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오월이면 햇차를 맛보는 것 같다. 우전은 간신히 맛만 보고 올해는 세작으로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내게는 사치란 생각을 떨칠 수 없지만 혼자 누리는 이 사치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작년에는 맛이 깊고 향기로웠는데 올해는 매끄러운 단맛이 더하다. 문태준 시인도 차를 즐기나보다. 시인의 성품이나 글맛이나 차맛이 일품으로 동일하다.

 

햇차를 끓이다가


멀리 해남 대흥사 한 스님이 등기로 부쳐온 햇차 한 봉지
물을 달여 햇차를 끓이다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이런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것인가
마르고 뒤틀린 찻잎들이 차나무의 햇잎들로 막 피어나는 것이었다
소곤거리면서 젖고 푸른 눈썹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차를 우려낼 때 “마르고 뒤틀린 찻잎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정말 차나무에 처음 잎이 나던 순간들처럼 연둣빛으로 서서히 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은 온몸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시간이다. 내가 도자기로 만든 찻주전자보다 유리유전자를 더 선호하는 까닭은 차가 우러나는 “간곡한 사연”과 보낸 이의 마음까지 같이 우러나는 것을 보고 듣고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색은 이렇게도 맑은데 입 안 가득 번지는 향과 맛은 대체 어디서 오겠는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밥맛 나는 사람, 술맛 나는 사람, 차를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각각이다. 이상하게도 술 마시는 사람들과는 차를 마시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밥을 먹고 나면 차를 마시게 마련이지만 이때 차를 마시는 것은 그저 이어지는 코스의 한 형식이기 쉽다. 차를 마시기 위해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 차를 마시다가 식사로 이어지고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다시 찻집을 찾게 되는 사람. 이런 사람 갖고 싶다.

문득 고즈녁한 찻집에서 향기와 맛과 시간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아마도 서로에게 향기와 맛을 나눠주기 위해 오랜 시간 찻잎처럼 외로움으로 건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찻잎이 따뜻한 물을 만나 향기로워 지듯이 그들도 서로에게 젖어 향기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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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07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6-0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맛도 참 좋네요. 저도 차한 우려야겠네요.

반딧불이 2009-06-07 02:27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은 어떤 차를 즐기세요? 낮에는 내내 세작을 우려내다가 방금 아름다운 가게에서 구입한 커피 '히말라야의 선물' 내렸답니다. 휘모리님 차맛에 시맛이 더해지시기를....

무해한모리군 2009-06-09 19:23   좋아요 0 | URL
저는 낮에는 보통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마시고, 집에오면 홍차도 마시고, 우롱차도 마시고, 겨울엔 보글보글 보리차도 끓여마시고 그래요..
저도 오늘은 시집한권 빼 읽어봐야겠네요.

프레이야 2009-06-07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방금 카페라떼 만들어 마셨네요. 차는 제가 먼저 찾게 되진 않고
옆지기가 가끔 우려내어 권하면 마셔요. 차 한 잔의 사치, 좋아요.^^
밥 먹고 나면 차 한 잔 같이 하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네요.

반딧불이 2009-06-07 22:57   좋아요 0 | URL
그마음 오래 간직해주세요. 언젠가 프레이야님과 차를 나눌 기회가 꼭 있기를 기대할께요.

파란여우 2009-06-0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뽕잎을 말려 뽕잎차를 만들었슴다. 마셔보진 않아서 맛은 모르겠구요.
역시나 마당가에서 따서 말린 박하잎차도 있는데 이 역시 손님들만 드리고 전 안마셔서..
전, 잎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 대신 뿌리차를 좋아해요. 이를테면 둥글레, 칡...^^

서정적인 글에 멋대가리 없는 댓글이라니...제가 요새 좀 이상해요.

반딧불이 2009-06-0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서울 한복판에 사는 저도 올해 감잎차를 만들어보았어요. 첫잎으로 만든 첫차가 나름 훌륭합니다. 제 느낌으론 여우님과는 맑고 깨끗한 잎차가 더 어울릴것 같은데...의외에요. 잠수만 안타시면 어떤 댓글이라도 환영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