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음악학자 앨프리드 스완은 1944년 자신의 친구에 관한 견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깊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거둔 커다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관객이 보여준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다. 그는 고독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조국 러시아를 영원히 그리워했다.”


(12)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낯설어진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 된 것만 같다. 낡은 작곡 방식을 펼칠 수도 없고, 새로운 작곡 방식을 습득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음악 양식을 느껴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였지만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있다. 나비부인은 남편을 위해 순순히 개종하였지만, 나는 내가 믿어오던 음악의 신들을 냉큼 버리고 새로운 신들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러시아에 닥친 재앙과도 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음악이, 그리고 모든 음악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정신적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명을 향한 끊임없는 순종이었다.”


(23-24)

말년에 그(라흐마니노프)는 나름대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새로운 종류의 음악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음악의 작곡가들은 느끼기보다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한스 폰 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을 환희하게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묵상하고 주장하고 분석하고 사고하고 계산하고 곱씹을 뿐, 절대 환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정신에 입각해 곡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당대의 정신은 음악에서 표현을 요구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곡가들로서는 사고는 가능하되 느낄 순 없는 음악을 엮어내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애가 요구하는 표현은 사실과 문자의 장인인 작가와 극작가에게 맡겨두고 영혼의 권역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것에 관한 나의 견해를 물은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경우도 현대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현대음악은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리는 음악입니다. 고사병에 걸린 채로 태어나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74)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 라흐마니노프는 첫 공개 연주회 장소도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골랐다. 바로 1892 9 26일에 열린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다. 이날 연주회에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피아노 협주곡 4> 1악장,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아울러 전 세계 청중에게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알릴 최신곡도 초연했다. 다름 아닌 <전주고 c샤프단조>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그해 가을에 작곡한 네 편의 피아노곡과 묶어서 출판업자 구트하일에게 건넸고, 구트하일은 다섯 편의 피아노곡을 <환상적 소품집, 작품 3>으로 출판했다.” 출판 악보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스승 안톤 아렌스키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새겨져 있었다.


(107)

작가 니콜라이 텔레쇼프는 1904년 모스크바의 어느 날 저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샬라핀은 라흐마니노프에게 불을 지폈고, 라흐마니노프는 샬랴핀에게 박차를 가했다. 두 거인은 서로를 격려하며 진정한 기적을 창조했다. 그것은 더 이상 흔한 의미에서의 노래도 음악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두 예술가가 발산하는 영감의 공세 같은 것이었다. … [라흐마니노프] 샬라핀과 가까이 지내는 동안 가장 강력하고 가장 깊으며 동시에 가장 절묘한 예술적 인상을 경험했고, 그것이 그에게 큰 혜택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즉흥 연주 솜씨가 기막혔다. 샬랴핀이 잠시 숨을 돌리려 하자 라흐마니노프는 믿을 수 없는 즉흥 연주 실력을 뽐냈고, 라흐마니노프가 잠깐 휴식을 휘하겠다 하지 샬랴핀은 피아노 앞에 앉아 직접 반주하며 러시아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색다른 콘서트는 자정을 넘은 시각까지 이어졌다. 샬랴핀을 유명인으로 만든 아리아와 오페라 발췌가 있었고, 아름다운 로망스가 장난기 가득한 음악이 있었으며, 탁월하고 매력적인 라 마르세예즈가 있었다.”


(119-120)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러시아 망명 언론에 게재한 리뷰에서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을 통해 강력한 사운드, 숙달된 리듬,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손 등 그야말로 리스트처럼 모든 것을 갖춘, 그리고 거기에 더해 러시아의 영혼까지 가미된모든 성장을 마친 특출된 피아니스트로 우뚝 섰다고 칭찬했다. 과연 이 작품으로 올린 개가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경력에서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대를 산 누군가는 이렇게 술회했다. “모스크바는 라흐마니노프를 흠모했다. … 모스크바의 대중은 라흐마니노프라면 껌뻑 죽었다. 그는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연주가 모든 이의 영혼을 파고들어 다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리지 못하는 심금을 울린 게 분명했다.


(176-177)

<피아노 협주곡 3>은 러시아정교회의 성가를 떠오르게 하는 음계 위주의 구불구불한 도입 선율부터 해서 낭만적이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한껏 품고 있다. 이 뚜렷한 러시아성은 빈틈없는 주제들의 통일성 및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의 기량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눈부신 기교와 더불어 이미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2>과 친숙하던 미국 관객을 겨냥한 노림수였던 듯 보인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곡의 음악적 특징을 전작보다 윗길에 놓았지만, 정작 관객들에게는 그만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곡을 헌정받은 러시아의 동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은 이 곡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독주자가 소화해야 하는 두터운 화음 텍스처와 널찍한 음역은 호프만의 조그마한 손보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설적인 뼘 너비에 적격인 게 사실이다. 호프만은 또한 이 곡에 구조미가 부족하다면서 협주곡보다는 환상곡에 가깝다고 조롱하듯 깎아내리기도 했다. 과연 제3악장은 협주곡치고는 제법 덩치가 큰데, 다만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례적 구성 덕순에 이 곡만의 멋진 개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아노 협주곡 3>이 피아니스트들이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편입된 건 1928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치의 연주 덕분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압도당한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을 통째로 삼킨 연주!”라고 상찬했다.


(197)

라흐마니노프의 인기 비결은 아름다운 선율과 풍성한 화음을 그만의 방법으로 배합한 음악에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경험한 바를 긍정받는 감정의 분출을 경험했다. 집시들이 부르는 노래, 오페레타, 그리고 문화 엘리트층이 멸시하는 대중적인 여흥과 마찬가지로 라흐마니노프가 쓴 음악을 듣는 즉시 감정이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은 그저 비관적이고 우울하고 어두운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른 음악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로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에 호소했다. M. L. 첼리시페바의 회고대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


(274-275)

<피아노 협주곡 4>의 뿌리는 러시아이지만, 마틴은 이 곡이 주로 뉴욕에서 쓰였고 서유럽에서 완성되었으며 게다가 섬세하고 명석한 작곡가의 작품이니 그가 수년간 주로 생활한 나라의 경치와 소리에 영향받은 게 당연하다면서 낭만파의 희뿌연 실안개는 영영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1924년의 라흐마니노프는 재즈와 안면을 튼 상태였고, 심지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초연도 참관한 다음이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피아노 협주곡 4>은 한층 간결해진 주제를 사용하는 등 라흐마니노프가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곡 스타일로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06-307)

의사까지 나서서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라흐마니노프는 역정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주회는 내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게서 연주회를 앗아가면 나는 시들고 말 겁니다. 통증이 있어도 연주할 때는 사라집니다. 종종 얼굴과 머리 왼쪽의 신경통이 스물네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연주회 전에는 마술처럼 없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요통 때문에 아주 고생했습니다.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앉은 상태에서 막이 올랐고, 연주를 할 때는 조금도 통증이 없었지요. 하지만 연주가 끝나니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막을 내린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뇨, 연주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일을 멈추면 시들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안 됩니다 무대 위에서 죽기를 바랄 수밖에요.”


(336)

라흐마니노프는 현대 기술을 사랑했고, 색소폰 같은 현대 악기들을 탐구했다. 또한 여러 망명지를 겪은 것처럼 제정러시아 말기의 시국도 경험하였다. 다시 말해, 사상과 혁신이 난무하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여건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같은 이유로 라흐마니노프는 읽어버린 나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의 음악과 정신은 1914년 부활절의 크렘린궁전을 담은 로베르트 슈테를의 그림, 즉 라흐마니노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옛 러시아의 이상화된 박제이자 그의 벽에 걸린 뮤즈를 동경했다. 라흐마니노프 개인에게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현대성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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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2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2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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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지난 편지에 이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2권을 이야기해줄게. 요즘 아빠가 좀 바빠서 책도 많이 못 읽고, 편지도 계속 밀리고 있는데, 분발해야겠다.

베르너는 휴가 때 국립정치교육원에서 알게 된 친구 프레데리크의 집에 갔단다. 프레데리크의 따뜻한 가족들을 만났고, 프레데리크의 꿈 이야기도 들었어. 프레데리크의 꿈은 새 전문가라고 했어. 그래서 집에 새에 관한 책들이 많았어. 프레데리크 자신은 교육원과 군인이 적성에 맞지 않는데, 집에서 원해서 가게 된 것이라고 했어. 휴가 복귀 후에도 프레데리크는 교육원 생활을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특히 비인간적인 명령에 대해서는 참다못해 거절했어.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는 왕따를 당하고 집단구타를 당했어. 베르너는 그의 편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단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졌어. 프레데리크는 집단구타로 머리를 크게 다치고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었어. 결국 프레데리크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집으로 귀환조치 되었단다.

베르너는 특별기술부대에 전출가게 되었어. 이제는 교육원이 아니라 실제 군인이 되는 거야. 베르너는 전출 가기 전에 프레데리크의 집에 갔어. 하지만 프레데리크는 베르너를 알아보지 못했단다. 만약 베르너가 왕따 당하는 프레데리크를 막아주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아니면 베르너도 프레데리크처럼 되었을까?

베르너가 전출 간 특별기술부대에서는 불법 송신하는 주파수를 찾아내 그 발원지를 찾아내는 일이란다. 이 일에 베르너는 전문가였어.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찾아내고, 계산을 통해 발원지를 알려주면 대기하고 있던 군부대가 출동하여 그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란다. 적군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이들이니까 말이야.

, 베르너는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찾는 일을 하고, 마리로르와 에티엔 할아버지는 라디오 송신기가 있고이것이 나중에 접점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다.

아무리 실력 좋은 베르너라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어. 불법 송신 주파수의 발원지를 잘못된 곳으로 알려주었다가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일이 생겼어.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주파수의 발원지를 제대로 찾아서 죽은 사람들은 죄가 있는가? 나라를 침략한 이들이 죄를 지은 거지.

어느날 베르너는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통해서 자신이 어렸을 때 아이들의 방에서 유타와 함께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단다. 반가웠겠지만, 이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상사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갈등했단다. 그는 상사에게 이 불법 라디오 주파수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 주파수의 발원지를 혼자 찾아갔단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나오는 소녀를 목격하게 된단다. 드디어 그렇게 베르너와 마리로르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어. 앞을 보지 못하는 마르로르는 베르너의 존재를 몰라겠지만


1.

한편 마리로르는 파리에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기로 한 날짜보다 한 지나고 안 오시자, 걱정이 쌓여갔단다. 그리고 20여일 만에 편지가 왔는데 베를린에 체포되어 있다고 했어. 앞을 볼 수 없는 마리로르

프랑스 파리가 독일에 점령당하고 생말로 주민들도 무엇인가 하려고 했어. 마네크 아주머니도 동참하려고 하셨단다. 총을 들고 나가 싸울 수는 없지만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어. 마을 아주머니들도 모두 동참하셨단다. 에티엔 할아버지도 다락방에 숨겨둔 라이오 송신기로 무엇인가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단다. 그런데 마네크 아주머니가 갑작스레 중병에 걸려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아버지도 안 오시고, 마네크 아주머니는 돌아가시고이제 그 큰 집에 마리로르와 에티엔 할아버지 둘 만 있단다.

1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에티엔 할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로 방에서 거의 나오시지 않는데, 살림을 도맡아 하던 마네크 아주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에티엔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으셨단다. 이런 큰 충격이 오히려 과거의 트라우마를 깨기도 하지. 에티엔 할아버지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마네크 아주머니에 대한 추모의 시간을 갖고, 본격적으로 무엇인가를 하셨어.

다락을 막은 옷장의 안쪽을 뚫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단다. 그리고 다락방에 있는 라디오 송신기를 수리했단다. 이제 마네크 아주머니가 하던 일을 마리로르와 에티엔 할아버지가 했단다. 마리로르는 빵집에 가서 빵집 아주머니로부터 비밀 숫자를 받아오고, 에티엔 할아버지는 그 숫자를 라디오를 통해 보냈단다. 그리고 짧은 클래식 소품 하나도 같이 보냈어. 전쟁에 찌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선율을 듣게 된다면 어땠을까. 에티엔 할아버지는 참 낭만적인 분인 것 같구나.

1권에서 박물관의 다이아몬드를 찾고 있는 독일군 원사 룸펠이라는 사람 생각나지? 마리로르의 아버지 다니엘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생각해서 다니엘을 파리 박물관 복귀를 지시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다니엘이 체포된 줄 몰랐어. 다니엘이 체포되어 형무소에 갇힌 지 4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단다. 룸펠은 다니엘이 머물렀던 생말로의 집을 알게 되어 그 집에 갔단다. 그리고 다니엘의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딸이 장님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마리로르에게 말도 걸었는데, 마리로르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도망쳤단다. 아참, 룸펠은 암 선고를 받고 치료를 받고 있던 중이라 도망치는 마리로르를 쫓아갈 체력이 안 되었단다.

그렇게 마르로르가 룸펠로부터 도망을 치다 보니 평상시보다 집에 오는 시간이 늦어졌단다. 에티엔 할아버지는 빵가게 심부름을 갔던 마리로르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걱정을 하며 집밖에 직접 나갔단다. 몇 십 년 동안 나가지 않던 집밖을 말이야. 나중에 마리로르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왔어. 이 일이 있고, 에티엔은 자신이 빵가게에 가겠다고 했어. 그런데, 이를 어쩌니, 에티엔이 빵가게 갔다가 그만 체포되고 말았단다. 집에 장님인 손녀가 혼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어. 이제 그 큰 집에 마리로르 혼자 있게 되었단다.

….


2.

그렇게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누군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났어. 할아버지의 발소리는 아니었어. 룸펠이었단다. 이곳 어딘가에 다이아몬드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온 거야. 룸펠의 생각이 맞았어. 다이아몬드는 이곳에 있었어. 아버지가 길 찾기 훈련을 하라고 만들어주진 생말로 도시 모형의 속에 숨겨 두었는데 얼마 전에 마리로르가 우연히 찾아냈단다. 그래서 지금은 마리로르의 주머니 속에 있었어.

침입자의 발소리를 들은 마리로르는 다락방으로 숨었어. 옷장의 문을 닫으면 다락방 입구를 찾을 수가 없거든. 룸펠은 집에 들어와서 이곳 저곳을 느릿느릿 돌아다니면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보았단다. 며칠이 지나도 그곳에 있었어. 그로 인해 마리로르는 다락방에 숨어서 나오질 못했어. 그리고 라디오 송신기를 켜고 에티엔 할아버지가 사주신 점자책 <해저2만리>를 낭독했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말이야.

그런데 그 방송을 베르너가 들었어. 베르너가 그 방송을 들을 시점에 베르너도 상태가 좋지 않았단다. 생말로에 있는 꿀벌 호텔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연합국의 폭격을 맞아 호텔은 무너지고 지하에 피신하고 있었거든많은 동료들이 죽고 폴크하이머라는 동료와 함께 있었어. 베르너를 그 방송을 듣고 자신이 얼마 전에 갔던 그곳임을 알았어.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그 주파수. 베르너는 그곳을 향했단다. 전쟁이고 뭐 다 필요 없고, 그 소녀를 만나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마리로르의 집에 왔는데, 베르너는 그곳에서 룸펠을 만나게 되었지. 그런데 바로 그때 마리로르가 다락방에서 며칠 동안 숨어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락방에서 뛰쳐나왔는데 룸펠이 깜짝 놀라서 총을 겨눴고, 이에 베르너가 룸펠을 공격하여 죽였단다. 베르너가 마리로르를 살린 거야. 마리로르는 베르너와 룸펠이 싸우는 소리만 들었을 테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드디어 만난 마리로르와 베르너. 베르너가 자신이 이곳에 온 곳에 대해 다 이야기했어.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라디오 방송부터 마리로르가 낭독한 <해저 2만리>까지얼마 안 있으면 대대적인 폭격이 있을 것을 알고 있던 베르너는 마리로르를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단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베르너는 마리로르를 사랑했어. 베르너의 도움으로 피신한 마리로르는 풀려난 에티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단다. 한편 마리로르와 헤어진 베르너는 체포되었어. 그리고 도망치다가 지뢰를 밟고 그만 운명을 달리했단다. 그렇게 베르너는 죽고 말았지만, 마리로르는 베르너로 인해 살 수 있었던 거야.

….

소설의 마지막은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지나고 나서 베르너의 군동료 폴크하이머가 베르너의 유품을 가지고 베르너의 일기에 담긴 사람들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마무리 된단다. 베르너의 일기에 담긴 사람들에는 유타, 프레데리크, 그리고 마리로르가 있었어.. 여기까지가 소설의 이야기란다.

이 소설은 아프지만 아름다운, 짧지만 진정한 사랑 이야기였단다. 2차 세계 대전에 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을 거야. 어쩌면 이 소설보다 더 가슴 아픈 일들이 실재했을 거란다. 아빠가 지난 편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단다.

….

소설을 덮고 드라마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예고편을 보았단다. 짧은 예고편이지만 소설의 장면들을 잘 그려낸 것 같더구나. 예고편을 봤더니 본편이 더 보고 싶더구나. 얼른 시간을 만들어야 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사령관은 덕목과 가족에 대해, 슐포르타 소년들이 어딜 가나 늘 달고 다니는 불을 상징하는 표지, 국가의 난로를 지피는 순수한 횃불을 의미하는 그 불에 대해서 연설하고, 또 총통이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하는데, 그 말은 베르너의 귀를 익숙하게 두들기고, 무모한 소년 하나는 투덜거리며 토를 단다.

책의 끝 문장: 이윽고 차들의 한숨 소리와 기차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추위 속에서 발을 재는 모든 사람의 소리만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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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질문의 의도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유르겐은 자기 인생을 돌이켜 봤다.

십대 중반까지, 독일의 축구 국가대표가 되어 외국에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출전하여 배를 타고 여러 나라에 가서 축구를 하고 환성을 듣고 싶었다. 외국 선수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코치들에게 제2의 제프 헤르베르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니 병역이 없었다면, 또 올림픽과 월드컵이 중지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네 동료가 쏜 여성은 두 아이의 엄마였어. 그 후에도 엄마로 있고 싶어했지. 잃어버린 아이들을 키워서, 언젠가 손주를 만나고 싶어 했어.”


(479)

나는 멈출 수 없었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나는 지금 죽을 수 없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전쟁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끔찍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전부 전쟁이 나쁜 거야. 그러니까 부탁이야. 제잘 용서해 줘.”


(523-524)

학교에서 던진 질문,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생각했던 질문. 세계는 이렇게 넓은데 소련만 유일하게 전선에 나서는 여성 병사를 길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답이 무엇이든 종전과 함께 여성 병사가 쓸모없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이 칭송한 대상은,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서 싸운 남자들과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후방을 지킨 정숙한 여자들이었다.

부활한 남녀 역할은 군대 안에도 영향을 끼쳐 여성은 전투 보직이 아니라 지원 보직으로 발령받는 등, 옛날식으로 분리되었다. 살아 돌아온 여성 병사를 꺼림칙해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특히 같은 여성들이 그들을 소외시켰다. 저격소대 여성들도, 세라피마와 이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527)

스탈린 체제가 공포정치였다면, 그것을 떠받들며 싸운 우리는 대체 뭐였지?

어쨌거나 스탈린은 극악무도한 자였던 만큼 그의 업적을 모조리 부정해야 하기에, 보존했던 시신을 매장하고 동상을 부수고 각종 서적을 다시 썼다. 당연히 스탈린그라드도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그렇다고 옛 이름인 차리친은 차르, 즉 황제를 연상시키므로 사회주의국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볼가강에 가깝다는 이유로 볼고그라드라는 무미건조하고 중립적인 이름을 대충 가져가 붙인 것이다.


(530)

소련이라는 이름의 국가는 삐걱거리며 나아가는 쇄빙선과도 같았다.

크고 작은 얼음을 부수며 나아가던 선체가 각종 사회적 모순으로 타격을 받아 언젠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모두가 한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배가 가라앉으면 보트에 나눠 타서 혹한의 바다로 노를 저을 수밖에 없다. 항해 도중에 선장이 바뀌는 것처럼 권력자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진다.


(532)

소련에서도 독일에서도 전시 성범죄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는 여성들이 입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성범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을 혐오하는 각 사회의 요구가 합쳐진 결과였다.

마치 교환 조건이 성립된 것과 같았다. 소련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른 독일 국방군과 독일인에게 폭력을 저지른 소련군은 사이좋게 입을 다물고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기본 좋은 영웅적 이야기. 아름다운 조국의 이야기.

참혹하고 비극적인 이야기. 무자비한 독재의 이야기.

그것은 독일에서도 소련에서도,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의 병사는 반드시 남자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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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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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줄 책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이라는 책이란다. 두 권짜리인데 오늘은 1권을 이야기해줄게. 이 책은 출간할 즈음에 인터넷 서점을 통해 제목은 알고 있던 책이야. 어여쁜 소녀의 얼굴을 한 책 표지 때문에 더 기억에 남은 책이란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그 드라마에 우리가 좋아하는 헐크, 마크 러펄로도 출연한다고 하더구나. 지금은 이미 드라마가 서비스 되고 있더구나. 드라마는 시간이 좀 되니, 날 잡아서 함 봐야겠구나.

아무튼 이제서야 이 제목만 알고 있던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자세히 알아보았단다. 퓰리처 상을 받았고,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을 한 소설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는 왜 이 소설을 추리 소설로 기억하고 있었는지 모르겠구나.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면, 읽고 나서 너희들에게도 이야기해 줄만한 역사 상식도 있겠다 싶어서 읽게 되었단다. 그리고 평점도 엄청 높아서 재미는 보장되겠고, 말이야. 지은이는 앤소니 도어라는 사람인데, 우리나라에는 많은 작품이 소개된 것 같지는 않구나. , 그럼 바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권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1.

1944 8 7. 프랑스 서부 해안 도시 생말로에서 이야기를 시작된단다. 보보렐 거리 4번지에 16살 장님 소녀 마리로르 르블랑이 살고 있었고,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18살 독일군 이등병 베르너 페닝이 한 호텔에서 연합군의 공세에 피신을 하고 있었단다.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야기는 그로부터 약 10년 전으로 돌아간단다. 소설의 전개는 1944년을 시점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데, 아빠는 가능하면 그냥 시간 흐름대로 이야기를 해줄게.

1934년 마리로르는 6살이었고, 파리에 살고 있었단다. 마리로르의 엄마는 마리로르를 낳다가 그만 돌아가셨고, 아버지 다니엘 르블랑과 둘이 살고 있었어. 아버지 다니엘은 박물관에서 자물쇠 장인으로 일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급격하게 마리로르가 시력이 악화되어 병원에 갔으나 이미 늦어서 시력을 잃고 말았단다.

다니엘은 그들이 사는 동네 모형을 조그맣게 만들어서, 시력을 잃은 마리로르에게 동네의 모습을 외우게 했어. 나중에 혼자서도 밖에 나갔다가 길을 잃지 않게 말이야. 그리고 돈이 생길 때마다 마리로르를 위해서 점자책을 사주었단다. 하지만 점자책이 비싸서 많이는 사주지 못했어. <80일 간의 세계 일주>, <삼총사>, <해저 2만리> 1. 마리로르가 점자로 읽은 책들이란다. 읽고 또 읽고

당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다들 설마 라고 생각들 했단다.

1940 6. 마리로르는 아버지 다니엘과 피난길에 올랐단다. 소문이었던 전쟁이 결국 일어났고, 파리가 함락하게 된 거야. 아버지가 일하던 박물관 관장님이 소개해준 지인의 집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어. 그런데 박물관 관장님의 지인의 도착을 해 보니, 그 집은 이미 폭격을 받아 무너졌고, 관장님의 지인은 런던으로 피난을 가고 없었어. 다니엘은 차선책으로 연락한 지 오래 된 작은 아버지, 그러니까 마리로르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이신 에티엔 할아버지 댁으로 갔단다. 다니엘이 작은 할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산 이유는 작은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은둔하고 지내셨기 때문이야.

마리로르의 친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함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셨는데, 친할아버지는 그 전쟁에서 그만 돌아가시고 작은 할아버지만 살아서 돌아오셨어. 전쟁에서 형을 잃은 작은 할아버지는 그 충격과 트라우마로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지냈는데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되었단다. 그래서 아버지도 작은 할아버지께 연락을 하지 않으신 거야. 작은 할아버지 에티엔은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받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어. 집안 일은 마네크 아주머니라는 분께서 해주시고 계셨어.

다니엘과 마리로르가 도착했을 때, 마네크 아주머니는 아주 다정하게 반겨주셨고, 이후에도 계속 마리로르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인정 많으신 분이었단다. 다니엘과 마리로르는 6층에서 지냈고, 작은 할아버지는 5층에 계셨어. 며칠 후 우연히 마리로르가 5층에 갔다가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작은 할아버지는 마리로르에게 따뜻하게 잘 대해주셨단다. 어느 할아버지가 조카 손녀딸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겠니. 작은 할아버지는 마리로르에게 책도 읽어주었고, 작은 할아버지의 비밀 장소인 다락방에 데려가기도 했어. 작은 할아버지의 다락방에는 온갖 기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라디오 송신기도 있었단다.

작은 할아버지는 자신의 형, 그러니까 마리로르의 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녹음한 내용들을 송출하는 일도 하셨다고 했어. 작은 할아버지가 마리로르를 통해서 이제서야 마음의 치유를 받는 것 같았단다. 전쟁의 상처를 받으신 작은 할아버지와 앞을 볼 수 없는 조카손녀 마리로르가 다락방에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해 보니 따뜻하면서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어느 날, 나라에서 통지문이 하나 날라왔어. 라디오를 모두 반납하라는 지였단다. 전쟁에 이용될 것을 막기 위함인 것 같았어. 아버지는 집에 있는 모든 라디오를 반납했단다. 작은 할아버지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커다란 옷장으로 막아 놓았단다. 나중에 혹시라도 검사하러 오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야.

….

어느날 박물관장의 전보가 하나 왔어. 아버지에게 온 전보인데 파리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어.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 중에 룸펠이라는 군인 원사가 있는데, 그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보물들을 다 빼앗아갔다고 했어. 사실 아버지는 박물관장님의 지시로 희귀한 다이아몬드를 숨겨두고 있었단다. 피난 올 때도 그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왔어. 아버지는 이 다이아몬드를 가져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단다. 아버지는 마리로르에게 파리에 갔다가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났단다. 하지만 아버지는 파리 가는 길에 그만 독일군에 체포되어 말았어.


2.

독일 에센시 외곽 졸페라인이라는 곳에 베르너는 엘레나 아주머니가 보살펴 주는 아이들의 집이라는 고아원에서 동생 유타와 함께 지냈단다. 베르너는 기계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는데, 어느날 고장 난 라디오를 주워왔고,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라디오를 고치게 되었단다. 그 이후 베르너와 유타는 라디오를 함께 들었어. 음악도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었단다. 채널을 돌리다가 프랑스 방송도 들을 수 있었어. 그 프랑스 방송에서는 아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내용도 알려주었는데 베르너를 라디오를 통해서 과학 공부도 하게 되었어. 14살이던 어느날 엘레나 아주머니를 통해서 고위 군장교 지들러 부부의 라디오를 고쳐줄 정도로 실력이 늘었어.

베르너는 지들러 씨 소개로 국립정치교육원에 시험 볼 수 있게 되었고, 합격을 했단다. 그곳을 졸업하게 되면 군인이 되는 것인데, 라디오에서 독일 군인은 악마라는 소리를 들은 동생 유타는 오빠가 국립정치교육원에 가는 것을 반대했단다. 하지만 베르너는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기뻐했어. 베르너는 국립정치교육원에서 공부와 군사훈련을 함께 받았는데, 수학에서 두각을 내면서 기계를 다루는 곳에 배정을 받고 실험실에게 엔지니어링 공부를 하게 되었단다.

…..

여기까지가 대략 1권의 이야기란다. 인류 역사에 있어 전쟁은 꽤 많이 일어났는데, 전쟁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란다. 그 많은 전쟁이 일어났지만, 전쟁으로 행복해진 나라는 아마 하나도 없을 거야. 어리석은 지도자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대부분이니까 말이야.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전쟁은 끊이질 않으니 안타깝구나. 앞을 못 보는 마리로르에게 전쟁은 더 힘들었을 것 같구나. 자신을 보살펴 주는 아버지마저 체포되었으니 말이야. 2권의 이야기도 곧 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땅거미가 지자 그것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책의 끝 문장: 그러나 그녀가 미처 벽돌을 내리기도 전에, 그녀 뒤에 있던 철사 덫이 홱 잡아당겨지더니 초인종이 울리고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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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5권 - 개화기편,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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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씩 읽는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5권을 읽었단다. 5권의 부제는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란다. 4권에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으로 빼앗기고, 강제로 군대까지 해산된 대한제국. 뜻있는 지식인들은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교육뿐이라고 생각하고, 학교들을 세우고, 계몽 운동을 많이 했는데, 강준만 님은 그런 활동을 교육구국론이라고 하신 것 같구나. 그런 계몽 운동을 하는 단체 중에 1907년 안창호가 주도하여 만든 신민회라는 비밀단체가 있단다. 비밀리에 활동을 해서 일제가 이 단체의 전재를 알게 된 것은 1911년이라고 하는구나.

나중에 이야기되기겠지만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감옥에 가게 된단다. 바로 그 신민회가 1907년에 만들어졌고, 교육 구국 운동을 펼쳤단다. 이때 많은 학교들이 문을 열었단다.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 안창호, 윤치호, 이종호가 함께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가 대표적이란다. 1908 5월에는 한성고등여학교가 개교했는데, 오늘날 경기여고가 바로 한성고등여학교하고 하는구나.

이 시기에 의병 활동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조국의 원수들을 처단하는 일들도 있었어. 그 중에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의 이야기를 읽게 되어 소개해줄게. 일본 통감부 외교고문으로 일하던 일본의 앞잡이 스티븐슨이란 자가 있었단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정당하다고 주장한 사람이야. 그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을 우리나라의 두 명의 애국지사가 동시에 암살을 시도했다고 하는구나. 두 애국지사는 장인환, 전명운이라는 분들인데, 두 분은 서로 모른 채 각각 거사를 단행했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분들인데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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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 23일 스티븐스(일본 통감부 외교고문)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역 구내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애국지사의 총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이 행동한 게 아니라 서로 모른 채 각각 거사에 나섰다. 먼저 전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되자, 장인환이 다시 3발을 쏘아 2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관통했고 나머지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는 병원에 옮겨진 후 사망했다. 그는 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함으로써 나의 강토를 빼앗았고, 나의 종족을 학살했기에 이를 통분히 여기어 그를 쏜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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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을 읽다 보니, 너희들과 최근에 보고 있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한 장면이 떠오르더구나. 극중 애신과 유진이 동시에 미국인 외교관을 저격하는 장면 말이야. 아마 드라마 작가가 스티븐슨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하지 않았을까 싶더구나.

이렇게 악덕 외국인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를 위해서 온 힘을 쏟았던 분들도 있었단다.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 동양척식회사를 연일 비판하던 베델이라는 분이란다. 반일 논조의 기사로 인해 베델은 상하이 감옥에 투옥하기도 하셨고, 석방 후 다시 신문을 냈는데, 1909 5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그의 나이 고작 36세였는데, 하늘은 왜 이런 이를 일찍 데리고 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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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3)

(베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앵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그런 한국 사랑은 그가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갖고 있는 웨일스 출신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베델의 한국 사랑과 반일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서울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의 성금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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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신문과 잡지들도 많이 출간하였는데, 18살이던 최남선도 1908 11 <소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단다. <소년>이라는 잡지는 우리나라 최초 종합 잡지로, 안창호가 만든 청년학우회 기관지 성격을 띠었고, 창간호에 그 유명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가 실려 있단다. 이 잡지에서는 외국 문학 작품도 번역해서 소개했는데, 톨스토이 책이 번역 소개되면서, 톨스토이 열풍을 이끌었다고 하는구나.


1.

1909년에는 간도에서 관한 청과 일본의 협약이 이루어졌는데, 우리나라 국경에 관한 문제인데 우리나라만 쏙 빠져있었구나. 이 청일협약에 의해 국경선이 두만강이 되면서, 간도 땅이 청나라 땅이 되고 말았구나. 열 받는 일뿐이구나. 신채호는 1910년경부터 만주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는 등 많은 이들이 간도를 빼앗으려고 노력했단다. 나중에 북한이 중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간도영유권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하는구나.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활발하다고 했잖아. 1907 7월에 고종이 강제 폐위 당하고 8월에는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의병 투쟁은 더욱 불이 붙었단다. 이제 정규군이 없어졌으니 모두 비정규군이 되어 의병 활동을 하게 된 거야. 그러자 일제는 의병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1909년에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많은 의병들이 돌아가셨단다.

….

지식인들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교육과 계몽에 힘썼어. 중국 양계초의 학문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상황에 적용하려고 했고, 민족주의자들은 우리나라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책들을 많이 쓰셨어. 신채호가 역사인물들을 출간한 것도 그런 취지였단다. 군대가 없어진 마당이 비밀리에 체력과 군사 훈련 비슷한 것을 하기 위해 운동회도 많이 열렸다고 하는구나.

그런 와중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1909.10)과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1909.12)이 전해졌어. 안중근의 이토 히루부미 사건은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오늘은 생략할게. 하나만 이야기하고영국의 찰스 모리머라는 기자가 재판을 보고 쓴 기사가 있는데, 안중근이라는 분이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이란다. 그런 분이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고, 아직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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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33)

1910 2 7일 오전 9시 뤼순 법정. 당시 15만 부를 발간하던 영국 최대의 주간지 <그래픽>의 기자 찰스 모리머는 재판 참관기를 통해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레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썼다. 모리머는 재판을 참관하던 많은 일본인들조차 안중근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가졌으며 그들에게서는 살해된 정치인의 추억보다 안중근의 명성이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안중근에 대해 그는 삶의 포기를 열렬히 염원했다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에 오른 건 다음 아닌 일본의 현대문명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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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결국 1910 8 29일 일본에 흡수되고 말았단다. 경술년의 나라의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경술국치라고 했어. 조선은 518년만에 망하고 말았단다. 한 나라가 망하는데 전쟁도 없이, 간신배들 여럿이 도장 찍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답답하구나. 이 일에 연루된 조선인 68명이 일본으로부터 귀족 신분을 부여 받았다고 하는구나. 양심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

지은이는 500년이나 긴 역사를 가진 조선은 왜 망했는가에 대한 많은 역사가들의 평가들을 소개해 주었단다. 그리고 조선이 왜 망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조선이 어떻게 500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역사들의 평가도 소개해 주었단다. 보통 당파 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일제 역사가들이 세뇌시킨 식민사관이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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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이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먹혀 들어갔다면, 그건 조선이 망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의 힘 때문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조선이 망했는가?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우리 스스로 내놓지 못한 채 당파싸움 때문에 망한 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건 매우 옹색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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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한 이유들이 역사가들마다 생각이 다 다르듯이 어떤 한 가지 원인에 의해서 망한 것 같지는 않구나. 하지만, 바뀔 수 없는 한 가지는 사악한 일본 때문에 망한 것은 명백하구나. 일본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망하지 않았겠지. 당시 제국주의가 만연해서 다른 나라가 쳐들어왔을 수도 있겠지. 넓게 이야기하면 제국주의가 조선을 망하게 했다고 볼 수 있겠구나. 조선이 시대의 흐름을 제때 읽지 못하고 근대화에 늦춰졌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나라가 망하게 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이렇게 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국 근대사 산책> 5권의 이야기도 끝이 났단다.

5권에서 이야기한 내용 중에 너희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두어 가지 소개하고 편지를 마치련다. 먼저 우리나라가 종교를 수용하는데 있어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글이란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같은 경우 심한 갈등을 보이는 종교들이 우리나라에는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점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라고 이야기하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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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85)

한국은 종교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찬 나라이나 어떤 단일 종교도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고 있지 않고 있는 다종교 국가이다.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많은 동구,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종교적 평화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은 유교의 문화적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나라이면서도 아시아적 가치를 변용하여 서구의 자유주의, 합리주의를 수용하는 데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다. 한국은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의 가치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국은 새무얼 헌팅턴이 역설한 문명의 충돌에 대한 해답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한국의 극단주의는 신바람특성과 맞물린 것으로 늘 잠재돼 있긴 하지만 오래 지속되긴 어렵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한국인은 단기적으로 극단주의적이지만, 장기적으론 중용 지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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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독립신문에 실린 시계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시계라는 것이 시간만 잘 맞추면 된다면서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기사가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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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독립신문> 1898 2 8일자 논설에 따르면, “사람이 시계를 살 때마다 기계 속을 모른즉 시계 좋고 아니 좋은 것을 아는 도리는 다만 전면에 비늘 둘이 시간과 분과 각을 옳게 가리키는지 아니 가리키는지 하는 것을 가지고 아는지라. 그것과 같이 사람을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하는 행사를 가지고 알기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라. 설령 시계가 보기에 훌륭하고 금과 보석으로 꾸민 시계나 그 시계가 시를 맞추지 아니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시계가 아니라 일개 값진 물건이라. 금과 보석을 팔면 돈은 생길지언정 시계로 쓸 것은 못 되지 그것과 같이 사람도 외양이 좋고 의복을 잘 입어 보기에는 좋은 사람 같이 보이나 자기 맡은 직무를 못 할 지경이면 무용지안이라. 그러하기에 시계 살 때에 외양과 모양은 어떠하였든지 시만 잘 맞추면 그 물건이 쓸데 있는 물건이요 사람도 지체가 없고 모양도 준수치 않더라도 맡은 직무만 착락 없이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보배로운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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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06 4월 대한자강회의 설립 이후,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학회 조직은 계속됐다.

책의 끝 문장: 나와 내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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