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야구를 보는 이유는 좋아하니까가 첫번째 이유다. 하지만 이왕 보는 거, 극적인 승부가 펼쳐지기를 바란다. 예컨대 올림픽에서 한국이 말리라는 나라와 3대 0으로 지다가 연속 세골을 넣어 동점을 이룬 적이 있다. 그 경기, 나는 자느라 못봤지만 본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롯데가 엘지한테 8대 0으로 지다가 9회 초에 13대 11로 역전을 했던 경기 역시 올해 최고의 명승부로 꼽힐만한 거였다. 그때 롯데 관중들이 어찌나 열광했는지, 그 경기를 못본 난 두고두고 가슴을 쳤다.

미국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서 그에 필적할 경기가 나왔다. 휴스턴과 애틀란타의 디비젼시리즈 4차전에서 애틀란타는 8회초까지 홈팀 휴스톤을 6대 1로 앞선다. 휴스톤의 완패가 예상되는 8회말, 버크만이란 휴스톤 타자가 극적인 만루홈런을 때린다. 일어나려던 관중들은 다시금 주저앉았고, 6대 5이던 9회말 투아웃에 아스무스가 그보다 더 극적인 동점홈런을 쳐낸다. 6대 6. 경기를 보러온 관중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상상이 가는가. 하이라이트를 보니까 관중석에 있던 사람이 좋아서 펄펄 뛰는데, 점프를 거의 1미터 이상 했다.

정말로 아쉽게도 난 이 경기를 보지 못했다. 우리 시각으로 새벽 2시에 시작된 이 경기를 보려고 난 전날 낮잠을 푹 자두었는데, 애틀란타의 만루홈런이 나오고, 또다시 점수를 추가해 5대 0이 되버리자 슬슬 잠이 쏟아지는거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TV 볼륨을 크게 키웠지만, 밀려드는 잠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TV 소리가 워낙 커서 난 편히 잠들 수가 없었고, 수시로 자다 깨다 하면서 경기를 봤다. 내가 볼 때마다 휴스톤 타자들은 헛방망이질을 해댔고, 다섯점 차 리드는 애틀란타 불펜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넉넉해 보였다. 내가 볼륨을 줄이고 본젹적으로 잠을 잤던 건 아마도 그 무렵이다(시간상으로는 5시 조금 못되었을거다). 그런데, 출근 시간이 걱정되어 화들짝 일어나보니 어느덧 스코어는 6대 6 동점, 경기는 13회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휴스톤이 언제 또 다섯점을 냈단 말인가? 하이라이트를 보니까 장난이 아니다. 만루홈런이 나오고, 9회 투아웃에 극적인 동점홈런. 이런 걸 보기 위해서 야구를 보는데, 막상 이럴 때는 자버리는 내가 너무도 미웠다.

6대 6으로 맞선 15회, 출근 때문에 보다말고 집을 나설 때는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경기 분위기로 보아 휴스톤이 이길 게 뻔했기 때문. 과연 휴스톤은 연장 18회, 크리스 버크의 홈런으로 경기를 끝내 버린다. 회사에서 이 결과를 보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기 간 관중들, 본전의 몇십배는 뽑았겠구나!"
생각해 보라. 야구는 원래 9회까지인데 18회까지 했으니 일단 더블, 홈팀이 이겼으니 또다시 더블, 8회말 만루홈런이 나왔으니 따따블, 9회 투아웃 동점홈런도 따따블. 거기에 최고의 마무리 브래드 리지가 나오는 걸 봤으니 더블, 안나올 예정이던 전설적 투수 로저 클레멘스가 나왔으니 또다시 더블. 몇십배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이 아니다.

관중들이야 그렇게 돈을 벌었지만, 결정적 장면을 못보고 자버린 난 도대체 얼마나 잃은 걸까. 괜히 잠만 설쳐서 지금도 졸려 죽겠다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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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0-1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 아시는 분도 어제 이거 보다 잠 설쳤다고 하던데, 왜 알라딘 대주주 마태우스님이라고, 그 분도 메이저리그 매니아십니다. 친하게 지내세요. ^^

날개 2005-10-1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다가 막판에 동점되고 뒤집고 하면 처음부터 점수 땄을때보다 훨~씬 더 흥분되더라구요..^^ 아깝겠어요.. 중요 장면을 놓쳐서...
근데, 님이 직접 하시는 운동은 뭐예요?

니콜키크더만 2005-10-1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무려 일주일만에 답을 드리네요. 죄송합니다. 지난주 좀 바빴습니다.... 제가 직접 하는 운동은 숨쉬기 뿐입니다. 아, 사실은 줄넘기를 좀 합니다.
하이드님/아 그러신가요? 저는 매니아까진 안되구 그냥 좋아하는 정도입니다. 그분과 한번 야구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네요.
 

미국 프로야구의 포스트시즌이 벌어지는 10월에는 정말이지 회사에 안가고 TV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기 일정도 무척이나 교묘한데, 우리 시각으로 새벽 두시에 한경기, 다섯시에 한경기, 8시, 11시에 또 한경기. 그러니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 네경기를 모두 볼 수가 있다. 이건 물론 팬들에 대한 배려일 수 있고, TV 중계에 붙는 돈을 생각하면 절묘한 상술로 여겨지기도 한다. 작년 어느날인가는 아침 일찍부터 하루 열시간 이상을-한경기가 연장까지 갔다-미국야구만 봤는데, 당시 해설을 하던 차명석 씨가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이거 끝나고 밥 드시고 잠깐 쉬시다가, 우리나라 포스트시즌 경기를 보면 되겠네요”

어제는 정말로 두시에 일어났다. 샌디에고전을 먼저 보고 보스톤과 LA 경기를 본 뒤 출근을 했다. 물론 비몽사몽이었고, 계속 졸다가 커피마시기를 반복해야 했다. 집에 오자마자 밥을 먹고 쓰러져 잤다.

오늘은 그래도 경기가 새벽 다섯시라 상황이 괜찮았다. 휴스톤이 10점을 내며 이기는 걸 보고 출근. 전날 푹 자서 견딜만한데, 보고싶은 양키스와 에인절스전을 못본 게 아쉽다. 지금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데, 왕젠밍의 호투를 발판으로 양키스가 앞서고 있다. 왕젠밍은 그 이름처럼 대만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박찬호가 그랬듯이 대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거기다 명문팀 양키스에 소속되어 있으니 더더욱 인기가 많을 수밖에. 박찬호의 엔트리 탈락으로 한국인 메이져리거들을 포스트시즌에서 볼 수 없다는 게 마음 아프지만, 같은 동양인인 왕젠밍이 늠름하게 2선발로 나섰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아야겠다. 같은 동양 선수가 잘하는 건 좋은 일이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내일도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야 하는 등 간만에 바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좋아하는 미국 야구를 볼 수 있어서 좋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요즘 들어 이성규가 해설하는 경기가 부쩍 많다는 건데, 부리님도 말씀하셨지만 이성규의 해설은 정말이지 한심한 수준이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든다. 올 시즌 홈런 51개의 경이적인 활약을 한 앤드류 존스가 타석에 나왔을 때, 이성규는 이런 말을 했다. “존스 선수, 득점권에서 아주 강하죠”
아나운서가 정곡을 찔렀다. “올 시즌 득점권 타율이 2할 6리밖에 안되는데요”
올해 타율이 2할6푼인데 득점권 타율이 2할6리, 이런 사람을 득점권에서 강하다고 하다니! 이성규는 최소한의 기록조차 확인하지 않은 거다. 데이터만 나열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래서 송재우를 좋아한다.

포스트시즌 경기가 모두 끝날 때쯤이면 10월도 다 갔을테고, 찬바람이 부는 11월이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또 한살 더 먹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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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축구라고는 K-리그밖에 없을 때, 난 관중도 시청자도 모두 외면하는 K-리그 중계를 하품을 하면서 봤다. 골이 들어가면 슬로이비디오 보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이영표가 네덜란드에 간 뒤로 네덜란드 리그를 중계해준다. 그걸 보면서 난 K-리그가 시시해졌다. 그러던 차에 박지성이 빅리그라 불리는 프리미어리그로 갔다. 세게임밖에 안봤지만 내 눈은 K-리그를 보기엔 너무 높아져 버렸다.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건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그 중에서도 지구방위대라고 불리는 레알마드리드의 경기다. 스페인 축구 자체가 힘을 중시하는 유럽식이 아닌, 기술 중심의 남미축구인데다 실제로 그 팀엔 브라질 선수들이 잔뜩 있다. 퇴근을 하고나서 레알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2차전을 봤다. 어제 잠을 많이 잔 게 아닌데도 하품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고, 경기가 워낙 스피디하게 진행되어 슬로우비디오를 보여줄 틈이 없었다. 골 챤스를 아깝게 놓쳤다고 아쉬워하기 전에, 상대팀이 결정적인 챤스를 잡고 슈팅을 날렸다.

약관의 호빙뉴가 몇명을 우습게 제끼는 것도 감탄이 나왔지만, 난 오늘 경기르 보면서 베컴에게 매료되었다. 베컴의 자로 잰듯한 센터링은 몇차례 결정적인 챤스를 만들었고, 레알이 넣은 두골은 모두 베컴의 발에서 나왔다. 바티스타와 라울 대신 반 니스텔루이 같은 애가 있었다면 두세골은 충분히 더 넣었을 정도로 베텀은 많은 챤스를 만들어 줬다.

작년 시즌 2위에 그친 뒤 선수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레알 마드리드, 내가 보기에도 전력이 훨씬 나아 보이지만 올시즌 초반 성적은 아주 저조하다. 호나우두, 라울, 베컴, 호빙뉴, 도대체 이런 선수들을 데리고 어떻게 질 수가 있는 걸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 말은 틀린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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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0-0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구를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레알 마드리드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는건 희안해 보이더군요.. 유명 선수란 선수는 다 끌어다 놓고서..ㅡ.ㅡ

니콜키크더만 2005-10-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그렇지요? 발로 하는 거라서 그런 걸까요...^^
 

김선우가 완봉을 했다. 이닝이터로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게 그의 가장 큰 약점이었는데, 9회까지 던졌고, 점수를 하나도 안내줬다. 그것도 타자 친화적 구장인 쿠어스필드에서.

피안타 3, 볼넷 한개인 김선우의 완봉은 4년만의 일이었는데, 네이버 기사에는 쿠어스필드에서 완투한 투수들의 기록이 나왔다. 한 네티즌이 여기에 토를 달았다.
"그래도 볼넷을 포함한 완투는 좀 어색하다. 볼넷없는 완투가 진정한 완투가 아닐까.. 볼넷 10개 하고 완투한다면.. 이건 좀 아이러니한 느낌.. "

김선우의 쾌거에 왜 이런 딴지를 거는지 이해가 안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볼넷없는 완투가 진정한 완투라는 이분의 말이 야구 용어를 헷갈린 소치라는 거였다. 완투, 즉 complete game은 볼넷과 안타, 점수를 얼마나 내주던 9회까지 던지는 걸 의미한다. 이분은 그러니까 완투와 완전경기(퍼펙트게임)을 착각한 거다. 랜디 존슨이 작년에 기록한 퍼펙트게임은 안타, 볼넷, 점수는 물론이고 에러까지도 없어야 하는 어려운 기록이다. 아무튼, 이분의 황당한 댓글에 네티즌은 난리가 났고, 댓글행렬은 4페이지에 달했다.

실수 한번 한 걸 가지고 너무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이분이 자신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겨댔다는 거다. 다른 네티즌들이 완투는 볼넷을 아무리 많이 내줘도 관계없다고 지적해줬을 때, 이분은 계속 말도 안되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러니깐 밥통아!! 내가 하는 말은 볼넷이 많으면서 완투하는건 좀 아이러니한게 아니냐는 그말이다 밥통아!! 휴~!!"

"밥통아!! 내가 김선우 완봉갖구 뭐라그러냐!? 완봉말고 완투가 볼넷 많으면서 완투했다는게 잘못됐게 아니냐고.. 제대로 완투할려면 볼넷없이 완투해야 퍼펙트게임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 밥통아!!!"

"휴 이 밥통에게 내가 뭐라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겠네.. 내 말은 완벽한 피칭을 할려면 볼넷없이 노안타로 가야 완투가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구!! 밥통.. 하여튼 말뜻을 모르네"

이분의 무식은 개념을 모른다는 비난에 반박하는, 다음 댓글에서 드러났다.
"완투는 피안타 제로를 말하고, 완봉은 9회까지 0점으로 봉해버린거 말하구 밥통들.. -_-;; 근데 완투에서 아무리 안타를 안내줘도 볼넷많으면 말짱 꽝아니냐는 내 의견을 피력한거 뿐이다 밥통아!!"

네티즌들이 퍼펙트게임과 완투, 완봉의 개념을 정리해주자 그는 자기 말의 취지를 알아들어야지 실수한 걸 가지고 물고늘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실수한 것에 대해 개떼같이 덤빈다면서 네티즌 탓을 해댔다. 댓글행진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글을 지우면서 끝이 났는데, 자기가 틀렸으면 미안하다고 하면 될 일이지 끝까지 우긴 건 분명 잘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태도에도 문제는 있다. 익명성이 보장되니만큼 더더욱 예의를 갖춰서 말해야 하건만, 누가 무식한 소리를 했다 하면 가르쳐줄 생각보다 무시와 비아냥으로 점철된 댓글들을 단다. 이번 경우에도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완투와 퍼펙트게임을 착각하신 것 같군요. 님이 말하는 건 퍼펙트게임이구요, 완투는 볼넷과 점수를 내줘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원래 미국야구에서 나온 개념이라 헷갈립니다. 하일성 씨도 가끔 퍼펙트와 완투를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구요, 양키스의 데이비드 웰스는 1997년 퍼펙트게임을 하고나서도 '완투하는 데 성공했다!'고 소리를 질렀지요. 님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했고요, 앞으로도 좋은 댓글 많이 남겨 주세요"

네이버스포츠에는 메이져리그 매니아들이 득실댄다. 그들의 지식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곳은 매니아들만 오는 곳은 아니며,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기 의견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같이 헛소리 좀 했다고 짓밟는 분위기라면 겁나서 어디 댓글을 달겠는가? 인기를 위해 무식을 가장하는 악플러들이 아니라면, 좀 더 예의를 갖춘 따뜻한 댓글로 응대하는 성숙한 인터넷 문화가 메이져리그 사이트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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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9-26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숙한 댓글 문화는 이곳 알라딘이 최고인듯 싶군요.

니콜키크더만 2005-09-2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아요

2005-09-30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콜키크더만 2005-10-01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안녕하세요? 아니 사촌동생이 그렇게 유명한 분이라니,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필경 제가 아는 분일텐데... 일이 잘 풀려서 다시금 서재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2005-10-04 1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콜키크더만 2005-10-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마이너리그서 뛰는 선수로만 알고 있었어요. 우리나라 온 줄은 몰랐구요, 케이블에 있는 것도 몰랐는데요. 좀 더 잘해서 메이져리그 무대에 섰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군요. 어깨부상이라니, 안타깝네요...
 

 여자농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누가 우승했다는 기사가 나면 본다. 이번 여름리그에서는 다시 코트에 복귀한 전주원의 활약에 힘입어 신한은행이 우승을 했다. 우승팀 감독의 인터뷰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감독이 이영주였기 때문.

내가 아는 친구는 가드를 세종류로 나눈다. 먼저 포인트가드. 경기의 흐름을 조절하고, 득점보다는 어시스트에 주력한다. 팀 득점이 여의치 않을 때는 3점슛을 넣을 수 있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이상민과 김승현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슈팅가드. 문경은으로 대표되는 슈팅가드는 말 그대로 외곽슛에 능해야 한다. 마이클 조던 역시 슈팅가드에 속한다.
그리고 세 번째, 무위도식 가드. 센터를 하자니 키가 작고, 포워드를 하기엔 몸싸움이 약하다. 그렇다고 슛을 잘하는 것도 아닌, 쉽게말해 하는 일이 별로 없는 선수를 일컫는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현대의 이영주. 당시 현대 팀에는 유도훈과 김지홍이라는 가드가 있었는데, 이영주도 대부분 이들과 함께 코트에 나섰다. 걸출한 가드가 없으니 숫자로 밀어붙이자는 전략. 이영주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하는 일 없이 공만 쫓아다녔는데, 당시 현대 팀의 성적이 가장 안좋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이영주가 감독을 해서 우승까지 한다니 정말 희한하지 않는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영주는 도대체 뭘 가르쳤을까? 하는 일 없이 어영부영하는 법? 비슷한 생각을 난 유지훤을 보면서도 했었다. OB 베어스(현 두산) 시절 유격수로 나서 실책만 연발하던 그 선수. 86년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김성한이 친 유격수 땅볼을 유지훤이 아웃시켰다면 해태의 4연패는 없었을 테지만, 유지훤은 희한하게도 그 공을 잡지 않고 기다렸고, 발이 느린 김성한이 1루에 세이프됨으로서 연장전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다. 당시 OB 팬이었던 내 친구가 어찌나 욕을 하던지. 타격도 안좋았고, 그나마도 승패가 갈린 뒤에나 홈런을 치곤 했던 유지훤이 지금 어느 팀의 코치로 가있는 걸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아니 저 인간이 도대체 뭘 가르친단 말인가? 가랑이 사이로 공 빠뜨리기?”
서정환이 삼성 감독이 되었을 때도 난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나처럼 생각하자면 선동렬처럼 전설적인 인물만이 감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 현역 시절 잘했던 선수가 꼭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야구의 대표적인 스타 나가시마 시게오가 요미우리를 맡았다 성적부진으로 잘린 것처럼. 그와 반대로 애틀란타의 보비 콕스 감독이나 시애틀을 이끌었던 루 피넬라, 슈퍼스타들을 잘 다독거리며 만년 우승후보로 만든 조 토레 양키스 감독은 선수 시절 화려한 스타는 분명 아니었다. 전설적 투수였던 선동렬이 오승환이나 권오준 등 좋은 투수를 만들어낸 건 인정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역량만큼은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듯이 (그렇게 돈을 쏟아부었는데 근근이 1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선수로서의 활약과 감독직을 수행하는 능력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러니 이영주가 신한은행을 이끌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고 해도 놀랄 게 없지만, 이영주의 선수 때 활약상을 잘 아는 나로서는 여전히 그에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건 아마도 한번 머리에 박히면 쉽게 고쳐지지 않는 선입견이라는 괴물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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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9-2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님은 정말 스포츠에 대해선 모르는게 없으시군요..
야구, 축구, 테니스서에 이어 농구에 이르기까지~ +.+

2005-09-21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9-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선동렬에게서는 아직까지 지도자의 그릇이 보이지 않아요.
현재로서 감독으로 가장 성공한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라면 야구의 김재박 감독, 농구의 신선우 감독, 배구의 김호철 감독이라고 생각되네요...축구의 차범근 감독은 아직은 감독으로서의 명성은 약간 부족한 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니콜키크더만 2005-09-2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신선우 감독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재박감독은 현대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그러고보니 신감독도 현대의 지원을 받았군요. 하지만 현대 유니콘스의 전력이 최강이었던반면, 농구계의 현대는 그렇지가 않았... 아니 그랬던가... 개인적인 선호가 판단을 흐리게 하네요^^
날개님/원래 스포츠라는 게 하나로 수렴되기 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