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끝까지 아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론은 늘 단순하다. 이것은 신비롭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질문의 끝이 삶의 암반에 도달하고 나면 기초를 쌓아 올리는 일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 P25

"나는 좀 고요하고 싶어."
이 질문과 대답은 화두처럼 내게 남았다. 내게 있어서 혼자란 것이 자유라고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과 외로움 혹은 결핍 대신.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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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향으로 온다. 바람이 면에서 선으로 불기 시작할 때 겨울은 감지된다. 길고, 얇고, 뾰족해 콧속에서 와르르 산산조각이 나는 겨울바람에서는 차가운 결말과 냉랭한 시작의 냄새가 난다. 붙잡지 못한 시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계절. 시간이 눈처럼 따뜻할 일은 없다. - P13

매해 겨울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매번 불완전한 정산내역을 받아 들었다. 올해의 결말은 늘 실패였고 새해의 시작은 잔인할 만큼 빨랐다. 너는 네가 원한 것을 절대 가질 수 없다고 겨울은 이야기했다. 네가 무엇이든 가질 수있었던 시기는 예전에 끝나버렸다고 그는 선언했다. 원래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그는 넉살 좋게 웃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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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비껴갔다. 단일 선택지가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병렬적으로 쌓이면 악행으로 치닫기 쉬웠다.  - P64

선량함을 고집하기 위해 지켜온 선택들이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순간, 미래에 남는 건 원하지 않던 삶이라는 모순. 이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이 남자와의 미래가 저주라 생각하며, 내가 해온 모든 일이 쓸모없는 짓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을 예측하는 지금의 끔찍함. - P81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같은 정당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머저리다 욕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장사하면, 아무리 바보 같은 물건이라도 좋다고 홍보해 주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다 욕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하지만 사과 씨를 심은 곳에서 오렌지 나무가 자라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듯이, 기대로 쌓은 관계가 틀어질 때, 그때는 괘씸함에 배신감까지 추가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적이 태어난다. 멍청한 소리까지 지지해 줬던 동료 정치인이 돌아설 때 가장 큰 적이 되고, 바보 같은 물건을 홍보해 줬던 친구가 돌아서면 가장 곤란한 민원인이 되는 것처럼. 나 또한 은주에게 그런 적이 되어주기로 했다. - P124

스스로를 이 꼴로 만든 게 무척이나 기뻐서 빠른 속도로 불안해졌다. 이 기쁨이 뇌에 새겨진 이상 두 번은 써먹지 못할 거다. 내일은 무엇으로 행복의 역치까지 도달해야 하는가. 쾌락이 커질수록 그 뒤편에 파인 구덩이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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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그때는 참 젊고 좋았다고 그리워한다. 정작 그때도 지금만큼의 스트레스가 있었겠지만, 시간이 추억으로 이름을 바꾸면 제법 찬란한 것으로 포장된다.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대부분의 실수가 그럭저럭 자랑할 법한 인생의 트로피처럼 느껴지는 반면, 현재는 아무런 특색 없이 쌓이기만 한 폐지 묶음 정도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폐지도 시간이 지나면 트로피가 된다. 3년 후에는 오늘을 추억할 것이고, 5년 후에는 오늘을 갈망할 것이고, 10년 후에는 오늘이 찬란했다는 평을 남기겠지. - P18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킬 때는 주저하지 말고 숨을 쉬자. 타인을 실망시켰다는 절망이 목을 조여 오지 못하도록, 들이쉬고 내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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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모든 것이 너무 많아........ 그게 내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어. 마크 트웨인이 했던 말 알지?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도록 시간이 존재한다고. 내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이 지금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지루할 틈이 없어. 난 모든 사람을, 모든 것을생각하는 중이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고, 당신도 이 속에서 나와 함께야." - P498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당신의 일부나 마찬가지일 때 그 사람의 부재는 당신의 DNA, 당신의 뼈, 당신 피부의 일부가 된다. 찰리와 실비의 죽음은 이제 줄리아를 구성하는 일부였다. 상실감이 그녀 안에서 강물처럼 흘렀다. 이렇게 오랫동안 떠나서 동생과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하다니 줄리아는 바보였다. 줄리아는 실비의 삶의 시작과 끝을 겪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 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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