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오월이면 햇차를 맛보는 것 같다. 우전은 간신히 맛만 보고 올해는 세작으로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내게는 사치란 생각을 떨칠 수 없지만 혼자 누리는 이 사치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작년에는 맛이 깊고 향기로웠는데 올해는 매끄러운 단맛이 더하다. 문태준 시인도 차를 즐기나보다. 시인의 성품이나 글맛이나 차맛이 일품으로 동일하다.

 

햇차를 끓이다가


멀리 해남 대흥사 한 스님이 등기로 부쳐온 햇차 한 봉지
물을 달여 햇차를 끓이다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이런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것인가
마르고 뒤틀린 찻잎들이 차나무의 햇잎들로 막 피어나는 것이었다
소곤거리면서 젖고 푸른 눈썹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차를 우려낼 때 “마르고 뒤틀린 찻잎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정말 차나무에 처음 잎이 나던 순간들처럼 연둣빛으로 서서히 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은 온몸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시간이다. 내가 도자기로 만든 찻주전자보다 유리유전자를 더 선호하는 까닭은 차가 우러나는 “간곡한 사연”과 보낸 이의 마음까지 같이 우러나는 것을 보고 듣고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색은 이렇게도 맑은데 입 안 가득 번지는 향과 맛은 대체 어디서 오겠는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밥맛 나는 사람, 술맛 나는 사람, 차를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각각이다. 이상하게도 술 마시는 사람들과는 차를 마시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밥을 먹고 나면 차를 마시게 마련이지만 이때 차를 마시는 것은 그저 이어지는 코스의 한 형식이기 쉽다. 차를 마시기 위해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 차를 마시다가 식사로 이어지고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다시 찻집을 찾게 되는 사람. 이런 사람 갖고 싶다.

문득 고즈녁한 찻집에서 향기와 맛과 시간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아마도 서로에게 향기와 맛을 나눠주기 위해 오랜 시간 찻잎처럼 외로움으로 건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찻잎이 따뜻한 물을 만나 향기로워 지듯이 그들도 서로에게 젖어 향기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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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7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6-0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맛도 참 좋네요. 저도 차한 우려야겠네요.

반딧불이 2009-06-07 02:27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은 어떤 차를 즐기세요? 낮에는 내내 세작을 우려내다가 방금 아름다운 가게에서 구입한 커피 '히말라야의 선물' 내렸답니다. 휘모리님 차맛에 시맛이 더해지시기를....

무해한모리군 2009-06-09 19:23   좋아요 0 | URL
저는 낮에는 보통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마시고, 집에오면 홍차도 마시고, 우롱차도 마시고, 겨울엔 보글보글 보리차도 끓여마시고 그래요..
저도 오늘은 시집한권 빼 읽어봐야겠네요.

프레이야 2009-06-07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방금 카페라떼 만들어 마셨네요. 차는 제가 먼저 찾게 되진 않고
옆지기가 가끔 우려내어 권하면 마셔요. 차 한 잔의 사치, 좋아요.^^
밥 먹고 나면 차 한 잔 같이 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네요.

반딧불이 2009-06-07 22:57   좋아요 0 | URL
그마음 오래 간직해주세요. 언젠가 프레이야님과 차를 나눌 기회가 꼭 있기를 기대할께요.

파란여우 2009-06-0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뽕잎을 말려 뽕잎차를 만들었슴다. 마셔보진 않아서 맛은 모르겠구요.
역시나 마당가에서 따서 말린 박하잎차도 있는데 이 역시 손님들만 드리고 전 안마셔서..
전, 잎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 대신 뿌리차를 좋아해요. 이를테면 둥글레, 칡...^^

서정적인 글에 멋대가리 없는 댓글이라니...제가 요새 좀 이상해요.

반딧불이 2009-06-0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서울 한복판에 사는 저도 올해 감잎차를 만들어보았어요. 첫잎으로 만든 첫차가 나름 훌륭합니다. 제 느낌으론 여우님과는 맑고 깨끗한 잎차가 더 어울릴것 같은데...의외에요. 잠수만 안타시면 어떤 댓글이라도 환영함다~
 
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는 실험 중 액체질소 폭발로 얼굴을 잃었다. 검붉은 거머리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흉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붕대복면을 하고 생활을 한다. 그러나 얼굴을 감추고자 한 붕대복면은 오히려 자신을 더 잘 드러내는 형국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그를 괴물 대하듯 한다. 일상적인 소통도 점점 멀어져 마침내는 가장 가까운 아내조차도 초급 외국어를 더듬거리는 듯 아주 기본적인 말 이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이전과 같은 타인과의 소통이 그리웠고 그 대안으로 가면을 생각하게 된다.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욕망과 치밀한 계획은 성공한다. 가면을 완성한 사내는 자신의 성공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거리에서 술집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면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확인한 남자는 자기 가면의 완결성을 증명하기 위해 가면의 얼굴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인인 자기 아내를 유혹한다. 
 

인간에게 얼굴은 어떤 의미일까? 가지고 태어난 맨얼굴 외에 또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변할까? 아마도 이러한 질문이 아베 코보가 『타인의 얼굴』을 쓰게 된 동기가 아닐까 싶다. 이미 『모래의 여자』에서 문명화의 정도는 피부의 청결도에 있다거나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틀림없이 피부에 있을 것이라던 저자의 생각은 『타인의 얼굴』에서 더욱 심화 확장된다.

플라스틱 인공기관에 대한 기사를 보고 찾아간 전문가의 입을 통해 저자는 “얼굴이라는 것은 결국 표정을 말하는 것이고, 표정이라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연결해주는 통로라고”말한다. 결국 가면을 갖는 것은 타인과 연결되는 두 개의 통로를 갖게 되는 셈이다. 하나의 신체에 두 개의 얼굴. 물론 관리가 잘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면의 얼굴에 아내가 너무나도 쉽게 유혹 당하자 사내는 그만 가면의 얼굴에 심한 질투심을 느끼며 가면의 얼굴과 붕대복면의 분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남자는 가면을 만들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가면을 쓰고 아내를 유혹한 사실 등을 노트에 모두 적어 자신이 정해놓은 장소에 두고 아내를 부른다. 그리고 노트를 읽은 아내와의 화해를 기다린다.

가면, 복면, 탈 등 이름도 용도도 다양한 모든 가면을 통틀어 말할 수 있는 기본 속성은 무엇일까?  저자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만들어내는 얼굴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얼굴...... 스스로 선택한 표정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해서 선택된 표정”이다. 노트를 읽은 아내의 귀가를 기다리는 남자에게 시간은 불안하게 두근거린다. 기다리다 못해 다시 찾아간 곳에 아내는 없고 대신 아내의 메모가 기다리고 있다.

“가면은 가면이라는 것을 상대에게 알림으로써 가면을 쓰고 있는 의미도 있는 게 아닐까요? 당신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여자의 화장인들 결코 화장임을 숨기려고 들지는 않습니다. 결국 가면이 나빴던 것이 아니고 당신이 가면 다루는 법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아내는 처음부터 그가 가면의 얼굴을 한 남편임을 알아보았고 그런 남편의 행위에까지 연민을 느껴 가면놀이에 동참했지만 부정한 아내로 자신을 몰아가는 남편의 유치한 가면놀이 방식에 화해의 가면놀이까지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처럼 얼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성형수술로 가공된 얼굴이 부끄럽다기보다는 많은 돈을 들일수록 자랑스럽게 또 당당하게 떠벌릴 수 있는 시대다. 1960년대에 발표된『모래의 여자』, 『불타버린 지도』와 함께 아베 코보의 실종삼부작이라 불리는 『타인의 얼굴』은 당시보다도 비주얼시대라는 지금의 현실에 더 밀착된 소설이다. 『모래의 여자』에서 모래의 불모성이 건조함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유동성에 있다는 것을 진단한 저자는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현대사회의 유동성 속에서 얼굴의 의미에 내포된 존재의 위태로움, 타자성 등을 되짚어보게 해준다. 『불타버린 지도』에서 어떻게 그의 사상이 전개될지 몹시 궁금한데 책을 구할 수가 없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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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과 사귀다 랜덤 시선 25
이영광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마지막을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장으로 마감해야한다. 나는 감상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착잡해지고 눈시울이 젖어드는 걸 감추지 못하겠다. 실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믿으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대통령에까지 이르렀지만 이제 그의 소신은 그를 부엉이 바위 아래로 내몰았다. 내 눈물 한 방울, 국화 한 송이가 그의 죽음에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싶어 망연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나는 그를 위로하기보다 내 마음을 위로하고자 시집을 펼친다.


이영광의 두 번째 시집 『그늘과 사귀다』는 아버지와 형을 차례로 잃고 죽음과 사귀어가는 과정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면서 울적한 마음의 눈까지 적신다.



떵떵거리는




아버지 세상 뜨시고
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
천둥 벼락도 불안 우울도 없이
전화벨이 몇 번씩 울었다


아버지가, 캄캄한 형을 데려갔다고들 했다
깊고 맑고 늙은 마을의 까막눈들이
똑똑히 보았다는 듯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손을 빌려서
아버지는 묻고
형은 태웠다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
뭍에 끌려 나와서도 살아 파닥이는 銀빛 생선들,
바람 지나간 벚나무 아래 고요히 숨 쉬는 흰 꽃잎들,

나의 죽음은 백주 대낮의 백주 대낮 같은
번뜩이는 그늘이었다

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가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에 들려보곤 했었다. 거기에는 밀짚모자를 쓴 잠바차림의 그가 구멍가게에 앉아 담배를 피우려는 모습도 있었고, 유모차에 손자손녀를 태우고 자전거에 매달아 동네 한 바퀴 도는 사진도 있었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도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해주었었다. 그런 그가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자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는 시인의 말이 주먹이 되어 가슴을 친다. 나는 아직 죽음의 그늘과 깊이 사귀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나의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천국에 가기를 기도할 수도 극락왕생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채찍질 하며 밀고 간 그의 생을 이제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쉼,


식은 몸을 말끔히 닦아놓으니,
생의 어느 축일 보다도 더
깨끗하고 
희다
미동도 없는데 어지러운
집은, 우물 같은 고요의 소용돌이 속으로
아득히
가라앉는다
찰싹, 물소리가 들려온 듯한  

창밖 새소리가 홀연 먼 산으로 옮겨 앉는
이 순간을,
한 번만 입을 달싹여
쉼,
이라 불러야 할까
우물 속에는 밤새워 가야 할 먼 길이
저렇듯 반짝이며 흐르고 있으니




5월 29일 11시 경복궁에서 국장이 시작되고 식이 끝나면 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가 열릴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마도 조문객들이 길게 뒤를 따르리라.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죽음은 길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길’을....... 기나긴 장례의 길을.......




길의 장례



나는 죽음의 뼛소리를 듣고 서쪽으로 갔다
날은 춥고 해는 기울고 어둠이 서서히 드리우는
먼 곳으로,
전차를 타고

이 죽음은 길을 좋아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길이었다.
길은 이 죽음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단 한 번 사랑해주지도 않았다
한 죽음이 더 큰 죽음에 의해 길 위에 쓰러질 때
그는 죽음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다만 흘린 피와 토사물과 제 내장이 짜내는 신음으로
길이 난생처음의 빛깔로 눈 감는 것을 갸우뚱, 보았으리라
버려진 길이었으므로 그는, 아팠으리라
제 속의 죽음이 밖으로 나와 저를 부를 때에도
그는 착하여 알아듣지 못했으며
새벽까지 길 위에 길처럼 길게 누워
집으로 가는 길 사력을 다해 찾고 있었으리라
그가 평생을 헤매 다녔으나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머나먼 세상이 또는 세월이
그에게 다가오기를 쿵쿵쿵쿵, 기다리는 동안
버르적거리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갔으리라
뒤늦게 달려온 구급차보다 먼저 그가 어딘가로 실려가고
죽음은 젖은 잎 뒹구는 골목을 스쳐 더 추운 곳,
야간 병원의 냉동고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를 목격했던 세상은 그제야 어둠에서 걸어나왔지만
부어터진 몸속에 있던 그는 간 곳 없다


냉동고에서 나온 죽음은 한 번 더 죽기 위해
화장장으로 간다 길가 나무들에 양철빛 불꽃이
타고 있다 한 번 더 죽기 위해 죽음은
이제 초열지옥으로 들어간다
이 개 같은 땅 어디에 눈물 많은 神이 있으랴
그 옛날 그가 나에게 물려주었던
왕자 화판만한 쪽창 하나를 이쪽으로 열어두고
죽음은 고요히 몸부림치며 들어간다
지상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불 속으로



‘그가 평생을 헤매 다녔으나/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머나먼 세상’을 두고 그는 화장 절차를 밟기 위해 화장장으로 갈 것이다. 화장지는 경기 수원시 영통구 하동 수원시연화장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죽기 위해 죽음은/이제 초열지옥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개 같은 땅 어디에 눈물 많은 神이 있으랴’ 이제 ‘죽음은 고요히 몸부림치며 들어’갈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불 속으로’


장례가 끝나면 그는 그의 사저 뒷산 어딘가에 묻힐 것이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를 찾을 것이다. ‘목숨도 성질도 다해서’(성묘) 그가 이사한 둥근 묘 앞에서 사람들은 술을 따르고 음복을 하고 담배에 불을 붙여 놓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술 잘못 드려도 상 엎지 않고/재차가 어긋나도 호통이 없는 대신에’(음복) 얼굴에 주름을 지으며 빙그레 웃을 것이다. 권력도 모함도 법도 죄도 없는 오롯한 독채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죽음은 누구나의 공통분모다. 이러한 탓인지 시인이 죽음의 그늘과 사귀어가는 과정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도 내 어머니의 죽음에도  어디에다 놓아도 시가 어긋나지 않는다.  시인의 마음을 알뜰하게도 할퀴고 간 죽음의 상처에서 돋아난 시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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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8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뻐꾸기는 지빠귀나 때까치의 둥지에 허락 없이 몰래 알을 낳는다. 위탁모를 제 맘대로 정하는 것이다. 물론 수고료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다.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들은 용서받지 못할 패악을 저지른다. 지빠귀나 때까치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그들의 알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다. 먹이를 독차지 하려는 까닭이다. 눈도 뜨지 못하고 털도 없는 뻐꾸기 새끼들이 등으로 다른 알을 밀어내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난 후에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고 싶었다.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초록에 겨워
거품 물까 봐
지쳐 잠들까 봐
때까치며 지빠귀 혹여 알 품지 않을까 봐
뻐꾸기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으로 뉘우치는 일
멀리서 울음소리로 알을 품는 일
뻐꾸기 운다

젊은 어머니 기다리다
제가 싼 노란 똥 먹는 어린 세 살
마당은 늘 비어 있고
여름이란 여름은 온통 초록을 향해
눈멀어 있던 날들
광목천에 묶여 있는 연한 세 살
뻐꾸기 울음에 쪼여 귓바퀴가
발갛게 문드러지던 대낮들 
 

그곳 때까치 집, 지빠귀 집
뻐꾸기가 떨어뜨려 놓고 간 아들 하나
알에서 나와 운다
뻐꾸기 운다


아들이 핸드폰을 두고 나갔다.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바닥을 밀어내는 전화기를 보다 못해 꺼버리려다 보고 말았다. 잘못 누른 단축번호 1번 김팀장 016-255-xxxx, 호기심에 눌러 본 2번 안사장 011-9703-xxxx. 엄마 아빠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김팀장, 안사장이라니! 나도 남편의 이름대신 ‘동거인’,  아들은 ‘보물 1호’ 딸 이름 앞에는 ‘예쁜이’이라고 입력해 놓았었다. 물론 단어의 일차적 의미가 우선이지만 부차적으로는 프로이트적 해석이 가능하기도 하다.

시인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놓은 뻐꾸기는 때까치며 지빠귀가 혹여 알을 품지 않을까봐 울고, 울어야한다고 한다. 내가 뻐꾸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를 막고 싶었던 것은 텔레비전에서 본 뻐꾸기 새끼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뻐꾸기 울음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까닭은 자본주의의 뻐꾸기가 내 둥지에 넣어놓은 알을 내 알 인줄 알고 키워온 지빠귀였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먹여 키워놓았더니 엄마를  김팀장이라고 부르는 싸가지 없는 자본주의의 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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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2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 중에는, 특히 남자들에게는 단축번호에 자주 쓰는 즉 편의상의 순서를 정해놓은 이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반딧불이님.
자본주의와 연관지어 쓰신 글에 슬쩍 미소가 머금어집니다. 딸보다 아들을 보물 1호라 하시고는 '프로이드적으로 해석..가능하기도하다'라 언급하신 부분에서도 슬쩍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더불어 아마 나중엔 따님이 분명 보물 1호의 호칭을 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오지랖 넓은 추측도 잠깐 해보았습니다--딸과 엄마는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는 것 같아서요.>


아드님의 마음 속 단축번호는 김팀장은 "결단코" 아닐꺼예요. 아드님에게 어머니이신 반딧불이님은 삶 그 끝까지 가슴아리고 소중한 존재이시니까요.


반딧불이 2009-05-21 22:47   좋아요 0 | URL
현대인들님. 위로 고맙습니다. 괘씸한 녀석이라고 욕해주시면 더 위로가 되었을텐데말이죠~ㅎㅎ

마늘빵 2009-05-21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여친 자리로 단축번호 자리를 항상 비워두었는데 언젠가부터는 귀찮아서 입력순으로 놔둬요. ^^ 별 의미가 없을 거에요.

반딧불이 2009-05-22 02:04   좋아요 0 | URL
제가 언어에 민감할걸까요? 정말 별의미가 없겠죠? 근데 녀석이 가끔 "엄마 계모아냐?"혹은 "엄마 계모 맞지?"라고 물을때는 저도 '그래..니 엄마 누구니?' 묻고 싶어진다니까요.
 

 

거실의 낡은 커튼을 걷어냈더니 풍경화 커튼이 새로 생겼다. 커다란 목련 곁에 단풍나무 아래 한 무더기 명자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동영상 커튼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인지, 나무가 바람을 부르는 것인지 한참을 내다보았다. 큰 목련은 손사래를 치듯 잎사귀 몇 개가 흔들릴 뿐인데 창 앞에 선 이름 모를 나무는 몸을 못 가누는 취객처럼 온몸으로 흔들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잎사귀모양의 네 개의 흰 꽃잎을 달고 있다. 처음 보는 나무다. 이럴 때는 인터넷이 식물도감보다 훨씬 낫다. 봄에 피는 꽃으로 검색을 하니 산딸나무란다.  으흠..이것이 산딸기도 아니고 산아들나무도 아니고 산딸나무란 말이지. 나는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못미더워 몇 번씩 웅얼거리며 보던 시집을 다시 뒤적인다. 그런데 이 시인도 나와 다르지 않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제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시인이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아직 한 번도 물푸레나무를 본 적 없다는 사실에 동감한 것은 잠시였다. 물푸레나무는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그 물을 파랗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인은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도’모르는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또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다고 한다. 시인들의 비극적 세계인식으로 마음 아프고 싶지 않은 날이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은 것이  갖지 못할 빛깔이 되어 아주 슬픈 빛깔일수밖에 없다는 이 묽은 감정의 번짐을 비극적 세계인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 마음에 물푸레나무 빛 저녁 어스름이 번져오듯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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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5-19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 오랜만에요.
시도 님의 단상도 참 좋아요. 잘 읽고 갑니다.^^

반딧불이 2009-05-1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반갑고 또 고맙습니다. 근데 이름을 바꿔오시니까 다른분 같아요.^.~

프레이야 2009-05-19 20:3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는 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