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행성 충돌이나 극심한 기후 변화가 일어나거나 압도적인 포획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못을 스스로 조르는 자기 파괴적 동물입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진행되는 전쟁을 보세요. ‘우리는 같은 종이야라는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늑대나 토끼가 보았다면 당혹스러울 일이고, 인간을 전염병균처럼 여기며 멀리 떠나려 할 겁니다. “인간들은 서로 거침없이 착취하려 하고 심지어 서로를 살육하니, 우리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지만 늑대와 토끼마저도 동족의 피를 묻힌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불행하게도 자신들이 도망할 곳마저도 인간에 의해 이미 잠식되어버렸으니까요.


(35)

우리는 성적이 좋은 아이여서, 품이 덜 드는 아이여서 우리 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쓸모가 있는 아이, 동년배보다 쓸모가 더 큰 아이라는 것이 사랑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에 실패할 때, 혹은 정리해고라도 당했을 때 여러분의 아이가 여러분을 떠나거나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무용으로 아이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여러분의 소중한 아이는 죽지 않고 여러분을 찾아올 테니까요.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아내도 무용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바람도 물도 그리고 새도 물고기도 무용으로 좋아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언젠가 병들도 나이 들어 쓸모는커녕 주변에 짐이 되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주변에 여러분을 쓸모로 평가하지 않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건, 바로 이것이 무용을 강조했던 장자의 진정한 속내였을 것입니다.


(46)

사랑이 힘든 것은, 양쪽 다가 주인이고 양쪽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자유와 자유가 만나는 팽팽한 긴장감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건 상대방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떤 강요도 없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라는 이야기도 성립되는 셈이죠.


(77)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저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겁니다. 바퀴를 깎을 때 끌질이 느리면 끌은 나무에서 미끄러져 제대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빠르면 끌은 나무에 박혀 빠지지 않습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것을 저는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뿐, 입이 있어도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끌질하는 동안 몇몇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또한 제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이 일흔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155)

차라리 우리는 바람과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의 마음은 바람과 같으며, 나아가 바람과 같은 것이어야만 합니다. 구멍이 되어 바람을 맞아 소리를 낼 수도 있고, 바람이 되어 누군가의 구멍에 들어가 그 구멍에 어울리는 소리를 낼 수도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이유입니다.


(187)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그러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기를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양생주>


(217)

설결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하니, 지극한 사람은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지극한 사람은 신비스럽지! 넓은 습지가 불타올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할 수 없고, 벼락이 산을 쪼개고 폭풍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네. 이와 같은 사람은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해와 달을 몰고 사면의 바다 밖에서 노닌다네. 죽고 사는 일도 그에게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이익과 손해라는 작은 실마리에 대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219)

기원전 4000년경 인간은 말을 마지막으로 가축화한 이후로 더 이상 다른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동료 인간을 가축화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인간 가축은 동물 가축과는 달리 말이 통하고 더 섬세한 작업에 투입할 수도 있으니까요. 거대 건축물로 상징되는 국가체제는 인간 가축화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죠. 20세기 전번에 민주주의를 자임했던 국가에서 언론이나 정치가들이 유행처럼 사용했던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입니다. 다른 국가들이 혹은 자국민들을 길들여 지배하려 할 때 반드시 병행해야만 하는 두 가지 방법을 비유한 거죠.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근과 채찍은 가축화 메커니즘의 핵심에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이 동료 인간에게 적용된 것이 바로 상과 벌 혹은 사랑의 방법과 폭력의 방법이니까요.


(324-325)

음악을 듣는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을 들을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습니다. 혹은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 거실의 불을 끄거나 빛을 약하게 조절합니다. 음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은 군주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는 복종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눈을 감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상대방에 복종하겠다는 의지와 무관합니다. 음악이나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눈을 감게 됩니다. 고개를 숙이지 않음이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의지라면, 눈을 감는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군주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응시하는 신하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타자의 말이나 혹은 타자를 듣는다는 것은 지해에의 의지나 복종에의 의지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건 소통에의 의지니까요.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고 말합니다. ‘’, ‘마음’, 혹은 보다 수천 배 중요한 것은 듣겠다는 그의 의지입니다. ‘듣겠다는 소통에의 의지가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좋고, 마음으로 듣는 것보다 기로 듣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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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도 1 - 포수의 원칙
방현석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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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최근 나랏일을 하는 이들 중에 이유를 좀체 알 수 없는 짓을 하는 이들이 많단다. 몇 달 전에 사회주의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나라 독립 운동에 평생을 하신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퇴출하겠다고 해서 시끄러웠단다. 많은 학계와 기사들이 육사 대변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질문을 했는데 육사 대변인은 제대로 된 답을 한 마디도 못했단다. 그 또한 윗사람 누군가 시켜서 한 일 같은데, 이런 일들이 어떤 한 사람의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실로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게 독재국가이지, 민주국가라 할 수 있는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홍범도 장군이 육군 사관학교의 뿌리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를 부정하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더구나. 역사 공부를 좀 하다 보면 일제 시대에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우리나라 독립에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알 텐데. 그리고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공산주의가 생기기 전이고, 당시 사회주의는 레닌의 사회주의로 하나의 사상으로 생각하는 게 맞는데 말이야. 정말 열 받더구나. 육군사관학교의 흉상 이전 논란이 있긴 해도 설마 이전하겠는가? 생각했는데속전속결로 일을 해치우더구나. 육사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은 아무리 군인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줄 알아야 진정한 군인 아닌가 싶은데, 다들 침묵하고 있더구나. 다들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더구나.

….

지난 정권 때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수십 년 만에 귀환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구나. 어떻게든 전 정부가 한 일을 흠집을 내려는 것 같았어. 하늘에 계신 홍범도 장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이걸 보시고 어떤 생각들을 하려는지

아빠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책은 <홍범도 평전>이라는 평전과 <나는 홍범도>라는 소설, 이렇게 두 권을 읽었단다. 그 외에 일제 시대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통해서 홍범도 장군에 대해 여럿 읽었단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 보니 또 한번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더구나. 그런 와중에 알라딘 서점의 블로그에서 <범도>라는 책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단다. 방현석이라는 분이 쓴 소설로 2권짜리였단다. 이 책은 올 유월에 출간되었는데, 홍범도 흉상 논란이 있기 몇 달 전이로구나. 마치 이런 일을 예견이라도 한 것인지아무튼 <범도>라는 소설을 읽을 좋은 시기가 아닌가 싶어 주문해서 읽어보았단다. 전에 읽은 <나는 홍범도>라는 소설은 조금 실망했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이번 소설은 어떨까? 아참, 소설이다 보니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졌고, 그로 인해 가상의 인물들도 등장한다는 점은 감안하면서 읽어야겠구나.


1.

홍범도의 어머니는 홍범도가 태어날 때 돌아가셨어. 그리고 어렸을 때 아버지 마저 돌아가셔서 홍범도는 아버지의 지인인 신포수에게 맡겨졌단다. 신포수는 신씨 성을 가진 포수라서 그렇게 부른 거야. 신포수와 함께 홍범도도 포수 일을 했단다. 사격에 재능이 있었어. 그래서 신포수는 홍범도를 군대로 보냈단다. 평양에 있는 군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나팔수로 일하다가 한양에 있는 군대로 파견을 가게 되었고, 우영사라는 높은 직책을 가진 민영익이라는 분의 경위관으로 일하게 되었단다. 민영익이라는 사람은 얼마 전에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를 이야기하면서 나온 적이 있는 사람인데 기억할는지미국까지 갔다 온 진보 인사였으나, 보수 쪽으로 돌아섰고, 그로 인해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혁파와 갈라서게 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혁파들에게 총상을 맞게 되었잖아. 이 소설에서도 그 장면이 등장한단다. 직접적으로 갑신정변이라는 말은 안 했지만 난리통에 민영익이 중상은 입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때가 바로 갑신정변 때였단다.

홍범도는 군대에 있으면서 이번에는 농군이 일으킨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을 했어. 소설은 홍범도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농군이 일으킨 난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동학운동이었던 것이란다. 홍범도는 갈등을 했어. 저 농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에게 총칼을 겨누어 하는지 말이야. 이 진압 과정에서 홍범도는 친한 군 동기인 백무현을 잃고 말았단다. 그는 죽기 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반지를 자신의 동생에게 전해주라고 했어.

홍범도는 백무현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백무현의 고향인 평양에 와서 백무현의 동생 백무아를 만나 백무현의 슬픈 소식을 전하고 백무현이 전해주라는 반지를 전해 주었단다. 이때 홍범도와 백무현의 동생 백무아는 슬픈 와중에 애틋한 감정을 서로 느꼈단다. 백무아는 야소교도를 믿고 교회에서 지내고 있었어. 군대에서 나와서 할 일이 없던 홍범도에게 백무아는 초지 공장을 소개해 주었단다. 초지 공장은 책을 만드는 공장인데, 아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지공장과 비슷한 것 같았어. 홍범도는 그렇게 초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매년 백무현의 기일이 되면 무아가 찾아왔고 홍범도는 무아와 함께 백무현의 기일을 챙겼단다. 그런데 4년째 되던 날 무아가 오지 않았어. 나쁜 놈들한테 몹쓸 봉변을 당했다고 했어. 홍범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평양으로 갔어. 무아는 그 일이 있고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다고 하는구나. 홍범도는 무아를 그렇게 만든 이를 찾아가 복수를 했단다. 한 놈은 죽이고, 한 놈은 그것을 못쓰게 만들었어. 법이 없는 세상, 홍범도는 자신이 법이 되려고 했어. 초지 공장의 사장이 금희네라는 여자를 건드렸고, 그로 인해 금희네는 자살을 하고 말았단다. 홍범도는 초지 공장의 사장을 죽이고 도망을 갔단다. 이때 갑신정변 때 죽은 친구 차이경의 동생들인 수경과 수이도 함께 데리고 갔단다. 홍범도가 차이경이 죽고 그들의 동생들을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 자신이 도망을 가고 나면 그들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들과 함께 간 곳은 신포수의 지인인 자담스님이 계시는 신계사라는 절이었단다. 그곳에서 차이경의 동생 수경과 수이는 수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단다. 예전에 <홍범도 평전>을 읽었을 때 홍범도가 신계사에 있을 때 비구니와 사랑에 빠져 절을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범도>라는 소설에서는 이런 설정을 했구나. 홍범도와 수경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거든. 홍범도가 신계사에 숨어 있었지만, 일경이 그곳까지 쫓아오게 되었고, 홍범도는 수경, 수이와 함께 다시 도망을 갔는데 도망가는 중에 수경, 수이와 헤어지게 되었단다.


2.

홍범도는 우연히 김수협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의기 투합하여 의병 활동을 하기로 했단다. 둘이서 일본군들을 처단했단다. 그러면서 주위의 다른 포수들과 농민들이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모였어. 그들은 어느 정도 조직도 갖추어지고, 일본군과 싸움에서 계속 승리를 거뒀단다. 그러자 그들의 소식이 다른 의병들에게도 전해지고, 유인석이 자신의 의병대와 연합하자는 제의가 왔어. 유인석이라고 하면 당시 조직이 꽤 큰 의병대를 이끌고 있던 사람이거든. 그들의 합류 제의에 의견이 분분했어. 홍범도는 낯선 이들과 연합이 장점도 있겠지만 좀 꺼려했단다. 그런데 김수협이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서 투표를 통해 연합하기로 결정했단다.

그런데 유인석의 의병대의 지휘부는 모두 유림 세력, 그러니까 양반들이었어. 유인석의 의병대는 신분제도가 아직 있었고, 그로 인해 미천한 신분에 대해 멸시하는 이들도 있었어. 그리고 홍범도의 의병대들이 다른 군장의 아래에 배치되었다가 나중에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어. 홍범도 의병대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조직 편대였지. 결국 일본군에 대패하고 말았어. 그의 정신적 동지였던 김수협도 죽고 말았단다. 결국 유인석 의병대와 연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어.

홍범도는 남아 있는 자신의 의병대원들은 집으로 보내고, 혼자 활동했단다. 탄광에 위장취업을 해서 다이너마이트를 훔친 다음 일본인 행사장에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기도 했어. 이 때 감옥에 투옥될 뻔했는데, 여염, 선형우 부부가 도와주어 피신할 수 있었단다. 여염과 선형우 부부는 홍범도를 함경도에 지내고 있는 러시아인 포수인 얀코프스키를 소개해주었고, 한동안 홍범도는 얀코프스키와 지냈단다. 그러면서 얀코프스키에게 러시아 총을 얻기도 했단다.

함경도에 지내면서 다른 포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신계사에서 도망갈 때 헤어진 수경, 수이 소식을 듣게 되었어. 그래서 수소문 끝에 수경의 집에 찾아가 재회했단다. 홍범도는 수경뿐만 아니라 아들 양순도 처음으로 만났단다. 양순은 어느덧 아홉 살이었어. 그곳에서 홍범도는 수경과 함께 지냈단다. 그의 고난한 삶 속에서 행복했던 몇 년이 그때였어. 둘째 아들 용환도 태어났어. 홍범도의 행복한 시간과 달리 나라 형편은 더 어려워지고 있었단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단다. 뿐만 아니라 민간들의 총기 소지도 금지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포수들의 총들도 압수한다는 거였어. 포수들에게 총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압수한다고? 홍범도는 함경도 포수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단다. 집에 있으면 총을 그냥 빼앗기게 되니까 말이야. 자연스럽게 다시 의병 활동을 하게 되었단다. 군대가 해산되면서 갈 곳 없어진 군인들도 의병을 하겠다고 왔어. 그 중에는 홍범도의 옛 군 동료들인 이정재, 이진도 있었단다. 특히 이진은 여자 포수 출신인데 명사수였단다. 이렇게 다시 모인 의병대는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단다. 홍범도의 첫아들 양순도 의병대에 합류했어. 의병대는 조직을 재건하면서 총대장을 임창근으로 하고 참모총장을 홍범도로 했단다.

여기까지가 1권의 이야기란다.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력이고, 어디까지 사실을 바탕으로 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의병들의 뜨거운 열정만은 모두 사실이었단다. 이렇게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의병들의 헌신과 노력을 안다면 그들에게 그런 처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야. 지금보다 더 많은 보상이나 혜택을 줘도 부족할 판에 말이야.

그럼 오늘은 이만. 조만간 2권 이야기도 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연해주의 여름.

책의 끝 문장: 양순이는 이렇게 남정과 함께 항일연합포연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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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과학 탐사기
민태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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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 신간 소개 코너에서 제목이 독특해서 책 소개를 읽어보고, 결국은 읽게 된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이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책이란다. 조선과 아인슈타인이 어울리지 않아서 책제목에 끌렸나 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던 1905,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던 1916, 우리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고생하던 시기였으니 나라밖 소식, 특히 과학에 대한 소식은 더욱 신경 쓸 시간이 없었던 때라고 생각했거든. 일제 시대를 다룬 책들은 주로 독립 운동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와 당시 출간된 문학작품들이 대부분이었어.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과학을 다룬 책들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구한말과 일제 시대의 이공계를 전공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란다.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과학에 대한 열의를 가진 사람이 없었을라구.. 어떤 이는 과학이 발전해야 나라가 힘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을 거야. 그 어느 때보다 과학을 공부하기 힘든 그 시절, 과학에 대해 누구보다 열의를 다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단다.

지은이는 민태기라는 분인데, 누리호와 차세대 발사체 엔진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분이라고 하더구나.  순도 100% 이공계 분인데, 글도 참 재미있게 잘 쓰시더구나. 지은이 소개를 읽어 보니 아빠가 예전부터 읽으려고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책 <판타레이>도 이 분이 쓰신 거더구나. <판타레이>는 제목만 알고 있었거든.. 이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구나. 이 책에는 당시 신문, 잡지 등에 실렸던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들도 많이 있더구나.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고아빠가 최근에 가끔씩 읽고 있는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와 시대적 배경이 비슷하여 그 책에 나온 사람들도 많이 나오더구나.


1.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를 처음 탄 사람은 누구일까? 독립신문으로 유명한 서재필이라고 하는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미국으로 망명을 가고 그곳에 의학을 전공했다는 구나. 안타까운 일은 미국 망명을 갈 때 식구를 남겨두고 혼자 갔는데 그의 아내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자살을 했다고 하는구나.  미국에서 생활하던 서재필은 미국인 뮤리엘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그들은 1895년 함께 귀국을 했대. 그런데 그때 미국에서 타던 자전거를 가지고 귀국을 했어. 그 자전거가 우리나라의 첫 번째 자전거라고 하는구나. 서재필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본 윤치호도 타고 싶어서 미국에 자전거를 주문하여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고 하는구나. 윤치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직구를 한 사람인가? ㅎㅎ

귀국한 서재필은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독립신문을 출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정해서 활동을 했어. 독립신문에서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시도했고…(이것도 전에 이야기해주었지?) 한글의 우수성을 논설로 신문에 실었대. 이 책에서는 당시 신문 기사를 그대로 실어주었는데, 옛말을 읽으면서 무슨 뜻인가 알아보는 재미도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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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이처럼 <독립신문>은 가독성을 위해 한글 띄어쓰기를 채택했고, 이후 띄어쓰기가 대중화되고 정착되었다. 논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각국에셔난 사람들이 남녀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오난 법인데, 죠션셔난 죠션 국문은 아니 배오드래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미라. 죠션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죠션 국문이 한문보다 얼마가 나흔 거시 무어신고 하니 첫재난 배호기가 쉰이 됴흔 글이요, 둘재난 이 글이 죠션글이니 죠션 인민들이 알어셔 백사을 한문 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 보고 알아보기가 쉬흘 터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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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자전거를 처음 탄 우리나라 사람은 서재필이면, 자동차를 처음 탄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였다구나. 이런 재미있는 상식을 알게 되는 깨알재미가 있구나.

서재필은 1898년 일제의 통제가 심해지면서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 미국에서 줄곧 생활한단다. 독립운동에서도 참여하시면 미국에서 해방 소식을 듣게 되었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지만 이제 조선이 둘로 나뉘어진다는 소식을 접했어. 1949년 삼일절 경축사를 직접 남겼는데, 조선이 둘로 나뉘어지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내용이 담겼고, 그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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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249)

타향에서 고국의 소식을 접하던 그는 자신의 심정을 1949 3.1절 경축사에 육성으로 남겼다. 3.1운동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건 서재필이기 미국에서 말하는 것이오. 나는 미국에 돌아온 뒤에 신체가 좀 강해지고, 시방 건강이 매우 좋지만은 아직도 언제 조선에 갈런지는 모르겠소이다. 내가 가든지 안 가든지 다만 부탁하는 말은 아무쪼록 조선 살게들 하시오. 합하면 조선이 살 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오. 조선이 없으면 남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죽을 일을 할 도리가 있습니까? 살 도리를 하시오. (…)

한 집안으로 4000년을 살았는데 왜 지금 나뉘어서 두 집안이 될 까닭이 있습니까? 둘이 되면 둘이 다 약해지고 살 수가 없을 터이니, 한 배 속에 든 것과 같아서 한쪽 배가 무너지면 저쪽도 망해지는 법이오. 나는 설령 미국에 있더라도 내 정신은 조선 사람과 같이 있으니 아무쪼록 합심하고 합동해서 조선을 살게 해주시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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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나라에 아인슈타인을 처음 소개한 것은 <공우>라는 잡지였어. <공우>는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들 모임인 공우구락부가 발간한 잡지라고 하는구나. 이후 여러 언론에서 아인슈타인을 소개했는데, 동아일보에서는 독일로 유학 간 황진남이 여러 차례에 걸쳐 상대성이론을 소개해 주었단다. 그 중에 아인슈타인을 소개하는 도입부가 재미있어 발췌해 본다. 당시 쓰던 옛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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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8)

베를린 유학생 황진남이 상대성이론 특집 기사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로 이어진다. 도입부가 재미있다.

소개함니다. 물리학에서 연구하시는 아인스타인양임니다. 우리 시대 위인인 아인스타인의 사촌 누이라 하는 한 여학생이 내게 말함은 오 년 전 스위스 쭈리히(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할 때다. “당신은 물론 아인스타인이 누구인지 아시오하고 뭇난 데 대하야 아모 형편도 모르는 나는 부정사로 답하얏다. 긔가 막히여 우스면서 이 불상한 냥반아! 용서하시오”(…)

아인스타인의 존재 여부도 모르든 나는 이 여학생의 비소를 감수하얏다.

이후로는 아인스타인과 상대성에 대한 해석적 서류도 읽어보고 또 그의 저서도 연구하야 보앗스나 (…) 책장을 넹길 때마다 츨라톤(플라톤)의 아카데미 문 앞에 설린 수학에 불통하는 자에게는 허입을 금함이라는 구절을 기억치 아니치 못하얏다. 아인스타인씨 자신도 말하기를 상대론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현재 차세에 5인 이외에 없다 하얏다는 풍설이 잇다. 고등 수학에 정통히 못하고는 상대론의 진미를 모르고 상대론을 이해치 못하면 아인스타인 숭배도 허위라 하겟다. (…) 그런대 유태인 배척이 이러케 심한 독일이 그를 위하야 특별히 천문대를 창건한 것을 보든지, 독일을 그러케 배척하든 영국과 전국 각 학교에 독일어 교수를 금지하든 미국이 그를 초청하는 것을 보면, 심지어 독일 것이라면 열성으로 증오하는 프랑스까지 그를 초청하야 후대하는 것을 보면 그 과학적 공적이 위대함을 추상할 수 잇다. 그런데 그가 우리 동아시아에 여행하려 출발하얏다는 소식을 듣고(우리 학계에 기와 누차 명석하게 소개되얏슬 듯하다) 상대론의 원리를 소개코자 하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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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아빠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단다. 일본은 세계 석학들을 초대하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아인슈타인을 초대했다고 하는구나. 그때가 1922년인데 아인슈타인이 아직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이래. 독일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배 안에서 아인슈타인이 노벨상 수상자로 확정되었다고 하는구나. 일본에서는 그냥 과학자가 아니고, 노벨상 수상자가 온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하는데향후 2차 세계대전에 유태인들은 학살하고 아인슈타인도 미국으로 쫓겨난 아인슈타인이 그 일본이 독일과 한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또는 당시 일본이 조선이라는 약소국을 무단 침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방문했다면 좀 실망스럽구나.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유학생들은 아인슈타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도 방문할 수 있도록 추진했지만 실패했다는구나.

당시 우리나라는 신문에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을 소개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어. 1923년에는 일본 유학생들인 최윤식, 김영식, 현위건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반응도 뜨거웠대.

….

양자역학은 최규남이라는 물리학자가 소개해 주었다고 하는구나. 최규남은 학창 시절에는 야구선수로도 활약을 해서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했대. 연희전문학교를 야구 우승으로 이끈 주장이자 투수로 신문 기사에 났다는구나. 최규남은 후에 미국 유학을 가서 물리학박사가 되었어. 그런데 그의 러브스토리는 영화와 같더구나. 미국에서 유학중인 최규남은 신문을 통해서 조국의 소식을 접했는데, 신문에 실린 이화여대 교수이자 성악가인 채선엽의 기사를 읽게 되었어. 그리고 바로 채선엽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둘의 연애는 시작되었고, 채선엽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지만 채선엽의 오빠 등 주변에서 도와주어 결혼에 골인했다고 하는구나. 그런 채규남은 조선일보를 통해 양자역학을 소개하였다고 했어. 우리나라 과학자들도 현대 물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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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62)

1936 2 8일부터 15일까지 최규남은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6편의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양자역학의 최신 동향을 소개한다. 그의 시각은 시리즈의 첫 문장에 잘 드러난다.

최근 이십 년간의 물리학 발전은 실노 녯것을 보내고 새것을 맛기에 무가지감이 잇다. 나날이 발전되는 신이론은 또다시 신이론 출현의 동인이 되여 물리학사상에 보기 드문 위관을 정하게 되엿다. 일즉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슌을 일으킨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엿고 현대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뿌라크리(드 브로이)’, ‘쉬레덴가(슈뢰딩거)’, ‘하이센벨크{아이젠베르크}’, ‘드랙(디랙)’, ‘풀랑크(플랑크)’, 여려 사람의 파동역학, 양자역학 및 양자론 등이라고 하겟다. (…) 인간의 사상사가 생긴 이래 철칙으로 미더오는 인과율도 조상지육이 되엿고 따라서 자연과학의 기초적 개념에까지 동요를 주게 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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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학자 중에 양자역학에 있어. 공을 세운 사람 중에는 이태규라는 분도 있단다. 1922년 일본에서 유학을 했는데, 전공은 수학과 화학이었어. 이후에 화학에 양자역학을 도입하여 양자화학이라는 분야에서 세계에서 알아주는 석학이 되셨다고 하는구나. 해당후 1955년은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첫 노벨상 후보까지 되셨다고 하는구나. , 이런 과학자들이 있었구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초창기 친일파 우범선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우장춘 박사란다. 우리나라 유전학계에 있어 엄청 유명한 사람이고, 그를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 알려졌다고 하는구나.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한 것이래. 그렇다고 그의 업적이 적은 것은 아니야. 온갖 종자 개발을 통해 우리나라 식량 증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우장춘 박사는 친일파의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다고 했어. 우장춘 박사의 어머니는 일본 사람으로 계속 일본에서 지내도 문제가 없었으나, 해방 후 1950년에 귀국하였다고 하는구나. 우장춘 박사가 이미 일본에서도 유명한 학자였기에 보내주지 않으려고 여러 방법을 썼으나, 우장춘 박사는 편법까지 써서 우리나라에 귀국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농업과 유전학 연구를 계속하셨다고 했어.


3.

이 책에서는 몰랐던 재미있고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있었다고 했잖아.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이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그런데 그것을 알려주는 지은이 민태기 님의 방식도 좋았어. 어떤 베트남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짜짠, 그가 호치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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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919년 응우옌은 파이레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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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가면 인하대학교가 있단다. 지금은 종합대학교이지만, 오래 전에는 공과대학만 있어서 나이 드신 분들은 인하공대라고 부르는 분들도 계셔. 아빠가 학창시절도 인하대학교는 종합대학교였지만, 다른 학과보다 공학과를 더 인정해주는 듯한 느낌이었지. 그 이유가 있더구나. 인하대학교가 하와이 노동자들의 우리나라에도 MIT 공대 못지 않은 공대를 만들어달라며 기부한 돈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인하대학교였대. 인하의 은 인천의 이고, ‘하와이라고 하는구나.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재미있는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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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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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일제 시대에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계셨다는 것을, 어쩌면 당연했던 이야기를 새삼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런 분들이 시대의 흐름을 잃지 않고 과학을 꾸준히 연구하셔서, 오늘날 과학 기술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크게 성장을 한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분들께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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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상대성이론을 알리는 데 그토록 열정적이었을까?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다짐한, 현식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운 시대를 살았으며, 그들이 소개한 과학으로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책은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분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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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시내에 뿌려진 신문이다.

책의 끝 문장: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


서재필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지만, 그날 조선의 달력은 11월 10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는 1896년 1월 1일이 된다. 양력이 시행된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개국 연호를 사용하던 조선은 ‘양력을 세운다’는 의미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력은 개혁 조치 중 하나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양력보다 요일제가 먼저였다는 것. 1895년 5월에 주 7일 요일제가 시행되어, 양력보다 6개월 앞섰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이후 단발령과 함께 진행된 양력에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종두법을 도입한 신지식인 지석영조차도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 P20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여운형이 체포된 것은 야구 시합때문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일본 대학들과의 경기에서 큰 점수 차로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이들의 경기는 일본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을 크게 고무시켰고, 여운형은 이 원정을 통해 국제 스포츠 경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여원형은 독립운동에 몰두하던 상하이에서도 야구를 즐겨 코치를 맡기도 하고, 유학생들을 모아 팀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선수 중에는 문인 주요한도 있었다. 여운형은 나중에 유학생 축구팀까지 만들어 동남아 원정을 떠나 국제경기도 했다. - P148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교토 다키이 연구소에서 우장춘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우장춘은 가족에서 ‘일본이 이번에는 패배할 것이다’라고 단언했고, 그들은 가장의 돌출 발언이 알려질까 봐 가슴 졸이며 전쟁을 견디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디키이 연구소에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우장춘이 기숙사에 찾아가 이들 조선인만을 상대로 강의했다는 것이다. 가끔 조선 청년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쳤고, 뒤이어 달래는 듯한 우장춘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나, 우장춘이 이 무렵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 P188

사회자 : 선생님 지금 구십 평생을 살아오셨는데요. 선생님 일생을 간단히 한마디로 평을 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피천득 : 그저 인생을 착하고 아름답게는 살려고 했는데, 그게 끝이고… (…) 우리나라는 과거에 저항 운동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근데 그걸 한 걸음 나가지 못하고 (…)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이나 쉬고 이렇게 한 것이 지금으로(서는) 한이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 P205

100년 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머나먼 저곳까지 가서 3.1운동을 알리고, 레닌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림을 보면 전 세계에서 모인 공산주의자 모두가 붉은 깃발을 흔들 때, 유독 이들만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가들은 태극기를 앞세워 광장을 누비고 생소했던, 당시 러시아 화가의 눈에도 인상적이었기에 굳이 그림 중앙에 넣은 것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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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27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풍성한 내용들이 많이 담긴 리뷰글입니다.

bookholic 2023-11-27 08:1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에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11)

음악학자 앨프리드 스완은 1944년 자신의 친구에 관한 견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깊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거둔 커다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의 관객이 보여준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다. 그는 고독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조국 러시아를 영원히 그리워했다.”


(12)

숨을 거두기 얼마 전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낯설어진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 된 것만 같다. 낡은 작곡 방식을 펼칠 수도 없고, 새로운 작곡 방식을 습득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음악 양식을 느껴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였지만 이는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알고 있다. 나비부인은 남편을 위해 순순히 개종하였지만, 나는 내가 믿어오던 음악의 신들을 냉큼 버리고 새로운 신들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 내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러시아에 닥친 재앙과도 같은 운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음악이, 그리고 모든 음악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정신적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고 늘 느껴왔고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명을 향한 끊임없는 순종이었다.”


(23-24)

말년에 그(라흐마니노프)는 나름대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새로운 종류의 음악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음악의 작곡가들은 느끼기보다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한스 폰 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을 환희하게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묵상하고 주장하고 분석하고 사고하고 계산하고 곱씹을 뿐, 절대 환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정신에 입각해 곡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당대의 정신은 음악에서 표현을 요구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곡가들로서는 사고는 가능하되 느낄 순 없는 음악을 엮어내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애가 요구하는 표현은 사실과 문자의 장인인 작가와 극작가에게 맡겨두고 영혼의 권역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것에 관한 나의 견해를 물은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경우도 현대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현대음악은 태어나자마자 늙어버리는 음악입니다. 고사병에 걸린 채로 태어나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74)

평생 현대 기술에 매혹되어 산 사람답게 라흐마니노프는 첫 공개 연주회 장소도 그에 어울리는 곳으로 골랐다. 바로 1892 9 26일에 열린 모스크바 전기박람회 현장이다. 이날 연주회에서 그는 안톤 루빈시테인의 <피아노 협주곡 4> 1악장,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연주했다. 아울러 전 세계 청중에게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알릴 최신곡도 초연했다. 다름 아닌 <전주고 c샤프단조>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그해 가을에 작곡한 네 편의 피아노곡과 묶어서 출판업자 구트하일에게 건넸고, 구트하일은 다섯 편의 피아노곡을 <환상적 소품집, 작품 3>으로 출판했다.” 출판 악보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작곡 스승 안톤 아렌스키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새겨져 있었다.


(107)

작가 니콜라이 텔레쇼프는 1904년 모스크바의 어느 날 저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샬라핀은 라흐마니노프에게 불을 지폈고, 라흐마니노프는 샬랴핀에게 박차를 가했다. 두 거인은 서로를 격려하며 진정한 기적을 창조했다. 그것은 더 이상 흔한 의미에서의 노래도 음악도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두 예술가가 발산하는 영감의 공세 같은 것이었다. … [라흐마니노프] 샬라핀과 가까이 지내는 동안 가장 강력하고 가장 깊으며 동시에 가장 절묘한 예술적 인상을 경험했고, 그것이 그에게 큰 혜택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즉흥 연주 솜씨가 기막혔다. 샬랴핀이 잠시 숨을 돌리려 하자 라흐마니노프는 믿을 수 없는 즉흥 연주 실력을 뽐냈고, 라흐마니노프가 잠깐 휴식을 휘하겠다 하지 샬랴핀은 피아노 앞에 앉아 직접 반주하며 러시아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색다른 콘서트는 자정을 넘은 시각까지 이어졌다. 샬랴핀을 유명인으로 만든 아리아와 오페라 발췌가 있었고, 아름다운 로망스가 장난기 가득한 음악이 있었으며, 탁월하고 매력적인 라 마르세예즈가 있었다.”


(119-120)

레오니트 사바네예프는 러시아 망명 언론에 게재한 리뷰에서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 협주곡 2>을 통해 강력한 사운드, 숙달된 리듬,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손 등 그야말로 리스트처럼 모든 것을 갖춘, 그리고 거기에 더해 러시아의 영혼까지 가미된모든 성장을 마친 특출된 피아니스트로 우뚝 섰다고 칭찬했다. 과연 이 작품으로 올린 개가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경력에서 새로운 단계로 올라섰다. 그와 동시대를 산 누군가는 이렇게 술회했다. “모스크바는 라흐마니노프를 흠모했다. … 모스크바의 대중은 라흐마니노프라면 껌뻑 죽었다. 그는 그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연주가 모든 이의 영혼을 파고들어 다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리지 못하는 심금을 울린 게 분명했다.


(176-177)

<피아노 협주곡 3>은 러시아정교회의 성가를 떠오르게 하는 음계 위주의 구불구불한 도입 선율부터 해서 낭만적이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한껏 품고 있다. 이 뚜렷한 러시아성은 빈틈없는 주제들의 통일성 및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의 기량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눈부신 기교와 더불어 이미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2>과 친숙하던 미국 관객을 겨냥한 노림수였던 듯 보인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이 곡의 음악적 특징을 전작보다 윗길에 놓았지만, 정작 관객들에게는 그만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곡을 헌정받은 러시아의 동포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은 이 곡을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독주자가 소화해야 하는 두터운 화음 텍스처와 널찍한 음역은 호프만의 조그마한 손보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전설적인 뼘 너비에 적격인 게 사실이다. 호프만은 또한 이 곡에 구조미가 부족하다면서 협주곡보다는 환상곡에 가깝다고 조롱하듯 깎아내리기도 했다. 과연 제3악장은 협주곡치고는 제법 덩치가 큰데, 다만 리처드 타루스킨은 이례적 구성 덕순에 이 곡만의 멋진 개성이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피아노 협주곡 3>이 피아니스트들이 스탠더드 레퍼토리로 편입된 건 1928년에 있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치의 연주 덕분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압도당한 라흐마니노프는 작품을 통째로 삼킨 연주!”라고 상찬했다.


(197)

라흐마니노프의 인기 비결은 아름다운 선율과 풍성한 화음을 그만의 방법으로 배합한 음악에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저마다 경험한 바를 긍정받는 감정의 분출을 경험했다. 집시들이 부르는 노래, 오페레타, 그리고 문화 엘리트층이 멸시하는 대중적인 여흥과 마찬가지로 라흐마니노프가 쓴 음악을 듣는 즉시 감정이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은 그저 비관적이고 우울하고 어두운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른 음악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로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에 호소했다. M. L. 첼리시페바의 회고대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모든 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고 다른 그 어떤 음악가도 건드릴 수 없는 심금을 건드려 소리나게 했다.”


(274-275)

<피아노 협주곡 4>의 뿌리는 러시아이지만, 마틴은 이 곡이 주로 뉴욕에서 쓰였고 서유럽에서 완성되었으며 게다가 섬세하고 명석한 작곡가의 작품이니 그가 수년간 주로 생활한 나라의 경치와 소리에 영향받은 게 당연하다면서 낭만파의 희뿌연 실안개는 영영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1924년의 라흐마니노프는 재즈와 안면을 튼 상태였고, 심지어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초연도 참관한 다음이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피아노 협주곡 4>은 한층 간결해진 주제를 사용하는 등 라흐마니노프가 군더더기를 덜어낸 작곡 스타일로 여전히 진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06-307)

의사까지 나서서 콘서트 일정을 줄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라흐마니노프는 역정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연주회는 내 유일한 기쁨입니다. 내게서 연주회를 앗아가면 나는 시들고 말 겁니다. 통증이 있어도 연주할 때는 사라집니다. 종종 얼굴과 머리 왼쪽의 신경통이 스물네 시간 동안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연주회 전에는 마술처럼 없어집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요통 때문에 아주 고생했습니다.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앉은 상태에서 막이 올랐고, 연주를 할 때는 조금도 통증이 없었지요. 하지만 연주가 끝나니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막을 내린 다음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어요. 아뇨, 연주를 줄일 수는 없습니다. 일을 멈추면 시들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안 됩니다 무대 위에서 죽기를 바랄 수밖에요.”


(336)

라흐마니노프는 현대 기술을 사랑했고, 색소폰 같은 현대 악기들을 탐구했다. 또한 여러 망명지를 겪은 것처럼 제정러시아 말기의 시국도 경험하였다. 다시 말해, 사상과 혁신이 난무하는 격변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여건으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같은 이유로 라흐마니노프는 읽어버린 나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의 음악과 정신은 1914년 부활절의 크렘린궁전을 담은 로베르트 슈테를의 그림, 즉 라흐마니노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옛 러시아의 이상화된 박제이자 그의 벽에 걸린 뮤즈를 동경했다. 라흐마니노프 개인에게 보이는 이러한 모순은 현대성의 본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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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2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2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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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지난 편지에 이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2권을 이야기해줄게. 요즘 아빠가 좀 바빠서 책도 많이 못 읽고, 편지도 계속 밀리고 있는데, 분발해야겠다.

베르너는 휴가 때 국립정치교육원에서 알게 된 친구 프레데리크의 집에 갔단다. 프레데리크의 따뜻한 가족들을 만났고, 프레데리크의 꿈 이야기도 들었어. 프레데리크의 꿈은 새 전문가라고 했어. 그래서 집에 새에 관한 책들이 많았어. 프레데리크 자신은 교육원과 군인이 적성에 맞지 않는데, 집에서 원해서 가게 된 것이라고 했어. 휴가 복귀 후에도 프레데리크는 교육원 생활을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특히 비인간적인 명령에 대해서는 참다못해 거절했어.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그는 왕따를 당하고 집단구타를 당했어. 베르너는 그의 편에 설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단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졌어. 프레데리크는 집단구타로 머리를 크게 다치고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었어. 결국 프레데리크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집으로 귀환조치 되었단다.

베르너는 특별기술부대에 전출가게 되었어. 이제는 교육원이 아니라 실제 군인이 되는 거야. 베르너는 전출 가기 전에 프레데리크의 집에 갔어. 하지만 프레데리크는 베르너를 알아보지 못했단다. 만약 베르너가 왕따 당하는 프레데리크를 막아주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아니면 베르너도 프레데리크처럼 되었을까?

베르너가 전출 간 특별기술부대에서는 불법 송신하는 주파수를 찾아내 그 발원지를 찾아내는 일이란다. 이 일에 베르너는 전문가였어.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찾아내고, 계산을 통해 발원지를 알려주면 대기하고 있던 군부대가 출동하여 그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이란다. 적군에 도움을 주고 있는 이들이니까 말이야.

, 베르너는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찾는 일을 하고, 마리로르와 에티엔 할아버지는 라디오 송신기가 있고이것이 나중에 접점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다.

아무리 실력 좋은 베르너라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어. 불법 송신 주파수의 발원지를 잘못된 곳으로 알려주었다가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일이 생겼어.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주파수의 발원지를 제대로 찾아서 죽은 사람들은 죄가 있는가? 나라를 침략한 이들이 죄를 지은 거지.

어느날 베르너는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통해서 자신이 어렸을 때 아이들의 방에서 유타와 함께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단다. 반가웠겠지만, 이 불법 라디오 주파수를 상사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갈등했단다. 그는 상사에게 이 불법 라디오 주파수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 주파수의 발원지를 혼자 찾아갔단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나오는 소녀를 목격하게 된단다. 드디어 그렇게 베르너와 마리로르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어. 앞을 보지 못하는 마르로르는 베르너의 존재를 몰라겠지만


1.

한편 마리로르는 파리에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기로 한 날짜보다 한 지나고 안 오시자, 걱정이 쌓여갔단다. 그리고 20여일 만에 편지가 왔는데 베를린에 체포되어 있다고 했어. 앞을 볼 수 없는 마리로르

프랑스 파리가 독일에 점령당하고 생말로 주민들도 무엇인가 하려고 했어. 마네크 아주머니도 동참하려고 하셨단다. 총을 들고 나가 싸울 수는 없지만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어. 마을 아주머니들도 모두 동참하셨단다. 에티엔 할아버지도 다락방에 숨겨둔 라이오 송신기로 무엇인가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단다. 그런데 마네크 아주머니가 갑작스레 중병에 걸려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아버지도 안 오시고, 마네크 아주머니는 돌아가시고이제 그 큰 집에 마리로르와 에티엔 할아버지 둘 만 있단다.

1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에티엔 할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로 방에서 거의 나오시지 않는데, 살림을 도맡아 하던 마네크 아주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에티엔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으셨단다. 이런 큰 충격이 오히려 과거의 트라우마를 깨기도 하지. 에티엔 할아버지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마네크 아주머니에 대한 추모의 시간을 갖고, 본격적으로 무엇인가를 하셨어.

다락을 막은 옷장의 안쪽을 뚫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단다. 그리고 다락방에 있는 라디오 송신기를 수리했단다. 이제 마네크 아주머니가 하던 일을 마리로르와 에티엔 할아버지가 했단다. 마리로르는 빵집에 가서 빵집 아주머니로부터 비밀 숫자를 받아오고, 에티엔 할아버지는 그 숫자를 라디오를 통해 보냈단다. 그리고 짧은 클래식 소품 하나도 같이 보냈어. 전쟁에 찌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선율을 듣게 된다면 어땠을까. 에티엔 할아버지는 참 낭만적인 분인 것 같구나.

1권에서 박물관의 다이아몬드를 찾고 있는 독일군 원사 룸펠이라는 사람 생각나지? 마리로르의 아버지 다니엘이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생각해서 다니엘을 파리 박물관 복귀를 지시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다니엘이 체포된 줄 몰랐어. 다니엘이 체포되어 형무소에 갇힌 지 4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단다. 룸펠은 다니엘이 머물렀던 생말로의 집을 알게 되어 그 집에 갔단다. 그리고 다니엘의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딸이 장님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마리로르에게 말도 걸었는데, 마리로르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도망쳤단다. 아참, 룸펠은 암 선고를 받고 치료를 받고 있던 중이라 도망치는 마리로르를 쫓아갈 체력이 안 되었단다.

그렇게 마르로르가 룸펠로부터 도망을 치다 보니 평상시보다 집에 오는 시간이 늦어졌단다. 에티엔 할아버지는 빵가게 심부름을 갔던 마리로르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걱정을 하며 집밖에 직접 나갔단다. 몇 십 년 동안 나가지 않던 집밖을 말이야. 나중에 마리로르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왔어. 이 일이 있고, 에티엔은 자신이 빵가게에 가겠다고 했어. 그런데, 이를 어쩌니, 에티엔이 빵가게 갔다가 그만 체포되고 말았단다. 집에 장님인 손녀가 혼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어. 이제 그 큰 집에 마리로르 혼자 있게 되었단다.

….


2.

그렇게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누군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났어. 할아버지의 발소리는 아니었어. 룸펠이었단다. 이곳 어딘가에 다이아몬드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온 거야. 룸펠의 생각이 맞았어. 다이아몬드는 이곳에 있었어. 아버지가 길 찾기 훈련을 하라고 만들어주진 생말로 도시 모형의 속에 숨겨 두었는데 얼마 전에 마리로르가 우연히 찾아냈단다. 그래서 지금은 마리로르의 주머니 속에 있었어.

침입자의 발소리를 들은 마리로르는 다락방으로 숨었어. 옷장의 문을 닫으면 다락방 입구를 찾을 수가 없거든. 룸펠은 집에 들어와서 이곳 저곳을 느릿느릿 돌아다니면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보았단다. 며칠이 지나도 그곳에 있었어. 그로 인해 마리로르는 다락방에 숨어서 나오질 못했어. 그리고 라디오 송신기를 켜고 에티엔 할아버지가 사주신 점자책 <해저2만리>를 낭독했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말이야.

그런데 그 방송을 베르너가 들었어. 베르너가 그 방송을 들을 시점에 베르너도 상태가 좋지 않았단다. 생말로에 있는 꿀벌 호텔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연합국의 폭격을 맞아 호텔은 무너지고 지하에 피신하고 있었거든많은 동료들이 죽고 폴크하이머라는 동료와 함께 있었어. 베르너를 그 방송을 듣고 자신이 얼마 전에 갔던 그곳임을 알았어.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그 주파수. 베르너는 그곳을 향했단다. 전쟁이고 뭐 다 필요 없고, 그 소녀를 만나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마리로르의 집에 왔는데, 베르너는 그곳에서 룸펠을 만나게 되었지. 그런데 바로 그때 마리로르가 다락방에서 며칠 동안 숨어있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락방에서 뛰쳐나왔는데 룸펠이 깜짝 놀라서 총을 겨눴고, 이에 베르너가 룸펠을 공격하여 죽였단다. 베르너가 마리로르를 살린 거야. 마리로르는 베르너와 룸펠이 싸우는 소리만 들었을 테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드디어 만난 마리로르와 베르너. 베르너가 자신이 이곳에 온 곳에 대해 다 이야기했어.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라디오 방송부터 마리로르가 낭독한 <해저 2만리>까지얼마 안 있으면 대대적인 폭격이 있을 것을 알고 있던 베르너는 마리로르를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단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베르너는 마리로르를 사랑했어. 베르너의 도움으로 피신한 마리로르는 풀려난 에티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단다. 한편 마리로르와 헤어진 베르너는 체포되었어. 그리고 도망치다가 지뢰를 밟고 그만 운명을 달리했단다. 그렇게 베르너는 죽고 말았지만, 마리로르는 베르너로 인해 살 수 있었던 거야.

….

소설의 마지막은 전쟁이 끝난 지 한참 지나고 나서 베르너의 군동료 폴크하이머가 베르너의 유품을 가지고 베르너의 일기에 담긴 사람들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마무리 된단다. 베르너의 일기에 담긴 사람들에는 유타, 프레데리크, 그리고 마리로르가 있었어.. 여기까지가 소설의 이야기란다.

이 소설은 아프지만 아름다운, 짧지만 진정한 사랑 이야기였단다. 2차 세계 대전에 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을 거야. 어쩌면 이 소설보다 더 가슴 아픈 일들이 실재했을 거란다. 아빠가 지난 편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단다.

….

소설을 덮고 드라마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의 예고편을 보았단다. 짧은 예고편이지만 소설의 장면들을 잘 그려낸 것 같더구나. 예고편을 봤더니 본편이 더 보고 싶더구나. 얼른 시간을 만들어야 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사령관은 덕목과 가족에 대해, 슐포르타 소년들이 어딜 가나 늘 달고 다니는 불을 상징하는 표지, 국가의 난로를 지피는 순수한 횃불을 의미하는 그 불에 대해서 연설하고, 또 총통이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하는데, 그 말은 베르너의 귀를 익숙하게 두들기고, 무모한 소년 하나는 투덜거리며 토를 단다.

책의 끝 문장: 이윽고 차들의 한숨 소리와 기차들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추위 속에서 발을 재는 모든 사람의 소리만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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