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
질문의 의도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유르겐은 자기 인생을 돌이켜 봤다.
십대 중반까지, 독일의 축구 국가대표가 되어 외국에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출전하여 배를 타고 여러 나라에 가서 축구를 하고 환성을
듣고 싶었다. 외국 선수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코치들에게
제2의 제프 헤르베르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니
병역이 없었다면, 또 올림픽과 월드컵이 중지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네 동료가 쏜 여성은 두 아이의 엄마였어. 그 후에도 엄마로 있고 싶어했지. 잃어버린 아이들을 키워서, 언젠가 손주를 만나고 싶어 했어.”
(479)
“나는 멈출 수 없었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나는 지금 죽을 수 없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전쟁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끔찍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야. 전부 전쟁이 나쁜 거야. 그러니까 부탁이야. 제잘 용서해 줘.”
(523-524)
학교에서 던진 질문,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생각했던
질문. 세계는 이렇게 넓은데 소련만 유일하게 전선에 나서는 여성 병사를 길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답이 무엇이든 종전과 함께 여성 병사가 쓸모없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이 칭송한 대상은,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서 싸운
남자들과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후방을 지킨 정숙한 여자들이었다.
부활한 ‘남녀 역할’은 군대 안에도 영향을 끼쳐 여성은 전투 보직이 아니라 지원 보직으로 발령받는 등, 옛날식으로 분리되었다. 살아 돌아온 여성 병사를 꺼림칙해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특히 같은 여성들이 그들을 소외시켰다. 저격소대 여성들도,
세라피마와 이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527)
스탈린 체제가 공포정치였다면, 그것을 떠받들며 싸운
우리는 대체 뭐였지?
어쨌거나 스탈린은 극악무도한 자였던 만큼 그의 업적을 모조리 부정해야 하기에, 보존했던 시신을 매장하고 동상을 부수고 각종 서적을 다시 썼다. 당연히
스탈린그라드도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그렇다고 옛 이름인 차리친은 차르, 즉 황제를 연상시키므로 사회주의국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볼가강에 가깝다는 이유로 ‘볼고그라드’라는 무미건조하고 중립적인
이름을 대충 가져가 붙인 것이다.
(530)
소련이라는 이름의 국가는 삐걱거리며 나아가는 쇄빙선과도 같았다.
크고 작은 얼음을 부수며 나아가던 선체가 각종 사회적 모순으로 타격을 받아 언젠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모두가 한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배가 가라앉으면 보트에 나눠 타서 혹한의 바다로 노를
저을 수밖에 없다. 항해 도중에 선장이 바뀌는 것처럼 권력자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진다.
(532)
소련에서도 독일에서도 전시 성범죄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는 여성들이 입은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성범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을 혐오하는 각 사회의 요구가 합쳐진 결과였다.
마치 교환 조건이 성립된 것과 같았다. 소련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른 독일 국방군과 독일인에게 폭력을 저지른 소련군은 사이좋게 입을 다물고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기본 좋은 영웅적 이야기. 아름다운 조국의 이야기.
참혹하고 비극적인 이야기. 무자비한 독재의 이야기.
그것은 독일에서도 소련에서도,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의 병사는 반드시 남자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