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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5권 - 개화기편,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씩 읽는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5권을 읽었단다. 5권의
부제는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란다. 4권에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으로 빼앗기고, 강제로 군대까지 해산된
대한제국. 뜻있는 지식인들은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교육뿐이라고 생각하고, 학교들을 세우고, 계몽 운동을 많이 했는데, 강준만 님은 그런 활동을 교육구국론이라고 하신 것 같구나. 그런
계몽 운동을 하는 단체 중에 1907년 안창호가 주도하여 만든 신민회라는 비밀단체가 있단다. 비밀리에 활동을 해서 일제가 이 단체의 전재를 알게 된 것은 1911년이라고
하는구나.
나중에 이야기되기겠지만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감옥에 가게 된단다. 바로 그 신민회가 1907년에 만들어졌고, 교육 구국 운동을 펼쳤단다. 이때 많은 학교들이 문을 열었단다.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 안창호, 윤치호, 이종호가
함께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가 대표적이란다. 1908년 5월에는
한성고등여학교가 개교했는데, 오늘날 경기여고가 바로 한성고등여학교하고 하는구나.
…
이 시기에 의병 활동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조국의 원수들을
처단하는 일들도 있었어. 그 중에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의 이야기를 읽게 되어 소개해줄게. 일본 통감부 외교고문으로 일하던 일본의 앞잡이 스티븐슨이란 자가 있었단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정당하다고 주장한 사람이야. 그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을 우리나라의 두 명의 애국지사가 동시에
암살을 시도했다고 하는구나. 두 애국지사는 장인환, 전명운이라는
분들인데, 두 분은 서로 모른 채 각각 거사를 단행했다고 하는구나. 아빠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분들인데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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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월 23일 스티븐스(일본 통감부 외교고문)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역 구내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애국지사의
총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이 행동한 게 아니라 서로 모른 채 각각 거사에 나섰다. 먼저 전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되자, 장인환이 다시 3발을 쏘아 2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관통했고 나머지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는 병원에 옮겨진 후 사망했다. 그는
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함으로써 나의 강토를 빼앗았고, 나의 종족을 학살했기에 이를 통분히 여기어 그를
쏜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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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을 읽다 보니, 너희들과
최근에 보고 있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한
장면이 떠오르더구나. 극중 애신과 유진이 동시에 미국인 외교관을 저격하는 장면 말이야. 아마 드라마 작가가 스티븐슨 암살 사건을 모티브로 하지 않았을까 싶더구나.
…
이렇게 악덕 외국인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를 위해서 온 힘을
쏟았던 분들도 있었단다.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
동양척식회사를 연일 비판하던 베델이라는 분이란다. 반일 논조의 기사로 인해 베델은 상하이 감옥에 투옥하기도
하셨고, 석방 후 다시 신문을 냈는데, 1909년 5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하는구나. 그의 나이 고작 36세였는데, 하늘은 왜 이런 이를 일찍 데리고 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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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3)
그(베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앵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그런 한국 사랑은 그가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갖고 있는 웨일스 출신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베델의
한국 사랑과 반일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서울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의 성금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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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신문과 잡지들도 많이 출간하였는데, 18살이던 최남선도 1908년
11월 <소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단다. <소년>이라는 잡지는 우리나라 최초 종합 잡지로, 안창호가 만든 청년학우회 기관지 성격을 띠었고, 창간호에 그 유명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가 실려 있단다. 이 잡지에서는 외국 문학 작품도 번역해서 소개했는데, 톨스토이 책이
번역 소개되면서, 톨스토이 열풍을 이끌었다고 하는구나.
1.
1909년에는 간도에서 관한 청과 일본의 협약이 이루어졌는데, 우리나라 국경에 관한 문제인데 우리나라만 쏙 빠져있었구나. 이 청일협약에
의해 국경선이 두만강이 되면서, 간도 땅이 청나라 땅이 되고 말았구나.
열 받는 일뿐이구나. 신채호는 1910년경부터
만주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는 등 많은 이들이 간도를 빼앗으려고 노력했단다. 나중에 북한이 중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간도영유권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하는구나.
…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 투쟁이 활발하다고 했잖아. 1907년 7월에 고종이 강제 폐위 당하고 8월에는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의병 투쟁은 더욱 불이 붙었단다. 이제
정규군이 없어졌으니 모두 비정규군이 되어 의병 활동을 하게 된 거야. 그러자 일제는 의병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1909년에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많은 의병들이 돌아가셨단다.
….
지식인들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교육과 계몽에 힘썼어. 중국 양계초의 학문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상황에 적용하려고 했고, 민족주의자들은
우리나라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책들을 많이 쓰셨어. 신채호가 역사인물들을 출간한 것도 그런 취지였단다. 군대가 없어진 마당이 비밀리에 체력과 군사 훈련 비슷한 것을 하기 위해 운동회도 많이 열렸다고 하는구나.
그런 와중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1909.10)과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1909.12)이
전해졌어. 안중근의 이토 히루부미 사건은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오늘은 생략할게. 하나만 이야기하고… 영국의 찰스 모리머라는 기자가 재판을 보고 쓴
기사가 있는데, 안중근이라는 분이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이란다. 그런 분이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고, 아직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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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33)
1910년 2월 7일 오전 9시 뤼순
법정. 당시 15만 부를 발간하던 영국 최대의 주간지 <그래픽>의 기자 찰스 모리머는 재판 참관기를 통해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레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썼다. 모리머는 재판을 참관하던 많은 일본인들조차 안중근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가졌으며 그들에게서는 살해된 정치인의 추억보다 안중근의 명성이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안중근에 대해 “그는 삶의 포기를 열렬히 염원했다”며 “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에 오른 건 다음 아닌 일본의 현대문명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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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결국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흡수되고 말았단다. 경술년의 나라의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경술국치’라고 했어.
조선은 518년만에 망하고 말았단다. 한 나라가
망하는데 전쟁도 없이, 간신배들 여럿이 도장 찍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답답하구나. 이 일에 연루된 조선인 68명이 일본으로부터 귀족 신분을 부여 받았다고
하는구나. 양심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
…
지은이는 500년이나
긴 역사를 가진 조선은 왜 망했는가에 대한 많은 역사가들의 평가들을 소개해 주었단다. 그리고 조선이
왜 망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조선이 어떻게 500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역사들의
평가도 소개해 주었단다. 보통 당파 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일제 역사가들이 세뇌시킨 식민사관이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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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이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먹혀 들어갔다면, 그건 조선이
망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의 힘 때문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조선이
망했는가?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우리 스스로 내놓지 못한 채 “당파싸움
때문에 망한 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건 매우 옹색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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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한 이유들이 역사가들마다 생각이 다 다르듯이 어떤
한 가지 원인에 의해서 망한 것 같지는 않구나. 하지만, 바뀔
수 없는 한 가지는 사악한 일본 때문에 망한 것은 명백하구나. 일본이 침략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망하지 않았겠지. 당시 제국주의가 만연해서 다른 나라가 쳐들어왔을
수도 있겠지. 넓게 이야기하면 제국주의가 조선을 망하게 했다고 볼 수 있겠구나. 조선이 시대의 흐름을 제때 읽지 못하고 근대화에 늦춰졌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나라가 망하게 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이렇게
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국 근대사 산책> 5권의
이야기도 끝이 났단다.
…
5권에서 이야기한 내용 중에 너희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두어
가지 소개하고 편지를 마치련다. 먼저 우리나라가 종교를 수용하는데 있어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글이란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같은 경우 심한 갈등을 보이는 종교들이 우리나라에는 평화로이 공존할 수
있는 점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라고 이야기하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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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85)
“한국은 종교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찬 나라이나 어떤 단일 종교도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고 있지 않고 있는 다종교 국가이다.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많은 동구,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종교적 평화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은 유교의 문화적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나라이면서도 ‘아시아적 가치’를 변용하여 서구의 자유주의, 합리주의를 수용하는 데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다. 한국은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의 가치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국은 새무얼 헌팅턴이 역설한 ‘문명의 충돌’에 대한
해답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한국의 극단주의는 ‘신바람’ 특성과 맞물린 것으로 늘 잠재돼 있긴 하지만 오래 지속되긴
어렵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한국인은
단기적으로 극단주의적이지만, 장기적으론 중용 지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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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독립신문에 실린 시계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시계라는 것이 시간만 잘 맞추면 된다면서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기사가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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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독립신문> 1898년 2월 8일자
논설에 따르면, “사람이 시계를 살 때마다 기계 속을 모른즉 시계 좋고 아니 좋은 것을 아는 도리는
다만 전면에 비늘 둘이 시간과 분과 각을 옳게 가리키는지 아니 가리키는지 하는 것을 가지고 아는지라. 그것과
같이 사람을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하는 행사를 가지고 알기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라. 설령
시계가 보기에 훌륭하고 금과 보석으로 꾸민 시계나 그 시계가 시를 맞추지 아니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시계가 아니라 일개 값진 물건이라. 금과 보석을 팔면 돈은 생길지언정 시계로 쓸 것은 못 되지 그것과 같이 사람도 외양이 좋고 의복을 잘 입어
보기에는 좋은 사람 같이 보이나 자기 맡은 직무를 못 할 지경이면 무용지안이라. 그러하기에 시계 살
때에 외양과 모양은 어떠하였든지 시만 잘 맞추면 그 물건이 쓸데 있는 물건이요 사람도 지체가 없고 모양도 준수치 않더라도 맡은 직무만 착락 없이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보배로운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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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906년 4월
대한자강회의 설립 이후,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학회 조직은 계속됐다.
책의 끝 문장: 나와 내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