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 - 육영수와 박정희, 그들만의 이야기
류보상 구성, 유정화.주기석.한창학 원안 / 북코리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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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또한, 육영수를 겪지 못한 세대에게는 낯선 사람일지도 모른다. 소설 '퍼스트레이디'는 신화로 채색된 육영수의 모습을 걷어 내고 인간 육영수의 사랑과 열정을 조명한다. 20세기를 살았고, 21세기에 더욱 빛나는 그녀의 정신과 삶을 대통령의 아내가 아닌, 한 여인의 일생 속에서 감동적으로 보여 줄 것이다. - '육영수, 그녀는 누구인가?' 중에서

 

 

육영수 여사를 아시나요?

 

충청도 제일 갑부 육종관의 둘째 딸로 태어난 육영수. 적극적으로 돈을 지향하는 아버지와 가치관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녀에게 아버지는 신뢰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때, 그녀는 변화의 삶을 선택하고, 미련 없이 아버지를 떠난다. 옥천에서 죽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시골에서 매우 드물게 서울의 명문 배화여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옥천 땅의 만석꾼인 육종관은 학문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에는 남달이 집착이 강했던 인물이다. 그의 형들은 고향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지만 그는 고향에 남아 가업을 이어 재산을 몇 배로 불렸던 것이다. 돈 모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 그는 매우 인색하고 괴팍하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었다. 대궐 같은 집에 수입한 장미꽃으로 가득 채우고 영사기를 틀어 활동사진을 감상할 정도였다. 

 

 

 


 

 

 

그녀에게 박정희는 인생 단 하나의 남자다. 불꽃같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살았다. 그의 가치관과 그녀의 가치관이 일치했을 때, 정말 행복한 삶이었다. 그가 국가를 위해 헌신할 때, 그녀는 국민을 위해 헌신했다. 누구도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모든 국민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국민의 사랑은 그녀에게 살아가는 긍지였고, 남편의 사랑은 그녀가 살아가는 행복이었다.

 
어느 날, 남편 박정희의 지독한 목적 지향성으로 국민의 눈길이 서늘해졌을 때, 그녀의 번뇌는 깊어졌다. 아버지를 떠나 남편을 선택하고, 국민을 사랑했지만,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는다. 남편과의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고뇌 또한 더욱 깊어졌다.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 자기 계발 욕구, 타인에 대한 능동적 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표현했던 탁월한 유머까지. 그녀는 현대 여성들의 진정한 롤모델일지도 모른다.

 

 

  

 

육군본부 정보국의 박정희 소령, 그는 인민군 피습 때 알게 된 장천웅 일병을 병문안 차 들린 육영수를 처음 만난다. 그녀는 장일병의 주인집 작은 아씨였다. 그때만 해도 지체 높은 집안이나 큰 부잣집에선 머슴살이를 하는 소위 하인들이 있었다. 장일병의 부모는 갑오경장 때 면천免賤을 했지만 양부모가 죽은 바람에 고아 신세가 되자 육씨 집안에서 거둬 키웠다.

 

첫 눈에 호감을 느낀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후배인 송재천 소위에게 병원 방문록에 기재된 주소를 거론하며 교동리를 잘 아느냐고 묻자 송소위는 자신의 고향을 왜 묻는지 의아해 하던 차에 육영수에 대해 묻자 깜짝 놀라고 만다. 왜냐하면 육영수는 그의 이종사촌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그 지역에선 모두 알아주는 옥천 땅의 만석꾼 육종관의 딸이었다. 이후 박정희는 송소위를 통해 육영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박정희라고 합니다"

 

박정희는 송재천을 통해 적극적인 구애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걸림돌은 그녀의 아버지 육종관이었다. 첫 대면 인사에 육종관은 박정희가 탐탁치 않았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옆에는 어린 하인이 무릎을 꿇은 채 구겨진 지전紙錢을 다리미로 펴고 있었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박정희에게 백 환짜리 종잇돈을 요구했다. 이에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건네자 습관적으로 돈을 펴며 "돈 귀한 줄 모르는 것들이 돈을 꼭 험하게 다뤄"라며 다시 그 돈을 박정희 앞에 툭 던졌다. 그런 태도에 박정희의 얼굴은 검붉어졌다.

 

분위기가 매우 어색한 때에 노크 소리와 함께 밝은 미소를 띤 육영수가 다과를 내려놓았다. 이를 본 박정희는 격앙된 감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박정희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에를 갖추고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한편, 육종관은 딸을 바라보는 박정희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코 마누라까지 나가라고 한 후 두 사람만이 방에 남았다.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박정희를 매섭게 바라보자, 박정희도 전혀 기죽지 않고 육종관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육종관은 자신의 면전에서 이렇게 당당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내 속마음을 숨기고 박정희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정희는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가진 게 얼마나 되나?'

"재산은 없지만, 누구보다도 따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재산 한 푼 없는 빈털털이 주제에 내 딸을 달라고?"

"그래서 허락을 못 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아니? 이게 어디서 벼르장머리 없는 짓이야?"

"무례한 건 어르신 아니요? 초면에 하대하고 거지 취급을 하지 않나"

"전 영수씨와 교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줄 아십시오"

"너 같은 놈한테는 딸이 아니라 종년도 못 줘!"

"또 찾아뵙겠습니다"

 

당한 게 분했는지 육종관은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댔다. 한편, 안하무인이던 남편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 혼이 난 것이 통쾌했는지 그의 아내, 즉 욱영수의 모친은 중매를 넣었던 송재천을 불러 박소령의 속마음을 알아본 후 딸도 그다지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으므로 둘의 결혼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대구 시내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아버지 육종관은 끝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신부 측 인사로는 그녀의 모친, 이종사촌 송재천, 그리고 장천웅 뿐이었다. 드디어 육영수는 충청도 갑부의 딸에서 가난한 군인의 아내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다.

 

신혼 생활은 충현동의 셋방에서 출발했다. 인상 사나운 주인집 아줌마는 초인종 소리에 대문을 열어주며 늘 "셋방 주제에 맨날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문 열어 주기도 귀찮아 죽겠네"라며 면박을 주었다. 셋방 안은 곰팡내가 가득했다. 벽지는 빗물로 얼룩져 있고, 바닥엔 군데군데 판초우의까지 깔려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오랫 동안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신당동에 허름한 가옥을 사들임으로써 비로소 마이홈 시대가 열렸다. 집수리를 마치고 입주하는 날 박정희는 집문서를 아내에게 건넸다. '육영수'라고 적혀 있었다. 군인의 박봉을 쪼개고 쪼개서 관리한 노력을 보상했던 것이다. 추후 신당동 집에 젊은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5.16 거사를 위한 선언을 했다. 거사는 성공했다. 박정희는 5월 18일에 귀가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육영수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젊고 아름다운 영부인이었다. 그녀의 첫 임무는 난민촌 의료소 방문이었다. 행사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럼에도 영부인은 침착하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했다. 난장판이 된 주변 청소를 하다가 쓰레기 봉지를 버릴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의료소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또 다른 감춰진 세상이 존재했다. 마치 지옥같았다. 천막촌 여인들이 둘러앉아 폐품 처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비단 이불에 쌀밥 처먹던 여자가 뭘 알겠어?'

'집이 그렇게 부자라면서? 그러니 대통령 마누라 자리도 샀겠지'

'철없는 영부인이 더 무섭네, 걱정이다, 걱정'

 

오늘 들었던 소리가 귓가에 아직도 맴돈다. 마음이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래!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창밖을 보던 영부인의 얼굴에서 수심이 사라지고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환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영부인의 나환자촌 방문에 대해 청와대 사람들 사이에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리고 비서실을 비롯한 경호실에서는 굳이 나환자촌까지 영부인이 직접 찾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말들이 솔솔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끈기 있게 준비했기에 드디어 나환자촌 방문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비서실에서 오늘 일정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고 영부인은 급히 부녀회원들이 모인 회의실로 향했다. 그러나 회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부녀회장 혼자서 영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전염병도 도는데 나환자촌은 매우 위험하다고 부녀회원들이 생각하고 있어서 이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는 부녀회장의 보고였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들이 전염되면 영부인이 책임을 지겠냐면서 문둥이한테는 가기 싫다는 말까지 했다.

 

"같이 가자는 소리 안 할테니 그만두세요. 의료협회장 부인이 의료 상식이 없다는 건 분명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이 부분은 대통령에게 직언하겠어요"

 

경호원들과 비서진에게 통보도 없이 영부인은 천웅과 최 비서만을 대동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철조망으로 얼기설기 막혀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는 나환자촌 입구에는 '나병은 낫는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더 이상 차가 진입할 수 없어서 천웅이 지도를 보면서 앞장 서 길잡이 했다. 정착촌에 들어섰을 때 입구에서 나환잗들이 대형 드럼통에 돼지비계를 삶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와 악취가 진동했다. 정착촌 자치회장이 놀란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못 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어떻게 왔냐고 놀란 표정이었다.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리는 어린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코를 풀어주는 영부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환자들은 박수를 쳤다. 환영 인사를 마치고 자치회 사무실로 초대되었다.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나누는데, 노크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환자가 있었다. 당황한 사람은 영부인이 아니라 자치회장이었다.

 

"방 씨, 무슨 일입니까? 이게 무슨 불손한 짓입니까?"

"헤헤, 귀한 손님이 오셨다 해서 이거라도 좀 드셔 보라고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이리 와서 앉으세요"  

 

육영수 옆에 앉은 방 씨는 보란 듯이 일그러진 손으로 계란을 깠다. 그러고는 두 조막손으로 계란을 받쳐 들고 육영수 앞에 내밀며 씩 웃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최 비서가 거의 기절할 것처럼 놀라 눈을 감아버렸다. 보다 못한 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면서 방 씨의 팔을 움켜잡았다.

"왜요? 문둥이는 높으신 분들한테 겨란 하나도 대접 못 한답니까? 이 팔 놔요. 대통령 사모님께 겨란 드려야 할 게 아뇨?"

 


비웃는 듯한 방 씨의 묘한 웃음 속에서 장기간 세상의 학대와 멸시를 받아 온 나환자들의 비애를 대변하는 듯한 그의 날카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방 씨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영부인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에 육영수는 미소를 지으며 방 씨에게서 계란을 받아들었다.


 

"맛있겠네요, 고마워요"
육영수가 서슴없이 계란을 한입 베어 물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어요? 여기 사람이 몇인데요?"

 

 


영부인은 행사에 초청할 어린이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 내일이 바로 어린이대공원 개장일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복지에 유독 관심이 깊었던 터라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이 부족한 현실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 능동에 있던 서울 컨트리클럽 골프장이 땅을 기부하는 바람에 어린이를 위한 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내가 다음에 데려가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던 박정희도 막내도 어린아이인데 데려가자고 거들었다. 그러나, 영부인은 결단코 불가하다고 못을 박았다. 왜냐하면 당일 행사의 주인공은 어린아이들인데, 만약에 막내가 참석하면 막내에게 더 신경을 쓰고 자연히 아이들 대접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8.15 경축 행사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옷장 앞으로 가서 넥타이를 골라 매려고 하자 영부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드릴 게 있는데 꼭 좀 들어주세요"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주춤하다가 대답 없이 넥타이만 계속 고르자 그녀는 호소하는 눈빛으로 할 말을 했다. 이 날이 그녀의 마지막 날일지 어찌 알았겠는가.

 

"떠나야 할 때를 놓치지 마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에요"
박정희가 못 들은 척하고는 육영수에게 다시 재촉했다.
"늦었으니 빨리 준비하라고"
재촉하는 박정희를 보던 육영수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죽었어요"
순간 박정희가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다시 물어보려다가 옷장 거울에 비치는 육영수의 얼굴을 보고는 멈칫했다.
"영안실에 가 봐야겠어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박정희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거길 왜 가? 당신이 가야 할 곳은 국립극장이야. 지하철 개통식이고"
육영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안타깝게 죽은 노동자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무척 괴로웠어요. 이제 영부인으론 가지 않아요. 인간이자 어머니로서 가는 거예요"
육영수의 말에 감정이 격해진 박정희가 맞받았다.
"당신은 일개 자원봉사자가 아니야, 국모야 국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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