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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 - 인간의 본능을 사로잡는 세계관―캐릭터―플롯의 원칙
전혜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5월
평점 :
더 나아가 ‘이야기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왔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이르렀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이야기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는 당위성과 개연성이 필요한가?’,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결핍을 극복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간 결과물입니다. - '들어가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https://blog.naver.com/wj_booking
책의 저자 전혜정은 스토리 작가이자 연구자이며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 창작전공 교수이다. 만화를 좋아해서 대학에서 시각디자인 및 영상디자인을 전공,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공부를 마친 후 막상 할 일이 없었다. 이에 스토리 창작을 시작, 단편 소설 작가로 데뷔했으며 콘텐츠 기획 PD를 거쳐, 스토리텔링 회사 미디어피쉬를 설립했다.
저자의 '스토리텔링 작법 강의'는 청강대 학생들의 인기 강의 중 하나인데, 이를 책으로 출간했다. 즉 인간은 왜 그런 이야기를 쓰는가, 모든 이야기는 결핍에서 시작된다, 본능을 자극하는 플롯 설계의 원칙 등 3부로 구성된 책은 총 21강講을 담고 있다. 책을 통해 저자의 명강의를 만날 수 있는데, 인상적인 내용을 요약해 본다.
왜 그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
특정한 장르나 소재를 ‘다룰’ 수는 있지만, ‘왜’ 그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대답할 수 있나? ‘그냥 미스터리가 재밌어서요.’ ‘피폐물이 제 취향이에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이야기를 쓸 때 장르와 소재만 맴돌다가 끝나게 된다. 내가, 그리고 인류가 ‘왜’ 그 장르를 선택해 왔는지를 모르면 여전히 미궁 속에 갇혀있는 처지나 다름없다.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지만 실은 그 어떤 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개인 취향’이라는 미궁 말이다.
그 이야기를 왜 쓰고 싶은지 대답할 수 없다면 그건 여전히 ‘쓰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듯이,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받는 이야기를 쓰거나 제대로 감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저것 복잡한 논의는 제쳐놓고 일단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인과법칙 없이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허구의 인과관계가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 ‘개연성’을 감각하는 방식이다. 증명도 어려운 이 ‘허구의 인과’를 인간은 진심으로 믿어왔다. 그냥 들어가기도 힘든 동굴 안에 값비싼 기회비용을 들여 웅장한 그림을 그릴 만큼. 세상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싶었던 인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화와 종교, 민담과 전설 같은 이야기가 발명된다.
부조리를 견디며 살아가는 법
멀티버스 세계관을 다룬 다니엘 콴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년)를 살펴보자. 조이는 멀티버스를 전부 경험한 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던 것도 당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찰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의미한 메시지나 질서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허무만이 진실이었다. 압도적인 부조리 앞에서 조이는 세계를 파괴하고 자신도 사라지려 한다.
이 영화는 허무에 사로잡힌 딸 조이를 구하기 위해 온갖 유니버스를 넘나드는 엄마 에블린의 이야기이다. 에블린은 모든 것이 찰나일지라도, 그 짧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소중한 가치들이 잿빛으로 변할지언정 찰나에도 함게 잇고 싶은 마음에 충실한다. 우주의 부조리를 어쩔 수 없지만 인간이 이를 버티고 살아가는 법은 그저 매 순간 옆 사람에게 다정해지는 것이라는 아포리즘으로 이 영화의 세계관은 완성된다. 즉 '세계에는 메시지가 없다'라는 사실이다.
전쟁과 질병, 차별과 혐오, 불공평, 재난,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 등 부조리가 만연한 세계에 던져져 불안한 우리는 모두 ‘에블린’의 딸이다. 조이처럼 감정과 인성이 모조리 마모된 채 자포자기하여 블랙홀로 걸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삶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삶이라는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다.

(사진, 당위의 삼각형)장르문학의 세계관에서 사건은 도미노처럼 연결된다
인류가 좋아해 온 이야기들은 당위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사건의 개연성을 갖추고 있다. 작가가 신화적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세계의 규칙을 만들고 무대를 창조한 이야기들이다. 한마디로 ‘허구’란 소리다.
설령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일지라도 창작자가 원하는 당위적 세계관에 그 실화가 기가 막힌 우연으로 들어맞을 때는 모티브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정윤철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말아톤>(2005년)은 자폐가 있는 마라토너 배형진 씨의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로, 주인공이 온갖 어려움 끝에 마라톤을 완주하는 이야기이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모가디슈>(2021년)는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 대사관 직원들이 목숨을 걸고 함께 탈출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년)은 천재 사기꾼 프랭크 애버그네일이 FBI 수사관의 끈질긴 추적 끝에 붙잡혀, 나중에 FBI 자문으로 일하기도 했다는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실화들은 해피엔딩이거나 적어도 정의, 우정, 희망, 화개의 메시지가 배치된 세계관에 부합한다.
장르문학엔 대체로 이런 방향성이 있다. 당위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질서가 있다. 이는 작품 속 세계에 작가가 만든 허구의 구조가 있다는 뜻이다. 신화는 이 구조를 아포리즘으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심청전>은 당대 사람들이 '효孝'라는 신화를 따르며 대리만족하도록 만들면서 장르문학의 역할을 했다.
서사문학이라면 사건의 흐름과 개연성을 고려하기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장르문학은 이를 더더욱 기술적으로 철저히 따른다. 사건의 흐름과 개연성은 장르문학에서 ‘플롯’이 된다. 마지막 도미노 패가 쓰러진 이유는 첫 번째 도미노 패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극의 1막에 권총이 등장하면 최소한 3막에는 발사된다. 작가는 도미노 패들이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넘어지도록 설계하고, 그 결과 독자는 마지막 도미노 패가 넘어질 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결핍, 삼각구조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본질
이야기의 구조를 세계관, 인물, 플롯으로 딱 잘라서 구분하기는 어렵다. 보물찾기 게임은 보물이 '결핍'된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인물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한 것이 세계관이고, 행동으로 확장한 것이 플롯이다.’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여기서 바로 인물의 ‘결핍’이 열쇠이다. 인물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찾기 위해 더 넓은 시공간을 누비고 더 많은 행동을 하려고 한다. 결핍된 것은 인물의 바깥에 있으므로 움직여서 경험의 세계를 넓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무대의 범위가 세계관이고, 게임의 규칙에 따라 배치된 사건들이 플롯이다. 최종적으로 결핍을 채워주고 인물이 성장하면, 그 성장의 크기만큼이 세계관의 범위와 플롯의 궤적이 된다. 결과적으로 인물에게 결핍된 것은 세계관의 질서였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일으키는 사건은 정답에 다가가는 풀이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 마땅히 주어져야 했지만 부조리한 현실 때문에 박탈당했던 무언가를 회복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인간은 사랑해왔다. 인물의 결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결핍된 것이 바로 작가의 메시지이다. 강의는 '인간의 결핍'으로 이어져간다.
인물에 대한 호기심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년)의 주인공 멜빈은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세계관의 신화적 질서가 결핍된 이물이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 핵심 메시지를 결핍한 인물은 열등감을 느낀다. 멜빈은 자신이 사랑받기 어려운 외모와 나이, 그리고 강박적이고 까칠한 성격을 가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사랑이 전혀 필요 없는 척을 한다.
더 강박적으로, 더 까칠하게 군다. 카페에서 늘 앉는 자리에만 앉으려고 괴팍스럽게 고집을 부리며, 같은 색의 보도블록만 밟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무시한다. 치료로 강박을 극복할 수 있지만 일부러 내버려 둔다. 자신이 외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까 봐 누가 개 한 마리만 맡겨도 극심하게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려운 거다.
하지만 멜빈이 개에게 정을 붙이고 주인에게 돌려보낼 때 남몰래 훌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는 이렇게 슬퍼지는 것이, 누군가를 잃고 괴로워지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사람을 싫어하며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모습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열등감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심리적 방어기제이다. 이후 그는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개롤이라는 여성을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주인공에 몰입하게 되는 점도 마찬가지로 우리들 또한 관계에 대한 결핍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야기 속 인물에게 대리만족하고 싶으므로 그의 행동과 선택에 최소한의 당위성이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왜 인물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자 한다.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커질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그의 행동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때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다. 처음에 이해가 어렵거나 심지어 반감까지 들었던 인물일수록 오히려 더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과적으로 그 인물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토록 어렵게 공감한 인물에게는 더 큰 애정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독자의 기본적인 심리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공감을 유도하는 메커니즘을 잘못 이해하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어떤 결핍을 가졌는지 짐작되지 않는 주인공이 누구나 할 법한 선택만 하는 거다. 주인공에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뿐더러 그가 어려움을 겪어도 공감이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플롯의 6가지 원형
결핍을 향한 여정
도플 갱어와의 대결
극적인 성장
사랑의 덫
운명적 선택
질서의 회복(혹은 파괴)
이밖에도 저자의 강의는 '캐릭터:결핍 버튼을 누르면 이야기가 시작된다', '메시지: 작가는 세계관의 질서로 말한다', '세계관: 첫 화에서 약속하고 끝가지 지켜라', 본능을 자극하는 플롯 설계의 원칙까지 이어진다. 책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을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현재 창작 활동 중이거나 창작지망생이라면 이 책의 필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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