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도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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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 믿고 보는 작가 박경리 선생의 <표류도>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토지> 전 권을 읽은 것, 그리고 <파시> 정도가 내가 읽은 박경리 선생의 작품이었다. 너무도 오래전 까마득한 시간 속에 <토지>라는 작품이 자리잡고 있어서 내가 <토지>와 <파시>를 읽었단 사실 외에 나머지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이 <표류도>와 <애가>를 선물 받았다. <애가>와 <표류도>는 박경리 컬렉션으로 '다산책방'에서 발간하고 있다. 책 날개의 정보를 확인해보면 총 16권으로 기획이 되어 있는 듯하고 그 중 현재 <김약국의 딸들>, <애가>, <표류도>의 3권이 발간이 되었다.

<김약국의 딸들>은 지난 번 <토지> 전집 발간 펀딩에 참여했을 때 우연찮게 1권이 페이지 오류가 발견이 되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받았고(아직 읽지 않음), 나머지 두 권은 출판사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기대하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믿고 보는 작가라고 했지만 사실 읽은 책이라곤 <토지>, <파시> 뿐인지라 작가의 다른 책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상태였다.



먼저 읽게 되었던 <애가>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양공주' 전력이 있었던 '진수'라고 보았다. 1950년대의 여성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이중적인 잣대로 여성을 평가했던 당시의 윤리 의식이 여성을 얼마나 억압하면서 고통 속에 빠지게 만드는지, 또 속물적인 사고로 위장한 과도한 관심과 공격이 '진수'와 '민호',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인 '현회'와 '정규'라는 인물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신물이 올라오기도 한다. 현실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왜 그리 남의 사랑에 관심들이 많으신지.... 이 작품은 현대의 멜로 드라마와 같이 '양공주'라는 자극적인 소재, 삼각관계(진수와 민호, 그리고 민호의 아내인 설희)에 불륜 로맨스가 등장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낭만성을 확보하면서 결국 사랑을 완성하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표류도>의 주인공인 '현회', 이 느낌 있고 개성적이며 특이한 이름은 <애가>에서도 등장을 해서 이것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애가>에서는 민호의 지도 교수의 부인으로, 그리고 민호와 결혼한 설희의 오빠이자 민호의 의대 동기이며 절친인 오정규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나온다. 지고지순한 둘의 사랑은 웬지 모르게 불륜인데도 응원을 하게 되는 힘을 지녔다.



아무튼 <표류도>의 현회는 's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인텔리 여성이지만 지금은 사생아로 낳은 딸 훈아, 어머니, 그리고 배다른 동생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이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사랑했던 찬수와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결혼식을 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임신을 한 상태였고, 그런 찬수가 전쟁의 와중에 비극적인 사고로 죽고 사생아인 '훈아'를 홀로 낳는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1950년대라는 시대 상황에서는 현회에게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요소인 것이다. '현회'로서는 의도하지 않은 불가항력의 요인이지만 어느 누가 그런 걸 신경쓰면서 욕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현회'라는 여성은 그러한 외부의 통상적인 윤리라든가 여자로서의 규범에 대해 대범하면서도, 지식인 여성으로서의 논리로 무장한 용감성을 발휘한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강한 책임 의식도 가지고 있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애정을 가지고 도우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그러한 그녀를 따듯하게 배려하는 시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로 번번히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녀는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 '마돈나'라는 다방을 열고 다방 마담이 되었던 것이다. '다방마담'이라는 직업으로 인하여 또 다른 남자들과의 만남을 야기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불가피하게 아름다운 만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그녀에게 크나큰 불행을 안겨주는 인물과의 만남도 예비하게 된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상현. 그는 신문사의 논설위원이며 저명한 집안의 자제이다. 역시 저명한 집안의 영애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다. 그는 다방 마담이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내면을 알아본 것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상현은 그녀가 다방 마담을 그만 두고 그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현회'는 그와의 사랑을 키워나가며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지 않는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 - 그녀는 언젠가 닥쳐올 그와의 이별을 기다린다. 자신 스스로는 그와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신문사 논설위원이라는 - 노동을 하고 있듯 -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다방마담'이라는 노동을 통하여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의무를 저버릴수가 없다. 그녀의 절박함을 그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비극은 이미 내포가 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그런데 이 샌님, 살아오느 내내 어려움이라곤 하나도 모르고 살아서 그런가 진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정면 돌파가 아니라 도망을 간다. 그가 만난 최고의 어려움은 '현회'가 다방마담을 그만두고 자신과 결혼하자는데도 거부하는 것이겠지. '다방마담'과 결혼하려고 자신의 가정을 깰 용기는 있으신지 묻고 싶다. 아무튼 도망을 갔다. 내가 보기엔 두 번이나...! 그러니 정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늘 ;'현회'의 곁에 없다. 이러니 믿고 의지할 수가 없는 거다.



그녀 주위의 또 다른 인물인 '환규'는 찬수의 친구이자 현재는 출판사 사장으로서 그녀에게 항상, 늘 의지가 된다. 그녀가 선생을 그만뒀을 때 일본어 원고의 번역을 의뢰하면서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금전적, 감정적 도움을 주는 존재이며 그녀를 사랑한다. 사실 '현회'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유일하게 '환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몰론, '현회'가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면 '환규'와 같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환규'는 '현회'가 죄를 짓고 수형생활을 하는 중에도 변함없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그녀의 곁을 지킨다. 역시 의리의 상남자라 믿음이 간다. 이 둘의 앞날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뿐. 



여기에 가장 비열하고 혐오스러운 인물은 대학 강사이면서 실력은 없어 제자들로부터 '대가리가 콘크리트'로 놀림을 당하는, 번드르르한 외모의 '최영철'이 있다. '마돈나'의 손님이면서 '현회'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런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무시를 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신은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 지극히 속물적이고 돈만 밝히는 수전노이면서 뭇 여성들을 갈취하고 다니는 사기꾼이다.  아무 관심도 없는데 자꾸 '현회'에게 되지도 않게 수작을 건다. 남들은 그의 비열함을 다 아는데 자신은 안 그런 줄 아는, 파렴치한으로 인하여 '현회'가 살인이라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죄를 짓게 되는데 아주 공헌을 하는 인물이다. 의도치 않은 한 번의 실수로 살인자가 되는 '현회'의 고난이 왜 이다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할 뿐 그가 죽은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드라마 보면서 "저런 놈은 죽어야 혀, 잘 죽었어. 죽어도 싸지!" 하고 외치게 만드는 인물이다.  

 


'현회'라는 인물은 그 당시의 여성상으로서는 드물게 용기있고 강단있는 여성이 아닐까 싶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넘어지지 않고 스스로 의지를 다지면서 꿋꿋하게 가족을 부양하고자 다시 일어선다. 이는 그녀와 어머니를 버리고 떠돌면서 배 다른 아이를 낳아 그녀의 어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긴 그녀의 아버지, 그녀가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어 대학을 졸업하였으나 사생아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을 당하게 하는 사회 규범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칭송 받아 마땅한 자질을 지닌 여성이 아닌가 말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을 버리고 유랑하는 무능력한 남자였던 아버지는 누구도 욕하지 않는다. 사회 규범을 들먹이면서 한 때 시기를 잘 만나 거대한 부를 이루고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리의 이자를 챙기는 그녀 주위의 친구들, 대학 강사라는 허울로 어렵게 모은 작은 돈을 등쳐먹는 '최영철'이라는 남자는 그럼에도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며 다시 다른 사람을 등쳐먹을 궁리에 몰두한다. 심지어 외국인을 '마돈나'에 데리고 와 가만히 있는 '현회'를 희롱한다. 이 인간이 하는 말만 들어도 이후에 하게 되는 '현회'의 행동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차라리 현회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극이며 그건 그저 비극을 잠시 유예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스터 스미스, 그렇게 그 여자가 욕심이 나요?"

      최 강사의 서툴지 않은 영어가 귀에 흘러들어 왔다. 이방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참 아름답소. 눈이 신비하고 슬픔에 젖어 있소."

     "스미스가 외로워서 그렇게 보이는 거요. 여자란 돈과 권력이면 정복되는 동물이 아니오?"

     "저 여자도 돈과 폭력이면 그만인가?"

     "물론."


     "흐음? 그렇다면 문제는 달라지겠는걸. 그럼 스미스는 날 도와주겠소?" 

     "아암, 돈 많이 주겠소."

     "안 돼, 그건. 일전에 내가 부탁한 일 들어주어야 돼요. 스미스, 사실 저 여자는 말이야. 내 것인데 조건에 따라 양보할 수 

      도 있어. 여자를 갖는 데는 낭비가 심해 골치야, 하하핫!"


     "이런 곳에 있는 여자는 레이디가 아니니까 손쉽고 또 뒤가 귀찮지 않거든 ..."



박경리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여성상은 한결같이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 나아가고 절망 속에 매몰돼 있을지라도 어느 순간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능동적인 인물들이다. 이 작품의 '현회'는 물론이고 <애가>에서 보았던 '진수'와 또 다른 '현회' 그리고 <토지>의 서희 아가씨까지. 그리고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자식을 부양하기 위하여 더 열심히 창작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던 작가 박경리 자신까지도. '현회'라는 여성 안에 작가 박경리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멋진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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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05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김약국의 딸들도 새로 나왔더군요 영화 ‘표류도‘는 원작과 결말이 다르더라고요 뭐 가능한 하나의 가정인데요 소설과 다른 평행우주가 펼쳐집니다 소위 통속소설이라지만 남다른 여주인공이라서 역시 박경리의 작품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가는 잘 기억 안 나는데 동명이인 현회에 대해서 함 찾아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은하수 2023-12-05 14:32   좋아요 2 | URL
영화는 다른 결말이군요! 맞아요. 엄밀히 살피면 통속소설이죠. 신문연재 소설이니 순수소설이기는 아마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박경리 선생은 돈을 벌어야했고 이 소설이 작은 발판이 되어주기도 했다니까요.
그런점에서 작가와 주인공이 일맥상통하기도 한거 같아요.
애가에선 현회와 정규, 표류도에선 현회와 환규~~
남자이름도 비슷해서 웃음 났지 뭐예요^^

서니데이 2023-12-05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수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은하수 2023-12-05 23:05   좋아요 1 | URL
어이쿠... 이런..
제가 좋아서 하고 서니데이님 비롯해서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축하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넘 감사합니다~~^^
남은 2023년의 시간 내내 책과 함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