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찾아온 불안이 머릿속에서 허겁지겁 많은 일을 하기 시작한다. 잡다하게 떠오른 생각들을 하나의 문장들로 순식간에 엮어낸다. 몰아친다고 해야 적당할까. 아이디어와 낱말 등이 비약적으로 연결되고 내가 관여한 여러 모임의 방향성과 앞으로 할 일까지 쓸데없이 생각하느라 뇌 공장이 멈추지 않는 것 같다. ‘이건 불안, 바로 너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어. 사실 너는 잘못이 없어. 중요한 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해서 거기에 대비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잖아. 그래 너는 지금 내게 분명한 동력을 제공하고 있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 뇌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려고 마구 돌아가는것 같은데 난 좀 버거워.‘ - P78
버스를 기다리면서 내가 막 뿌려놓은 글을 역순으로 쭉 읽어봤는데 어쩐지 뿌듯했다. 몇 해 전 혐오 세력들에게 표적이 되어 내 모든 트윗이 탈탈 털리고 공격을받았다. 그렇게 내 트윗을 집요하게 모아서 뿌리고 공격했던 이들은 지금 다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이것 봐, 나는 아직도 시시껄렁한 트윗을 마구마구 올리는 트잉여인 것이다! 나의 승리라고. 하하하하하하. 유치하다고? 유치하라지. - P80
어떤 직업이든 이런 종류의 다정함 뒤에는 자신감과 실력이 있는 것 같다. 교사도 그렇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터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어내야 하는 학생들 곁에서 나는 다정한 교사이고 싶다. 실력을 갖추고 힘을 빼고 싶다. 학생들이 아파하면 그저 ‘미안한 마음으로 곁에 있어주고 싶고, 작은 일도 크게 격려하느라 호들갑스럽고 싶다. 마취가 풀려간다. 너무 아프다. 진통제를 먹어야겠다. - P93
-길이 난 것이다. 경기도교육연수원이 교사 자격연수 온라인 강의를 위해미리 배포한 교재에 나에 대한 온갖 루머의 종합 격인원고가 실렸다.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왜곡과 편견, 힘*오를 부끄러움도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낸 글이었다. 이걸 정정해보겠다고 거대 언론사와 2년을 싸워 승소를 하고 이를 증언한다고 용기 내 방송에까지 나갔건만, 그 먼길을 돌고 돌아 내가 봐야 하는 것이 당시의 조선일보]보다 더 신이 나서 지껄이는 이 따위 글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것도 1급 정교사 자격연수라는 공인된국가연수프로그램에서. - P94
상당한 스트레스가 있었어도 이번 일은 그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 사회의 성평등을 가로막는 수많은걸림돌과 장벽들 사이에서 많은 교사들이 어떤 길을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대는 우왕좌왕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각자 노련한 업무 담당자처럼자기 할 일을 하면서 빠르게 연결되어 연대를 형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수원의 시정 조치가 반드시 뒤따르게해야겠지만 설령 결과가 그에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것만으로도 작은 승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길이 난것이다. 분명히 없던 길이었는데. 이번 연대의 ‘길‘을 보고 그 위를 걸으며 다행히 나는 희망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냉 소로 점철된 삶으로 내 삶의 무게가 이동할 것 같지 는 않다. - P97
페미니즘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일상과 교실을 꼼꼼하게 다시 뜯어보았다. 김승희의 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에서 말하는 ‘당연의 세계‘와 ‘물론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 속에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향한 차별과 혐오의 반복된 역사를 공부하고 그것이 여전히 현실에 존재함을 깨닫는 일은 차라리 놀랍지 않았다. 내가 그 모든 일에 그렇게까지 무신경하고 무지한 채로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에 비하면 그 깨달음마저도 나 혼자 했다기보다 시대가 한 일이었다. 공용화장실에 숨어 남자 여섯 명을 보내고 기다렸다가 여성이 들어오자 무참히 살해한 사건을 검경 및 언론에서 여느 때처럼 ‘묻지마살인‘으로 명명하자,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나와 피해자를 추모하며 ‘여성혐오범죄‘에 대한 사회적책임을 성토하게 된 시대였다. 미투운동의 물결이 일고수많은 용기가 서로 교차하고 연결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나는 내 시대에 감사했다. -페미니즘 교육 중에서 - P100
-분투 우울증을 앓으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문장이 그냥 흩어져버려서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짧은 글도 힘들어서 읽은 문장을 또 읽고 또 읽고 하다가포기했다. 그러다 한두 달 전부터 책이 읽혔다. 문장과문단을 넘어 무려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것 같았지만 내가 정말 이걸 하나 싶어서 책을읽는 나를 계속 관찰했다. 예전의 읽기를 빠른 걷기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재활치료 중 걷기다. 속도도 느리고 읽었던 문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 또 읽어야 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높고 험한 산 오르듯 넘었다. 몇 걸음 올랐다가 잠깐 쉬고 다시 일어나 걷듯, 문장들 사이에서 숨을골랐다. 답답하지만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서 나에게는 그게 너무 희망찼다. 회복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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