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바다 앞에 섰을 때,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퍼붓는 눈송이쯤, 뭔가 달콤한 추억거리를 만들기 좋은 근사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차가운 바람이 한적한 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우리의 어깨와 등에 눈송이를 실어날랐다. 어두운 겨울 저녁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나트륨 가로등의 노란빛 속에서 꿈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뭔가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씩 이야기가 끊어지고 잠깐의 침묵이 흐를 때도 있었다. 우리 사이에 이야기가 있든 침묵이 있든 그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이,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다시는,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영원히 갈라놓을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날 춤추듯 내리던 그 많은 눈송이들은 마지막 축제 같은 것이었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어둡고 한적하고 폭설이 내리는 길을 눈사람이 되어 걸어가는 우리를 안쓰럽게 여기고 버스기사가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버스를 세운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버스를 타지 말고 더 걸으며 눈을 맞았어야 했다. 버스기사의 호의와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했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다. 어리석게도 버스에 올랐고 우리는 마지막을,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시간을 더 단축시켜버린 것이다.

 

버스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도 알 수 없었다. 굳어버린 얼굴로,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우리는 우리일 수 없었다. 그 길에서 버스에 올라타던 그 순간, 우리는 더이상 같은 길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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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1-29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읽고 오늘도 한번 더 읽고 갑니다.
아름답고 또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서요. 안타까워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걸까요?

섬사이 2013-11-29 22:26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된 제 기억 속 한 장면이에요.
안타깝고 아름답지만
삶은 또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니까요.
지금은 이렇게 무덤덤하게 꺼내놓을 수 있어요.
 

요즘 내가 병에 걸렸나보다. 책이 잘 안 읽어지는 병이다. 그 병의 원인을 대충 알 것도 같다.

 

작년 내내  도서관 이름으로 초등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목록을 뽑았다.  어린이책을 문학, 수학, 과학, 경제, 법, 역사 등등의 영역으로 나누어 많이 읽었다. '질보다 양'의 책읽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고나니까 올해는 어린이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책도 잘 읽지 않고 띵까띵까 놀다가 엉뚱하게도 그림그리기로 한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그림그리기가 마무리되어갈 무렵부터 연이어 ㄷ대학 교양교육원에 다녀야 할 일이 생겼고, 그 교양교육원 강의는 내 관심분야와 90퍼센트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이 교육의 끝이 어딘지 한번 끝까지 가보자 하는 오기로 그 과정도 거의 막바지로 접어들었고 아직도 뚝심있게 버티며 강의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걸 대견하다고 해야 하는지 미련하다고 해야 하는지.

 

그 결과, 질보다 양의 책읽기는 그나마 내가 갖고 있던 깊이라고까지 말할 것도 없는 그 얕은 책읽기마저도 상실하게 만들었나 보다. 휘리릭 후딱 읽는 책읽기, 깊이 들여다 보지 않고 전체적인 느낌만으로 좋다 별로다 했던 게 내게 악영향을 미친 거다.  어쩌면 성의없이 읽혀진 책들도 상처입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따뜻함이 그리워진다. 초겨울 차가운 날씨때문만은 아니다. 핑계지만 그 후로 이런저런 일에 시간과 마음을 뺏기면서 병의 증세를 더 악화시킨 꼴이다.

 

어린이책 세 권을 읽었지만 잘 안 읽어진 책에 대해서 페이퍼를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좀 고민을 했다.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니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을 얻었다. 읽은 책에 대해 몇 줄이라도 적어놓는 편이 나중에 '이렇게라도 써서 남겨두길 잘했어.'라며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컴 속 하얀 공간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져오지만, 혹시라도 이리저리 고민하며 쓰다보면 책이 잘 안 읽어지는 이 병이 회복의 기미를 보일지도 모르니까 가보자.  

 

  

 

 

 

 

 

 

 

 

 

 

 

 

『왕봉식, 똥파리와 친구야』 김리리 글, 이상권 그림, 우리교육, 2003

 

'왕땅콩 갈비 게으름이 욕심쟁이'라는 긴 별명으로 불리는 우리의 왕봉식 군의 좌충우돌 이야기. 봉식이네 가족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5편의 이야기가 밝고 유쾌하다. 마치 한 편의 시트콤을 본 듯한 느낌이다. 누나와 형, 얄미운 여동생 사이에서 겪는 갈등과 고민, 아이다운(아이답다는 건 또 뭘까?) 생각과 솔직함들이 묻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책을 덮고 나서 왜 아쉬움이 남는 걸까.

이 책의 맨 마지막 이야기 <봉식이네 가족 신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봉식이가 학교 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드는데 '솔직하게, 사실 그대로' 만들어 오라는 선생님의 당부에 따라 아빠는 '화를 잘 내는 우리 아빠'로. 엄마는 '잔소리를 잘 하는 우리 엄마'로, 누나는 '나한테 가장 잘해 주는 우리 누나', 형은 '나를 무지 잘 괴롭히는 우리 형', 동생 봉순이는 '불여우에 고자질쟁이 봉순이'로 가족소개를 한다. 숙제를 마치고 봉식이가 이불 속에 들어가 눕자 스케치북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가족신문을 그렸던 쪽에서 가족들의 얼굴이 움직이며 말하기 시작한다. 가족신문 속 그림가족들이 봉식이에게 불만을 터뜨리다가 결국 반성하며 함께 '김치'하고 웃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봉식이가 지나치게 솔직하게 가족신문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쩐지 작가가 결말을 너무 작가에게 편리하도록 해결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주인공의 상상에 이야기가 너무 많이 기댄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결말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김샌다.

<까미야, 봉식이 소원 좀 들어줘>나 <왕봉식, 똥파리와 친구야>도 상상의 이야기지만 <까미야, 봉식이 소원 좀 들어줘>는 어른들의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고, <왕봉식, 똥파리와 친구야>도 봉식이의 자아존중감 회복과 상처치유의 과정으로서의 상상의 이야기라 거부감이 덜했다. 작가에게 편리한 사건해결방법으로서의 상상이 아니라 의미있는 판타지 쪽으로 방점을 찍을 수 있었던 거다. 맨 마지막 이야기도 그랬더라면 아쉬움이 덜했을 것이다.

 

 

 

『가오리가 된 민희』 이민혜 글, 유준재 그림, 문학동네, 2009 

 

봉식이와는 딴판인 민희를 만났다. 초등 저학년과 고학년의 차이인지, 아니면 복닥복닥 여섯 식구 사이에서 다복하게 살아가는 봉식이와 (티격태격 갈등을 겪으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생선가게 미혼모의 딸이라는 간극 때문인지 책의 분위기가 확 다르다. 생선가게 미혼모의 딸로 초등 고학년 사춘기 초입의 시간을 버텨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민희가 가오리로 변하는 걸 보면서. 왜 하필 가오리일까, 궁금했는데 날개처럼 펼쳐진 가오리의 지느러미로 하늘을 날아간다는 설정이 가능했고, 가오리의 납작한 형태가 공부에 대한 압박감, 비린내가 난다며 선을 긋는 친구들에 대한 서운함과 외로움, 미혼모의 딸이라는 사회의 시선 등에 위축된 민희를 상징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오리로 변한 채 바다로 날아가면서 기억을 하나 하나 잃어버릴 때는 '얘가 어쩌려고 이러나...'하는 심정이었다. 기억이라는 거, 추억이라는 거,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게 또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심각하게 무서워진다. 살아온 날들이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지극히 평범해도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기억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나에 대한 기억도 분명, 나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조각들이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타인에 대한 기억도 그 사람 하나하나를 이루는 조각들이 될 것이다. 기억 하나 하나를 잃고 점점 완벽한 가오리로 변하는 민희의 모습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내 본능이 향한 곳은 바다였지만 지금 이 바다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바다는 바로 엄마였다. 포근한 물살, 향긋한 비린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물을 주는 곳, 내가 아무리 가오리이고, 가오리 서식지는 서해라고 해도 나의 본능이 좇는 바다는 그 바다가 아니었다.' (71쪽)

어쩌면 가오리로 바다를 찾아가는 민희의 여정은 미혼모로 생선가게를 하고 있는 엄마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었던 민희가 엄마와 화해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거다. 그 여정 중에 할아버지를 만나고 아이를 만나는 이야기는, 민희의 여정을 풍부하게 만드는 효과는 있었지만 이야기 전체로 봤을 때는 오히려 산만해지는 느낌이었다는 게 좀 아쉽다.

<낙서하는 아이>와 <병아리 죽이기>는 <가오리가 된 민희>보다는 좀 더 쉽게 읽힌다. 이 작가의 책을 처음 읽는 거라 섣불리 얘기하긴 어렵지만 이야기에 많은 의미와 가치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집 괴물 친구들』, 박효미 글, 조승연 그림, 사계절, 2013

 

이 작가의 『학교 가는 길을 개척할거야』를 읽고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 책은 아이들의 모습을, 마음을 참 잘 담아내고 있었고, 그 책을 아이에게 읽어준 엄마들은 아이들이 정말 학교가는 길을 개척할까봐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실제로 몇몇 아이는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은 개척해서는 안된다고, 차라리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을 개척하라고 엄마들이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박효미 작가가 쓴 초등 저학년을 위한 책이 나온 걸 보고 무척 반가웠다. 근데 내가 너무 기대를 크게 했나 보다.  2학년 짜리 우리 막내가 재미있게 읽는 걸 보니 그렇게 실망스러운 작품은 아닌데 말이다. 『학교 가는 길을 개척할 거야』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의 세계가, 그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는데, 이 책에서는 뭔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안상민과 안종민은 형제다. 형제니까 당연히 다투고 싸운다. 특히 종민이에게 형의 세계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형 상민이는 종민이가 함부로 자기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 편이다. 어느날 형 상민이는 장롱 속에 숨어있다가 동생 종민이가 몰래 자기방에 들어와 책가방을 뒤지는 현장을 덮친다. 현장에서 붙잡힌 종민이는 형에게 괴물친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괴물들이 바로 빨간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장롱 속에서 뛰어나와 방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이비야, 상민이 방 문지방에 살면서 종민이에게 형의 잘못을 고자질하게 만드는 툴툴지아, 형 방에 있는 물건들을 몰래 몰래 가져다가 종민이 침대 밑에 숨겨놓는 누툴피피다.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게 만드는 인상적인 문장과 장면들이 있다. 괴물들의 캐릭터도 성공적이다. 그런데도 앞에서 말했듯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린 종민이의 입을 빌려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음... 그게 무슨 뜻이냐면... 책이란 게 결국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긴 하지만 "이거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하는 티가 나서는 안되는 거 아니냐.. 뭐,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독자가 종민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확 믿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이야기 속에 마음 놓고 풍덩, 빠질 수 있으니까. 근데 난 자꾸 이거 종민이가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던 거다.

그런데 정말 그런 괴물들이 있었던 거냐고?  그러고보니 울막내가 그 점을 어떻게 이해했을지 궁금해진다. 괴물들 이름의 독특한 느낌을 재미있어하긴 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 괴물들은 종민의 상상에서 튀어나온 괴물일 확률이 크다. 이 책에서 중요한 건, 형 상민이가 동생 종민이의 괴물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줬다는 거,  재미있게 잘 들어줬을 뿐 아니라 들으면서 동생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안종민 방에서 나오려는데, 문지방에서 침대 밑으로 뭔가가 휙 지나갔다. 나는 얼른 엎드렸다. 그러고는 치렁치렁 늘어진 침대보를 걷어 올렸다.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구석지에서 뭔가 꾸무럭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냉큼 일어나 긴 자를 가져왔다. 그러곤 다시 엎드려 잡동사니를 쑤셨다.

아쉽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나는 멋쩍게 일어났다.  (93쪽)

이해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괴물들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문학은 어린이문학이나 어른들문학이나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 아니면 전혀 모르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닌가 싶다. 오늘 올린 저 세 권의 어린이책도 서로서로 좀 더 잘 이해하고 살아보라고, 알고보면 다 나름의 사정이 있고 상처가 있고 고단함이 있어 그런거라고, 열띠게 말하고 있는 거다.

세 권의 책에 대해 까탈을 부려놓고 이제와 "잘 이해하고 사세요"라니, 뭔가 좀 민망한 마무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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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11-28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가방가~ 섬사이님!
저는 책에 대해 까탈부린 리뷰나 페이퍼가 좋아요~
사실 그렇게 쓰는 게 작가에 대한 애정이고 좋다고만 쓰는 리뷰보다 어렵다는 것도 아니까요.^^

섬사이 2013-11-28 08:33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순오기님.
내가 뭐라고 까탈을 부렸나 싶어 찜찜했는데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고마워요. ^^
 

물고기 5마리에게 먹이를 주고 베란다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차가운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집안으로 몰아친다. 으스스 추워 얼른 가디건을 찾아 입는다. 초겨울 햇빛은 너무 약하다. 1층인 우리집은 불을 켜지 않으면 하루종일 잿빛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사물들이 또렷한 자기 빛을 잃는다. 이럴수록 나라도 또렷하게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뜨끈한 커피 한 잔으로 머리속을 맑게 해야지.

 

어제 읽은 어린이책 두 권과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책으로 가는 문』이라는 책을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이 책들 속에 들어있는 문장들이 좀처럼 정리되지를 않는다. 일목요연하게 문장들의 맥을 짚어가야 하는데 요란하게 덜그럭거리며 차분히 가라앉지를 않는다. 애꿎은 커피만 홀짝거리고 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으면 난 먹을 것을 찾는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난 구강기에 욕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이 나이까지 버텨온 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어제 읽은 세 권의 책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한 잔의 커피로는 턱없이 모자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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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그리고 인철이의 경우』 김소연 장편동화, 손령숙 그림, 사계절, 2009

 

엄마 아빠의 갑작스러운 이혼으로 충격 받고 까칠해진 선영이와 새엄마와 아빠, 그리고 이복동생 사이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인철이의 이야기. 작품 내에서 선영이는 엄마가 구두가게 아저씨가 가깝게 지내자「사랑 손님과 어머니」와 자신의 입장을 견주어보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만큼 이 주제가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주제라는 걸 작품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하긴 늘 주제는 반복되는 거고,  뻔하게 느껴지는 주제를 얼만큼 세련되고 촘촘하고 단단하게 담아내느냐가 늘 작가가 고민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인철이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계모와 전처 자식간의 아슬아슬한 감정적 대립도 신데렐라나 콩쥐팥쥐처럼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옛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니 말해 무엇하리.

 

일단 작가의 전작들, 『꽃신』,『명혜』,『남사당 조막이』에 비해 이야기가 성긴 느낌을 받았다.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의 기분은 마치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누군가 말아주는 국수를 급하게 후루룩 먹었는데 다 먹고 나도 어딘지 허전하고 속이 헛헛한 느낌이랄까.  다 먹고 난 뒤에도 입도 속도 허전해서 쩝쩝 입맛을 다시며 좀 더 먹을 게 없나 아쉬워 두리번거려지는, 그런 거 말이다.

 

아무래도 갈등과 문제들이 너무 쉽게 해결되어버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족 내에서 점점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새엄마도 아빠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던 인철이의 갈등은 새엄마가 인철이의 방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눈시울 적시는 장면 하나로 해결된다. 정말 현실에서도 그럴까? 그렇게 쉽게 오해가 풀리고,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고, 그렇게 쉽게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선영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선영이나 인철이의 경우와 비슷한 입장에 놓인 아이들에게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위로와 힘이 되는 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다고 일방적으로 국수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먹는 동안은 뜨끈한 국물에 한기를 녹이고 주렸던 속을 부족하게나마 달랬으니 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성찬보다도 더 훌륭한 소울푸드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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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와가 여기 있었다 한림 고학년문고 11
닐 슈스터만 지음, 고수미 옮김 / 한림출판사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발음기호가 따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ə]는 가장 흔한 모음이지만 음가가 거의 없는데 슈와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어리거나 젊은 시절에 영어사전을 자주 들춰보며 발음기호를 확인하던 나는 발음기호에 적힌 그대로 정직하게 [ə]를 발음하려고 애를 썼는데 말이다. ‘의 중간 어디쯤의 정확한 소리를 내보려고 간혹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내 어린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슈와라는 성을 가진 한 아이, 친구들에게 슈와라고 불리던 아이는 정말 [ə]랑 닮아서 눈에도 잘 띄지 않을 뿐 아니라 기억 속에서 자꾸 지워지고 마음에서 빠져나가 버린다.

또 다른 한 아이, 앤치 보나노는 가운데 아이 증후군’(40)이 있다. 앤치에게는 프랭크라는 잘난 형이 있고 크리스티나라는 주목받는 여동생이 있다. 앤치는 그냥 거기있는 애일뿐이다. 그래서 앤치는 슈와의 기분이 어떨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자꾸 신경이 쓰인다.

십대의 아이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의 시간만큼 똑같은 크기의 불안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도하게 자기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경향도 있고. 그런 의미에서 희미한 존재감은 십대인 슈와와 앤치에게 꽤나 신경 거슬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

 

하지만 그게 꼭 앤치와 슈와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삶이 우울해지거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때, 같이 점심을 먹거나 영화를 볼 사람이 없을 , 하루종일 어느 누구도 내게 카톡도 문자도 보내지 않을 때, 그럴 때마다 나의 존재감이 흐릿해지는 쓴맛을 맛보게 되지 않나? 그러다보면 첫사랑의 기억 속에 내가 얼만큼의 흔적으로 남아있을지, 혹은 직장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쓸모있는 존재감 확실한 부품인지,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소중한 친구로 인정받고 있는지, 가족들에게 나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앤치의 엄마가 주방을 자신의 영역으로 고수하고 싶어하는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앤치의 엄마가 고백처럼 내뱉던 말이 기억난다.

“......하지만 가끔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문득 삶이 의미 없다고 느낄 때가 있어. 가족과 함께 집에 있으면서도 문득 자기 인생은 어디에도 없고, 모든 사람의 인생처럼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어느 쪽이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바구니는 무거워져. 달걀이 깨질 수도 있고.” (216)

 

결국 우리는 세상에 자기의미를 심으며 살아가려고 애를 쓴다. 앤치도 슈와도 괴팍한 크롤리 영감과 앤치의 부모님, 슈와의 사라진 엄마, 그리고 우등생 프랭크 형과 동생 크리스티나까지도.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한 가지. 자기의미는, 혹은 존재감은 누가 부여해주는 거지?

슈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

네가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너는 그 사람을 어떻게 아니? 나무를 생각해 봐, 앤치. 숲에서 쓰러지는 나무 말이야.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날 때 거기에 아무도 없다면, 나무는 정말로 소리를 내지 않는 거고,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면 너는 정말로 거기에 없었던 거야.” (202)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의 기억력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는 걸까. 그건 어쩐지 자존심 상한다. 나 스스로를 그리 썩 대단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기억력에 의지해서 내 존재를 확인받아야 한다는 걸 흔쾌히 인정하기는 찜찜하다. 저 위의 문장을 한참을 노려보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슈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내려면 먼저 나무 스스로 크게 자라야 해.”

 

우리는 항상 누군가가 날 눈여겨 봐주기를 바라지만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야무진 렉시는 우리에게 이렇게 반문한다.

괜찮아. 느껴지는데 굳이 보일 필요는 없잖아?” (153)

누군가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도, 누군가가 나를 잘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무척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클립처럼 존재감 희미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미의 영역을 찾아가는 것은 무지무지 용감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책 속에서 슈와가 보여준 클립들은 하나하나가 얼마나 경이롭고 소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우리가 미처 마음을 기울여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을 뿐.)

 

이 책은 한림 고학년문고 시리즈 중 하나지만 개인적으로 청소년 책으로 분류해 둔다. 내용과 그 내용이 품은 의미들이 청소년들에게 더 적합할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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