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병에 걸렸나보다. 책이 잘 안 읽어지는 병이다. 그 병의 원인을 대충 알 것도 같다.

 

작년 내내  도서관 이름으로 초등학생들을 위한 추천도서목록을 뽑았다.  어린이책을 문학, 수학, 과학, 경제, 법, 역사 등등의 영역으로 나누어 많이 읽었다. '질보다 양'의 책읽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고나니까 올해는 어린이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책도 잘 읽지 않고 띵까띵까 놀다가 엉뚱하게도 그림그리기로 한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그림그리기가 마무리되어갈 무렵부터 연이어 ㄷ대학 교양교육원에 다녀야 할 일이 생겼고, 그 교양교육원 강의는 내 관심분야와 90퍼센트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이 교육의 끝이 어딘지 한번 끝까지 가보자 하는 오기로 그 과정도 거의 막바지로 접어들었고 아직도 뚝심있게 버티며 강의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걸 대견하다고 해야 하는지 미련하다고 해야 하는지.

 

그 결과, 질보다 양의 책읽기는 그나마 내가 갖고 있던 깊이라고까지 말할 것도 없는 그 얕은 책읽기마저도 상실하게 만들었나 보다. 휘리릭 후딱 읽는 책읽기, 깊이 들여다 보지 않고 전체적인 느낌만으로 좋다 별로다 했던 게 내게 악영향을 미친 거다.  어쩌면 성의없이 읽혀진 책들도 상처입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따뜻함이 그리워진다. 초겨울 차가운 날씨때문만은 아니다. 핑계지만 그 후로 이런저런 일에 시간과 마음을 뺏기면서 병의 증세를 더 악화시킨 꼴이다.

 

어린이책 세 권을 읽었지만 잘 안 읽어진 책에 대해서 페이퍼를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좀 고민을 했다.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니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을 얻었다. 읽은 책에 대해 몇 줄이라도 적어놓는 편이 나중에 '이렇게라도 써서 남겨두길 잘했어.'라며 다행으로 여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컴 속 하얀 공간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져오지만, 혹시라도 이리저리 고민하며 쓰다보면 책이 잘 안 읽어지는 이 병이 회복의 기미를 보일지도 모르니까 가보자.  

 

  

 

 

 

 

 

 

 

 

 

 

 

 

『왕봉식, 똥파리와 친구야』 김리리 글, 이상권 그림, 우리교육, 2003

 

'왕땅콩 갈비 게으름이 욕심쟁이'라는 긴 별명으로 불리는 우리의 왕봉식 군의 좌충우돌 이야기. 봉식이네 가족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5편의 이야기가 밝고 유쾌하다. 마치 한 편의 시트콤을 본 듯한 느낌이다. 누나와 형, 얄미운 여동생 사이에서 겪는 갈등과 고민, 아이다운(아이답다는 건 또 뭘까?) 생각과 솔직함들이 묻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책을 덮고 나서 왜 아쉬움이 남는 걸까.

이 책의 맨 마지막 이야기 <봉식이네 가족 신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봉식이가 학교 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드는데 '솔직하게, 사실 그대로' 만들어 오라는 선생님의 당부에 따라 아빠는 '화를 잘 내는 우리 아빠'로. 엄마는 '잔소리를 잘 하는 우리 엄마'로, 누나는 '나한테 가장 잘해 주는 우리 누나', 형은 '나를 무지 잘 괴롭히는 우리 형', 동생 봉순이는 '불여우에 고자질쟁이 봉순이'로 가족소개를 한다. 숙제를 마치고 봉식이가 이불 속에 들어가 눕자 스케치북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가족신문을 그렸던 쪽에서 가족들의 얼굴이 움직이며 말하기 시작한다. 가족신문 속 그림가족들이 봉식이에게 불만을 터뜨리다가 결국 반성하며 함께 '김치'하고 웃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봉식이가 지나치게 솔직하게 가족신문을 만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쩐지 작가가 결말을 너무 작가에게 편리하도록 해결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주인공의 상상에 이야기가 너무 많이 기댄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결말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김샌다.

<까미야, 봉식이 소원 좀 들어줘>나 <왕봉식, 똥파리와 친구야>도 상상의 이야기지만 <까미야, 봉식이 소원 좀 들어줘>는 어른들의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고, <왕봉식, 똥파리와 친구야>도 봉식이의 자아존중감 회복과 상처치유의 과정으로서의 상상의 이야기라 거부감이 덜했다. 작가에게 편리한 사건해결방법으로서의 상상이 아니라 의미있는 판타지 쪽으로 방점을 찍을 수 있었던 거다. 맨 마지막 이야기도 그랬더라면 아쉬움이 덜했을 것이다.

 

 

 

『가오리가 된 민희』 이민혜 글, 유준재 그림, 문학동네, 2009 

 

봉식이와는 딴판인 민희를 만났다. 초등 저학년과 고학년의 차이인지, 아니면 복닥복닥 여섯 식구 사이에서 다복하게 살아가는 봉식이와 (티격태격 갈등을 겪으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생선가게 미혼모의 딸이라는 간극 때문인지 책의 분위기가 확 다르다. 생선가게 미혼모의 딸로 초등 고학년 사춘기 초입의 시간을 버텨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민희가 가오리로 변하는 걸 보면서. 왜 하필 가오리일까, 궁금했는데 날개처럼 펼쳐진 가오리의 지느러미로 하늘을 날아간다는 설정이 가능했고, 가오리의 납작한 형태가 공부에 대한 압박감, 비린내가 난다며 선을 긋는 친구들에 대한 서운함과 외로움, 미혼모의 딸이라는 사회의 시선 등에 위축된 민희를 상징하기에 적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오리로 변한 채 바다로 날아가면서 기억을 하나 하나 잃어버릴 때는 '얘가 어쩌려고 이러나...'하는 심정이었다. 기억이라는 거, 추억이라는 거,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게 또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심각하게 무서워진다. 살아온 날들이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지극히 평범해도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기억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나에 대한 기억도 분명, 나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조각들이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타인에 대한 기억도 그 사람 하나하나를 이루는 조각들이 될 것이다. 기억 하나 하나를 잃고 점점 완벽한 가오리로 변하는 민희의 모습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내 본능이 향한 곳은 바다였지만 지금 이 바다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바다는 바로 엄마였다. 포근한 물살, 향긋한 비린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물을 주는 곳, 내가 아무리 가오리이고, 가오리 서식지는 서해라고 해도 나의 본능이 좇는 바다는 그 바다가 아니었다.' (71쪽)

어쩌면 가오리로 바다를 찾아가는 민희의 여정은 미혼모로 생선가게를 하고 있는 엄마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었던 민희가 엄마와 화해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거다. 그 여정 중에 할아버지를 만나고 아이를 만나는 이야기는, 민희의 여정을 풍부하게 만드는 효과는 있었지만 이야기 전체로 봤을 때는 오히려 산만해지는 느낌이었다는 게 좀 아쉽다.

<낙서하는 아이>와 <병아리 죽이기>는 <가오리가 된 민희>보다는 좀 더 쉽게 읽힌다. 이 작가의 책을 처음 읽는 거라 섣불리 얘기하긴 어렵지만 이야기에 많은 의미와 가치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집 괴물 친구들』, 박효미 글, 조승연 그림, 사계절, 2013

 

이 작가의 『학교 가는 길을 개척할거야』를 읽고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 책은 아이들의 모습을, 마음을 참 잘 담아내고 있었고, 그 책을 아이에게 읽어준 엄마들은 아이들이 정말 학교가는 길을 개척할까봐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실제로 몇몇 아이는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은 개척해서는 안된다고, 차라리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길을 개척하라고 엄마들이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는 박효미 작가가 쓴 초등 저학년을 위한 책이 나온 걸 보고 무척 반가웠다. 근데 내가 너무 기대를 크게 했나 보다.  2학년 짜리 우리 막내가 재미있게 읽는 걸 보니 그렇게 실망스러운 작품은 아닌데 말이다. 『학교 가는 길을 개척할 거야』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의 세계가, 그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는데, 이 책에서는 뭔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안상민과 안종민은 형제다. 형제니까 당연히 다투고 싸운다. 특히 종민이에게 형의 세계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형 상민이는 종민이가 함부로 자기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선을 긋는 편이다. 어느날 형 상민이는 장롱 속에 숨어있다가 동생 종민이가 몰래 자기방에 들어와 책가방을 뒤지는 현장을 덮친다. 현장에서 붙잡힌 종민이는 형에게 괴물친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괴물들이 바로 빨간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장롱 속에서 뛰어나와 방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이비야, 상민이 방 문지방에 살면서 종민이에게 형의 잘못을 고자질하게 만드는 툴툴지아, 형 방에 있는 물건들을 몰래 몰래 가져다가 종민이 침대 밑에 숨겨놓는 누툴피피다.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게 만드는 인상적인 문장과 장면들이 있다. 괴물들의 캐릭터도 성공적이다. 그런데도 앞에서 말했듯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어린 종민이의 입을 빌려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음... 그게 무슨 뜻이냐면... 책이란 게 결국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긴 하지만 "이거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하는 티가 나서는 안되는 거 아니냐.. 뭐,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독자가 종민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확 믿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이야기 속에 마음 놓고 풍덩, 빠질 수 있으니까. 근데 난 자꾸 이거 종민이가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던 거다.

그런데 정말 그런 괴물들이 있었던 거냐고?  그러고보니 울막내가 그 점을 어떻게 이해했을지 궁금해진다. 괴물들 이름의 독특한 느낌을 재미있어하긴 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 괴물들은 종민의 상상에서 튀어나온 괴물일 확률이 크다. 이 책에서 중요한 건, 형 상민이가 동생 종민이의 괴물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줬다는 거,  재미있게 잘 들어줬을 뿐 아니라 들으면서 동생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안종민 방에서 나오려는데, 문지방에서 침대 밑으로 뭔가가 휙 지나갔다. 나는 얼른 엎드렸다. 그러고는 치렁치렁 늘어진 침대보를 걷어 올렸다.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는 구석지에서 뭔가 꾸무럭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냉큼 일어나 긴 자를 가져왔다. 그러곤 다시 엎드려 잡동사니를 쑤셨다.

아쉽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나는 멋쩍게 일어났다.  (93쪽)

이해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괴물들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문학은 어린이문학이나 어른들문학이나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 아니면 전혀 모르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아닌가 싶다. 오늘 올린 저 세 권의 어린이책도 서로서로 좀 더 잘 이해하고 살아보라고, 알고보면 다 나름의 사정이 있고 상처가 있고 고단함이 있어 그런거라고, 열띠게 말하고 있는 거다.

세 권의 책에 대해 까탈을 부려놓고 이제와 "잘 이해하고 사세요"라니, 뭔가 좀 민망한 마무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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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11-28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가방가~ 섬사이님!
저는 책에 대해 까탈부린 리뷰나 페이퍼가 좋아요~
사실 그렇게 쓰는 게 작가에 대한 애정이고 좋다고만 쓰는 리뷰보다 어렵다는 것도 아니까요.^^

섬사이 2013-11-28 08:33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순오기님.
내가 뭐라고 까탈을 부렸나 싶어 찜찜했는데 그렇게 이해해 주시니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