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정미경님의 소설 <장밋빛 인생>을 읽다가 '이 세상과 맞서는 칼 하나'라는 글에서 잠시 멈칫했다. 대학 때 끄적거리며 써놓았던 시가 생각나서. 오래된 노트들을 뒤져보니 그 때 썼던 시가 사라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1988년 초봄'이라고 노트 밑단에 써놓은 걸 보니, 햐~~ 벌써 20년 전이다. 기념으로 20년 전 내가 끄적여 놓았던 시를 알라딘 서재에 옮겨 놓아 본다.
성(城)
봄이 떠난 숨겨진 자리에
오만하고 튼튼한 성을 쌓아서
수녀 얼굴을 한
창부 하나와,
동방박사 변장을 기막히게 잘하는
사기꾼 하나와,
순진한 눈동자를 가진
강도 하나 불러 들이고
그들을 지키는 병사가 되는 거야.
십자가 짊어진 선량한 사나이 있어
어느 날 성을 찾아와
목이 마르다 하거든
말 줄임표와 바닷물 한 잔 주어
쫓아보내고,
길을 잃은 가난한 소년이
성을 찾아와
쉴 자리 구하거든
마침표와 칼 한 자루 주어
돌려보내야 해.
바람이 흐르는 거리만큼 강물도 깊고
겨울 밤 두께만큼 달도 밝은데
봄 하나, 봄 둘의 그림자 지기도 전에
저만치 다시 오는 겨울이 두려워
성은 날로날로 어른이 되라.
지금 보니 나도 참 유아적이고 유치뽕짝인 시기가 있었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 때에 나는 뭘 그리 나름대로 비장하게 지키려고 했을까. 성을 쌓고, 자기를 속이고, 누군가를 쫓아내면서.
암튼 나의 20년 묵은 미발표 작품을 알라딘 서재를 빌어 발표하는 셈이다. (나의 모든 것이 다 미발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