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과 사귀다 랜덤 시선 25
이영광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마지막을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장으로 마감해야한다. 나는 감상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는 마음이 착잡해지고 눈시울이 젖어드는 걸 감추지 못하겠다. 실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믿으며 스스로를 채찍질해 대통령에까지 이르렀지만 이제 그의 소신은 그를 부엉이 바위 아래로 내몰았다. 내 눈물 한 방울, 국화 한 송이가 그의 죽음에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싶어 망연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나는 그를 위로하기보다 내 마음을 위로하고자 시집을 펼친다.


이영광의 두 번째 시집 『그늘과 사귀다』는 아버지와 형을 차례로 잃고 죽음과 사귀어가는 과정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면서 울적한 마음의 눈까지 적신다.



떵떵거리는




아버지 세상 뜨시고
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
천둥 벼락도 불안 우울도 없이
전화벨이 몇 번씩 울었다


아버지가, 캄캄한 형을 데려갔다고들 했다
깊고 맑고 늙은 마을의 까막눈들이
똑똑히 보았다는 듯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손을 빌려서
아버지는 묻고
형은 태웠다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
뭍에 끌려 나와서도 살아 파닥이는 銀빛 생선들,
바람 지나간 벚나무 아래 고요히 숨 쉬는 흰 꽃잎들,

나의 죽음은 백주 대낮의 백주 대낮 같은
번뜩이는 그늘이었다

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가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에 들려보곤 했었다. 거기에는 밀짚모자를 쓴 잠바차림의 그가 구멍가게에 앉아 담배를 피우려는 모습도 있었고, 유모차에 손자손녀를 태우고 자전거에 매달아 동네 한 바퀴 도는 사진도 있었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도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해주었었다. 그런 그가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자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는 시인의 말이 주먹이 되어 가슴을 친다. 나는 아직 죽음의 그늘과 깊이 사귀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나의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천국에 가기를 기도할 수도 극락왕생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채찍질 하며 밀고 간 그의 생을 이제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쉼,


식은 몸을 말끔히 닦아놓으니,
생의 어느 축일 보다도 더
깨끗하고 
희다
미동도 없는데 어지러운
집은, 우물 같은 고요의 소용돌이 속으로
아득히
가라앉는다
찰싹, 물소리가 들려온 듯한  

창밖 새소리가 홀연 먼 산으로 옮겨 앉는
이 순간을,
한 번만 입을 달싹여
쉼,
이라 불러야 할까
우물 속에는 밤새워 가야 할 먼 길이
저렇듯 반짝이며 흐르고 있으니




5월 29일 11시 경복궁에서 국장이 시작되고 식이 끝나면 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가 열릴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마도 조문객들이 길게 뒤를 따르리라.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죽음은 길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길’을....... 기나긴 장례의 길을.......




길의 장례



나는 죽음의 뼛소리를 듣고 서쪽으로 갔다
날은 춥고 해는 기울고 어둠이 서서히 드리우는
먼 곳으로,
전차를 타고

이 죽음은 길을 좋아했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길이었다.
길은 이 죽음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단 한 번 사랑해주지도 않았다
한 죽음이 더 큰 죽음에 의해 길 위에 쓰러질 때
그는 죽음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다만 흘린 피와 토사물과 제 내장이 짜내는 신음으로
길이 난생처음의 빛깔로 눈 감는 것을 갸우뚱, 보았으리라
버려진 길이었으므로 그는, 아팠으리라
제 속의 죽음이 밖으로 나와 저를 부를 때에도
그는 착하여 알아듣지 못했으며
새벽까지 길 위에 길처럼 길게 누워
집으로 가는 길 사력을 다해 찾고 있었으리라
그가 평생을 헤매 다녔으나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머나먼 세상이 또는 세월이
그에게 다가오기를 쿵쿵쿵쿵, 기다리는 동안
버르적거리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갔으리라
뒤늦게 달려온 구급차보다 먼저 그가 어딘가로 실려가고
죽음은 젖은 잎 뒹구는 골목을 스쳐 더 추운 곳,
야간 병원의 냉동고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를 목격했던 세상은 그제야 어둠에서 걸어나왔지만
부어터진 몸속에 있던 그는 간 곳 없다


냉동고에서 나온 죽음은 한 번 더 죽기 위해
화장장으로 간다 길가 나무들에 양철빛 불꽃이
타고 있다 한 번 더 죽기 위해 죽음은
이제 초열지옥으로 들어간다
이 개 같은 땅 어디에 눈물 많은 神이 있으랴
그 옛날 그가 나에게 물려주었던
왕자 화판만한 쪽창 하나를 이쪽으로 열어두고
죽음은 고요히 몸부림치며 들어간다
지상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
불 속으로



‘그가 평생을 헤매 다녔으나/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머나먼 세상’을 두고 그는 화장 절차를 밟기 위해 화장장으로 갈 것이다. 화장지는 경기 수원시 영통구 하동 수원시연화장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죽기 위해 죽음은/이제 초열지옥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개 같은 땅 어디에 눈물 많은 神이 있으랴’ 이제 ‘죽음은 고요히 몸부림치며 들어’갈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춥고 어두운/불 속으로’


장례가 끝나면 그는 그의 사저 뒷산 어딘가에 묻힐 것이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를 찾을 것이다. ‘목숨도 성질도 다해서’(성묘) 그가 이사한 둥근 묘 앞에서 사람들은 술을 따르고 음복을 하고 담배에 불을 붙여 놓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술 잘못 드려도 상 엎지 않고/재차가 어긋나도 호통이 없는 대신에’(음복) 얼굴에 주름을 지으며 빙그레 웃을 것이다. 권력도 모함도 법도 죄도 없는 오롯한 독채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죽음은 누구나의 공통분모다. 이러한 탓인지 시인이 죽음의 그늘과 사귀어가는 과정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도 내 어머니의 죽음에도  어디에다 놓아도 시가 어긋나지 않는다.  시인의 마음을 알뜰하게도 할퀴고 간 죽음의 상처에서 돋아난 시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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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7 08: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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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0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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