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사랑? 어떤 사랑?  

영화의 첫 시작은 소피아가 계단을 내려와 곤히 잠들어 있는 남편 톨스토이 침대에 올라가 곁에 눕는 장면이었다. 소피아는 잠든 톨스토이의 뺨에 키스를 하고 남편의 팔로 자기 어깨를 감싼다. 하지만 금방 툭, 떨어지는 남편의 손. 몇 차례 남편의 손이 자기를 감싸주지 않고 떨어지자 소피아는 남편의 손을 끌어 자기 어깨 위에 놓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으로 꼭 붙잡는다. 톨스토이는 그것도 모르고 코를 골며 계속 잠에 빠져 있다.  

참 신기하게도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 이 첫 장면이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른다. 비저항주의, 사유재산포기 등을 주장한 이른바 톨스토이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아내 소피아와의 갈등의 원인과 소피아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이 무엇인가를 이 첫 장면이 암시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상에 취해 있는 톨스토이와 그 고귀한 이상에게 남편을 뺏긴 듯한 소피아. 게다가 톨스토이가 품었던 순수한 이상은 그 실현을 위해 조직화되면서 누군가의 의도와 목적에 맞추어 변질되고 조작되어 가는 분위기를 풍긴다.  하긴 세상의 종교와 이념들이 모두 그러했으니 톨스토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소피아는 남편 톨스토이에게 자주 묻는다. "나를 사랑해요?"하고. 소피아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톨스토이의 사유재산 포기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소피아가 걱정하는 것은 톨스토이의 사후 자식과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의 상실이 아니라, 46년 동안 삶을 함께 나누어 온 남편이 '이상의 실현'을 이유로 점점 멀어지면서 자기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상실감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시작되면서 스크린에 보였던 문장,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그 문장은 소피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소피아의 다소 과장되고 과잉된 감정과 행동은 오직 톨스토이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건지도. '성인'으로 추앙받는 남편이 아니라 침대에서 수탉 소리를 내는 남편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으니 애초부터 톨스토이의 이상은 소피아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소피아가 톨스토이의 이상에 뜻을 함께 한 블라디미르를 증오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블라디미르는 끊임없이 톨스토이에게서 소피아를 떼어놓고 싶어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가 앞장 서서 추진한 '톨스토이 이상 실현 사업'(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으나)의 하나인 공동체 농장은 뭔가 불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감시하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사람들의 표정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상'과 '공동체'는 있으나 사람의 '삶'의 알맹이가 빠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톨스토이의 공동체 농장의 불안은 톨스토이가 농장을 방문했을 때 찍은 단체사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찍기에 익숙치 않았던 당시 사람들의 카메라 앞에서의 긴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공동체'라는 제목을 붙이기엔 그들의 표정과 시선과 거리가 심상치 않다. 

이 영화에서 '인간미'를 느끼게 해주는 인물은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블라디미르가 아니다. 오히려 톨스토이를 숭배하며 톨스토이의 비서가 된 순진한 청년 발렌틴과 그의 연인인 의지가 강하고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눈을 갖고 있는 용감한 여인 마샤다. 마샤는 원칙을 지키느라 (그것도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형식으로서의 자잘한 원칙들) 본질을 잃고 있는 공동체를 직시한다. 그녀는 톨스토이주의의 본질은 '자유'와 '사랑'이라고 말하고는 공동체를 버리고 모스크바로 떠난다.  어떤 의미에서 이상은 때때로 '허구'에 가깝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각각 생생한 빛깔과 의미를 갖고 있는 사랑이 '이상' 속에서는 질식하고 마는 건지도 모르겠다.

발렌틴은 그토록 숭배했던 톨스토이와 소피아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오히려 안타까움과 혼란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인간에게 더 소중한 걸까. 인류애를 실현하는 이상일까, 아니면 '불완전한 남자와 불완전한 여자'가 나누는 리얼리티한 사랑일까.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나 '사랑'이란 것 자체가 너무 불명확하고 변덕스럽고 불가해할 뿐이니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자기의 신념을 위해 소피아를 떠나 쓸쓸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한 톨스토이는 마지막 순간에 그 해답을 찾았을까. 톨스토이는 자기의 삶은 블라디미르가 계획했던 톨스토이의 우상화 작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작품의 초고를 함께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13명의 아이를 낳은 소피아와 동거동락하며 나누었던 사랑의 의미 속에서 완성되었다는 의미였는지, 죽음이 침대 머리까지 다가왔을 때 톨스토이는 소피아를 찾는다.  

부럽기도 했다. 과연 톨스토이와 소피아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렇게 백발이 성성해지고 주름투성이 얼굴이 되었을 때, 나는 남편에게 '나를 사랑해요?'라고 물어볼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이 궁금하기나 할까? 나는 지금 가슴 속에 어떤 사랑을 품고 있는 걸까.  

이 겨울이 다가기 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야 겠다. 다락방님의 리뷰를 읽고 무척 끌렸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나니 읽지 않으면 찝찝함에 시달릴 것만 같은 예감까지 보태졌다.  어떤 <안나 카레니나>를 고를까도 고민이다.   

민음사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구절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문학동네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구절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어느 쪽의 번역이 마음에 드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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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1-1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 하지만, 문학동네의 앞 구절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민음사의 뒷 구절이 마음에 드네요. 하핫.

저는 민음사 판으로 읽고 싶었었어요. 특별한 이유라기 보다는 민음사 전집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본의 아니게 문학동네 판으로 읽었거든요. 다른 출판사 책으로 읽어보지 않아 비교는 어렵지만, 문학동네의 안나 카레니나는 참 마음에 들었어요, 섬사이님.

그런데 섬사이님, 영화 보셨다!!!!!!! 히죽 ^________^

섬사이 2011-01-20 10:23   좋아요 0 | URL
번역된 걸 보면 양쪽이 다 조금씩 끌려요.
민음사 본은 정갈하지만 다소 딱딱할 것 같은 느낌이고
문학동네 본은 번역한 사람이 꽤 맛을 살리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하는데 한편으로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해요. ^^
아무튼 2월부터는 안나 카레니나를 꽉 붙잡을 거예요.

hnine 2011-01-19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오전에 TV를 종종 보았는데 지난 주였나? 고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톨스토이에 대한 특강을 며칠에 걸쳐서 해주더군요. 톨스토이라는 거장에 대해 다각도로 파헤치고 해석하여 강의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화의 첫장면이 인상적인데요? 톨스토이가 죽음을 맞는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가요?
마지막에 써주신 구절은, 전 민음사 번역이 더 익숙하네요.

섬사이 2011-01-20 10:26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좋은 강의를 놓쳤네요. 재방송 해주면 좋은데..
톨스토이가 쓸쓸한 기차역 역장의 집에서 죽음을 맞는 게 마지막 장면이에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아무튼 참 좋았어요. ^^

프레이야 2011-01-19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 제가 보고싶었던 영화에 이렇게 좋은 글 주셔서 넘 좋아요.^^
여긴 상영을 너무 짧게 하고 지나가 못 보고말았어요.
다음 기회가 있겠지요.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톨스토이의 정신세계 이해를 돕더군요.
그의 사생활은 어땠을까요.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품고 있을까, 저도 생각해요.

민음사 번역이 익숙한데, 문학동네 번역이 끌리네요.
나름나름의 불행이라... 표지도 문학동네 것이 끌립니다.^^

섬사이 2011-01-20 10:2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외에 '영화'를 가지고 저를 자극하신 분이 바로 프레이야님이에요.
그런데 한 번 보기 시작하니까 보고 싶은 영화들이 줄줄이 따라올라와서 큰일이에요. 지금도 '아이 엠 러브'를 예매할까 말까 고민 중이라는..그 다음에 '환상의 그대',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고슴도치와 여우> 얼른 보관함에 넣어둘래요. 제목이 무척 재미있네요.
번역은, 그쵸? 자꾸자꾸 읽어보면 문학동네 번역에서 맛이 느껴져요.

순오기 2011-01-20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보고 싶었는데 놓쳤어요~~~~~ 리뷰가 좋아 꼭 보고 싶은데요.
안나 카레니나~ 민음사 문학동네, 고민하게 만드네요~ ^^

섬사이 2011-01-20 10:31   좋아요 0 | URL
저 큰일났어요. 극장이랑 너무 친해지려고 해서요.^^ 저 영화는 저 혼자 보러갔었는데요, 제 앞이랑 제가 앉은 줄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뒤에만 몇 명 앉아 있더라구요. 극장 안을 저혼자 통째로 빌린 듯한 착각 속에서 영화에 빠져드는 기분, 정말 좋았어요. ^^
어쩌면 올해는 책보다는 영화에 대한 리뷰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무스탕 2011-01-20 11:38   좋아요 0 | URL
혼자 영화보는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면 같이 다니기 어려워지지요.
제가 그렇거든요. 같이 보는것도 재미있지만 혼자 보면서 옴팡 영화에 빠져드는것도 끝내주게 좋아요.
올해 섬사이님의 영화 리뷰, 잔뜩 기대에요 :)

섬사이 2011-01-21 10:30   좋아요 0 | URL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혼자 보는 거, 처음이었는데 훨씬 자유롭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순오기 2011-01-22 00:33   좋아요 0 | URL
제가 영화 혼자 잘보는 아줌마에요.
극장을 통째로 빌려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지요.ㅋㅋ
영화 리뷰, 책 리뷰~ 요즘은 게으름 부리는 중...
다른 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으면 그런 게 어렵더군요.
좀 전에 확인하니 우리동네 극장에 '울지마 톤즈'가 걸려서 올해 첫 영화로 볼거에요.

섬사이 2011-01-24 17:43   좋아요 0 | URL
일이 많으신가 봐요.
울지마, 톤즈.
그 영화를 보면 슬프고 미안하고, 반성하고, 뿌듯하고..
아주 복잡한 마음이 될 것같아요.
순오기님의 영화소개, 기다릴게요.
보고싶은 영화들이 너무너무 많아졌어요. ^^

순오기 2011-01-24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애들이 울지마 톤즈를 안 본다 하고, 심야상영도 없어서 다른 걸 봤어요.
심장이 뛴다~~~~~~~~~ 를 봤는데 좀 별로였어요.ㅜㅜ
절박한 상황인데도 관객이 공감하기 어려운 설정, 긴박감이 떨어지는 연출이 문제인지, 편집이 문제인지... 아쉬움이 많은 영화였어요.

순오기 2011-01-26 18:55   좋아요 0 | URL
오늘 지나면 톤즈 내릴거 같아서 8시 25분 마지막 프로 보러 갑니다~

섬사이 2011-01-28 16:0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은 심야를, 저는 조조를~~ ^^
전 오늘 동네 엄마들이랑 같이 '조선명탐정'보고 왔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어요.
울지마 톤즈는 어떠셨는지...
'울지마요, 순오기님..'할만큼 슬프고 감동적이고 막 그러셨나요?^^

순오기 2011-01-28 20:22   좋아요 0 | URL
좀 울었어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니 밥벌이 할만한 전문직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나를 반성하며 부끄러웠어요.ㅜㅜ

섬사이 2011-01-29 14:47   좋아요 0 | URL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겠지요.
순오기님처럼 열정적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부끄럽다면
저 같은 사람은 쥐구멍을 찾아야겠군요. ^^

세실 2011-01-26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요 번역이 심플하니 좋은데요. 님 리뷰 읽고나니 영화 보고 싶네요.
안나 카레니나 읽는 것으로 대신할까요? 그나저나 언제....읽고 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없고..슬퍼요.

섬사이 2011-01-28 16:0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한 일주일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누구의 방해도 없고, 어떤 스케줄도 없는 그냥 내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돼요.
전 전업주부인데도 그런데 세실님은 더 하시겠지요?
영화는 참 좋았어요. 그런데 하도 오랜만에 극장나들이를 다니니까,
보는 영화마다 다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