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하라는 말하자면 이 나라의 땅과 피와는 관계가 없는 지성의 악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닌지, 이사오는 구라하라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데도 그 악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P280
오직 영국과 미국만 신경 쓰며 일거수일투족에 색기가 스미고 낭창한 허리로 걷는 것 외에는 재주가 없는 외무성 관료, 사리사욕의 악취를 풍기고, 땅바닥의 냄새를 맡으며 먹이를 찾아다니는 거대한 개미핥기 같은 재계인들. 스스로 부패덩어리가 된 정치인들. 출세주의의 갑옷을 두르고 딱정벌레처럼 꼼짝 못 하게 된 군벌. 안경을 쓰고 축 늘어진 하얀 구더기같은 학자들. 만주국을 첩의 자식 보듯이 하며 벌써부터 이권다툼에 손을 뻗는 사람들. 그리고 거대한 빈곤은 지평선의 아침노을처럼 하늘에 비쳐 든다. - P281
구라하라는 이런 비참한 풍경화의 한가운데 차갑게 놓인하나의 검은색 실크해트다. 그는 무언으로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고 그것을 찬양했다. - P281
서글픈 해, 희고 쌀쌀맞은 태양은 한 줄기 빛의 은혜도 주지 못하고, 그럼에도 아침마다 근심스럽게 떠올라 하늘을 돌았다. 그것이야말로 폐하의 모습이었다. 태양의 기쁜 얼굴을 다시금 우러러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 P281
그렇다면 순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암살자 명단에서 구라하라만을 제외하는 것? 아니, 그러면 내가 불쌍한 효자 아들이 되기 위해 일국의 독을 못 본 척하고, 폐하를 배반하고, 나아가 자신의 진심을 배반하는 꼴이 된다. - P282
생각해 보면 구라하라를 잘 모를수록 이사오의 행위는 정의에 가까워지는 셈이었다. 구라하라는 되도록 멀리 있는, 추상적인 악이어야 했다. 은혜와 원한은 물론이고 살아 있는 그에 대한 애증마저 희박한 곳에 비로소 살인이 정의가 되는 근거가 존재했다. 그는 그저 멀리서 그 악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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