이 테니스에서 위세를 떨쳤다면 아마 테니스 붐이 엄청났을겁니다.

니콜키크더만 2005-09-21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들켜버렸네요
잉크냄새님/스포츠계의 기린아인 우리 낭자군도 테니스에서만큼은 기를 못펴더군요.
 

옛날, 내가 중학교 때쯤 되어 야구 오락이 나왔다. 스포츠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오락도 그런 쪽으로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 야구오락은 워낙 중독성이 강해 학교만 파하면 오락실로 달려가곤 했었다. 내 성적이 갑자기 곤두박질친 이유 중 3할은 그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팀을 모델로 했던 그 오락은 실제 상황과 비슷하게 세이부 라이언즈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가장 강했다. 하지만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소위 용병이라 부르는 외국인 선수를 어떻게 뽑느냐는 것. 2인용을 할 땐 각각 두명씩의 외국인선수를 고를 수 있었고, 대부분이 타자를 뽑았다. 그 타자들은 쳤다하면 거의 홈런을 쳤으니까. 투수들은 다 마구를 던졌는데 200킬로의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 공이 활활 타오르는 투수, 공이 크게 원을 그리는 투수 등이 있었지만 그 효력은 1이닝밖에 지속되지 않았기에 투수를 뽑는 건 그다지 실익이 없었다.

메이져리그 야구를 열심히 보다보니 그 오락 생각이 난다. 특히 외국인선수들과 닮은 선수들이 메이져리그에 몇명 있는 것 같아 한번 써본다.

-외국인선수 중 가장 선호되는 선수가 있었다. 매우 뚱뚱하지만 타율이 4할9푼9리에 홈런이 50개이고, 게다가 발도 무지하게 빠른 최고의 선수였다. 그 선수는 꼭 데이비드 오티즈를 닮았다. 올시즌 홈런을 마흔세개나 때렸고, 타점도 130점에 육박하며 전성기를 누리는 오티즈는 매니 라미레즈와 함께 보스톤을 이끌고 있는데, 오락과 다른 점은 그가 왼쪽타자라는 점, 흑인이고 발이 그리 빠른 선수가 아니라는 점 등이지만, 파괴력이라든지 타석에서 압도하는 포쓰는 거의 비슷하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오티즈를 닮은 선수를 빼앗긴 경우, 검은 피부의 외국인타자가 2순위로 뽑혔다. 타율이 4할8푼2리에 홈런 숫자도 꽤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선수는 여러모로 블라디미르 게레로를 빼닮았다. 어느 공이나 다 친다는 점, 쳤다하면 장타가 나온다는 점, 그리고 흑인이라는 점 등이 닮은 점이지만 외국인선수가 좌타자인 데 반해 게레로는 우타자란 게 다른 점이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선수 중 키가 무지하게 크고 빼빼마른 선수가 있었다. 키가 큰만큼 달리기도 잘하고 수비력도 좋은데, 타격이 외국인 선수 중 쳐진다는 게 문제. 이 선수는 꼭 엘에이 다저스의 제이슨 워스를 닮았다. 타율도 별로 안좋으면서도  트레이시 감독의 신임을 희한하게 받고 있는 워스는 키가 2미터에 달하는 장신. 몸매도 그렇지만 타력이 형편없다는 점 등이 둘의 닮은점이다. 게다가 워스는 발도 그리 빠른 선수가 아니다.

-키가 작고 머리는 커서 삼등신인 선수가 있다. 발이 무지하게 빠르고 장타력도 꽤 있는 편이지만, 배트가 짧아서 바깥쪽 볼에 쥐약이다. 이 선수는 누굴 닮았을까. 애틀란타의 라파엘 퍼칼과 판박이가 아닐까.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작년 플레이오프에서 결승 3점 홈런을 치기도 했던 퍼칼, 그를 보면 1번타자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공을 던지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마구 투수는 존 스몰츠를 생각나게 한다. 부상으로 2년간 마무리투수를 했긴 하지만, 스몰츠는 역시 선발체질. 94년인가 24승을 하면서 싸이영상을 탈 때 스몰츠는 거의 언히터블이었다. 오락에서도 불이 타는 공을 던지면 어느 타자도 그 공을 치지 못했다. 올시즌 스몰츠는 선발로 복귀, 3점 이하의 방어율에 14승을 거두며 애틀란타를 지구우승으로 이끌고 있다.

-공을 던지면 공이 원을 그리며 날라가고, 타자들은 속수무책인 마구투수. 그는 꼭 보스톤의 팀 웨이크필드 같다. 시속 60마일대에서 형성되는 너클볼에 타자들은 헛스윙을 연발하며, 삼진을 당하고 들어갈 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올시즌 15승을 올린 웨이크필드는 양키스전 완투승을 비롯해 최근 4경기를 전부 완투 비슷하게 던지는 괴력을 발휘했는데, 사실 너클볼은 던지는 데 힘이 안들어 15회까지도 던질 수 있을 듯하다. 메이져리그에서 너클볼로 일가를 이룬 웨이크필드, 그 비법을 혹시 전자오락에서 배운 건 아닐런지.

친구들과 그 오락을 많이 하곤 했었는데 특히나 제훈이는 내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제훈이와 다시 만나서 야구오락을 할 수 있는 그날이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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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는 박찬호(물론 전성기의 찬호를 말한다)만큼 위력적인 볼을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다만 찬호보다 제구력이 좀 더 뛰어난 게 장점이라면 장점. 하지만 김선우에게는 그 유일한 장점을 상쇄시킬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는 지나치게 소심했다. 타자와 맞서기보다는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하다 볼넷을 남발했으니, 공의 위력도 없는 애가 스트라이크도 못던지면 어떻게 아웃카운트를 잡는단 말인가. 연습투구는 잘하는데 마운드에만 서면 덜덜 떨었고, 보스톤에서 그가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2002년, 라이벌이자 웬수(한번 싸운 적이 있다)인 토모 오카를 쫓아 몬트리올(현 워싱턴)에 온 그는 약팀이니만큼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줄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시즌 막판 선발로 등판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대로 잘 던지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심각한 문제를 또하나 노출하는데, 그건 바로 왜소한 체격답게 체력이 약하다는 거였다. 4회까지 잘 막고한회만 더 막으면 승리투수가 되는 시기에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이유로 마운드를 내려와야 할 경우가 두번이나 있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완봉 직전까지 갔다가 그런 모습을 또 보였기에, 스카우팅 리포트에서 "선발보다는 중간계투가 더 어울리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올 시즌에도 승리를 목전에 둔 4회 투아웃에 부상으로 마운드를 내려가는 일이 한번 있었다.

그래도 희망을 품었던 2003년, 라이벌인 오카가 풀타임 선발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는 마이너에서 시즌을 시작하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열심히 하니 결국 기회가 왔다. 하지만 그는 모처럼 찾아온 그 기회를 날리고 말았는데, 나도 TV로 봤던 그 경기에서 김선우는 정말 해도 너무했다.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하다 볼넷을 내주고, 결국 만루를 만들어주고. 프랭크 로빈슨 감독은 1회부터 거구를 이끌고 마운드에 올라가야 했다. 1회를 1실점으로 비교적 잘 막았지만, 2회도 같은 패턴으로 실점을 거듭하자 감독은 가차없이 김선우를 내렸고, 기자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 "걔가 투수냐. 그런 애가 메이져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 언론들은 말이 심했다고 난리를 쳤지만, 내가 감독이어도 그랬을 것 같다.

그 후 2년간은 김선우의 시련기였다. 그를 나쁘게 본 감독 밑에서 있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중간계투로 내보냈다 갑자기 선발로 던지게 하고, 잘 던지는데 4회에 빼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오카가 감독에게 밉보여 밀워키로 갔지만, 그의 자리는 영 불안했다. 그랬던 선우가 콜로라도로 오게 된 것은 새로운 기회였다. 애런 쿡과 김병현을 제외하곤 선발진의 방어율이 다들 5점대인 개판 일보직전의 마운드,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현재 5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의 구위는 1, 2선발급은 결코 아니다. 구속이 과거보다 빨라졌고, 90개를 넘겨도 스피드가 변함이 없을 정도로 스태미너도 향상되었지만, 풀타임 선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는 타자들을 피하는 소극적인 투구에서 벗어나 직구로 정면승부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허들 감독의 눈에 들었고, 투구수 관리를 잘해가며 5이닝, 6이닝을 버텨줌으로써 심심치 않게 승리를 따내고 있다. 인터넷에 의하면 허들 감독이 남은 경기에서 김선우의 선발출장을 보장했다는데, 그렇다면 3-4경기 정도에서 더 선발로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경기에서 제발 좀 잘 던져서 내년 시즌에는 선발로 한시즌을 시작했으면 한다. 선발로 남느냐 마느냐를 놓고 시즌 내내 서바이벌 게임만 하고 있는 우리나라 선수들을 보니까 답답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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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박찬호가 풀타임 선발이 되었을 때, 내 관심은 오직 박찬호가 잘하나 못하나였다. 그가 잘하면 재미있는 경기고 못하면 아닌 거였다. 이듬해부터 메이져리그 중계권은 인천방송으로 넘어갔고, KBS와 달리 방송에 내보낼 콘텐츠가 부족했던 인천방송에서는 박찬호가 안나온 경기도 시시때때로 중계해 줬다. 그 경기들을 보면서 난 메이져리그의 재미를 느꼈고, 지금은 거기서 뛰는 선수 대부분을 알아볼 정도의 팬(매니아라고 하긴 부족하다)이 되었다. 그때 알았다. 박찬호가 나왔을 때는 야구 경기의 재미를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는 걸. 박찬호 한사람에게 매몰되어 수많은 멋진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거다.

웬일인지 겁나게 일찍 일어난 오늘, 일어난 김에 맨유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봤다. 경기 시작 15분께부터 봤으니 거의 다 본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아나운서와 해설자는 수시로 "박지성이 나왔으면" 하고 바라는 거다. 솔직히 난 그게 짜증이 났다. 박지성이 나오면 더 좋겠지만, 못나오더라도 다른 유명한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닌가? 그럼에도 중계팀은 아주 집요해, 전반전에 수비수 하나가 부상으로 실려나가니까 "아, 이런 식이면 박지성이 뛸 수도 있겠네요"라며 반색을 하고, 나중에 루니가-그 유명한 웨인 루니 말이다-어이없는 행동으로 퇴장을 당하자 "체력이 좋은 박지성같은 선수가 들어올 수도 있겠다"고 한다. 박지성이 뛸 수만 있다면 "다른 선수의 불행은 곧 우리의 행복"이 된다는 그런 심리는 스포츠기자들로 하여금 박지성의 라이벌 크리스티얀 호나우두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박지성에게 기회가 왔다"는 반윤리적인 말까지 하게 만들었다. 중계팀의 바람대로 박지성은 후반 10분을 남기고 교체투입되었지만, 루니의 퇴장공백을 메우느라 오버를 한 맨유 선수들의 체력이 고갈된 탓에 이렇다할 챤스를 잡지 못한 채 경기가 끝나고 만다.

박지성이 명문구단인 맨유에 갔을 때, 치열한 주전경쟁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긱스나 호나우두에 비해 박지성이 아직은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맨유를 택한 모험정신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며, 박지성은 충분히 해낼 능력을 가진 선수다. 문제는 언론과 팬들이다. 그가 영국에 간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주전에서 탈락하느니 하면서 그의 출전에만 촛점을 맞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2003년 네덜란드에 갔을 때, 바로 주전 자리를 꿰찬 이영표와 달리 박지성은 후보였다. 포루투칼과의 경기에서 환상적인 골을 넣었던 그가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열심히 한 결과 박지성은 당당한 주전이 되었고, 챔피언스리그의 활약에 힘입어 특급선수 부럽지 않은 명성을 얻지 않았는가. 프리미어리그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고, 챔피언스리그까지 합치면 남은 경기는 아직도 많다. 그 과정에서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며, 문제는 오히려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는가이다.

박찬호가 메이져리그를 우리 안방으로 가져왔듯이, 박지성은 축구팬들로 하여금 꿈에서나 그리던 프리미어리그를 볼 수 있게 해줬다 (그전에도 중계를 안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매주마다 보게 된 건 그의 공로다). 박지성이 나오면 더 좋겠지만, 안나오면 안나온대로 경기 자체를 즐겼으면 좋겠다. 그게 프리미어리그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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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9-1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유의 경기를 보는것만으로도 흥분됩니다. 무엇보다 공수의 빠른 전환과 엄청난 압박이 압권이더군요. 저도 박지성이 나오기를 내심 바라지만 반니, 루니, 긱스, 호나우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더군요. 프리미어리그의 중계활성이 극심한 수준차를 보이는 K 리그의 위축을 가져오는 것은 좀 안타깝네요.

날개 2005-09-1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가 축구광이라 꼬박꼬박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본다지요.. 전 옆에서 그냥 슬쩍~ 근데, 울 나라 경기와는 달리 무지하게 박진감이 있더군요..

니콜키크더만 2005-09-1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아, 부군께서 축구광이시군요! 날개님도 축구 웬만큼 좋아하시죠? 원래 축구는 같이보면 더 재밌잖아요
잉크냄새님/님은 참 바람직한 팬이시군요. 전 루니의 플레이에 매료되었었는데, 오늘 퇴장은 좀 아쉽더라구요. 그리고 프리미어 때문에 케이리그가 죽는 건 저 역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메이져리그 때문에 국내야구가 몇년간 죽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케이리그도 다시 살아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