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잡문
안도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안도현 시인이 2013년 "박대통령 재임 중에 시(詩)를 안 쓰겠다"며 절필 선언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였을까. 박근혜 (당시)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소장했다고 한 발언에 대하여 비방혐의로 재판 중이었던 그에게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뒤집어 '일부 유죄(허위사실에 대해서는 무죄, 비방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던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뉴스에 등장한 그의 절필선언에 대해서 이를 바라보는 태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독재시절도 꿋꿋히 견디며 시를 썼던 시인이 당분간 펜을 꺾는다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으나, 혹자는 그의 태도를 재판부에 대한 반감이나 단순한 투정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하였다. 그의 절필선언과 관련된 사건들은 다분히 정치적이었지만, 그가 시를 쓰지 않겠다는 행위를 단순히 정치적 부당함에 호소하기 위한 투정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더러워서 당분간 회사에 나가지 않겠다거나, 화가 나서 더이상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다는 수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시인이 시을 쓰지 않는 것은 그동안 쌓아왔던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스스로 박탈하고,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외면한 채 언어로서의 시를 일정기간 감옥에 가두어버리겠다는 고통스러운 결단이었을테니 말이다.

      

시를 쓰지 않겠다던 그가 '잡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 변(辨)은 이러하다. "일찍이 중국의 루쉰은 잡문이라는 형식을 무기 삼아 당대의 현실을 타개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잡문스러운 문장으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 그런 호기 넘치는 기획 같은 것은 없다. 내 이마 위를 스쳐간 잡념들과 하릴 없는 중얼거림이 여기 들어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고 싶은 욕망이 문장에 스며 있기도 할 것이다. 시도 아니고 제대로 된 산문도 아닌, 그러나 시와 산문의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긴장한 흔적들을 모아 감히 <잡문>이라는 문패를 내다건다." 즉, 그는 시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시로 표현하는 것까지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다른 형식을 빌려 타들어가는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의 책 <잡문>은 제목부터가 시가 아님을 표방하고 있다. 비록 '잡문'이라고는 하나, 형식적 모호함이도 불구하고 시인의 입과 손끝에서 빚어진 언어들은 마치 몇 구절의 짧은 시처럼 내게 전해졌다. "시인에 의해 폐기된 말도 넓은 의미에서는 시어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그가 밝혔듯이, 그가 트위터에 써 놓은 글 244개를 추려 모은 이 책 속에 나타나는 짧고 단순한 문장과 가끔씩 저도 모르게 드러나는 운율, 그리고 새, 매미, 꽃, 바람과 같은 다양한 소재들에 대한 감각적 시선은 마치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시킨다. 화려한 수식으로 말을 꾸미거나 구구절절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까닭에 문장을 통하여 바로 드러나지 않는 숨은 뜻과 배경은 의도치 않은 더 깊고 풍부한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단숨에 읽다가도 한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는 한 두줄의 글을 한참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새 잡문은 시가 되고, 시는 시인의 목소리가 되고, 그 목소리는 내 머리와 가슴을 울려대기 시작한다.

    

너는 꽃 피고 새가 울어서 봄이라지만 나는 이유 없이 아프고 가려워서 봄이다. - 14쪽

낙엽을 보며 배우는 것 한 가지. 일생 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 것. 떠날 때 보면 안다. - 17쪽

절벽이 가로막아도 절망하지 않는 강물처럼, 바위가 눌러도 아파하지 않는 모래알처럼, 장대비 몰아쳐도 젖지 않는 새소리처럼. - 28쪽

매미는 한사코 울고, 가까스로 울고, 참았다가 울고, 참지 못해서 울고, 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운다. 어떤 매미는 여름여름 울고, 어떤 매미는 씨벌씨벌 울고, 어떤 매미는 짜리릿짜리릿 우는데, 내 귀는 매미 이름을 구별도 못하고 그냥 듣는다. - 30쪽

꽃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짧기 때문인데 어쩌자고 나는 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나. - 39쪽

응석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이 햇볕을 나 혼자만 이마에 받는 게 미안한 날이었다. 하루도 미안한 마음 없이는 넘어갈 수 없는 내 조국의 맑은 하늘이 서러웠다. - 50쪽

가까이에서 산비둘기 운다. 서럽게 울다가 한참 그쳤다가 또 운다. 무슨 생각인가 하다가 다시 운다. 슬픔이 넘쳐 목멘 듯 너무나 간절한 듯 쉬었다가 운다. 울지 않고는 배기지 않을 수 없다는 듯 운다. 울지도 못하는 것들에게 들으라는 듯 자꾸 운다. - 54쪽

바다가 엎드린 채 밤을 뒤적이고 있다. - 55쪽

나는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햇빛이 미끄러져 내리는 나뭇잎의 앞면보다는 뒷면의 흐릿한 그늘을 좋아하고 남들이 우러러보고 따르는 사람보다는 나 혼자 가만히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을 더 사랑한다. - 53쪽

시를 쓴다는 것은 말이 품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를 체득해서 시어라는 방식으로 채택하거나 폐기하는 걸 말한다. 시어는 시인에 의해 마지막으로 선택된 말의 집합인데, 시인에 의해 폐기된 말도 넓은 의미에서는 시어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 69쪽

이 못난 세상을 울음으로 들이받지 않으면 여름을 건너갈 수 없어 매미는 운다. - 98쪽

아유슈비츠의 바퀴벌레는 그곳이 아우슈비츠인 줄 모른다. - 130쪽

분명히 어두운데 왜 어두운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어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과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136쪽

미친 시간이 자신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자가 바로 미친 자다. - 159쪽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경우,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연애라고 하고, 가장 더러운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 - 171쪽

햇볕이 한 장 한 장 쌓인다. 이걸 언제 다 정리해서 책장에 꽂지? -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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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2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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