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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단편집의 경우, 여러 단편 중 대표주자를 책 제목으로 내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책의 제목이 된 단편은 그 얼굴의 역할을 하지만, 몸통까지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 독자들에게 알려진 수상작은 다른 수상집 등에 묶여 다른 제목으로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예를 들면, 이 책에 수록된 <한정희와 나>는 2017년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한 작가의 (수상작을 포함한) 단편집을 별도로 출간하는 경우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다른 단편을 얼굴로 내세울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제목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보다 다른 단편들이 더 좋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책의 백미는 맨 뒷편에 있는 <이기호의 말>이다. 나는 여타의 다른 소설에서 이와 같이 솔직하고 감동적인 자아성찰을 읽어본 적이 없다.
작가는 종종 소설 속에 자신을 등장시켜, 소설과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인 '나(이기호)'를 등장시키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실제 작가의 생각과 말투와 행동도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아직 이기호 작가의 글을 많이 읽어본 편이 아니라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며 독자들을 혼동시키려 하는 것인지, 소설이라고는 해도 결국 '내' 이야기임을 밝히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소설이 중고나라에서 떨이로 팔려나가는 것에 모욕을 느껴 직접 판매자를 만나려고 했던 소설가(<최미진은 어디로>), 용산참사 때 현장에 가지 못한 크레인 기사를 인터뷰 하는 소설가(<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떼인 돈을 찾기 위해 그 주소지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 남자를 설득시켜야 하는 주민이자 소설가(<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본의 아니게 중학생 조카를 잠시 맡게 된 남편이자 소설가(<한정희와 나>) 등에서 작가는 화자이면서 등장인물로 교차되어 나타난다. 독자는 이 이야기들을 그저 즐겁게 읽어나가면 될 뿐, 실제 일어난 일인지, 그럴듯한 허구인지, 현실과 허구를 반반씩 섞어놓은 것인지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
이 단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감정을 고르라면, 나는 '염치'를 택하겠다. 염치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자신이 손수 싸인한 책이 헐값에 판매되는 것에 모욕을 느낀 소설가에게 "아저씨는 우리 미진이도 잘 모르잖아요... 모르면서 그냥 좋은 인연이라고 쓴 거잖아요... 그건 그냥 쓴 게 맞잖아요... 씨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왜 책을 파는지... 내가 당신이 쓴 글씨를 얼마나 오랬동안 바라봤는지... 우리 미진이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30-31쪽)"라고 말하는 판매자, 인터뷰 말미에 "거 용산에서 일어난 그거 말이에요... 지금 형씨가 그걸 쓰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거 때문에 우리가 그 난리를 쳤고... 한데요... 그걸 쓰려고 하는 사람이... 하필 왜 나를 찾아왔어요?(66쪽)"라고 말하는 크레인 기사, "오빠가 어떻게 저한테 삼 년 만에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죠?(232쪽)"라고 말하는 윤희, 그리고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어린 게 염치도 없이...(270쪽)"라고 한정희를 꾸짖는 나. 이들은 모두 상대방의 태도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염치를 상기시킨다. 현상만을 보고 느끼지 않아도 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그 불편함을 느끼고야마는 스스로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작가가 등장인물로 개입되지 않은 두 편의 연작 <나를 협오하게 될 박창수에게>와 <오래전 김숙희는>에서는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남편에게 밝혔지만 이렇다 할 반응도 대응도 없이 현실을 유지하려는 남편의 태도에 오히려 모멸감을 느끼는 김숙희가 등장한다. 작가는 우리가 '염치'를 말해야 할 상대방이, 스스로 자괴감을 느껴 남편을 살해한 김숙희인지, 수면유도제를 통해 그녀를 잠재우면서 계속 꾸역꾸역 현실을 유지하려는 남편인지, 그녀와 내연관계에 있었으면서도 사실은 그녀를 혐오했다고 주장하며 정작 이유 없는 돈을 받은 정재민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난달 중순 무렵, 외장 하드를 사려고 우연히 중고나라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누군가 내 책을, 그러니까 이 년 전에 나온 내 장편 소설을, 염가 판매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귈 때는 별로 사랑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막상 이별을 통보하자 목놓아 울게 되는... 그렇게 슬퍼하면서 비로소 스스로 사랑을 완성하는... 그때 당시 나는 바로 그 ‘목놓아 울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렇게 계속 어떤 열기 같은 것을 느끼고, 멈추지 못했겠지... 바로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내 소설이, 괜찮아 보였을 테니까. 돌아서면 인정하고 말아야 할 테니까... - 20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 33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해받고 싶지도 않고, 이해를 믿지도 않으며, 이해와 싸우고 싶지도 않다. 그것들을 위해 이 글을 이렇게 길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120, 121
때때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볼 때가 많았다. 만약 그날, 내가 남자의 승합차에 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까? 남자가 차에 타라고 보채도 모르는 척 계속 걷기만 했다면 내 남편의 운명도 많이 달라졌을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다,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스스로 답변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실처럼 길게 이어져 내 인생의 많은 것들이 거기에 줄줄 달려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선이 하나 더 있었는지 모른다고, 그것은 각기 다른 실이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해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저마다 각기 다른 여러 개의 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의 선으로만 보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보려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자기 스스로를 보려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의심을 하게 될 때가 더 많아졌다. - 131, 132
나는 이제 그가 벌을 받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안쓰럽다거나, 그에게 미안한 마음 또한 들지 않는다. 각자의 죄가 있고, 각자의 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뭉뚱그려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평평해질 뿐이다. 죄는 그때 반복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미움도 슬픔도 사랑도 증오도 삶도. 그게 전부다. - 145, 146
그러니까 사실 나는 지금 이 진술서를 쓰면서도 그것이 궁금하다. 왜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왜 어떤 사람은 수치를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생각하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 167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도 나도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의 일인지 잘 몰랐던 것이 맞았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랬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맞이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어떤 시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몰랐던 것이 맞았다. 그건 아이들을 아무리 많이 키우고 있다고 해도 저절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예상 가능한 아이란 없는 법이니까... - 251
어느 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이란 오직 그것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쩐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해서 쓰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쓰는 글. 나는 그런 글들을 여러 편 써왔다. - 265
내겐 환대,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한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 265, 266
한 인물에게 고유한 이름과 사연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범주 내로 동일화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자, 곧 절대적 타자만이 고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유한 자는 말의 의미 그대로 지상의 누구와도 ‘같지 않은’자이고, 누구와도 ‘차이 나는’ 삶을 살았던(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사의 윤리는 타자를 항상 ‘나와 다른 자’ ‘짐작 불가능한 자’로 정의할 수밖에 없게 한다. 바로 그 짐작 불가능성을 유지한 채로, 타자를 나에게 이해된 바가 아닌 그 자신의 이름에 따라 호명하고, ‘차이 속에서’ 관계 맺는 것이 고유명사의 윤리다. (김형중의 해설, 다시, ‘환대’에 대하여) - 279
소설 속 화자와 실제 작가는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고, 그걸 구분해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라고, 우리는 배웠다네. 하지만 실제론 그러지 않는다는 것을 자네도, 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마추어든 숙련된 독자든, 은근슬쩍 그 벽 너머를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지. 작가 또한 일부러 그 벽에 숭숭 구멍을 뚫어 살짝살짝 보여주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못 본 척, 서로 속고 속이고 눈감아주고 작품 볼 줄 안다, 상찬을 늘어놓는 거라네. 그것이 소설을 읽는 우리의 윤리적인 태도라네. 나는 그 태도가 싫었다네. 소설이, 작가가 뭐 대단한 거라고... 나는 ‘작품’이라는 말도 싫어했다네. 그 ‘ㅁ’자 받침으로 끝맺는 단어 속에 어쩐지, 무언가를 구분 짓고자 하는 이상한 태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나는 아예 그 태도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네. (이기호의 말) - 309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이기호의 말) - 313,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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