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정미경님의 소설 <장밋빛 인생>을 읽다가 '이 세상과 맞서는 칼 하나'라는 글에서 잠시 멈칫했다.  대학 때 끄적거리며 써놓았던 시가 생각나서.  오래된 노트들을 뒤져보니 그 때 썼던 시가 사라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1988년 초봄'이라고 노트 밑단에 써놓은 걸 보니, 햐~~ 벌써 20년 전이다.  기념으로 20년 전 내가 끄적여 놓았던 시를 알라딘 서재에 옮겨 놓아 본다.

              성(城)

봄이 떠난 숨겨진 자리에
오만하고 튼튼한 성을 쌓아서
수녀 얼굴을 한
창부 하나와,
동방박사 변장을 기막히게 잘하는
사기꾼 하나와,
순진한 눈동자를 가진
강도 하나 불러 들이고
그들을 지키는 병사가 되는 거야.

십자가 짊어진 선량한 사나이 있어
어느 날 성을 찾아와
목이 마르다 하거든
말 줄임표와 바닷물 한 잔 주어
쫓아보내고,

길을 잃은 가난한 소년이
성을 찾아와
쉴 자리 구하거든
마침표와 칼 한 자루 주어
돌려보내야 해.

바람이 흐르는 거리만큼 강물도 깊고
겨울 밤 두께만큼 달도 밝은데
봄 하나, 봄 둘의 그림자 지기도 전에
저만치 다시 오는 겨울이 두려워
성은 날로날로 어른이 되라.

 

지금 보니 나도 참 유아적이고 유치뽕짝인 시기가 있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 때에 나는  뭘 그리 나름대로 비장하게 지키려고 했을까.  성을 쌓고, 자기를 속이고, 누군가를 쫓아내면서.

암튼 나의 20년 묵은 미발표 작품을 알라딘 서재를 빌어 발표하는 셈이다. (나의 모든 것이 다 미발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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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2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잘 쓰셨어요 :)

소싯적 글은 자신이 읽으면 유치하지요 ^^
저도 미발표 작품들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다 폐기처분하고 ㅋㅋ
절필 선언한지가 오래되놔서 :)
잘 읽었습니다.

섬사이 2007-07-03 16:16   좋아요 0 | URL
저는 절필 운운할 정도의 文歷도 갖고 있지 않은지라..^^ 그래도 내 마음대로의 시를 끄적이곤 했었는데, 정현종님의 시를 읽고는 그 다음부터는 아예 안쓰게 되어버렸어요. 그 시의 내용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면 시로도 거짓말을 할까...하는 내용이었거든요. ^^

홍수맘 2007-07-0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절대 유치뽕짝 아니예요. 저한테 미발표 작품이란 조재 자체가 없었다지요.
멋지세요.

섬사이 2007-07-03 16:17   좋아요 0 | URL
야~~ 박수까지 받고 기분 좋네요.^^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07-07-02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걸요! 돌아보면 모두가 유치하지요. 그만큼 지금 나아져있다는 말이
되구요. 충분히 좋아요. 88년도에 전 졸업했지요^^

섬사이 2007-07-03 16:27   좋아요 0 | URL
정말요? 혜경님 댓글에 위로받았어요. 그래요, 적어도 20년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단 뜻으로 받아들이면, 저 유치함도 너그럽게 이해해줄만 하네요. ^^ 88년에 졸업하셨으면 저보다 2년 선배세요.

다락방 2007-07-0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너무나 근사해서 저는 앞으로 알라딘에 시를 쓰지 못하겠는걸요. 훗.

섬사이 2007-07-04 08:5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놀리시면 싫어욧~!!!

2007-07-04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05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7-07-05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신걸요..이렇게 오래 간직한 글을 발표하시다니..알라딘 주민인것이 또 한번 자랑스러워요..^^&


섬사이 2007-07-05 11:44   좋아요 0 | URL
배꽃님, 다녀가셨군요.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한동안 또 안보이시길레 님 서재로 쳐들어가 구석구석 뒤지며 찾아보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