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난 겨울이 2월의 마지막 날에 끝난다고 믿었다.
2월 28일. 가끔은 2월 29일.
아무리 춥거나 눈이 와도 2월이 지나면 그건 겨울이 아니지.
아닌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 P8

나는 얼음 위를 걸어본 적이 있다.
오직 겨울에만 볼 수 있다고 니가 말했다.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고서는 갈 수 없는 어떤 바위 아래를, 물이 얼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얼음 위를 걸어서.
나는 너의 신발에 발을 넣어볼 것을 모른 채, 너를 따라언 강 위로 올라갔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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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말했다. "난 안돼, 실은 루디에게 할 말이 있었어. 강 너머 카페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가서 기다릴 필요 없다는 말 좀 전해 주지 않을래?"
루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서 도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크는 말했다. "그 친구에게 예의는 지켜."
루디는 여전히 묵묵부답인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 P305

자크는 말했다. "가봐, 난 호텔에서 기다릴게."
사라는 말했다. "난 집에 갈 거야."
자크는 호텔의 캐노피로 갔다. 사라는 루디와 둘이 남았다.
"정말 내가 가길 바라?"
"네가 가지 않을 이유가 없어."
"내가 가서 뭘 어떻게 설명을 해."
"설명하고 말 것도 없어. 널 보면 바로 이해할 테니까."
"만나러 가고 싶었잖아. 그것도 아주 많이."
"이젠 상관없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걸."
루디는 말했다. "그럼 내가 갈게."
그는 부교에 발을 들였다가 다시 사라에게 다가왔다.
- P306

그는 말했다.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사공은 끈덕지게 기다렸다. 루디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루디는 말을 이었다. "타키니아에 들르면, 아니다. 나도 같이 가야겠다." 그는 부정적으로 덧붙였다. "가이드들이 게을러서 아무래도 작은 말들을 안보여 줄 것 같거든. 가이드가 보여주지 않아서 그걸 못 보
면, 거긴 가나마나야."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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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우 작가의 단편집.
3편의 단편과 작가의 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한 편의 에세이가 실려있다.
책은 작고 귀엽고 표지는 스카이 블루에 초록 잎 하나, 그리고 낙타 한 마리.
이 책에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초록 고래, 푸른 색 돌, 하얀 눈, 그리고 다시 초록...

♧초록 고래가 있는 방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문을 두드리면, 계속해서 두드리면... 열리지 않을까? 새벽 세시, 내가 문을 두드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찾는 이는 바로 윗집 여자였다. 일주일 전부터 내 방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는데, 윗집 여자는 줄곧 부재중이었다. 그 바람에 일주일간 전등도 켜지 못했고 방 안이 온통 곰팡이로 뒤덮이는 끔찍한 악몽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조금 전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나오는 길에 나는 우연히 보았다. 빌라 꼭대기 층, 그러니까 내 윗집의 얇은 속 커튼 사이로 환한 빛이 구원처럼 흘러나오는 모습을. - P9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범인은 근처에 있다
빌라 CCTV 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추적추적 비 내리는 여름밤, 나는 빌라 화단 앞에서 집주인 겸 빌라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사고 났어요?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지 집주인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장국영이 사라져서요. 장국영이 사라졌다고요? 아, 제가 기르는 야자나무 이름이 장국영입니다. 그러자 아이씨...… 하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알겠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합시다. 전화를 끊고 확인해보니 새벽 한 시였다. 이런. - P51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오사카, 하고 영하 언니가 말했을 때 나는 
세 번째 샷을 내리는 중이었다. 
주영, 나랑 오사카에 가자.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오사카 근교에 있는 작은 고등학교 운동장. 삼 년 전 그곳에서는 한일 고교 친선 축구대회가 열렸고, 후반전 사십 분에 한국 팀이 한 골을 넣으면서 승리했다. 기념으로 학교 뒤뜰에 무릎 높이의 플라타너스 묘목을 한 그루 심었는데, 얼마나 자랐으려나. 어쩌면 어깨까지 자랐을지도.
- P105

♧초록은 어디에나
‘초록은 어디에나‘는 오래전 겨울밤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떠올린 문구이다. 
어두운 외투를 걸치고 거리를 걷다 보니 문득 초록이 보고 싶었다. 환한 초록, 자라나는 초록, 우글거리는 초록. 초록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에게 초록은 따뜻한 슬픔의 색.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 빛이 한 줄기 섞인 푸르름. 
그러나 나는 질문하는 동시에 답을 알고 있다.
초록은 어디로 가는 법이 없다. 초록은 어디에나
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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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이야기가 절대 멈추지 않기를
페미니즘이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방식이 매번 충격적인사건 하나가 터지고 떠들썩한 반응이 이어지는 식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단 한명의 가해자, 단 하나의 사건에만 초점을 맞춘다.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가 일상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건은 법칙이 아니라예외일 뿐이라는 주장에 맞는 서사를 짜내고, 인간의 탈을 쓴악마의 행동일 뿐이라 결론짓고 넘어가려 한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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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오전 열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은 한결같은 무더위가 느껴졌다. 휴가를 보내려고 이곳에 와 있다는 걸 떠올리는 데는 늘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자크는 아직 자고 있었고, 가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사라는 부엌으로 가서 식은 커피 한 잔을 들이켠 뒤 베란다로 나갔다. 늘 제일 먼저 일어나 있는 건 아이였다. 아이는 베란다 계단에 홀딱 벗고 앉아, 정원을 기어다니는 도마뱀들과 강에 떠다니는 보트들의 움직임을 번갈아 지켜보고 있었다.
"모터보트 타고 싶어."
아이는 사라를 보자 말했고, 사라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아이가 말하는 모터보트의 주인은 이곳에 온 지 엿새밖에 되지않은 남자였다. 아직 누구도 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라는 아이에게 모터보트를 태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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