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읽지 않던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읽었다. 중학생들의 '왕따'라는 소재를 택한 면에서는 얼마 전 읽었던 <우아한 거짓말>과 유사한 면이 있었으나, <우아한 거짓말>이 학생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보다 많은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책은 학교 내 남학생들의 힘의 권력관계나 중학교라는 작은 사회의 구조적 측면에 대하여 더 많은 할애를 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터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소설의 흐름은 나구라 유이치라는 소년의 실족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변인들의 상황을 다면적인 관점에서 묘사함으로써 한 사건의 원인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인 잘못이나 기여를 한 것으로 단순화 할 수 없으며, 복합적인 관련성과 각자 나름의 관점이 있기 마련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왕따를 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싼 이들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학생들 사이에서의 관점이다. (1) 오해를 받을지언정 끝까지 침묵을 지키려는 소년들, (2) 자신의 과오를 숨기려는 소년들, (3) 소년의 왕따를 제3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학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번째는 학교와 학부모들 사이에서의 관점이다. (1) 유가족과 가해 학생들, 그리고 그 외의 학생들의 입장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교장 이하 학교 교직원들, (2) 자기 자식은 절대 가해학생일리가 없다고 믿으며 끝까지 대응하는 학부모, (3) 하나뿐인 외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그래도 죽음에 이르게 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유가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번째는 학교와 학생들을 둘러싼 지역 사회의 관점이다. (1) 학교폭력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사건에 매달리는 경찰과 경찰과 협력하여 진실을 파해치려는 검찰, (2) 작은 마을 내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입장 정리가 어려운 지역 사회, (3)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되 이 사건이 잊혀지지 않도록 보도하려는 언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들을 보고 있노라면 각각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내가 이 입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유가족의 절망과 가해자 가족의 결백이라는 대립 구조에서는, 진실을 알기 위해 과도한 요구를 하는 유가족의 입장도, 이를 우선적으로 수용하려는 학교측도, 이에 반대하여 가해학생이 아닌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학부모들도, 뚜렷한 증거 없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해자 가족의 입장도 잘 드러나 있다. 누구라도 이 중 어느 입장이라도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고 최적의 태도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사망한 학생인 나구라 유이치를 순진하거나 선한 이미지로 묘사하여 흑백을 강렬히 대비한 것이 아니라, 힘 없고 나약하여 비굴한 면모를 보이는 한편 더 약한 자에게는 힘을 행사하거나, 남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집안의 부(富)를 과시하거나, 눈치 없이 비밀을 폭로하여 친구들이 곤경을 겪게하면서도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고, 자신이 왕따를 당하면서도 딱히 힘들어하지 않는 인물로 묘사해 흑백을 여러차례 혼재시키고 있다. 비록 순간적으로나마 '저러니까 따 당하지', '저러면 맞을만 하지', '우리 때도 저랬지' 라며 폭력을 정당화 하며 책을 읽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내 안에 아직도 깃들어 있는 폭력과 그에 대한 정당성은 지금껏 관성적으로 대해왔던 이 사회에서의 왕따나 폭력에 대해 다른 시선도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결론부분에서는 딱히 놀랄만한 반전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반전이라기 보다는 그동안 여백 속에 감추어져 있던 추가적인 사실들을 통하여 이 소년의 죽음에는 많은 원인들에 대하여 다시 한번 조망한다. 마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들에게 과연 누구를 비난하며 누구를 옹호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덧1: 왜 작가는 제목에 '町'자를 썼을까. 그리고 번역자는 '밭두렁' 혹은 '경계'라는 뜻을 왜 '거리'로 번역했을까?


덧2: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 소설의 경우 일관되게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성(이치가와)을 어떤 때는 이름(겐타)을 쓰기 때문에 유사한 이름이 나오면 곧잘 헷갈리곤 한다. 게다가 부부가 같은 성을 쓰는데 아이까지 겹치면... 그래서 가끔 이런 식의 관계도를 그려보곤 하는데, 귀찮지만 읽으면서 그때그때 추가를 하고 읽다가 '이 사람이 누구지?'라는 의문이 들면 관계도를 보고 이해할 수 있어서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에는 도움이 된다. 이걸 그리다가 도저히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한 책이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이었는데, 책 어디쯤에 아직 이런 쪽지가 숨어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터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7쪽(작가의 말)

중학생은 잔인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시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잔인함은 혼자 서는 과정에서 터지는 고름 같은 것이다. 다들 더는 어른들에게 울면서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들끼리 생존 게임을 시작한다. - 70쪽

"어른 이라면 눈을 돌리고 안 보면 그만아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 혼자라는 선택지가 없어. 중학생이란 생물은 연못 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라, 모두 같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어." -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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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23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저도「대망」 읽을 때 관계도 그렸어요.. `마쓰다이라 타케치요`에서 `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기까지 1명당 평균 3번은 이름이 바뀌니...ㅜㅜ

붉은눈 2016-08-23 20:12   좋아요 1 | URL
아, 저는 <대망> 조금 읽다가 복잡해서 접어 두었는데 다시 펴볼 엄두는 안나고 시간만 가네요. 이번에 다시 도전할 때는 이런 방식을 써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거서 2016-08-23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장인물 관계도를 그리면서 봐야 하는 책이군요… 아이디어 하나 얻었습니다. ^^

붉은눈 2016-08-23 20:37   좋아요 1 | URL
저는 외국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읽다보면 누가 누구였는지 헷갈리더라구요. 그렇다고 대충 대상과 내용을 추측하며 읽고 싶지는 않아서 이렇게 한번 그려봤습니다.

오거서 2016-08-23 20:41   좋아요 1 | URL
저도 외국이름 난맥이 심합니다. 앞으로는 붉은눈 님의 아이디어를 빌어 저도 대충 읽지 않고 관계도를 그리면서 제대로 읽어볼 수 있겠습니다. ^^

가오리 2016-08-24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추리소설 좋아하는데..처음엔 단순히 이름 기억을 위해(부부이 성이 같으니 정말 헷갈렸어요.이건 번역가들이 조금 신경써주셨으면 좋겠던데...) 그린 관계도가 나중엔 정말 관계를 알고 흐름을 알수있는 맵이 되더라고요.
모방범다시 도전해보세요 이정도의 열정이라면!!

붉은눈 2016-08-24 21:21   좋아요 0 | URL
아, 이미 이런 경험이 있으시군요. 맞습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부부는 물론 아이의 성까지도 같은데다가, 단순히 공식적인 관계에서만 성을 쓰면서 ~씨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윗사람이 아랫사람 대할 때나 그리 친하지 않은 관계 혹은 거리를 두고자 할 때는 성을 쓰고, 친한 친구들이나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끼리는 이름을 부르니 인물이 많아지면서 혼란이 거듭되더라구요. 막상 이 책을 읽고 모방범을 떠올리기는 했는데, 그 두꺼운 책 3권을 이렇게 다시 읽으려니 엄두가 안나긴 하네요. ^^
 
인생 독해 - 나의 언어로 세상을 읽다
유수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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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저자의 책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를 읽은 후, 나와는 안맞는 것 같아서 앞으로 그의 책은 다시 읽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옆에 놓인 <인생 독해>라는 제목을 보고는 매우 신기한 생각이 들어 책장에서 책을 뽑았다. 경험상 '인생' 운운하는 제목이 달린 책치고 제대로 된 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영문 독해'가 아닌 '인생 독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가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첫 장을 펴니 책 날개에 적힌 자기소개가 이렇다.


"앵무새처럼 배운 대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거부하며 유아독존으로 버티던 시절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책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유일한 취미는 책읽기다. 삶이 힘들거나 고민이 있을 때에는 책을 잔뜩 쌓아놓고 잠수를 탄다. 주입식 독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대로 읽고 이해하고 현실에 접목하고 응용하는 실전형 책읽기를 추구한다. (...) 길들여지지 않은 자의 시선으로 책을 읽고, 그 내용과 인물들을 흡수함으로써 삶에 대한 통찰과 다양한 전략들을 발견하고 스스로 학습한다." (이하 ""는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한 부분임)

이런 자기소개를 보고는 기가 막혔다. 그의 이전 책에서 나는 단 한 페이지도 20대들에게 '책을 읽어라'라고 조언했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오로지 독하게 살아남기 위하여 어떻게 정신적인 무장을 하고 어떻게 질러버려야 할 것인가를 설파했을 뿐이다. 그런데 원래 책읽기가 자기의 취미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는 것을 추구한단다. 내가 얼마전 읽은 저자의 책이 2008년 출간된 것이었고, 이 책이 2015년 출간되었으니, 7년 사이에 무슨 큰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의 삶의 궤적을 잘 추적하지 못한 과문함 때문에 그를 잘 모르는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을 보니 유수연은 어느덧 이지성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

"만약 당신이 혁신과 창업을 꿈꾸고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길 꿈꾸고 있다면
지금 당장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영어 공부나 자격증 취득이 아니라,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다."

어조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전 책에서 웰빙에 물든 20대를 나무라던 그는 매우 놀랍게도 "이제는 우리도 이 느림의 미학과 우회의 원리를 깊이 배워야 할 때"라고 말한다. 본문에서는 '사토리 세대'를 언급하며, "사토리 세대는 최소한 그들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현대판 이방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기성의 가치관이나 무의미한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이다"라며 긍정적인 시선까지 보낸다. 이에 대한 변(辨)은 프롤로그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읽어봐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이 그가 그렇게도 강조했던 '노력'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버린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책이 사람들에게 자기계발과 성공을 강요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커졌다. 나의 글과 그 안에 담긴 독설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초라한 과거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로 전진하라는 채찍질어었다. 그런데 그 독설이 나를 넘어 다수를 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어느새 왜 그러한 독설의 언어로 살아왔는가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이 시대의 성공 원리만을 설파하는 상징이 된 것 같다. (...) 나도 다시 태어나 지금의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면 자신이 없다. 그런데 누구에게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너의 노력 끝에는 반드시 달콤한 열매가 열릴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본문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다. 도대체 저자는 얼마나 살벌한 세상을 살아왔기에 여전히 이 세상은 정글이며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곳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일까.

"이 정글과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헛된 희망의 지푸라기를 붙잡고 왜곡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더욱 헤어날 수 없는 늪이 될 뿐이다. 누군가는 긍정의 힘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노래하지만, 나는 절망보다 긍정이나 희망이 주는 배신이 더 싫다."

어쨌든 그동안 줄곧 혹독한 노력을 예찬하던 저자의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의 변화는 매우 당황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변화가 일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책 곳곳에서 여전히 예전 자신의 말에 대한 방어기재가 뒤섞여 있는 것을 보는데, "여전히 나는 '노력하라'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희망을 가지라'라는 말은 할 수 없다"라거나 "내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희망이 너무 허황돼 보이기 때문이다. 열에 아홉은 지금의 자신과는 너무나 먼 희망을 말한다. (...) 그들의 희망은 차라리 '욕심'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앞에서는 사회 구조적으로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 감히 노력하면 성공하리라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바로 뒷장에서는 노력하라고는 해도 희망을 가지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구조적 문제가 아닌 바로 사람들의 희망은 희망이 아닌 욕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왜 다른 이들의 욕망은 이렇게 허황되고 과도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일까?

여섯 페이지 분량의 프롤로그만 읽어도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책을 덮었어야 했는데, 이왕 책을 읽기 시작한 거 자기변명을 늘어놓은 프롤로그가 아닌 고전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2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파트 1에는 '인생,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는 제목 하에 <데미안>, <이방인>, <크리스마스 캐럴>, <페스트>, <어린왕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파트 2에서는 <콧수염 아저씨의 똥방귀 먹는 기계>, <배꼽>, <사자와 곰과 여우 이야기>, <인생론>, <전쟁론>,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 <경쟁우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각 파트에 기형도와 이상의 시를 한편씩 넣어주는 섬세한 편집도 잊지 않는다. 게다가 저자는 파트 1에서는 인문학도로 파트 2에서는 경영학도로 변신한다. 파트 2는 고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소비문화, 차별화 마케팅, 소비 욕망, 컨버전스, 그리고 너무 많은 이들이 언급해버린 스티브잡스의 인문정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 


파트 1만 보면, 그가 선정해놓은 것은 독자들이 너무나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고전들 뿐인데, 이런 고전들을 도대체 어떤 다른 시선으로 읽어냈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각 고전에 대한 서술 형식은 이러하다. (1) 고전을 읽게 된 배경이나 자신의 옛 경험을 간략히 언급한다, (2) 고전의 줄거리를 요약한다, (3) 중간중간에 인상 깊었던 대목을 삽입하거나 이 고전을 해설한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한다, (4) 이야기에 자신의 관점을 연결시키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막상 그가 그렇게 강조한 자기만의 방식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결국 저자의 목소리가 들어간 부분은 (1)과 (4)뿐인데, (1)은 책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책을 소개하기 위한 도입이므로 특별한 것이 없다. 따라서 독자들은 (4)에서 펼쳐지는 서술을 통하여 저자의 차별된 시선을 읽어내야 한다. 


그가 그나마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 <데미안>과 <어린왕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데미안>을 시작할 때 그가 독설을 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혼돈의 시간 속에 홀로 버려진 아이가 아무도 주지 않는 답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인문학의 힘이나 고전의 위대함 같은 거창함 이전에 나의 초라한 책읽기에는 '절실함'이 있었다. (...) 그렇게 돌아온 탕자는 모순 덩어리인 이 사회에 가장 최적화된 인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이상한 나라'의 모든 요구를 불만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렇기에 탕자의 언어는 고울 수가 없었다. 나의 독설은 그렇게 나의 본질적인 시작과 맞물려 있다."


어린 저자가 그렇게 절실하게 책을 읽고 이 이상한 사회의 요구에 맞춤형 인간이 되도록 스스로를 무장했다는 것도 의아하지만, 그렇다고 내심까지 변한 것은 아니어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곱기만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인가. 자신이 독설을 하게 된 연유가 이것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성격'이라고 하면 안되었을까?


"나에게 주어진 불평등, 불행, 모순을 이겨내기 위해서 아플 때에는 피하지 말고 한번 독하게 앓고 나와야 한다. 어설프고 잔인한 희망에 의존하지 말고 차라리 절망 속에서 몸부림쳐보는 것이 더 확실한 길이다. 그 몸부림 끝에 자신을 완전히 붕괴시킨 후 다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 살아남는 방법을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정제되어 살아남은 진정한 '나'가 전면에 나서야만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볼 수 있다."


저자가 성인으로 성장하여 사회에 나오게 된 배경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독자들도 정말 이런 살벌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 인식을 해야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왜 자신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닌건가? 


한편 <어린왕자>는 저자의 속을 '긁어 놓은' 나쁜 고전으로 등장하는데, 어린왕자가 장미에 대한 자신의 집착은 장미에게 물도 주고 그것을 잘 자라게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별을 재산으로 여기고 계속 별을 세는 사업가에게서는 별에 도움이 되는 어떠한 점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 대목에서, 저자는 매몰찬 비난을 퍼붓는다. 


"어른인 나는 반성하기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듯한 이 대화에 반감이 생긴다. 오히려 어린 왕자가 '별을 세는 게 왜 중요해요?'라고 묻는 순간, 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했던 인생의 별이 갑자기 무의미한 것으로 추락하는 취급을 당해 영 못마땅했다. 그 사업가는 숫자를 세는 것이 자긴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범죄가 아닌 이상 누구든 자신이 옳다고 믿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순수하거나 고상하다고 해서 무조건 그들의 평가에 맞우어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다. 어째서 어린왕자가 꽃을 돌보는 것만 중요한 일이겠는가. 사업가가 별을 세는 일도 중요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달리 볼 일이다. 그런 '다양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라면 좋았을텐데, 저자가 생각하는 다양성은 딱 저자 자신까지만을 포용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기성세대는 이렇다.


"만약 우리가 특별한 스펙이나 배경 없이 성실함만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면, 기존의 방식으로 조직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격증을 따고, 인맥을 위해서 회식을 따라다니고, 회사에서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몰려다니며 밥을 먹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해서 회사와 상관의 비위를 맞추며 연명하는 들러리로만 남게 될 뿐이다. 물론 우리가 만년 과장으로라도 가늘고 길게 가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들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저자가 생텍쥐페리에게 반감을 갖는다면, 나 또한 저자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직장인들이 살벌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영어공부 하고, 자격증 따고, 회실 따라다니고, 밥 같이 먹고,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건 왜 나쁜가? 그런 들러리의 삶이어서 안 좋고, 저자가 학원에서 강의하고, 가끔 방송에 출연하고, 이렇게 책도 쓰는 것은 주인공의 삶이어서 바람직한 것인가? 들러리가 없다면 이 사회에서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방법이라도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페스트를 물리치는 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페스트가 물러갈 그때를 준비해야만 한다. 변화와 의지를 가지고, 현재의 모습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반드시 찾아 꿋꿋이 살아남아야 한다. 지치고 힘든 일이지만 그럴수록 현실에 깨어 있어야 한다. 현실을 피해 숨어들지 말고 두 발로 마주 서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의 언어로 기록해가며, 자신의 방식대로 페스트와 맞서야 한다. 어떤 모습으로든 이 페스트에 맞서 살아남은 우리가 바로 역사이며, 다음 세대를 열어간다는 것을 믿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꿋꿋이 살아남'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저자의 뛰어난 시선에 따르면 기성세대는 다들 외형적으로는 들러리의 삶을 살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가슴 속에 품은 꿈과 이상을 저자가 알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런 기성세대들의 생존법이 뭐? 20대의 공감을 얻기 위해 기성세대를 바보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저자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럼 너는 네 별에 가서 네 꽃 하고 둘이서 그렇게 살아. 나는 오늘도 나의 별에서, 별 세는 일의 의미를 찾고, 가로등 불에 책임을 다하며 나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나도 똑같이 말해주고 싶다. 너는 강의실에 가서 네 수강생들하고 그렇게 살라고. 


저자는 이 책에서 그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의도했는지 몰라도, 내가 읽어낸 것은 이전과 동일한 비틀린 시선일 뿐이다. 이 한권의 책을 덮으며 도대체 저자는 사람은 그가 강조하는 고전 읽기를 통해 무엇을 깨달은 것이며, 그 시선을 사회로 돌려 자신과 타인의 인생을 어떻게 읽고, 감히 인생을 독해했다고 하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덧1. 본문에서 저자가 밝힌 폐쇄성의 원리는 이러하다. "어찌 되었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학벌과 성공과의 상관관계가 깨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에게 오히려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의 당연한 성공보다는 결점을 딛고 일어난 약자의 스토리가 더 관심을 끄는 것, 이를 테면 마릴린 먼로의 입술 위의 점,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다는 사실 등이 강하게 기억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다."

나도 혹시 유수연과 위즈덤하우스가 소비심리로 이용한 폐쇄성의 원리에 빠져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가 생각하듯이 학원강사가 무슨 고전이냐라는 폐쇄성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가 굳이 여러 권의 고전을 들먹여서까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있다. 저자의 배경이 아니라 이 책에 드러나는 모순과 자가당착은 단순히 하나의 점이나 눈썹의 부재로 생각할만한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다. 


덧2. (좋은 느낌으로 이 책을 접한 분들도 많겠지만) 앞으로는 호감이 가지 않는 저자의 책은 정말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괜한 시간을 들여 비판만 적어 놓는 감상평은 나 스스로에게도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을 시간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 말이다. 


덧3. 나는 누구에게 보이기보다는 개인적으로 내가 읽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곳에 끼적끼적 감상을 쓰는 정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많은 고수들의 글을 읽으면서부터는 어디에 가서 함부로 '책을 좀 읽는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게 되었다. 저자와 같이 처절한 독서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는 독서를 통하여 겸허함을 배운다.

내가 생각하는 통찰력이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스스로 나의 주변을 재배열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연히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외부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적시적소에 자신의 의도를 풀어냄으로써 전체 흐름을 타는, 혹은 이끌어가는 능력.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통찰의 힘이다. - 9쪽

바꿀 수 없는 선택지라면, 내게 주어지지 않은 선택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살아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 53쪽

공감이란 타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즉 이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스스로를 외롭게 한다. 공감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와 타인, 나와 세상과의 다리이며, 그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내 안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생각의 깊이가 없고 고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정만 있을 뿐이지, 공감을 할 능력은 없다. 자신만의 고민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공감을 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 69쪽

만약 전염병이 돌지 않았다면 모든 거리는 밤새 불을 밝히며 흥청거렸을 것이다. 전염병이 오기 전 세상은 누구나 자유롭게 외출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더 넓은 바깥 세상과 비교하지 않는다. 과거나 미래와도 비교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옆 사람과 오늘만을 비교하며 불평할 뿐이다. 전염병이 끝나고 마을이 개방되면 사람들은 또다시 바깥세상의 기준으로 또 다른 차별을 찾아내 불평할 것이다. 인간이란 하나의 페스트가 사라져도 또 다른 페스트를 찾아내고, 자기 기준의 차별에서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 79쪽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선택이 있다면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뿐이다. 이 시대의 페스트와 차별을 극복할 것이냐, 아니면 각종 차별에 대해 불평하며 계속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갈 것이냐의 선택이 삶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타루의 말대로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은 더욱더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 84쪽

그저 누구나 던질 수 있는 단순한 몇 마디 비판이나 마치 제삼자의 입장에서 내뱉는 겉핥기 식의 평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학생들은 항상 이런 얘기를 한다. "수업을 들으면 이해는 가는데, 혼자서 풀면 못 풀겠어요."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이 말이, 바로 아는 것과 응용하는 것의 차이다. 혼자서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강의 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말 역시 "많이 본 것과 아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지식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나’라는 상황에 맞춰 자생력 있게 운용할 정도로 소화해내야 그 지식이 의미 있는 것이다. 똑같은 지식을 습득해도 개인마다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모두 다르다. 즉, 지식은 누구에게 가느냐, 어떻게 응용되느냐에 따라 그 파급효과가 달라진다. -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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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2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붉은눈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자는 차별화를 위한 깊이없는 독설을 담은 책을 낸 것 같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셔서 타인의 헛된 시간을 방지하게 해주신 붉은눈님께 감사드려요^^:

붉은눈 2016-08-21 15:20   좋아요 1 | URL
이 글을 다쓰고 다른 리뷰들을 보니 저 말고는 이 책이 좋다고 한 서평이 더 많네요. 이렇게까지 길게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혹시나 제 괜한 편견과 삐딱한 시선으로 엄한 책을 비난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기에 저자의 글 인용에 더욱 신경을 썼던 것 같네요. 격려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겨울호랑이님 포스팅을 자주 읽는데 그 깊이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차마 댓글은 못남기고 있습니다. ^^; 편안한 오후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6-08-21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게 아니라 요즘 유명인들이 유명세를 배경으로 큰 차이없는 책들을 내는 것 같습니다. 붉은눈님 견해에 동감합니다.. 제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이제 겨우 내용 정리 수준이고 깊이있게 이해는 못하고 있습니다..같이 대강의 내용을 공유하고자 예습한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좋은 의견 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붉은눈님^^

cyrus 2016-08-22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밖에 나가면 책덕후 티를 안 내려고 합니다. 책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리고 책 얘기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취급해요.

붉은눈 2016-08-23 19:44   좋아요 0 | URL
네, 아는 사람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이렇게 책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좋습니다.
 
우아한 거짓말 (양장)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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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에 대한 신뢰감으로, 예전부터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같은 작가의 소설이었기에 책을 집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차례가 없거나, 있더라도 1부, 2부 정도로 구분하는 다른 소설에 비하여 이 소설은 각 캐릭터들의 관점과 그에 호응되는 비유적인 소제목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예를 들어, '우박 섞인 비'라는 제목은 천지의 죽음을 무심히 대하는 수경을 보며 "우박 섞인 거친 비로 무덤에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선생님의 시선을, '키 큰 피에로'는 그동안 천지가 버팀목처럼 받쳐주었기에 그나마 키 큰 피에로처럼 보였던 화연이 천지의 부재로 인해 바닥으로 뚝 떨어져 주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아픈 영혼'은 천지가 스스로를 투명 인간, 주변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 삶을 버리려는 다짐을, '다섯 개의 봉인 실'은 천지가 세상을 등지면서 자신을 포함한 다섯 사람에게 남긴 마지막 메세지를 각각 지칭하고 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쉽게 남용되고 있는 생각이며 태도였던가. 과연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안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천지의 죽음 이후에 드러나는 여러 배경들을 통하여 '관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천지의 죽음이라는 결과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화연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비단 하나의 원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누구 하나만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손쉬운 비난은 단지 자기 스스로의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회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죄인이다'는 식의 참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그만큼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안다고 생각한 이면에 간과되어 있는 생각이나 무관심이 상대방에게는 극심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한번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결과와 이에 연결되어 있던 관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는 과정이 흥미롭다. 줄곧 우울한 전개가 될 법한 상황임에도 각 캐릭터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들 사이의 생생한 대화(특히, 엄마와 만지)는 슬픔과 절망에 도달한 남겨진 자들의 현실적 삶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며? 근데, 엄마는 안 그런 거 같아. 그날 다 흘려보낸 것 같아."
"가슴에 묻어? 못 묻어. 콘크리트를 콸콸 쏟아붓고, 그 위에 철물을 부어 굳혀도 안 묻혀. 묻어도, 묻어도, 바락바락 기어 나오는 게 자식이야. 미안해서 못 묻고, 불쌍해서 못 묻고, 원통해서 못 묻어." - 63쪽

"지쳤지 나도. 사람 안 변하더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원래’라는 말이야. 걔가 원래 그런다. 원래 그러는 거 모르고 결혼했냐? 환장할 뻔했다. 뭘 해도, 원래라는 말 앞에서 다 무너지는 거야." - 166쪽

진짜를 알고 있는 자의 조롱, 눈앞의 이득과 상대를 비웃으면서 얻는 비열한 쾌감을 위해 남의 아픈 진짜를 이용하는 인간들. 묻어 두고 싶은 자신의 진짜를 타인의 진짜로 덮어 놓고 슬쩍 빠지는 인간들. 엄마는 진짜든 가짜든, 그 속에 가려진 진실을 봐야 한다고 충고했다.
"진짜 가짜가 존재하기까지의 진실을 봐. 눈에 확 보이는 진짜 가짜, 그거 완전 생날거야. 잘못 손대면 탈 난다. 진짜가 진실, 가짜가 거짓, 그러면 세상 살기는 참 편할 거야." - 222, 223쪽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은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다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 놓고 장난치는 거에요. 나는 사과했어, 그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 239쪽

"앞으로는 사람 가지고 놀지 마. 네가 양손에 아무리 근사한 떡을 쥐고 있어도, 그 떡에 관심 없는 사람한테는 너 별거 아냐. 별거 아닌 떡 쥐고 우쭐해하지 마. 웃기니까." - 251쪽

기억이라는 것은 잊으려 할수록 악착같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이니, 잊을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그 고약한 기억에 슬쩍 웃기도 합니다. 나를 지치고 쓰러지게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바라봐 주는 누군가도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기도 하니까요. - 작가의 말(258쪽)

어른이 되어 보니, 세상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고 근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리 세상을 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느끼지 못했을, 소소한 기쁨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애초에 나는 큰 것을 바란 게 아니니까요. - 작가의 말(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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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9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관심이 싫은 사람은 타인의 관심을 얻으려고 종종 자해를 일으키거나 타인에게 폭력을 가할 때가 있어요.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 - 초라한 들러리에서 연봉 10억 골드미스가 된 유수연의 성공 비법
유수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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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라"라는 투의 제목을 싫어한다. 원래가 명령조의 말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이런 제목을 가진 책의 특징은 '~해라, 그러면 성공한다'와 같이 원인과 결과를 너무 단순화하거나, (자신을 다른 이들의 워너비쯤으로 여기고) '~해라, 그려면 나처럼 될 수 있다'며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과대하게 포장한 메세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목이 싫다면서 굳이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도대체 20대들이 왜 이 사람의 독설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정신상태가 안일하다며 매섭게 몰아치고, 인생을 독하게 살라고 주문하는 말에 왜 그렇게 많은 20대들이 빠져드는 것일까, 궁금했다(그런데 정작 '독설'이라는 제목의 책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내가 도저히 20대들의 시선으로 이런 책들을 읽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트마다 '시작', '도전', '열정', '비전'과 같이 일반화된 자기계발서의 용어나 수준을 벗어나지 않은 정형화된 형식을 취하고 있어 다른 계발서들과 특별한 차별성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초라하다고 했던 20대 무명에서 스타강사가 되기까지의 사례를 사이사이에 포함시키고, 일반화된 자기계발 지침들을 적절히 자신의 목소리로 변환했다는 점이 특징이기는 하다. 예를 들면, '블루오션 직업을 찾아라', '기회와 행운은 움직이는 자의 것', '글로벌 시대, 해외 인턴에 도전하라', '재능보다 노력이다', '미치려면 제대로 미쳐라', '선택과 집중! 나를 완성하는 열쇠', '나만의 경쟁력을 개발하라'는 소제목들은 이미 보편하되고 흔해 빠진 이야기들이지만, 성공한 스타강사이자 독설가 유수연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뭔가 다른 내용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정작 이 책을 쓴 저자가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책을 폈다고는 했지만, 카피에 뭉뚱거려진 '연봉 10억 골드미스'라는 저자의 상황은 누구라도 한번쯤은 호기심을 가질 법 한 경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나 성공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나 행동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은 읽는 내내 전혀 들지 않았다. 별로 가진 것도 없는 불리한 조건과 배경을 딛고 금전적인 부(富)를 얻은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일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보이는 오류를, 저자 또한 그대로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성공이 오로지 자신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자신의 경험이 모든 이들의 성공을 위한 공통적이고 유일한 분모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과 같은 방식이 노력이 아닌 것에는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내가 그런 그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나는 내 힘으로 올라섰다는 것이다. 그들이 1명씩 나와 맞짱을 뜨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다. 난 늦더라도 그렇게 1명씩 제쳐서 조금씩, 그리고 이제 상당히 많이 이 사회를 밟고 올라가오 있다. 비켜라, 거치적거린다. 뭐, 이런 것쯤이야!" 


또한 자신은 이미 성공의 맛을 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열에 올라섰음에도 여전히 20대들과 자신을 한 편으로 묶고 기성세대들을 비판하는 오류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 우리가 한국 영어 교육을 망친다! 그런데 그거 알아? 힘없고 돈 없고 빽 없고 학벌 없는 우리는 취업부터 해야겠다. 그런데 취업하려니 토익 성적 가져 오란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쓰레기' 같은 강의라도 들어서 취업해야겠다. 외국 나가서 돈으로 영어를 발라 올 수 없어서! (...) 학벌과 토익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이 사회에서 한번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 당신들이 알긴 알아?"


그러나 저자는 지금 스스로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시스템으로 인하여 덕을 본 사람이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강사를 할 수 있었을까? 토익 점수가 모든 20대에게 요구되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저자의 성공은 가능했을까? 물론 저자가 기존의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 비난받을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혜택을 받아온 저자가 기존 시스템을 비판하는 것은 얘기가 좀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시스템을 경영학적 마인드로 제대로 간파하고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한 지금 시점에서, 과연 저자는 기존에 자신이 밟아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바꿀 의향이 있는 걸까? 아쉽게도 이런 생각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은 독하게 마음먹고 실천하여 성공했다고 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를 '이 사회를 바꿀 힘이 없'는 존재로 낮추고 있다. 그러면서 기성세대가 사회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니 약자인 20대와 자신은 강의실에서 '썩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판은 실컷해놓고나서 보여주는 약자코스프레와 '이렇게라도 공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무책임은 적잖이 당황스럽다. 


"이 사회가 그들의 진정한 능력을 보려 하지 않고 토익 점수와 학벌과 학점을 요구할 때 우리는 아직 이 사회를 바꿀 힘이 없어 저는 이 젊은 친구들과 함께 돈 5,000원에 9시간 동안 강의실에 틀어박혀 보냅니다. 그런데 방송은 이 젊은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비판? 대안 없는 비판? 왜곡?

우리 젊은이들은 이번 여름 무더위에도 푹푹 찌는 강의실에서 썩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허리가 휘게 일해야 하고, 강사인 저는 목이 나가도록 떠들어야 합니다. 힘없는 우리 젊은이들을..."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우리'의 범위에 묶는 자신과 20대는,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미 이질적인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런 20대들에게 한다는 말이 헝그리 정신, 새마을운동 정신이라고? 이쯤되면 충고의 수준은 거의 노년들의 입에서 나오는 뻔한 패턴, 즉 '꼰대'수준과 다를 바 없다. 


웰빙이라는 것에는 기존의 경쟁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무엇이 진정한 성공이고 행복인지 살펴볼 수 있는 다른 관점의 시선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데, 이 웰빙에 대한 저자의 이해수준은 단지 풍족한 이들이 즐기고 누리는 라이프 스타일에만 국한되어 있다. 이는 저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스스로의 경험을 너무 과도하게 긍정화하기 때문에 드러나는 생각이다.  


"웰빙의 유혹은 이미 20대 젊은이들의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든 상태다. 사회가 20대들에게 면죄부와 자기 합리화를 주는 것이다. 성공을 꿈꾸는 20대? 야망을 좇는 20대? 패기의 20대? 그런 20대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요즘 20대는 웰빙에 젖어 있다. 나는 그렇게 웰빙을 좇는 20대가 싫다.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웰빙이 아닌 새마을운동 정신이다."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력이 부족해서였다고 둘러댈 수 있으니, '노력해라'라는 말은 어찌보면 가장 쉽고 편한, 그렇지만 무책임한 조언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저자가 과연 젊은이들의 멘토를 자처할 수 있을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스타강사로 성공한 저자의 이후 행보는 과연 무엇일지도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30대인 저자가 조금 더 나이든 기성세대가 되면 20대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조금이라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이 주어진다면 저자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지. 저자가 호주에 어학연수를 가서 독하게 영어공부를 하고, 영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고, 그러한 경험들을 접목하여 유명한 토익강사가 되었다는 성공 스토리는, 저자와 같이 토익강사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모든 영역에 당연하게 적용될 수는 없는 단편적 사례일뿐이다. 개인의 성공스토리를 궁금해하는 것과 그와 같은 방식을 따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이 가진 현재의 지위나 부(富)의 상태만을 보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 오류를 범하는데, 그러기 전에 상황이 바뀌면 내가 과연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냐는 질문을 스스로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맞지 않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따라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까. 


가장 만족할 만한 점은 내가 즐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다. 난 Nobody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난 나를 통해 지식이 전달되고 있을 때, 나를 통해 같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 더 자극을 받는다. 강의실에 빼곡하게 들어찬 수강생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쏠려 있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의 모든 세포들이 살아 숨 쉬는 것이 느껴진다. - 32쪽

치열하게 살라고 하면 사람들은 머릿속으로만 치열하다. 각종 고민과 답 없는 질문들로 돌다리만 두드리고 있다. 20대의 치열함은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나와야 한다. 몸이 고달프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20대의 대부분은 몸이 아닌 머릿속이 치열하다. 그것도 하나 마나 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내가 20대일 때는 너무 가진 것이 없어서 고민할 것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잃을까봐 고민인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미리 고민하지 마라. 스스로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전에 하는 고민은 나를 비롯한 모두를 더 초라하게 할 뿐이다. 결국 그것이 우리의 발목윽 잡아 불확실한 미래를 핑계로 눌러 앉게 만든다. - 44쪽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이 제일 한심하다. 일단 움직여라. 사진을 배운다면 사진 아르바이트도 뛰고, 경력도 쌓고, 동호회도 나가고, 공모전에도 도전해라. 그저 방 안에서 인터넷만 뒤지고 있지 마라. 그리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기웃거리지 마라. 내가 가지 못한 길에는 항상 미련이 남는다. 그 미련에 흔들리면 결국 어떤 길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 55쪽

하지만 운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그저 내가 운이 좋아서 스타 강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말은 한마디 뿐이다.
"Luck sometimes visits a fool, but it never sits down with him.(행운은 부족한 사람에게 올 수는 있어도 그 사람에게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
나에게 운이 따랐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시장을 분석하고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낯선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 두려웠지만 주저하지 않고 떠났고, 호주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강사로 제법 입지를 굳혔음에도 애써 다진 기반을 떨치고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또 다시 영국으로 날아갔다.
난 ‘용기란 두려운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렵지만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항상 새기고 산다. - 96쪽

사람들은 종종 수단과 목표를 혼동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어는 수단이고 의사소통의 기술일 뿐이다. 목표를 향해 동원하는 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그 수단들을 가장 경쟁력 있게 써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사회가 수단 중의 하나인 영어에만 집착하고 그것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구체적으로 영어를 잘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와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실력을 요구한다면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좀 더 확실하게 영어를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 104, 105쪽

준비를 해서, 때가 되어서는 움직일 수 없다. 준비된 자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때다. 준비 없이 일단 몸으로 부딪치며 자신의 길을 열어가는 사람에게도 지금이 시작할 때다. 고민하고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항상 여기에 남아 나머지들의 자리를 지켜둔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좋은 때는 바로 지금, 오늘이다. - 137쪽

나에게 공부는 생존이었다. 특별한 공부법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열심히 미쳐라’라는 것이 전부다. 어떻게 미치느냐, 얼마나 미쳐야 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각자의 앞에 어떤 변수가 놓여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이 변수를 풀어내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데 가타부타 조언을 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 148쪽

나는 어느 한 순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수롭지 않은 순간순간들이 모여 나를 완성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만들어가야 할 작품이다. 시간을 더 아껴서 쪼개 쓰고, 최선을 다한 사람이 더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 156쪽

‘재주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옛말이 있다. 얕은 재주로 어설프게 인정받다가 이도 저도 남지 않고 결국 모든 것을 놔야 하는 사람들, 어려서는 통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분야에서도 전문성이 없으니 밀려나고 결국 과거의 화려함을 입에 달고 사는 초라한 사람들, "내가 예전에는 말이지, 나도 그거 좀 아는데..." 어설프게 내 것이 아닌 것을 미리 즐기다간 바로 추월당한다.
뭐든 잘한다는 말은 거꾸로 생각하면 잘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같다. 물론 어떤 일이든 소박하게 중간 이상만 할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가장 중심이 되는 일 하나에만 집중해야 한다. 나머지 어설픈 재능들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자기 관리 능력이다. - 160,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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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19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서를 읽다 보면 이러한 자화자찬에 금세 피곤함이 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붉은눈님

붉은눈 2016-08-19 16:07   좋아요 1 | URL
어차피 좋은 시선으로 읽지도 못할 책을 굳이 골라 비난만 늘어놓았는데, 좋은 리뷰라고 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어쩌면 이 책을 찾는 이들은 배경이나 계층적 괴리감 없이도 흠모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 그가 전해주는 이런 단순한 메세지를 통하여 성공으로 향하는 구름다리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안도현 잡문
안도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안도현 시인이 2013년 "박대통령 재임 중에 시(詩)를 안 쓰겠다"며 절필 선언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였을까. 박근혜 (당시)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소장했다고 한 발언에 대하여 비방혐의로 재판 중이었던 그에게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뒤집어 '일부 유죄(허위사실에 대해서는 무죄, 비방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던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뉴스에 등장한 그의 절필선언에 대해서 이를 바라보는 태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독재시절도 꿋꿋히 견디며 시를 썼던 시인이 당분간 펜을 꺾는다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으나, 혹자는 그의 태도를 재판부에 대한 반감이나 단순한 투정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하였다. 그의 절필선언과 관련된 사건들은 다분히 정치적이었지만, 그가 시를 쓰지 않겠다는 행위를 단순히 정치적 부당함에 호소하기 위한 투정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더러워서 당분간 회사에 나가지 않겠다거나, 화가 나서 더이상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다는 수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시인이 시을 쓰지 않는 것은 그동안 쌓아왔던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스스로 박탈하고,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외면한 채 언어로서의 시를 일정기간 감옥에 가두어버리겠다는 고통스러운 결단이었을테니 말이다.

      

시를 쓰지 않겠다던 그가 '잡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 변(辨)은 이러하다. "일찍이 중국의 루쉰은 잡문이라는 형식을 무기 삼아 당대의 현실을 타개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잡문스러운 문장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 그런 호기 넘치는 기획 같은 것은 없다. 내 이마 위를 스쳐간 잡념들과 하릴 없는 중얼거림이 여기 들어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고 싶은 욕망이 문장에 스며 있기도 할 것이다. 시도 아니고 제대로 된 산문도 아닌, 그러나 시와 산문의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긴장한 흔적들을 모아 감히 <잡문>이라는 문패를 내다건다." 즉, 그는 시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시로 표현하는 것까지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다른 형식을 빌려 타들어가는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의 책 <잡문>은 제목부터가 시가 아님을 표방하고 있다. 비록 '잡문'이라고는 하나, 형식적 모호함이도 불구하고 시인의 입과 손끝에서 빚어진 언어들은 마치 몇 구절의 짧은 시처럼 내게 전해졌다. "시인에 의해 폐기된 말도 넓은 의미에서는 시어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그가 밝혔듯이, 그가 트위터에 써 놓은 글 244개를 추려 모은 이 책 속에 나타나는 짧고 단순한 문장과 가끔씩 저도 모르게 드러나는 운율, 그리고 새, 매미, 꽃, 바람과 같은 다양한 소재들에 대한 감각적 시선은 마치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시킨다. 화려한 수식으로 말을 꾸미거나 구구절절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까닭에 문장을 통하여 바로 드러나지 않는 숨은 뜻과 배경은 의도치 않은 더 깊고 풍부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단숨에 읽다가도 한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는 한 두줄의 글을 한참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새 잡문은 시가 되고, 시는 시인의 목소리가 되고, 그 목소리는 내 머리와 가슴을 울려대기 시작한다.

    

너는 꽃 피고 새가 울어서 봄이라지만 나는 이유 없이 아프고 가려워서 봄이다. - 14쪽

낙엽을 보며 배우는 것 한 가지. 일생 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 것. 떠날 때 보면 안다. - 17쪽

절벽이 가로막아도 절망하지 않는 강물처럼, 바위가 눌러도 아파하지 않는 모래알처럼, 장대비 몰아쳐도 젖지 않는 새소리처럼. - 28쪽

매미는 한사코 울고, 가까스로 울고, 참았다가 울고, 참지 못해서 울고, 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운다. 어떤 매미는 여름여름 울고, 어떤 매미는 씨벌씨벌 울고, 어떤 매미는 짜리릿짜리릿 우는데, 내 귀는 매미 이름을 구별도 못하고 그냥 듣는다. - 30쪽

꽃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짧기 때문인데 어쩌자고 나는 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나. - 39쪽

응석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이 햇볕을 나 혼자만 이마에 받는 게 미안한 날이었다. 하루도 미안한 마음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내 조국의 맑은 하늘이 서러웠다. - 50쪽

가까이에서 산비둘기 운다. 서럽게 울다가 한참 그쳤다가 또 운다. 무슨 생각인가 하다가 다시 운다. 슬픔이 넘쳐 목멘 듯 너무나 간절한 듯 쉬었다가 운다. 울지 않고는 배기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운다. 울지도 못하는 것들에게 들으라는 듯 자꾸 운다. - 54쪽

바다가 엎드린 채 밤을 뒤적이고 있다. - 55쪽

나는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햇빛이 미끄러져 내리는 나뭇잎의 앞면보다는 뒷면의 흐릿한 그늘을 좋아하고 남들이 우러러보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나 혼자 가만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더 사랑한다. - 53쪽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 품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체득해서 시어라는 방식으로 채택하거나 폐기하는 걸 말한다. 시어는 시인에 의해 마지막으로 선택된 말의 집합인데, 시인에 의해 폐기된 말도 넓은 의미에서는 시어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 69쪽

이 못난 세상을 울음으로 들이받지 않으면 여름을 건너갈 수 없어 매미는 운다. - 98쪽

아유슈비츠의 바퀴벌레는 그곳이 아우슈비츠인 줄 모른다. - 130쪽

분명히 어두운데 왜 어두운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어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과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136쪽

미친 시간이 자신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자가 바로 미친 자다. - 159쪽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경우,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연애라고 하고, 가장 더러운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 171쪽

햇볕이 한 장 한 장 쌓인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해서 책장에 꽂지? -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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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2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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