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사상을 하나의 냄새처럼 기꺼이 몸에 두른 것이다. 옛날 깊고 어두운 눈을 했던, 육체적으로 지나치게 우울한 느낌을 풍겼던 청년 시절에서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가 겪은 역경, 고뇌, 무엇보다 굴욕이 지금은 가슴을 펴고 아들의 광휘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혼다가 생각하기에 이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아들에게 맡겼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의 오랜 굴욕이, 권문에 맞서는 순결한 소년의 우렁찬 외침과 챙강거리는 검의 소리로 바뀌어. - P384

혼다는 이쯤에서 이사오에 대한 이누마의 진실한 말을 한마디 듣고 싶어졌다.
"이사오 군은, 당신이 마쓰가에를 가르쳤던 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던 가장 큰 꿈의 실현이라고 할 순 없을까요?"
혼다의 질문에 이누마는 "아뇨. 녀석은 그저 저의 아들일뿐입니다." 하고 잘라 말하고 기요아키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련님은 그런 생애를 보내신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하늘의 뜻에 맞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 - P384

부모인 제게도 뜻이 있습니다. 아니, 아들 이상의 우국충정이 있습니다. 저에게 모든 것을 숨기고 일을 벌이려 하다니, 정말이지 자식은 부모 마음을 모른다는 옛말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저는 늘 앞일을 내다봅니다. 결행하기보다도, 결행하지 않고 수확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5. 15 사건 때도 감형 탄원서가 쇄도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사람들은 분명 젊고 순진한 피고를 동정할 겁니다. 그건 거의 확실해요. 그렇다면 아들은 목숨을 잃지도 않고, 오히려 경험을 쌓고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다면 아들은 평생 가도 굶을 일이 없어요. 쇼와 신풍련의 이누마 이사오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세상의 경외를 받을 테니까요." - P388

혼다는 일단 아연했다. 아연함에 이어, 과연 그게 전부일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누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사오를 처음으로 구한 사람은 아버지고 이제부터 구하려고 하는 혼다는 말하자면 이누마의 의도를 실현하는 조수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판사직도 내던지고 무상으로 이사오의 변호를 맡은 혼다의 후의를 이렇게까지 저버리는 말은 없다. 또한 혼다의 행동에 깃든 품위를 이렇게까지 모독하고 유린하는 말도 없다. - P388

그러나 혼다는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변호하려 하는 것은 이사오이지 그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더럽혀져 있어도 그 더러움이 아들에게 미치지는 않는다. 이사오가 취한 행동의 청정한 동기는 조금도 흐려지지 않는다. - P389

그렇다 해도, 눈앞에 있는 이누마의 무례한 말에 조금 울컥했어야 할 혼다가 평정을 지킬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밀담이니 들어오지 말라며 종업원을 내보낸 이 작은 방에서 이누마가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한 뒤 털 많은 손가락을 떨며 서둘러 술을 따르는 모습에서, 혼다는 이누마가 결코 말하지 않을 어떤 감정을, 아마도 그가 아들을 밀고한 가장 깊은 동기를, 즉 아들이 곧 실현하기 직전이었던 피의 영광과 장렬한 죽음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질투를 읽었기 때문이다. - P389

줄지어 선 젊은 피고인들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고 늠름하고 맑은 이사오의 눈을 향해 혼다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사건소식을 들었을 때 더할 수 없이 어울린다고 느꼈던 그 부릅뜬 눈이 새삼 이 자리에 걸맞지 않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느껴졌다. - P447

‘아름다운 눈이여,‘ 하고 혼다는 외쳤다. ‘맑게 빛나며 늘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그 삼광 폭포의 물을 갑자기 맞는 것처럼 이 세상 것이 아닌 비난을 느끼게 하는 젊은이의 무쌍한눈이여. 뭐든 말해라. 뭐든 정직하게 말하고 마음껏 상처를 받아라. 너는 이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알아야 할 나이다. 뭐든 말하면 나중에 너는 ‘진실은 누구도 믿어 주지 않는다‘라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교훈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그 아름다운 눈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이다.‘ -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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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오와 흰 옷 행렬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혼다는 왜인지 자신이 이 어스레한 들판에 그려지는 그림에서 튕겨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발길을 조금씩 논 쪽으로 옮겨 볏단 사이를 나아가며 행렬에서 멀어졌다. 지극히 중요한 어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사오의 모습은 이제 선명하게 보였고, 그 가슴에 붉은 구슬 목걸이처럼 걸려 있는 나무 열매 같은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 P310

혼다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지금 거부할 수 없는 힘이 힘이 다가와서 자신의 이성을 때려  부수려 하고 있었다. 그 힘의 긴박한 숨결과 날갯짓이 벌써부터 느껴졌다. 예감이라는 것을 믿지 않지만, 사람이 자신의 죽음, 혹은 가까운 이의 죽음의 예감에 휩싸이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310

"큰일이군. 총까지 들지 않나, 가이도 선생님이 말한 대로야. 너는 난폭한 신이야. 틀림없어."

이 말을 들은 순간, 혼다의 기억이 비로소 무자비하게 명확한 형태를 띠었다. 지금 의심의 여지 없이 눈앞에 되살아난 것은 1913년 여름의 어느 밤, 마쓰가에 기요아키가 꾸었던 꿈의 광경이었다. 그 특이한 꿈을 기요아키는 꿈 일기에 자세히 적었고, 혼다는 바로 지난달에 그것을 다시 읽었다. 그 내용이 구석구석 생생하게, 혼다의 눈앞에서 십구 년이 지난 지금 이 세상의 일부가 된 것이다.
기요아키가 이사오로 환생했음을 설사 이사오는 모를지라도 혼다는 이성의 힘을 모조리 동원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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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하라는 말하자면 이 나라의 땅과 피와는 관계가 없는 지성의 악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닌지, 이사오는 구라하라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데도 그 악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P280

오직 영국과 미국만 신경 쓰며 일거수일투족에 색기가 스미고 낭창한 허리로 걷는 것 외에는 재주가 없는 외무성 관료, 사리사욕의 악취를 풍기고, 땅바닥의 냄새를 맡으며 먹이를 찾아다니는 거대한 개미핥기 같은 재계인들. 스스로 부패덩어리가 된 정치인들. 출세주의의 갑옷을 두르고 딱정벌레처럼 꼼짝 못 하게 된 군벌. 안경을 쓰고 축 늘어진 하얀 구더기같은 학자들. 만주국을 첩의 자식 보듯이 하며 벌써부터 이권다툼에 손을 뻗는 사람들. 그리고 거대한 빈곤은 지평선의 아침노을처럼 하늘에 비쳐 든다. - P281

구라하라는 이런 비참한 풍경화의 한가운데 차갑게 놓인하나의 검은색 실크해트다. 그는 무언으로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고 그것을 찬양했다. - P281

서글픈 해, 희고 쌀쌀맞은 태양은 한 줄기 빛의 은혜도 주지 못하고, 그럼에도 아침마다 근심스럽게 떠올라 하늘을 돌았다. 그것이야말로 폐하의 모습이었다. 태양의 기쁜 얼굴을 다시금 우러러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 P281

그렇다면 순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암살자 명단에서 구라하라만을 제외하는 것? 아니, 그러면 내가 불쌍한 효자 아들이 되기 위해 일국의 독을 못 본 척하고, 폐하를 배반하고, 나아가 자신의 진심을 배반하는 꼴이 된다. - P282

생각해 보면 구라하라를 잘 모를수록 이사오의 행위는 정의에 가까워지는 셈이었다. 구라하라는 되도록 멀리 있는, 추상적인 악이어야 했다. 은혜와 원한은 물론이고 살아 있는 그에 대한 애증마저 희박한 곳에 비로소 살인이 정의가 되는 근거가 존재했다. 그는 그저 멀리서 그 악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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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그렇다면 묻겠는데,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이번에는 이사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 중위를계속 똑바로 쳐다보던 눈길이 그에게서 잠시 벗어나 비 얼룩이진 벽에서 꼭 닫힌 불투명유리 창 쪽으로 옮겨갔다. 시야는거기서 막히고, 비가 촘촘한 유리창살 너머에서 한없이 낮게깔렸음을 알 수 있다. 창문을 열어도 비가 끊기는 경계는 결코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사오는 이곳에 없는, 훨씬 멀리있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 P160

"태양이・・・・・・ 동이 트는 낭떠러지 위에서, 떠오르는 해에 기도하고…………… 반짝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고상한 소나무 나무 밑동에서.... 자결하는 것입니다." - P160

"하지만" 하고 이사오는 이즈쓰의 마음에 그 경신이 스며들 때까지 충분히 기다린 후 말했다. "폭탄은 일종의 비유야.
신풍련의 우에노 겐고가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소총 같은 거야. 결국에는 오직 검이야. 그걸 잊지 마. 육탄과 검뿐이라고."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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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의 우익활동과 할복은 어러모로 한국사람인 나에게 껄끄럽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첫권이었던 《봄눈》에서는 아름다운 청년 기요아키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사랑과 미문에 힘입어 거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두번째권 《달리는 말》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는
이사오를 지키고 싶어하는 혼다의 바람은 이뤄지기
싶지 않아 보인다.
순수를 맹목적으로 갈망하는 그 열정이 무모해 보이고 내가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할복이라는 자살이 등장하는 ‘신풍련사화‘라는 봉기가 작품 전체의 중요 소재로 작용한다.

˝태양이...... 동이 트는 낭떠러지 위에서, 떠오르는 해에 기도하고...... 반짝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고상한 소나무 나무 밑동에서 ...... 자결하는 것입니다.˝ (160쪽)

불과 19살의 청년이 세상의 부정을 폭로하고 척결하고 싶어하는 열정은 아름답지만 그 끝이 어째서 할복자살이란 말인가!

순수란 꽃 같은 관념, 박하 맛이 강한 양치액 같은 관념, 자상한 어머니의 가슴에 매달리는 듯한 관념을 서슴없이 피의 관념, 부정을 베어 쓰러뜨리는 칼의 관념, 대각선으로 내리치는 동시에 튀어 오르는 피바람의 관념, 또는 할복의 관념으로 이어 주는 것이었다. ‘꽃처럼 지다‘라고 할 때, 피범벅이 된시체는 곧 향기로운 벚꽃으로 변한다. 
순수란 얼마든지 정반대의 관념으로 전환된다. 그러므로 순수는 시(詩)다. - P152

이사오에게 ‘순수하게 죽는다‘라는 건 오히려 쉽게 느껴졌는데, 순수를 관철하려 할 때 예를 들어 ‘순수하게 웃는다‘는어떤 것일지 고민스러웠다. 감정을 아무리 제어하려 해도 그는 가끔 시시한 광경에 웃음이 나왔다. 길가에서 강아지가 나막신을 가지고 놀고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이상할 만큼 큰 하이힐을 물고 와서 휘두르며 놀고 있는 걸 보았을 때도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런 웃음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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