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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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보이지 않으면 믿지도 않는다'는 불가지론자로서 내세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기대도 품을 수 없었던 그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죽음에 대해 유쾌한 토론을 벌인다. 신을 그리워하는 태도를 질척하다고 일갈해버리는 철학과 교수 형,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 어머니, 전신을 지배하는 병마와 싸우다 병실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까지, 이 책은 누군가의 아들이자 형제인 줄리언 반스와 영국 문학의 제왕으로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죽음을 면밀히 파헤친 줄리언 반스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해낸 에세이다.

 

 

 

 

 

 

죽음에 관하여 유쾌한 토론을 벌이다

 

책의 저자 줄리언 반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영국

 

 

 

 

 

 

프랑스 비평가 샤를 뒤보스는 죽음에 대한 인식에 관해 '죽음의 숙명을 알리는 모닝콜'이라는 문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낯선 호텔 방에서 이전에 묵었던 투숙객이 맞춰놓은 자명종이 울리는 바람에 야심하기 그지없는 시간에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암흑과 공포 속으로 내던져진 채, 현세가 잠시 세 들어 사는 세계임을 통렬히 자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최근에 저자의 친구 R은 그에게 얼마나 자주,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그는 잠에서 깨어 있는 하루 동안 적어도 한 번은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런 후 간간이 일어나는 야간 침입들이 있다고도 했다. 외부 세계가 뚜렷한 평행선을 그릴 때, 저녁으로 접어드는 시간, 낮이 짧아질 때, 혹은 긴 하루 동안의 하이킹이 끝나갈 때, 자주 죽음의 필연성이 불청객처럼 그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온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망의 종교를 가져야만 한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운명을 감당해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운명처럼 무감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군! 그런 거군!' 하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발아래 놓인 검은 구덩이를 응시함으로써 사람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이다" - 플로베르

 

 

당신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쪽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는가?

 

언뜻 쉬운 문제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떨까? 당신은 죽음 같은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고, 도락道樂을 좇고, 소임을 다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그런 후 마침내 죽음이 임박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를 맞았다. 그런데 바로 앞 문장의 마침표를 찍으며, 지금까지 이어져온 당신 인생사가 다 헛소리였음을 새로이 자각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애초에 언젠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면 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1882년 3월 6일 월요일, 도데, 투르게네프, 에드몽 드 공쿠르와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졸라'르 레베일 모르텔'의 이러한 영향들에 관해 털어놓았고, 공쿠르가 그의 이야기를 낱낱이 받아 적었다. 그날 저녁, 그들 중 넷(1880년 플로베르가 사망했으므로 '다섯 명의 저녁 식사'에서 한 명이 빠졌다)은 죽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가 투르게네프는 이렇게 (살짝 손짓으로 시범을 보이면서) 그 생각을 떨쳐버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인들은 골칫거리를 '슬라브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할 줄 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인들은 논리적이지만 성가실 정도로 끈질기게 떠오르는 상념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이 안개를 불러 모은다고 했다. 가령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 폭풍에 갇히게 되면 추위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생각을 말아야지 안 그러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더 큰 사안에도 이와 똑같은 방법을 적용해 이겨낼 수 있었다. '이렇게' 떨쳐버리면 되었다.

 

 

 

우리가 예술을 탄생시키는 이유는 죽음을 무릎 꿇리려고, 안 되면 최소한 반항이라도 해보기 위해서일까? 죽음을 초월하기 위해서? 죽음에게 제 분수를 알게 해주기 위해서? 취향은 변한다. 진실도 클리셰가 되어버린다. 모든 예술의 형태들은 사라진다. 심지어 죽음을 뛰어넘은 위대하기 그지없는 예술의 승리조차 실소가 나올 정도로 단명한다. 소설가는 다음 세대의 독자들에게 희망을 걸지 모르며, 그러는 것으로 죽음을 비웃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사형수 독방의 벽을 긁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러는 이유는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도 여기 있었다, 라고.

우리는 살고, 우리는 죽고, 우리는 기억되고, 우리는 잊힌다. 즉시 잊히는 것이 아니라, 한 켜 한 켜씩 잊힌다.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부모는 대개 그들의 성인기를 통해서다.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조부모는 그들 인생의 마지막 3분의 1이라 할 수 있는 노년기를 통해서다. 그 외에 기억나는 다른 존재가 있다면 아마도 따끔거리는 턱수염에 지독한 냄새, 아마도 생선 냄새 같은 걸 풍기는 증조부 정도가 있지 않을까. 그다음엔? 사진들, 그리고 얼마간 우연히 발견하는 기록들일 것이다. 미래에는 내가 하는 일처럼 바닥이 얕은 서랍에 기록을 보관하는 일이 아니라 뭔가 기술상의 갱신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 세대에 달하는 조상들이 영화와 테이프와 디스크를 통해서 살아남아 움직이고 말하고 미소 짓고, 그들도 여기 있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

 

정신이 멀쩡할 때 죽음을 선고받는 것이 어쩌면 최상의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노환을 앓는 대부분의 노인들은 죽음이 가까이와 있음을 예견하면서도 가족들의 철저한 보안 속에 목숨을 연명하다가 별다른 준비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아버지도 그랬다. 노인대학원에선 배움의 즐거움을, 성당에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환희를 경험하다가 갑자기 허리가 아파 치료차 병원에 입원한 뒤로 병상 밖으로 결국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책 대신 음악과 함께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들 동안 이것저것 확인할 게 많다고 한다. 우선 자신도 생선 냄새를 풍기게 될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지를 말이다. 죽음과 이에 대한 두려움에 대하여 저자는 화해로 결론내는 듯하다. 그는 단 한 명의 독자도 남지 않게 될 작가의 절멸을 상상하며 받아들인다. 책의 원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Nothing to be frightened of)>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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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0시간제 노동법(근로기준법) 실무 바이블 - 2016년 최신 개정 노동법과 판례 등을 반영한
노무법인 평로 엮음 / 올인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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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사노무 관련 책들은 이론에 치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실제 현장의 중소기업 CEO나 인사노무 담당자가 이를 참고하여 적법하게 인사노무제도를 운영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책은 인사노무제도의 실제 운영시 고려해야 하는 핵심 유의사항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안내함으로써 법을 모른다 하더라도 따라하기만 하면 안정된 인사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술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은 지루하게 처음부터 읽어 가는 것이 아닌,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실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소기업 CEO와 인사노무 담당자의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도록 기술되어 있다.

 

 

 

2011년 7월 1일부터 상시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도 주40시간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한편, 상시 10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용자는 의무적으로 취업규칙을 작성하여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취업규칙을 통해 주40시간제를 설계하여 운영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아졌다.

취업규칙은 각 기업의 최고 규범에 해당하며, 주40시간제 체계를 비롯하여 기업내 근로자의 각종 근로조건과 조직운영상 필요한 규율 등을 담고 있어야 하고, 또한 CEO의 경영철학에 따른 고유의 기업문화 등을 법의 테두리 내에서 여러 인사노무제도에 반영함으로써 고유의 조직문화 생성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은 취업규칙의 효용성을 미처 인식하지 못함에 따라 근로기준법에서 강제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지못해 적당히 "이름"만 바꿔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 실제 운영되고 있는 근로자의 각종 근로조건이나 관례화된 기업문화 등을 취업규칙에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한편, 중소기업들은 대개 그 규모가 작아서 전담 인사노무 담당자의 고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고, 그나마 인사노무 담당자는 노동관련법령에 대한 전문적인 법률지식과 실무경험이 미비한 탓에 주40시간제를 비롯하여 법에서 요구하는 인사노무제도의 최소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실무적으로 어떠한 절차를 이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도 미비하여 잦은 오류를 범한다.

결국 최소한의 법정 기준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기업의 인사노무제도로 인해 사용자는 노동관련법령의 의무규정을 본의 아니게 위반하여 벌칙을 받게 되는 기회손실을 입게 되고, 근로자는 노동관련법령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여전히 빈발하고 있다.

 

 

 

이 책은 인사관련 부서 책임자, 인사담당자 등이 직접 취업규칙으로 주40시간제를 설계하고 인사노무제도를 실제 운영할 수 있도록 매뉴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실제 인사노무 담당자가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인사노무제도의 실무내용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안내하고 있는 실무서라서 실무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책의 내용은 취업규칙 예시문, 실무내용, 참고서식, 유의사항, 관련 법령, 행정해석 및 판례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는 바, 취업규칙 예시문을 통해 주40시간제 및 인사노무제도의 기본 골격을 이해하도록 하고, 실무내용에서 구체적인 내용과 절차를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참고서식에서 관련 서식 정보를 확인하고, 유의사항에서 실제 운영시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을 확인하고, 관련 법령과 행정해석 및 판례에서 좀더 심도깊은 이해와 참고를 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이번 개정2판에는 단시간 근로자의 연차휴가 적용 오류에 관한 사항, 해고예고 요건 중 일부에 대한 헌법재판소 위헌판결에 관한 사항, 정년 연장에 관한 사항, 육아휴직 기준 변경에 관한 사항, 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 관련(대법원 판례) 사항, 재해발생 보고에 관한 사항, 5인 미만 사업장의 법정퇴직금에 관한 사항, 퇴직일시금과 퇴직연금의 중간정산(중도인출)에 관한 사,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 특례에 관한 사항 등을 변경하거나 추가,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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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만큼 커다란 구름을 삼킨 소녀
로맹 퓌에르톨라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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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비당스는 모로코에 있는 딸 자헤라를 만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지만 아이슬란드에서 분화한 거대한 화산재로 인해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다. 모로코로 가기 위해 백방으로 항공, 철도, 선박 등을 알아보지만 화산재 구름은 프랑스 대기는 물론 육로와 항공편까지 모두 결항이 된 상태다. 공항에는 프로비당스뿐만 아니라 발이 묶인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 항공대란을 야기한다.

 

 

작가 로맹 퓌에르톨라가 소재로 쓴 이 이야기는 2010년 4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 폭발로 인한 화산재 구름으로 인해 남부 프랑스와 스위스, 북부 이탈리아 대기를 덮쳤으며,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까지 확산되었다. 모든 항공편이 결항이 되어 발이 묶인 인파는 물론, 화산재를 피하기 위해 대서양을 통과하는 항공편들이 모두 화산재를 피하기 위해 우회하고 있으며, 그로인한 재난으로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작가 역시 여행 중 아이슬란드 화산재를 만나 발이 묶였고, 그로 인해 이 작품이 탄생했다.

 

그의 두 번째 소설 역시 독특한 이력과 삶의 가치관을 가진 로맹 퓌에르톨라만의 개성과 엉뚱한 상상력이 보태어져 탄생한 작품이다. 소설 속 화자話者 레오 마샹은 오를리 공항에서 항공 관제사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이발을 하기 위해 미용실을 찾는다. 미용실에는 손님이 전혀 없고, 오직 자신과 나이 든 미용사 둘뿐이다.

 

자리에 앉은 레오 마샹은 무거운 침묵을 깨며 미용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보라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집에 우편물을 가져다주는 아주 예쁜 아가씨 집배원이 있는데 어느 날 뜬금없이 그의 일터인 관제 센터로 찾아와 자신의 이름은 프로비당스라고 밝히며, 하늘을 나는 걸 허락해 줄 수 있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여자 집배원이 비키니 차림이라는 것이다. 묵묵히 얘기를 듣고만 있던 노 미용사는 특히 이 대목에서 조금 더 집중한다. 미용사는 모든 걸 다 알고 싶다는 표정이고, 마샹은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싶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이 소설은 레오 마샹이 자신이 겪은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노인에게 이야기를 던지며 시작된다. 이후 레오 마샹은 스토리의 전달자로서 프로비당스, 즉 비키니를 입은 여자 집배원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독자들은 노 미용사처럼 레오 마샹이 꺼내놓는 이야기에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재밌는 소재가 있어도 적절한 설계도가 없으면 탄탄한 건물을 지을 수 없듯이 소설에 있어서도 잘 짜여진 계획과 의도 없이는 몰입감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없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액자형 구성을 선택했다. 남이 해주는 이야기, 특히나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하늘을 날겠다며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란 없을 것이다. 한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이야기가 파생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은 점점 더 커진다. 또한 직접 겪을 일을 전하는 것이니만큼 다소 황당할 수 있는 설정에도 레오 마샹이 들려주는 프로비당스의 하늘을 난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에 리얼리티를 더한다.


프로비당스는 모로코에 있는 입양 딸 자헤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오를리 공항을 향한다. 자헤라는 태어날 때부터 점액과다증을 앓고 있다. 이 병은 마치 어린 자헤라의 폐 속에 에펠탑보다 큰 구름을 삼킨 것 같은 느낌을 주며 산소호흡기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병이다. 실제로 작가는 그레고리 르마르샬(1983~2007)이라는 점액과다증으로 사망한 프랑스의 가수의 사례를 다루었다.

 

 

 

 

프로비당스는 모로코에서는 고칠 수 없는 양녀 자헤라의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아이를 데려오려고 모로코로 향하는 길에 공항 직원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는다. 아이슬란스에서 발생한 화산 분화로 인해 하늘이 온통 화산재 구름으로 뒤덮여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모로코로 갈 방법을 궁리하던 그녀는 우연히 중국 해적처럼 생긴 한 남자를 만나 직접 하늘을 날아 모로코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고, 하늘을 날기 위한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춘다.


첨단 과학이 발달한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프로비당스의 비행은 그저 우스꽝스럽게 비춰질 수도 있다.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이야기는 공상 만화에나 등장하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인간이 맨몸으로 하늘을 비행했다는 이야기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런 황당한 스토리를 프랑스 소설 특유의 유머로 익살스럽게 풀어냈다. 프로비당스가 하늘을 날며 오바마와 올랑드 대통령을 만나고, 위협적인 적란운을 만나 추락하며 슐뢰족에게 붙잡혀 간신히 목숨을 구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상으로 인해 읽는 우리들은 내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또한 프로비당스가 죽어가는 양녀를 구하기 위해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과 맞닥뜨리며 스스로 대처해 나가는 모습은 신선한 감동 그 자체이다.

 

 

항공대란이 발발하다

 

"좌우간 그 여자는 꽃무늬 비키니를 입고 있었습니다. 정말 예쁜 여자였어요. 여자는 다시 '나는 항공 흐름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요. 관제사님, 전 그저 당신이 나를 비행기로 여겨주기만을 바라요. 화산재 구름의 영향을 받을 정도로 높이 날진 않을 거예요. 공항 이용세를 내야 한다면 그건 걱정 마세요. 자 이거 받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여자는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5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더군요. 그 돈이 집배원용 가죽 가방에서 나온 게 아닌 건 분명합니다. 여자는 가방을 메고 있지 않았거든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여자의 결심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습니다. 여자가 정말 자신이 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슈퍼맨이나 메리 포핀스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잠깐 동안 저는 여자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p.12)

 

현 위치는 프랑스 오를리 공항이다. 프로비당스는 집배원이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집배녀(factrice)라는 단어의 사용을 허용했지만, 프로비당스는 종전처럼 집배원(facteur)이라는 말을 선호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단어를 가지고 지적하는 것에 이골이 났다. 그녀가 보기에 직업이 여성화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었고, 따라서 일부 여자들이 집배녀라는 세 글자 속에 여성 해방을 위해 바쳐 온 한평생이 담겨 있다고 믿는 것도 기꺼이 수긍하는 편이었다.

 

이런 문제는 그녀 자신과는 무관한 문제였다. 집배원이라는 단어는 5백 년부터 존재해 온 반면 집배녀의 역사는 고작 30년이었고 더구나 오늘날까지도 그 단어는 솔직히 사람들의 귀에 낯설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니까. 프로비당스는 집배원이라고 함으로써 쓸데없이 긴 설명을 하는 데 필요한 말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생후 7개월에 이미 첫 걸음을 뗄 정도로 성질이 급했던 그녀에게는 분명한 이점이었다.

 

 

 

 

콧수염 여자 경찰의 말이 맞았다. 전날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분화하면서 토해낸 화산재 구름 때문에 예정된 항공편의 절반이 이미 취소된 상태였다. 담배 연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시점에서 화산재까지 겹치다니, 상황은 전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몇 시간 후 공항 전체가 폐쇄될 수도 있는 상태였다. 프로비당스의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연기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그깟 구름이 뭐라고 그토록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지? 어째서 커다란 솜 덩어리, 거대한 먼지 덩어리 하나가 그토록 복잡한 기계들을 온통 주저앉힐 수 있단 말이지? 듣자하니 화산재 구름은 몇 년 전 체르노빌에서 출발해 유럽 하늘을 관통하면서 몇몇 피아노 천재(손이 세 개 달린 아이들), 캐스터네츠 대가(네 개의 고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를 탄생시킨 방사능 구름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 같았다. 당시 체르노빌 구름은 기적처럼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멈췄는데 그건 혹시 비자가 없었던 건 아닐까? ㅎㅎㅎ.

'구름을 삼켰다'는 표현은 아이가 앓고 있는 점액과다증이라는 병을 설명하기 위해 프로비당스가 찾아낸 표현이다. 아이의 허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 그 때문에 아이가 갖게 되는 느낌을 실감나게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어렴풋하게 수증기가 차오르는 듯한 답답함 때문에 아이는 조금씩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숨이 막혀왔다. 마치 어느 날 문득 부주의하게 덥석 삼킨 적란운이 몸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침마다 자헤라는 딸기를 얹은 구름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시리얼을 담듯 그걸 볼에 담았다. 목구멍을 따끔따끔하게 자극할 수도 있는 그걸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꿀꺽 삼켜야 했다. 세상엔 땅콩이나 굴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헤라는 가슴 깊은 구석에서 자라나 에펠탑만큼 거대하게 커지는 그 구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이따금씩 아이는 아예 파리라는 도시 전체를 먹고 있는 중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석재 교각과 오스망 남작풍의 근엄한 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들, 유리로 된 박물관들과 에펠탑이 있는 그 파리를 말이다.

'몹쓸 화산재 구름 같으니, 좌우지간 연기를 만들어내는 것들은 흡연자를 포함하여 모두 우리를 괴롭힌다니까! 대기권에 연기를 뿜어내는 그것들이야말로 이 검은 괴물을 빚어낸 장본인들이잖아. 그러고 보면 화산은 담배 제조자들이 고안해 낸 그럴 듯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아, 아이슬란드는 얼마나 좋은 구실이란 말인가! 누가 그 나라를 원망하겠어? 아이슬란드 사람들이야 물론 아닐 테지, 하긴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지조차 잘 모르는데 뭐. 당신들은 알고 있었어? 아이슬란드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느냐고? 학자들은 우리가 평생 히말라야 눈사람 예티를 만날 확률이 아이슬란드 사람을 만날 확률보다 높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고'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다

 

"하늘 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뭐라고요?"

 

 


프로비당스는 아주 낡은 라디오를 통해서 이 세상이 아닌 세계, 지구가 아닌 다른 별, 외계 언어만을 쓰는 어떤 별에서 보내는 전파를 잡기라도 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돌 지경이었다. 그녀는 중국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반드시 출발해야 한다면 그게 유일한 방법일 테죠. 당신이 직접 나는 것만이 해결책이란 말입니다"라고 말하자 남자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당신은 지금 나더러 반나절 만에 비행기 조종법을 배우라는 거예요?"
"누가 비행기를 조종하랍니까? 나는 당신에게 난다고 말했어요, 이런 빌어먹을!"

 

 

 

 

항공 관제사 레오 마샹에게 이륙을 요청하다

 

프로비당스는 꽃무늬가 프린트된 비키니를 골랐다. 그녀 자신이 할머니 방 양탄자 조각을 가지고 디자인했음직한 복고풍의 수영복이었지만, 좌우지간 가볍다는 장점만큼은 확실했다. 프로비당스는 탈의실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옷을 벗고 그 꽃무늬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제법 예뻤다. 균형 잡히지 않은 다이어트와 운동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거리에서 적지 않은 남자들이 뒤돌아볼 만큼 근사했다. 프로비당스는 정반대되는 요소들이 결합된 뛰어난 유전자적 형질을 타고났다. 예를 들어 날씬한데, 딱 달라붙는 스웨터를 입으면 동그랗고 단단한 가슴이 도드라진다거나, 말벌까지 시샘할 정도로 가느다란 개미허리임에도 엉덩이는 빵빵한 탓에 숱한 별명도 얻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어김없이 형성되는 남성 팬클럽 회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식이었다.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공항도 대통령에게 문을 닫을 순 없네"
"거대한 화산재 구름 때문에 비행기들이 날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아침 요약 서류 내용입니다"


"거보게, 자네는 방금 단 한 문장으로 훌륭하게 요약하지 않았는가 말일세! 거대한 화산재 구름 때문에 비행기들이 날 수 없습니다. 복잡할 거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자네가 알아두었으면 하는데, 그 어떤 화산재 구름도 프랑스 대통령 전용기의 이륙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온 일행은 오토바이 기동대를 동원하여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올랑드 대통령을 오를리 공항으로 안내했다. 공항에서는 콧수염을 기른 국경 경찰대 소속 경찰 한 명이 대통령에게 상황을 브리핑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버락 오바마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역시 마법처럼 나타난 또 다른 순백 치아의 금발 여인이 내민 별 모양 상자에서 작은 파란색과 흰색 천 조각을 꺼내 프로비당스가 입은 비키니 상의에 달아주었다. 그런 다음 그는 감격한 태도로 여자 집배원의 두 뺨에 키스했다.

 
"생큐", 영광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늘어난 무게가 비행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된 프로비당스가 머뭇거리며 인사했다. 검정색 옷을 입은 정보부 직원 두 명이 단호한 태도로 다시금 그녀를 꽉 잡아 비행기 출입문으로 안내했다. 거기서 프로비당스에게 여행 잘하라는 인사를 건넨 두 남자는 그녀가 미처 제로니모오오오를 외칠 사이도 없이 그녀를 허공으로 떠밀었다.

프로비당스가 비행 리듬을 되찾는 데에는 적어도 몇 초가량이 필요했다. 그녀가 원래 페이스를 되찾았다 싶었을 때 또다시 귓가에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비행기였다. 백색 동체 위에 프랑스 공화국이라고 적혀 있는 비행기는 불과 몇 분 전에 미국 비행기가 했듯이 그녀에게 접근했다. 공항이 모든 사람에게 폐쇄된 건 아닌 모양이야, 라고 프로비당스는 생각했다.

 

 

 

 

꿈을 꾸기에 인간이다

 

인간이 새처럼 날 수 있는 게 말이 되냐고 더 이상 따지지 말자. 판타지는 그냥 판타지일 뿐이다.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고 말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프로비당스는 우여곡절 끝에 새처럼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워 결국 프랑스 파리에서 모로코까지의 성공적인 비행을 완수하고 아이도 살려낸다. 소설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순간, 소설은 반전의 재미를 더해 준다.

 

화산 폭발이라는 자연 재해로 인한 재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이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개인이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게 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국가적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숙제를 우리들에게 던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개개인의 행복은 여지없이 침탈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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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슬림 - 중남미를 제패한 천재 경영자
디에고 엔리케 오소르노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슬림과 관련된 경제보고서나 그의 제국에 대한 경제적 시선만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비롯해 그가 끼치는 사회적인 영향,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그의 행동들과 실수를 담았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카를로스 슬림은 어떤 인물인가?

 

카를로스 슬림은 멕시코의 기업인이다. 그는 매년 발표되는 세계 부자 랭킹에서 꾸준히 최상위권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통신재벌'로 알려져있는데, 그가 운영하는 '텔멕스'는 멕시코 유선 통신 시장의 90%를 독점하고 있고, '아메리카모빌'은 2010년 기준 라틴아메리카 18개국에서 가입자가 2억6천만 명에 달하는 남미 최대 규모의 통신사다.

 

뿐만 아니라 금융업, 건설업, 담배, 레스토랑 체인 등 약 200개의 기업을 소유 및 경영하고 있는데 이들 기업체들 모두 멕시코 국내에서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여 그는 소위 '멕시코 경제 대통령'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나아가 손 대는 사업마다 성공함에 따라 '미다스의 손'이라고도 불린다.

 
10년 넘게 세계 부자 랭킹 1위를 독차지했던 미국의 빌 게이츠를 제치고 그는 2010년 처음으로 세계 부자 랭킹 1위에 등극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13년까지 4년 연속 1위 자리를 유지함으로써 비로소 전세계 최고의 부자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2016년 포브스에서 발표한 그의 추정 재산은 약500억 달러(한화로 약 59조1500억원)인데, 한국의 최고 부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약 11조8013억원)보다 약 5배 많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인 26세에 창업, 1982년 멕시코의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당시 헐값으로 사들인 수많은 회사들이 엄청난 가치로 불어나면서 슈퍼 리치가 되었다. 특히 1990년 국영 통신 업체였던 텔멕스가 민영화될 때 이를 인수한 것이 세계적인 대부호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많은 인터뷰와 기밀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 책은 세계적인 대부호 카를로스 슬림의 삶을 파헤치고 있다. 저자 디에고 엔리케 오소르노는 정치, 사회, 역사적 보도 기사를 참조할 뿐만 아니라, 카를로스 슬림의 직접적 증언을 통해 탁월한 사업 비전과 함께 수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레바논 이민자 아들의 독특한 삶을 들려준다.

 
책은 진부한 기업 성공담이나 경제적 지표 나열을 뛰어넘어 개발도상국 멕시코에서 출생해서 <포브스> 부호 순위 1위에 랭크된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들은 그의 출신과 복잡한 가족 및 사회관계들, 특별한 금융 전략들, 넓은 인맥들, 그리고 칭기즈칸이나 버나드 바루크에서 소피아 로렌에 이르는 그의 개인 관심사까지 알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책에서는 권력의 메커니즘과 우리 시대의 신자유주의 도덕 경제를 구현하는 이 사업가의 모순점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특히 그가 학문이나 예술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모습이나 방식은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과는 사뭇 다르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누군가를 비방 내지는 찬양하려는 의도 없이, 충분한 검토 내용을 바탕으로 투명하게 인간 카를로스 슬림이 누구인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사람들은 카를로스 슬림을 과시하지 않고도 많은 돈을 셀 줄 아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해외로 나가게 될 때는 호텔에 있거나, 아니면 집을 빌리거나 친구 집에서 머문다. 해외에는 어떤 저택도 구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3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의 홍보팀은 그가 입는 옷이 삭스 백화점의 세련되고 비싼 옷이 아니라, 그의 소유인 시어스 백화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옷이라고 했다. 그는 중요한 자리에서도 세련되지 않은 행동들을 가끔 보인다. 와인보다는 코카콜라 라이트를 선호하고 손에 일본식 땅콩을 들고 먹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한마디로 서민지향적인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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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레이디 - 육영수와 박정희, 그들만의 이야기
류보상 구성, 유정화.주기석.한창학 원안 / 북코리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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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또한, 육영수를 겪지 못한 세대에게는 낯선 사람일지도 모른다. 소설 '퍼스트레이디'는 신화로 채색된 육영수의 모습을 걷어 내고 인간 육영수의 사랑과 열정을 조명한다. 20세기를 살았고, 21세기에 더욱 빛나는 그녀의 정신과 삶을 대통령의 아내가 아닌, 한 여인의 일생 속에서 감동적으로 보여 줄 것이다. - '육영수, 그녀는 누구인가?' 중에서

 

 

육영수 여사를 아시나요?

 

충청도 제일 갑부 육종관의 둘째 딸로 태어난 육영수. 적극적으로 돈을 지향하는 아버지와 가치관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녀에게 아버지는 신뢰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때, 그녀는 변화의 삶을 선택하고, 미련 없이 아버지를 떠난다. 옥천에서 죽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시골에서 매우 드물게 서울의 명문 배화여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옥천 땅의 만석꾼인 육종관은 학문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에는 남달이 집착이 강했던 인물이다. 그의 형들은 고향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지만 그는 고향에 남아 가업을 이어 재산을 몇 배로 불렸던 것이다. 돈 모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 그는 매우 인색하고 괴팍하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었다. 대궐 같은 집에 수입한 장미꽃으로 가득 채우고 영사기를 틀어 활동사진을 감상할 정도였다. 

 

 

 


 

 

 

그녀에게 박정희는 인생 단 하나의 남자다. 불꽃같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살았다. 그의 가치관과 그녀의 가치관이 일치했을 때, 정말 행복한 삶이었다. 그가 국가를 위해 헌신할 때, 그녀는 국민을 위해 헌신했다. 누구도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모든 국민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국민의 사랑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긍지였고, 남편의 사랑은 그녀가 살아가는 행복이었다.

 
어느 날, 남편 박정희의 지독한 목적 지향성으로 국민의 눈길이 서늘해졌을 때, 그녀의 번뇌는 깊어졌다. 아버지를 떠나 남편을 선택하고, 국민을 사랑했지만,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는다. 남편과의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고뇌 또한 더욱 깊어졌다.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 자기 계발 욕구, 타인에 대한 능동적 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표현했던 탁월한 유머까지. 그녀는 현대 여성들의 진정한 롤모델일지도 모른다.

 

 

  

 

육군본부 정보국의 박정희 소령, 그는 인민군 피습 때 알게 된 장천웅 일병을 병문안 차 들린 육영수를 처음 만난다. 그녀는 장일병의 주인집 작은 아씨였다. 그때만 해도 지체 높은 집안이나 큰 부잣집에선 머슴살이를 하는 소위 하인들이 있었다. 장일병의 부모는 갑오경장 때 면천免賤을 했지만 양부모가 죽은 바람에 고아 신세가 되자 육씨 집안에서 거둬 키웠다.

 

첫 눈에 호감을 느낀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후배인 송재천 소위에게 병원 방문록에 기재된 주소를 거론하며 교동리를 잘 아느냐고 묻자 송소위는 자신의 고향을 왜 묻는지 의아해 하던 차에 육영수에 대해 묻자 깜짝 놀라고 만다. 왜냐하면 육영수는 그의 이종사촌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그 지역에선 모두 알아주는 옥천 땅의 만석꾼 육종관의 딸이었다. 이후 박정희는 송소위를 통해 육영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박정희라고 합니다"

 

박정희는 송재천을 통해 적극적인 구애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걸림돌은 그녀의 아버지 육종관이었다. 첫 대면 인사에 육종관은 박정희가 탐탁치 않았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옆에는 어린 하인이 무릎을 꿇은 채 구겨진 지전紙錢을 다리미로 펴고 있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박정희에게 백 환짜리 종잇돈을 요구했다. 이에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건네자 습관적으로 돈을 펴며 "돈 귀한 줄 모르는 것들이 돈을 꼭 험하게 다뤄"라며 다시 그 돈을 박정희 앞에 툭 던졌다. 그런 태도에 박정희의 얼굴은 검붉어졌다.

 

분위기가 매우 어색한 때에 노크 소리와 함께 밝은 미소를 띤 육영수가 다과를 내려놓았다. 이를 본 박정희는 격앙된 감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박정희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에를 갖추고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한편, 육종관은 딸을 바라보는 박정희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코 마누라까지 나가라고 한 후 두 사람만이 방에 남았다.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박정희를 매섭게 바라보자, 박정희도 전혀 기죽지 않고 육종관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육종관은 자신의 면전에서 이렇게 당당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내 속마음을 숨기고 박정희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가진 게 얼마나 되나?'

"재산은 없지만, 누구보다도 따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재산 한 푼 없는 빈털털이 주제에 내 딸을 달라고?"

"그래서 허락을 못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아니? 이게 어디서 벼르장머리 없는 짓이야?"

"무례한 건 어르신 아니요? 초면에 하대하고 거지 취급을 하지 않나"

"전 영수씨와 교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줄 아십시오"

"너 같은 놈한테는 딸이 아니라 종년도 못 줘!"

"또 찾아뵙겠습니다"

 

당한 게 분했는지 육종관은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댔다. 한편, 안하무인이던 남편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 혼이 난 것이 통쾌했는지 그의 아내, 즉 욱영수의 모친은 중매를 넣었던 송재천을 불러 박소령의 속마음을 알아본 후 딸도 그다지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으므로 둘의 결혼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대구 시내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아버지 육종관은 끝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신부 측 인사로는 그녀의 모친, 이종사촌 송재천, 그리고 장천웅 뿐이었다. 드디어 육영수는 충청도 갑부의 딸에서 가난한 군인의 아내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다.

 

신혼 생활은 충현동의 셋방에서 출발했다. 인상 사나운 주인집 아줌마는 초인종 소리에 대문을 열어주며 늘 "셋방 주제에 맨날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문 열어 주기도 귀찮아 죽겠네"라며 면박을 주었다. 셋방 안은 곰팡내가 가득했다. 벽지는 빗물로 얼룩져 있고, 바닥엔 군데군데 판초우의까지 깔려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오랫 동안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신당동에 허름한 가옥을 사들임으로써 비로소 마이홈 시대가 열렸다. 집수리를 마치고 입주하는 날 박정희는 집문서를 아내에게 건넸다. '육영수'라고 적혀 있었다. 군인의 박봉을 쪼개고 쪼개서 관리한 노력을 보상했던 것이다. 추후 신당동 집에 젊은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5.16 거사를 위한 선언을 했다. 거사는 성공했다. 박정희는 5월 18일에 귀가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육영수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젊고 아름다운 영부인이었다. 그녀의 첫 임무는 난민촌 의료소 방문이었다. 행사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럼에도 영부인은 침착하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했다. 난장판이 된 주변 청소를 하다가 쓰레기 봉지를 버릴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의료소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또 다른 감춰진 세상이 존재했다. 마치 지옥같았다. 천막촌 여인들이 둘러앉아 폐품 처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비단 이불에 쌀밥 처먹던 여자가 뭘 알겠어?'

'집이 그렇게 부자라면서? 그러니 대통령 마누라 자리도 샀겠지'

'철없는 영부인이 더 무섭네, 걱정이다, 걱정'

 

오늘 들었던 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맴돈다. 마음이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래!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창밖을 보던 영부인의 얼굴에서 수심이 사라지고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환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영부인의 나환자촌 방문에 대해 청와대 사람들 사이에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리고 비서실을 비롯한 경호실에서는 굳이 나환자촌까지 영부인이 직접 찾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말들이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끈기 있게 준비했기에 드디어 나환자촌 방문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비서실에서 오늘 일정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영부인은 급히 부녀회원들이 모인 회의실로 향했다. 그러나 회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부녀회장 혼자서 영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전염병도 도는데 나환자촌은 매우 위험하다고 부녀회원들이 생각하고 있어서 이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는 부녀회장의 보고였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들이 전염되면 영부인이 책임을 지겠냐면서 문둥이한테는 가기 싫다는 말까지 했다.

 

"같이 가자는 소리 안 할테니 그만두세요. 의료협회장 부인이 의료 상식이 없다는 건 분명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 부분은 대통령에게 직언하겠어요"

 

경호원들과 비서진에게 통보도 없이 영부인은 천웅과 최 비서만을 대동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철조망으로 얼기설기 막혀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는 나환자촌 입구에는 '나병은 낫는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더 이상 차가 진입할 수 없어서 천웅이 지도를 보면서 앞장 서 길잡이 했다. 정착촌에 들어섰을 때 입구에서 나환잗들이 대형 드럼통에 돼지비계를 삶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와 악취가 진동했다. 정착촌 자치회장이 놀란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못 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어떻게 왔냐고 놀란 표정이었다.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리는 어린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코를 풀어주는 영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환자들은 박수를 쳤다. 환영 인사를 마치고 자치회 사무실로 초대되었다.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나누는데, 노크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환자가 있었다. 당황한 사람은 영부인이 아니라 자치회장이었다.

 

"방 씨, 무슨 일입니까? 이게 무슨 불손한 짓입니까?"

"헤헤, 귀한 손님이 오셨다 해서 이거라도 좀 드셔 보라고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이리 와서 앉으세요"  

 

육영수 옆에 앉은 방 씨는 보란 듯이 일그러진 손으로 계란을 깠다. 그러고는 두 조막손으로 계란을 받쳐 들고 육영수 앞에 내밀며 씩 웃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최 비서가 거의 기절할 것처럼 놀라 눈을 감아버렸다. 보다 못한 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면서 방 씨의 팔을 움켜잡았다.

"왜요? 문둥이는 높으신 분들한테 겨란 하나도 대접 못 한답니까? 이 팔 놔요. 대통령 사모님께 겨란 드려야 할 게 아뇨?"

 


비웃는 듯한 방 씨의 묘한 웃음 속에서 장기간 세상의 학대와 멸시를 받아 온 나환자들의 비애를 대변하는 듯한 그의 날카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방 씨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영부인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에 육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방 씨에게서 계란을 받아들었다.


 

"맛있겠네요, 고마워요"
육영수가 서슴없이 계란을 한입 베어 물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어요? 여기 사람이 몇인데요?"

 

 


영부인은 행사에 초청할 어린이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 내일이 바로 어린이대공원 개장일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복지에 유독 관심이 깊었던 터라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이 부족한 현실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 능동에 있던 서울 컨트리클럽 골프장이 땅을 기부하는 바람에 어린이를 위한 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내가 다음에 데려가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던 박정희도 막내도 어린아이인데 데려가자고 거들었다. 그러나, 영부인은 결단코 불가하다고 못을 박았다. 왜냐하면 당일 행사의 주인공은 어린아이들인데, 만약에 막내가 참석하면 막내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자연히 아이들 대접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8.15 경축 행사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옷장 앞으로 가서 넥타이를 골라 매려고 하자 영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릴 게 있는데 꼭 좀 들어주세요"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주춤하다가 대답 없이 넥타이만 계속 고르자 그녀는 호소하는 눈빛으로 할 말을 했다. 이 날이 그녀의 마지막 날일지 어찌 알았겠는가.

 

"떠나야 할 때를 놓치지 마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에요"
박정희가 못 들은 척하고는 육영수에게 다시 재촉했다.
"늦었으니 빨리 준비하라고"
재촉하는 박정희를 보던 육영수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죽었어요"
순간 박정희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다시 물어보려다가 옷장 거울에 비치는 육영수의 얼굴을 보고는 멈칫했다.
"영안실에 가 봐야겠어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박정희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거길 왜 가? 당신이 가야 할 곳은 국립극장이야. 지하철 개통식이고"
육영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안타깝게 죽은 노동자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무척 괴로웠어요. 이제 영부인으론 가지 않아요. 인간이자 어머니로서 가는 거예요"
육영수의 말에 감정이 격해진 박정희가 맞받았다.
"당신은 일개 자원봉사자가 아니야, 국모야 국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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