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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한동안 읽지 않던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읽었다. 중학생들의 '왕따'라는 소재를 택한 면에서는 얼마 전 읽었던 <우아한 거짓말>과 유사한 면이 있었으나, <우아한 거짓말>이 학생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보다 많은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책은 학교 내 남학생들의 힘의 권력관계나 중학교라는 작은 사회의 구조적 측면에 대하여 더 많은 할애를 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터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소설의 흐름은 나구라 유이치라는 소년의 실족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변인들의 상황을 다면적인 관점에서 묘사함으로써 한 사건의 원인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인 잘못이나 기여를 한 것으로 단순화 할 수 없으며, 복합적인 관련성과 각자 나름의 관점이 있기 마련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왕따를 당한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싼 이들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학생들 사이에서의 관점이다. (1) 오해를 받을지언정 끝까지 침묵을 지키려는 소년들, (2) 자신의 과오를 숨기려는 소년들, (3) 소년의 왕따를 제3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학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번째는 학교와 학부모들 사이에서의 관점이다. (1) 유가족과 가해 학생들, 그리고 그 외의 학생들의 입장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교장 이하 학교 교직원들, (2) 자기 자식은 절대 가해학생일리가 없다고 믿으며 끝까지 대응하는 학부모, (3) 하나뿐인 외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채 그래도 죽음에 이르게 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유가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번째는 학교와 학생들을 둘러싼 지역 사회의 관점이다. (1) 학교폭력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사건에 매달리는 경찰과 경찰과 협력하여 진실을 파해치려는 검찰, (2) 작은 마을 내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입장 정리가 어려운 지역 사회, (3)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되 이 사건이 잊혀지지 않도록 보도하려는 언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들을 보고 있노라면 각각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내가 이 입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유가족의 절망과 가해자 가족의 결백이라는 대립 구조에서는, 진실을 알기 위해 과도한 요구를 하는 유가족의 입장도, 이를 우선적으로 수용하려는 학교측도, 이에 반대하여 가해학생이 아닌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학부모들도, 뚜렷한 증거 없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해자 가족의 입장도 잘 드러나 있다. 누구라도 이 중 어느 입장이라도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고 최적의 태도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사망한 학생인 나구라 유이치를 순진하거나 선한 이미지로 묘사하여 흑백을 강렬히 대비한 것이 아니라, 힘 없고 나약하여 비굴한 면모를 보이는 한편 더 약한 자에게는 힘을 행사하거나, 남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집안의 부(富)를 과시하거나, 눈치 없이 비밀을 폭로하여 친구들이 곤경을 겪게하면서도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고, 자신이 왕따를 당하면서도 딱히 힘들어하지 않는 인물로 묘사해 흑백을 여러차례 혼재시키고 있다. 비록 순간적으로나마 '저러니까 따 당하지', '저러면 맞을만 하지', '우리 때도 저랬지' 라며 폭력을 정당화 하며 책을 읽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내 안에 아직도 깃들어 있는 폭력과 그에 대한 정당성은 지금껏 관성적으로 대해왔던 이 사회에서의 왕따나 폭력에 대해 다른 시선도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결론부분에서는 딱히 놀랄만한 반전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반전이라기 보다는 그동안 여백 속에 감추어져 있던 추가적인 사실들을 통하여 이 소년의 죽음에는 많은 원인들에 대하여 다시 한번 조망한다. 마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들에게 과연 누구를 비난하며 누구를 옹호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고 있는 듯하다.
덧1: 왜 작가는 제목에 '町'자를 썼을까. 그리고 번역자는 '밭두렁' 혹은 '경계'라는 뜻을 왜 '거리'로 번역했을까?
덧2: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 소설의 경우 일관되게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성(이치가와)을 어떤 때는 이름(겐타)을 쓰기 때문에 유사한 이름이 나오면 곧잘 헷갈리곤 한다. 게다가 부부가 같은 성을 쓰는데 아이까지 겹치면... 그래서 가끔 이런 식의 관계도를 그려보곤 하는데, 귀찮지만 읽으면서 그때그때 추가를 하고 읽다가 '이 사람이 누구지?'라는 의문이 들면 관계도를 보고 이해할 수 있어서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에는 도움이 된다. 이걸 그리다가 도저히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한 책이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이었는데, 책 어디쯤에 아직 이런 쪽지가 숨어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일에는 흑백을 가릴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마련이라, 100퍼센터의 악도, 100퍼센트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7쪽(작가의 말)
중학생은 잔인하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시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잔인함은 혼자 서는 과정에서 터지는 고름 같은 것이다. 다들 더는 어른들에게 울면서 매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들끼리 생존 게임을 시작한다. - 70쪽
"어른 이라면 눈을 돌리고 안 보면 그만아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 혼자라는 선택지가 없어. 중학생이란 생물은 연못 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라, 모두 같은 물을 마실 수밖에 없어." -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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