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의 낡은 커튼을 걷어냈더니 풍경화 커튼이 새로 생겼다. 커다란 목련 곁에 단풍나무 아래 한 무더기 명자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동영상 커튼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것인지, 나무가 바람을 부르는 것인지 한참을 내다보았다. 큰 목련은 손사래를 치듯 잎사귀 몇 개가 흔들릴 뿐인데 창 앞에 선 이름 모를 나무는 몸을 못 가누는 취객처럼 온몸으로 흔들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잎사귀모양의 네 개의 흰 꽃잎을 달고 있다. 처음 보는 나무다. 이럴 때는 인터넷이 식물도감보다 훨씬 낫다. 봄에 피는 꽃으로 검색을 하니 산딸나무란다. 으흠..이것이 산딸기도 아니고 산아들나무도 아니고 산딸나무란 말이지. 나는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못미더워 몇 번씩 웅얼거리며 보던 시집을 다시 뒤적인다. 그런데 이 시인도 나와 다르지 않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제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시인이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아직 한 번도 물푸레나무를 본 적 없다는 사실에 동감한 것은 잠시였다. 물푸레나무는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그 물을 파랗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인은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도’모르는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또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다고 한다. 시인들의 비극적 세계인식으로 마음 아프고 싶지 않은 날이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은 것이 갖지 못할 빛깔이 되어 아주 슬픈 빛깔일수밖에 없다는 이 묽은 감정의 번짐을 비극적 세계인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 마음에 물푸레나무 빛 저녁 어스름이 번져오듯 가슴이 먹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