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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독해 - 나의 언어로 세상을 읽다
유수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같은 저자의 책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를 읽은 후, 나와는 안맞는 것 같아서 앞으로 그의 책은 다시 읽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옆에 놓인 <인생 독해>라는 제목을 보고는 매우 신기한 생각이 들어 책장에서 책을 뽑았다. 경험상 '인생' 운운하는 제목이 달린 책치고 제대로 된 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영문 독해'가 아닌 '인생 독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가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첫 장을 펴니 책 날개에 적힌 자기소개가 이렇다.
"앵무새처럼 배운 대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거부하며 유아독존으로 버티던 시절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책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유일한 취미는 책읽기다. 삶이 힘들거나 고민이 있을 때에는 책을 잔뜩 쌓아놓고 잠수를 탄다. 주입식 독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대로 읽고 이해하고 현실에 접목하고 응용하는 실전형 책읽기를 추구한다. (...) 길들여지지 않은 자의 시선으로 책을 읽고, 그 내용과 인물들을 흡수함으로써 삶에 대한 통찰과 다양한 전략들을 발견하고 스스로 학습한다." (이하 ""는 모두 이 책에서 인용한 부분임)
이런 자기소개를 보고는 기가 막혔다. 그의 이전 책에서 나는 단 한 페이지도 20대들에게 '책을 읽어라'라고 조언했던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오로지 독하게 살아남기 위하여 어떻게 정신적인 무장을 하고 어떻게 질러버려야 할 것인가를 설파했을 뿐이다. 그런데 원래 책읽기가 자기의 취미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는 것을 추구한단다. 내가 얼마전 읽은 저자의 책이 2008년 출간된 것이었고, 이 책이 2015년 출간되었으니, 7년 사이에 무슨 큰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의 삶의 궤적을 잘 추적하지 못한 과문함 때문에 그를 잘 모르는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을 보니 유수연은 어느덧 이지성이 되어 돌아온 것 같다.
"만약 당신이 혁신과 창업을 꿈꾸고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길 꿈꾸고 있다면
지금 당장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영어 공부나 자격증 취득이 아니라,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다."
어조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전 책에서 웰빙에 물든 20대를 나무라던 그는 매우 놀랍게도 "이제는 우리도 이 느림의 미학과 우회의 원리를 깊이 배워야 할 때"라고 말한다. 본문에서는 '사토리 세대'를 언급하며, "사토리 세대는 최소한 그들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현대판 이방인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기성의 가치관이나 무의미한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이다"라며 긍정적인 시선까지 보낸다. 이에 대한 변(辨)은 프롤로그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읽어봐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이 그가 그렇게도 강조했던 '노력'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버린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책이 사람들에게 자기계발과 성공을 강요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커졌다. 나의 글과 그 안에 담긴 독설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초라한 과거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로 전진하라는 채찍질어었다. 그런데 그 독설이 나를 넘어 다수를 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어느새 왜 그러한 독설의 언어로 살아왔는가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이 시대의 성공 원리만을 설파하는 상징이 된 것 같다. (...) 나도 다시 태어나 지금의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면 자신이 없다. 그런데 누구에게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너의 노력 끝에는 반드시 달콤한 열매가 열릴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본문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다. 도대체 저자는 얼마나 살벌한 세상을 살아왔기에 여전히 이 세상은 정글이며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곳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일까.
"이 정글과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헛된 희망의 지푸라기를 붙잡고 왜곡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더욱 헤어날 수 없는 늪이 될 뿐이다. 누군가는 긍정의 힘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노래하지만, 나는 절망보다 긍정이나 희망이 주는 배신이 더 싫다."
어쨌든 그동안 줄곧 혹독한 노력을 예찬하던 저자의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의 변화는 매우 당황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변화가 일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책 곳곳에서 여전히 예전 자신의 말에 대한 방어기재가 뒤섞여 있는 것을 보는데, "여전히 나는 '노력하라'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희망을 가지라'라는 말은 할 수 없다"라거나 "내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희망이 너무 허황돼 보이기 때문이다. 열에 아홉은 지금의 자신과는 너무나 먼 희망을 말한다. (...) 그들의 희망은 차라리 '욕심'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앞에서는 사회 구조적으로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 감히 노력하면 성공하리라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바로 뒷장에서는 노력하라고는 해도 희망을 가지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구조적 문제가 아닌 바로 사람들의 희망은 희망이 아닌 욕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왜 다른 이들의 욕망은 이렇게 허황되고 과도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일까?
여섯 페이지 분량의 프롤로그만 읽어도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책을 덮었어야 했는데, 이왕 책을 읽기 시작한 거 자기변명을 늘어놓은 프롤로그가 아닌 고전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를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2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파트 1에는 '인생,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는 제목 하에 <데미안>, <이방인>, <크리스마스 캐럴>, <페스트>, <어린왕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파트 2에서는 <콧수염 아저씨의 똥방귀 먹는 기계>, <배꼽>, <사자와 곰과 여우 이야기>, <인생론>, <전쟁론>,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 <경쟁우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각 파트에 기형도와 이상의 시를 한편씩 넣어주는 섬세한 편집도 잊지 않는다. 게다가 저자는 파트 1에서는 인문학도로 파트 2에서는 경영학도로 변신한다. 파트 2는 고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소비문화, 차별화 마케팅, 소비 욕망, 컨버전스, 그리고 너무 많은 이들이 언급해버린 스티브잡스의 인문정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
파트 1만 보면, 그가 선정해놓은 것은 독자들이 너무나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고전들 뿐인데, 이런 고전들을 도대체 어떤 다른 시선으로 읽어냈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각 고전에 대한 서술 형식은 이러하다. (1) 고전을 읽게 된 배경이나 자신의 옛 경험을 간략히 언급한다, (2) 고전의 줄거리를 요약한다, (3) 중간중간에 인상 깊었던 대목을 삽입하거나 이 고전을 해설한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한다, (4) 이야기에 자신의 관점을 연결시키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막상 그가 그렇게 강조한 자기만의 방식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결국 저자의 목소리가 들어간 부분은 (1)과 (4)뿐인데, (1)은 책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책을 소개하기 위한 도입이므로 특별한 것이 없다. 따라서 독자들은 (4)에서 펼쳐지는 서술을 통하여 저자의 차별된 시선을 읽어내야 한다.
그가 그나마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 <데미안>과 <어린왕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데미안>을 시작할 때 그가 독설을 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혼돈의 시간 속에 홀로 버려진 아이가 아무도 주지 않는 답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인문학의 힘이나 고전의 위대함 같은 거창함 이전에 나의 초라한 책읽기에는 '절실함'이 있었다. (...) 그렇게 돌아온 탕자는 모순 덩어리인 이 사회에 가장 최적화된 인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이상한 나라'의 모든 요구를 불만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렇기에 탕자의 언어는 고울 수가 없었다. 나의 독설은 그렇게 나의 본질적인 시작과 맞물려 있다."
어린 저자가 그렇게 절실하게 책을 읽고 이 이상한 사회의 요구에 맞춤형 인간이 되도록 스스로를 무장했다는 것도 의아하지만, 그렇다고 내심까지 변한 것은 아니어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곱기만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인가. 자신이 독설을 하게 된 연유가 이것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성격'이라고 하면 안되었을까?
"나에게 주어진 불평등, 불행, 모순을 이겨내기 위해서 아플 때에는 피하지 말고 한번 독하게 앓고 나와야 한다. 어설프고 잔인한 희망에 의존하지 말고 차라리 절망 속에서 몸부림쳐보는 것이 더 확실한 길이다. 그 몸부림 끝에 자신을 완전히 붕괴시킨 후 다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 살아남는 방법을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정제되어 살아남은 진정한 '나'가 전면에 나서야만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볼 수 있다."
저자가 성인으로 성장하여 사회에 나오게 된 배경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독자들도 정말 이런 살벌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 인식을 해야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왜 자신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닌건가?
한편 <어린왕자>는 저자의 속을 '긁어 놓은' 나쁜 고전으로 등장하는데, 어린왕자가 장미에 대한 자신의 집착은 장미에게 물도 주고 그것을 잘 자라게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별을 재산으로 여기고 계속 별을 세는 사업가에게서는 별에 도움이 되는 어떠한 점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 대목에서, 저자는 매몰찬 비난을 퍼붓는다.
"어른인 나는 반성하기를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듯한 이 대화에 반감이 생긴다. 오히려 어린 왕자가 '별을 세는 게 왜 중요해요?'라고 묻는 순간, 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했던 인생의 별이 갑자기 무의미한 것으로 추락하는 취급을 당해 영 못마땅했다. 그 사업가는 숫자를 세는 것이 자긴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범죄가 아닌 이상 누구든 자신이 옳다고 믿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순수하거나 고상하다고 해서 무조건 그들의 평가에 맞우어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다. 어째서 어린왕자가 꽃을 돌보는 것만 중요한 일이겠는가. 사업가가 별을 세는 일도 중요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달리 볼 일이다. 그런 '다양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라면 좋았을텐데, 저자가 생각하는 다양성은 딱 저자 자신까지만을 포용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기성세대는 이렇다.
"만약 우리가 특별한 스펙이나 배경 없이 성실함만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면, 기존의 방식으로 조직에서 인정을 받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격증을 따고, 인맥을 위해서 회식을 따라다니고, 회사에서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몰려다니며 밥을 먹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해서 회사와 상관의 비위를 맞추며 연명하는 들러리로만 남게 될 뿐이다. 물론 우리가 만년 과장으로라도 가늘고 길게 가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들의 생존법이기도 하다."
저자가 생텍쥐페리에게 반감을 갖는다면, 나 또한 저자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직장인들이 살벌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영어공부 하고, 자격증 따고, 회실 따라다니고, 밥 같이 먹고,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건 왜 나쁜가? 그런 들러리의 삶이어서 안 좋고, 저자가 학원에서 강의하고, 가끔 방송에 출연하고, 이렇게 책도 쓰는 것은 주인공의 삶이어서 바람직한 것인가? 들러리가 없다면 이 사회에서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방법이라도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페스트를 물리치는 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페스트가 물러갈 그때를 준비해야만 한다. 변화와 의지를 가지고, 현재의 모습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반드시 찾아 꿋꿋이 살아남아야 한다. 지치고 힘든 일이지만 그럴수록 현실에 깨어 있어야 한다. 현실을 피해 숨어들지 말고 두 발로 마주 서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의 언어로 기록해가며, 자신의 방식대로 페스트와 맞서야 한다. 어떤 모습으로든 이 페스트에 맞서 살아남은 우리가 바로 역사이며, 다음 세대를 열어간다는 것을 믿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꿋꿋이 살아남'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저자의 뛰어난 시선에 따르면 기성세대는 다들 외형적으로는 들러리의 삶을 살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이 가슴 속에 품은 꿈과 이상을 저자가 알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런 기성세대들의 생존법이 뭐? 20대의 공감을 얻기 위해 기성세대를 바보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저자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럼 너는 네 별에 가서 네 꽃 하고 둘이서 그렇게 살아. 나는 오늘도 나의 별에서, 별 세는 일의 의미를 찾고, 가로등 불에 책임을 다하며 나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나도 똑같이 말해주고 싶다. 너는 강의실에 가서 네 수강생들하고 그렇게 살라고.
저자는 이 책에서 그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의도했는지 몰라도, 내가 읽어낸 것은 이전과 동일한 비틀린 시선일 뿐이다. 이 한권의 책을 덮으며 도대체 저자는 사람은 그가 강조하는 고전 읽기를 통해 무엇을 깨달은 것이며, 그 시선을 사회로 돌려 자신과 타인의 인생을 어떻게 읽고, 감히 인생을 독해했다고 하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덧1. 본문에서 저자가 밝힌 폐쇄성의 원리는 이러하다. "어찌 되었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학벌과 성공과의 상관관계가 깨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에게 오히려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의 당연한 성공보다는 결점을 딛고 일어난 약자의 스토리가 더 관심을 끄는 것, 이를 테면 마릴린 먼로의 입술 위의 점,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다는 사실 등이 강하게 기억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다."
나도 혹시 유수연과 위즈덤하우스가 소비심리로 이용한 폐쇄성의 원리에 빠져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가 생각하듯이 학원강사가 무슨 고전이냐라는 폐쇄성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가 굳이 여러 권의 고전을 들먹여서까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있다. 저자의 배경이 아니라 이 책에 드러나는 모순과 자가당착은 단순히 하나의 점이나 눈썹의 부재로 생각할만한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다.
덧2. (좋은 느낌으로 이 책을 접한 분들도 많겠지만) 앞으로는 호감이 가지 않는 저자의 책은 정말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괜한 시간을 들여 비판만 적어 놓는 감상평은 나 스스로에게도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을 시간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 말이다.
덧3. 나는 누구에게 보이기보다는 개인적으로 내가 읽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곳에 끼적끼적 감상을 쓰는 정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많은 고수들의 글을 읽으면서부터는 어디에 가서 함부로 '책을 좀 읽는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게 되었다. 저자와 같이 처절한 독서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나는 독서를 통하여 겸허함을 배운다.
내가 생각하는 통찰력이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스스로 나의 주변을 재배열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연히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외부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적시적소에 자신의 의도를 풀어냄으로써 전체 흐름을 타는, 혹은 이끌어가는 능력.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통찰의 힘이다. - 9쪽
바꿀 수 없는 선택지라면, 내게 주어지지 않은 선택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고 살아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 53쪽
공감이란 타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즉 이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스스로를 외롭게 한다. 공감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나와 타인, 나와 세상과의 다리이며, 그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내 안의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생각의 깊이가 없고 고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정만 있을 뿐이지, 공감을 할 능력은 없다. 자신만의 고민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공감을 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 69쪽
만약 전염병이 돌지 않았다면 모든 거리는 밤새 불을 밝히며 흥청거렸을 것이다. 전염병이 오기 전 세상은 누구나 자유롭게 외출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더 넓은 바깥 세상과 비교하지 않는다. 과거나 미래와도 비교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옆 사람과 오늘만을 비교하며 불평할 뿐이다. 전염병이 끝나고 마을이 개방되면 사람들은 또다시 바깥세상의 기준으로 또 다른 차별을 찾아내 불평할 것이다. 인간이란 하나의 페스트가 사라져도 또 다른 페스트를 찾아내고, 자기 기준의 차별에서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 79쪽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선택이 있다면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뿐이다. 이 시대의 페스트와 차별을 극복할 것이냐, 아니면 각종 차별에 대해 불평하며 계속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갈 것이냐의 선택이 삶의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타루의 말대로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은 더욱더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 84쪽
그저 누구나 던질 수 있는 단순한 몇 마디 비판이나 마치 제삼자의 입장에서 내뱉는 겉핥기 식의 평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학생들은 항상 이런 얘기를 한다. "수업을 들으면 이해는 가는데, 혼자서 풀면 못 풀겠어요."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이 말이, 바로 아는 것과 응용하는 것의 차이다. 혼자서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강의 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말 역시 "많이 본 것과 아는 것을 착각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지식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나’라는 상황에 맞춰 자생력 있게 운용할 정도로 소화해내야 그 지식이 의미 있는 것이다. 똑같은 지식을 습득해도 개인마다 마주하게 되는 현실은 모두 다르다. 즉, 지식은 누구에게 가느냐, 어떻게 응용되느냐에 따라 그 파급효과가 달라진다. -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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