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는 지빠귀나 때까치의 둥지에 허락 없이 몰래 알을 낳는다. 위탁모를 제 맘대로 정하는 것이다. 물론 수고료를 지불하는 것도 아니다.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들은 용서받지 못할 패악을 저지른다. 지빠귀나 때까치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그들의 알을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다. 먹이를 독차지 하려는 까닭이다. 눈도 뜨지 못하고 털도 없는 뻐꾸기 새끼들이 등으로 다른 알을 밀어내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난 후에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고 싶었다.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초록에 겨워
거품 물까 봐
지쳐 잠들까 봐
때까치며 지빠귀 혹여 알 품지 않을까 봐
뻐꾸기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으로 뉘우치는 일
멀리서 울음소리로 알을 품는 일
뻐꾸기 운다
젊은 어머니 기다리다
제가 싼 노란 똥 먹는 어린 세 살
마당은 늘 비어 있고
여름이란 여름은 온통 초록을 향해
눈멀어 있던 날들
광목천에 묶여 있는 연한 세 살
뻐꾸기 울음에 쪼여 귓바퀴가
발갛게 문드러지던 대낮들
그곳 때까치 집, 지빠귀 집
뻐꾸기가 떨어뜨려 놓고 간 아들 하나
알에서 나와 운다
뻐꾸기 운다
아들이 핸드폰을 두고 나갔다.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바닥을 밀어내는 전화기를 보다 못해 꺼버리려다 보고 말았다. 잘못 누른 단축번호 1번 김팀장 016-255-xxxx, 호기심에 눌러 본 2번 안사장 011-9703-xxxx. 엄마 아빠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고 김팀장, 안사장이라니! 나도 남편의 이름대신 ‘동거인’, 아들은 ‘보물 1호’ 딸 이름 앞에는 ‘예쁜이’이라고 입력해 놓았었다. 물론 단어의 일차적 의미가 우선이지만 부차적으로는 프로이트적 해석이 가능하기도 하다.
시인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놓은 뻐꾸기는 때까치며 지빠귀가 혹여 알을 품지 않을까봐 울고, 울어야한다고 한다. 내가 뻐꾸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를 막고 싶었던 것은 텔레비전에서 본 뻐꾸기 새끼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뻐꾸기 울음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까닭은 자본주의의 뻐꾸기가 내 둥지에 넣어놓은 알을 내 알 인줄 알고 키워온 지빠귀였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먹여 키워놓았더니 엄마를 김팀장이라고 부르는 싸가지 없는 자본주의의 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