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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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소재로 삼음 책을 그리 즐겨 읽지는 않지만, 제목에 계속 눈이 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제목이 그대로 읽히지 않고, "천 개의 바람이 되어"로 바뀐 채 내 눈에 박히고 있었다. 마침 4월이었다. 3년만에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찬란한 봄에 나는 역설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곤 한다. 첫장을 펴니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라고 쓰인 한편의 시가 적혀 있다. 무슨 뜻인지 머리로 채 이해하기도 전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마시고 내쉬는 숨결이 이제 더 이상 나를 통하지 않는, 그저 허공을 떠도는 바람이 되는 순간이라니...


책은 크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는 신경외과 의사인 그가 폐암 진단을 받게된 순간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1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의사가 되기까지의 생각과 성장과정을 담았다. 2부에서는 전도유망한 그가 레지던트 생활을 막 마치려 할 때 암 진단을 받게 되고, 투병생활과 의사로서의 삶을 병행하는 시간들이 담겨 있다. 결론은 이미 예상했지만, 남아 있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호전되던 그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다.


에필로그는 아내의 몫으로 남겨졌던 것으로 보아, 10년의 삶이 남았다면 의사생활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고, 1년이 남았다면 책을 쓰고 싶다고 했던 그에게는 아마도 이 책을 끝맺을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사람과 홀로 남겨진 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의 조합은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절묘한 구성으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의 감정을 자극한다. 


"나는 그의 아내이자 목격자였다"는 마지막 문장 앞에서는 참았던 감정이 그대로 주저 앉는 것을 느꼈다. 가장 사적인 친밀감이 있는 사람인 아내가 목격자로서 한자 한자 써내려간 남편의 소멸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절박한 순간이지만 격렬하지 않은 담담한 서술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작가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성숙'이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주어진 삶을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동일한 뜻의 단어가 형용사로 쓰여 삶을 비출 것인지, 부사로 쓰여 산다는 행위를 비출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 같다. 부스러진 희망, 애절한 사랑, 준비되지 않은 이별, 그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해 버리거나 스스로 과열되지 않는 것, 주어진 날들을 견디어 내는 것은 슬프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일이다.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외과는 뇌와 의식만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찮은 물질주의, 쩨쩨한 자만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문제의 핵심, 진정으로 생사를 가르는 결정과 싸움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곳에서 어떤 초월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 105, 106쪽

생물학, 도덕, 삶, 그리고 죽음의 개별적인 가닥들이 마침내 서로 엮이기 시작하는 듯했다. 완벽한 도덕 체계는 아니더라도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 잡히고 그 안에 내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긴장감 높은 분야의 의사는 삶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삶이 굴절되는 가장 위급한 순간에 환자를 만나게 된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 140, 141쪽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 161쪽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자가 원하는 건 의사가 숨기는 과학 지식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실존적 진정성이다. 통계를 지나치게 파고드는 건 소금물로 갈증을 해결하려는 것과 같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고뇌에 빠지는 일은 생존 가능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164쪽

예전에 내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나는 죽음과 마주한 채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에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입장이 갈린 채, 의학을 계속 파고들지 아니면 문학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죽음과 마주하며 나는 예전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 아니면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버둥거렸다. - 169쪽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그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수술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왜냐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 179, 180쪽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나는 히포크라테스나 마이모니데스, 오슬러도 가르쳐 주지 않은 뭔가를 배웠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 197, 198쪽

과학을 형이상학의 결정권자로 보면 세상에서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 의미도 함께 사라져버리고, 이런 의미가 모두 사라진 세상은 결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생의 의미를 믿으면 반드시 신도 믿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과학이 신에 대해 어떤 근거도 제공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거도 마련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인생 자체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실존적 주장은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못하게 되고 과학적 지식이 곧 모든 지식이 되어버리고 만다. - 201쪽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과학방법론은 인간이 만든 산물이기에 영원불변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손쉽게 조작하기 위해, 현상을 다루기 쉬운 단위들로 축속하기 위해 과학 이론을 만든다. 과학은 재현 가능성과 인위적인 객관성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이런저런 주장을 내세울 때는 탁월하지만, 고유하고 주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에 과학 지식을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은 경험적이고 재현 가능한 정보를 체계화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과학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런 핵심적인 감정과 과학 이론 사이의 간극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 어떤 사상 체계도 인간 경험을 온전하게 담을 수 없다. 형이상학은 계시(啓示)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 201, 202쪽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이런 과거 완료 상태에 도달한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대부분의 야망은 성취되거나 버려졌다. 어느 쪽이든 그 야망은 과거의 것이다. 미래는 이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가 되어버렸다.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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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26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많다고 해서 성숙한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어요. 나이에 상관없이 주어진 삶을 알차게 보내고, 타인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성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