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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타이탄들의 전쟁 - 1조 달러 시장의 승자를 결정할 게임의 법칙
게리 리블린 지음, 김동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평점 :
1990년대 중반부터 실리콘밸리 안팎의 사정에 대해 글을 써 온 나로서는 또 다른 실존적 질문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AI가 실리콘밸리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실리콘밸리의 본질은 언제나 스타트업이었다. 구글과 페이스북은 차고와 친구 집 거실에서 출발해 기술 기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AI, 특히 생성형 AI 분야는 성공에 따른 보상이 엄청난 만큼 초기 자본 또한 많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이 과연 스타트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낳았다.- '서문' 중에서

총 19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저자 게리 리블린은 세계적인 탐사 보도 전문 기자로 퓰리처상 수상 경력이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IT 업계의 이면을 날카롭게 취재해 왔다. <뉴욕타임스> 실리콘밸리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뉴스위크>, <포춘>,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와이어드> 등 유수의 매체에 기고해 왔다.
책은 AI 시장이 예전처럼 ‘쉽게 돈을 버는’ 시대가 아님을 선언한다. 대규모 모델 개발에 필요한 자본이 천문학적 수준에 달하면서, 기술력이 절대적이지 않게 되었다. 벤처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과연 AI 기업이 실제 수익을 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과거 '닷컴 버블' 시절에 제기되었던 화두와도 닮아 있다. 실제 챗GPT를 만든 오픈AI는 2024년 37억 달러 매출에도 불구하고 연간 약 50억 달러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여름, 다트머스대학교 캠퍼스에 20여 명의 연구자들이 모였다. '인공지능'이란 용어를 처음 만든 이 대학교의 젊은 수학 교수 존 매카시가 이들을 초대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다트머스 하계 인공지능 연구 프로젝트'는 인공지능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매카시보다 앞선 연구자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암호를 해독한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이었다. 그가 1948년에 쓴 논문 '지능을 가진 기계'에서 "기계가 지능을 지닌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연구를 제안한다"라고 말했다. 2년 후 그가 이미테이션 게임이라고 명명한 시험법까지 제안했다. 그는 2000년까지는 컴퓨터가 이 시험을 통과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그 예측은 20년 이상 빗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크게 주목받은 연구자가 있었다. 코널대학교 교수였던 프랭크 로젠블랫으로 연구 논문에서 퍼셉트론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논문에서 그는 "지각과 인지, 개념 형성, 경험을 일반화하는 능력 등, 그동안 인간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기능을 과연 기계가 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인공 신경망을 구축해 인간의 두뇌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는 미 해군연구소로부터 연구 기금을 지원받았다.
"해군, 생각하는 프랑켄슈타인을 발명하다"
이에 관해 스탠퍼드 인공지능연구소 소장 크리스 매닝은 로젠블랫의 '생각하는 컴퓨터'는 실제보다 과장된 면이 많지만 인간의 뇌를 닮은 컴퓨터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개척한 것은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오늘날 이 기술은 '머신러닝'으로 불린다. 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과업을 수행하는 능력을 키우는 방식이다.
동료 학자들은 기자들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956 여름, 다트머스에 모인 학자들은 당시에 인공지능보다는 '규칙 기반 컴퓨팅'이란 접근 방식에 더 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즉 인간처럼 학습하는 신경망의 구축보다는 인간의 지식과 추론 능력을 컴퓨터가 따라 하도록 일일이 프로그래밍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이 방식은 훗날 '전문가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이 노선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인물은 MIT 교수 마빈 민스키였다.
민스키는 다트머스 회의의 공동 주최자였고, 훗날 존 메카시와 함께 MIT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창설했다. 1967년, 민스키는 "한 세대 안에 인공지능 관련 문제 대부분이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같은 노선을 따르던 허버트 사이먼도 1960년대 중반이면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계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럼에도 AI의 발전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컴퓨터 자체의 한계에 있었다.
1982년에 이르러 마빈 민스키는 AI가 지금까지 과학이 맞닥뜨린 문제 중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인정했다. 결국 희망은 신경망 기술에 있다는 점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로젠블랫에 대한 사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로젠블랫은 <퍼셉트론>이 출간된 지 불과 2년 뒤, 43번째 생일을 앞두고 보트 사고로 익사했다.
AI 개발 초기 수 십 년간 이 분야의 중심지는 미국 동부였다. 그러나 1930년대 스탠퍼드대학교의 연구 활동을 영리 기업과 연계하려 시도하면서 서부로 이동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1939년, 대학교 공학부 학장 프레더릭 터먼의 제자였던 빌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가 한 차고에서 전자기기 회사를 창업했다. 스탠퍼드는 이런 창업 정신을 장려, 인근 지역에 산업 단지를 조성했다. '인공지능' 용어를 만든 존 매카시도 1960년대 초 MIT를 떠나 스탠퍼드 인공지능연구소 설립에 힘을 보탰다. 1980년대에는 세계 최고의 AI 연구소로 자리매김했다.
리드 호프먼은 대학 시절 AI에 회의적이었다. 기술은 아직 걸음마였고, 현실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그는 판을 떠나지 않았다. 첫 창업이 실패로 끝난 뒤, 피터 틸의 부름을 받아 페이팔에 합류했고, 링크드인을 창업하고, 마크 저커버그를 만나 초기 페이스북에도 투자했다. 연이어 성공을 거둔 그는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캐피털 그레이록에 합류하며, 다시 AI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호프먼이 벤처투자자로서 처음 투자한 에어비앤비는 원금의 1천배에 달하는 수익을 그레이록에 안겨 주었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자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타트업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넷스케이프를 무너뜨렸고, 시장을 장악해 버렸다. 당시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배운 교훈은 단순했다. 대기업이 뛰어들면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I 분야도 동일하게 흘러갈까? 한편 앤비디아의 GPU가 등장, 연산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신경망 연구가 주류가 되었다. 컴퓨팅 파워, 데이터, 신경망 기술이 맞물리며 AI 시대를 열 준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현대 AI 시대는 실리콘밸리가 아닌, 뜻밖에도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철학을 전공하고 갈등 조정가로 활동하던 무스타파 슐레이만은 데미스 하사비스, 셰인 레그와 함께 2010년 딥마인드를 설립했다. 이들의 비전은 경험을 통해 학습하는 인간형 지능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딥마인드의 문제는 언제나 자금 유치였다. 피터 틸, 일론 머스크 같은 투자자들에게 초기 투자를 받았지만,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AI 개발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또한 인재 유치 경쟁도 점점 심해졌다.
하사비스는 한편으로 지쳐 있었다. 그는 “AI 문제를 정말 해결하려면 회사를 구글만큼 키워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죠.”라고 말했다. 세 명의 공동 창업자는 자금이 풍부한 대기업에게 인재를 끊임없이 빼앗기는 데에도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매각이 순리라고 판단, 협상을 가졌다. 2014년 초, 구글은 딥마인드를 6억 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오픈AI는 단순한 스타트업이 아니었다. 그 여정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일론 머스크, 샘 올트먼, 리드 호프먼이 함께 그린 비전은 곧 내부 갈등으로 흔들렸고, 지금 부족과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며 위기를 맞았다. 2019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1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1년 후, GPT-3가 공개되었다. GPT-2의 100배가 넘는 성능을 자랑했다.
스티브 발머와 사티아 나델라, 두 사람 모두 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끌었지만, 각자 바라본 미래는 전혀 달랐다. 발머는 매출을 키우고 윈도우를 지키는 데 집착했다. 그러나 그 집착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반면 나델라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모든 것을 배우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경재사의 제품능 무대에 올리고, 클라우드와 AI에 전사적으로 투자한다. 이런 결정으로 테크 공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발머는 윈도우의 입지를 확대하는 데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사내의 혁신 분위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책의 저자 게리 리블린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오랜 직원들이 피땀 흘려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발머의 간섭으로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바람에 결국 회사를 떠난 이야기를 취재했다. 그중 한 명은 애플 아이팟이 등장하기 전부터 MP3 플레이어를 개발해 온 사람이었다. 또 아이패드가 출시되기 전에 태블릿 개발팀에서 일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발머가 윈도우에 매달리는 바람에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파묻히고 말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장부상 이익이 매년 수십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발머가 CEO 로 제임하는 내내 주가는 횡보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구글이 딥마인드를 인수한 후, 시간이 갈수록 갈등은 깊어졌다. 대기업의 구조와 속도, 보수적인 문화는 딥마인드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구글은 AI 기술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동시에 그 기술을 세상에 내놓는 일을 두려워했다. 강력한 기술과 인재를 보유했음에도 구글은 어쩌다가 스스로 혁신을 가로막는 '느린 공룡'이 되었을까? 무스타파 슐레이만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연구보다 제품 출시를 원했고, 경국 구글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2022년 1월, 슐레이만은 8년간 일했던 구글을 떠나 그레이록으로 옮겼다.
2020년, 실리콘밸리는 폭발했다. 코로나, 저금리, 넘치는 유동성 속에서 벤처 시장은 쟁탈전으로 불타올랐다. 리드 호프먼은 링크드인을 통해 테크 산업의 황금기를 열였고, 투자자이자 정치인이며 자선가로서 실리콘밸리의 무게추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돈과 기술, 그리고 권력의 결합이 이루어진 그 시기에 호프먼은 때로는 '정의'를 말했고, 때로는 '음모론'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
무스타파 슐레이먼은 대화형 AI가 인간과 감정을 공유하고, 친구처럼 동행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세계적인 연구자 카렌 시모니언과 조 펜튼, 리드 호프먼을 공동 창업자로 영입, 인플렉션AI를 출범시켰다. 투자 유치, 인재 채용, AI 윤리 논란, 가술적 난제 속에서 궁극의 'AI 에이전트'라는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슐레이만은 인플렉션AI에 2억 2.500만 달러의 초기 투자를 마감하자 공격적인 인재 영입에 나섰다. 2022년에 발표된 LLM 관련 연구 논문은 두 가지가 가장 중요했다. 하나는 소규모 모델을 오래 학습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LLM에 복잡한 수힉 문제를 학습시키는 방법이었다. 슐레이만은 두 연구 논문의 주저자를 모두 영입했다.
오픈 AI는 2022년 11월 조용히 챗GPT를 출시했다. 누구도 이 제품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챗GPT는 출시 5일만에 100만 명, 9주만에 1억 명이 사용하는 서비스로 급성장했다. 실리콘밸리는 이를 'AI의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 불렀다. 인간처럼 자연스런 어투로 대중을 매료시킨 챗GPT는 놀라운 성과였지만 여전히 오류, 환각, 편향 등 근본적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숙제였다.
호프먼은 오픈AI의 이사였음에도 챗GPT의 출시 시기를 직접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는 인플렉션AI가 경쟁 제품을 개발 중이었기에 이해 충돌을 염려한 탓이었다. 호프먼이 한 말 중 “스타트업이 출시한 제품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마음에 들 정도면 이미 출시 시기를 놓친 것”이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챗GPT가 적절한 사례였다. 올트먼은 챗GPT가 출시된 지 몇 달 후 이렇게 트윗했다. “다소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일찍 세상에 공개한 이유는, 자료를 충분히 입력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다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트먼의 말은 시의적절했다.
2023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는 챗GPT 기술을 결합한 새로운 빙 검색 엔진을 공개했다. 나델라는 '검색의 새 시대'를 선언했고, 언론과 업계는 이를 마이크로소프트의 반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드니라는 이름의 이 AI는 일부 사용자와의 대화에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며 논란을 불러왔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의 발표 하루 전에 구글은 자사 AI 바드를 급하게 공개했다. 하지만 시연 영상 속 오류로 인해 구글 주가는 하루 만에 1천억 달러를 증발시켰다.
인플렉션AI가 '파이'라는 AI를 개발했다. 파이는 사용자에게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반응하도록 개발되었다. 이를 위해 긍정적 성격은 강화하고 부정적 태도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훈련되었다. 예상치 못한 챗GPT의 폭발적 인기와 구글의 빠른 반격은 인플렉션AI에 압박이 되었고, 출시 일정과 마케팅 전략 등에서 허둥거렸다.
정치권에선 샘 올트먼이 규제를 요청하는 전략으로 AI 규제 논의를 주도했고, 찬반 논쟁이 격화되었다. 메타는 오픈소스모델 LLaMA를 공개하며 개방성을 강조했고,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사 제품에 AI를 통합하면서도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다. 오픈소스와 폐쇄형 모델 간의 논쟁은 AI 생태계의 핵심 갈등 속으로 떠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마침내 윈도우11에 코파일럿을 기본으로 통합했지만 때때로 마치 자기 그림자를 무서워하는 거인처럼 행동했다. 인플렉션AI의 개발자들은 ‘개인 인공지능'
에는 분명한 성격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은 최대한 무미건조한 성격을 지향하는 듯했다. 심지어 아주 온건하고 단순한 질문에도 침묵하곤 했다.
AI에 일찍 뛰어들었던 페이스북도 마크 저커버그가 메타버스를 추진하면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 그는 3D 가상현실에 사활을 걸었는지 2021년 회사명을 ‘메타’로 바꾸고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러나 2023년이 되자, 저커버그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메타는 시장에 다섯 번째나 열 번째, 혹은 스무 번째로 LLM을 출시하는 회사가 되기를 택하지는 않았다. GPT-4나 바드, 코파일럿, 파이처럼 폐쇄형 독점 구조로 LLM을 운영하는 대신, 자사 대규모 언어 모델인 LLaMA를 오픈소스로 공개하기로 했다.
인플레션AI는 2023년 6월에 13억 달러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4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회사는 공격적인 인재 채용을 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슐레이만은 초지능 AGI보다는 제품 완성도와 정서적 연결에 집중했다. 그러나 친구형 AI, 정신 건강 AI 분야는 이미 치열한 경쟁 중이었다.
인공지능은 기술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각 주체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술 기업들은 더 빠르고 넓게 확장하며 시장 선점을 노렸고, 정치권은 규제와 경쟁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했다. 기술 낙관론자 마크 안드레센은 'AI를 늦추는 건 살인 행위'라고 주장했고 무스타파 슐레이만은 '안전한 가속'을 강조했다. AI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테슬라 등이 새로운 기술 지배자로 부상했지만, 인플렉션AI의 '파이'처럼 기술력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운 현실도 드러났다.
2023년 11월, 오픈AI CEO 샘 올트먼이 이사회에 의해 갑자기 해임당했다. 이 사건은 AI 안전성과 경영 방식을 둘러싼 이사진의 내부 갈등이 핵심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올트먼과 핵심 인재들을 영입하려 했지만, 오픈 AI 직원의 반발과 내부 탄원서 덕분에 결국 올트먼은 CEO로 복귀했다. 한편, 슐레이만은 막대한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인해 인플렉션AI의 꿈을 접고 마이크로소프트에 합류, 기술 라이선스를 제공하는 형태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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