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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정치 - 좌·우파를 넘어 서민파를 위한 발칙한 통찰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7년 4월
평점 :
매번은 아니지만 저자의 경향신문 칼럼을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 특유의 재치있는 표현과 반어적 문장에 빠져들고는 했었다. 그렇기에 이 책을 고르는데 별 주저함이 없었다. 제목 또한 '그 답게' 서민적 정치라고 하니, 그가 말하고 싶은 서민적 정치란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 읽고 보니 조금 허망한 느낌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특징 없이 서술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민 스타일의 논조에 대한 내 기대가 너무 컸나?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래도 다음 장에는 있겠지'라며 기대했던 서민적 표현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감능력, 민주적 리더, 관심과 감시, 색깔론, 지역감정, 선거를 통한 심판, 청년의 정치참여, 개성공단과 통일, 노조, 복지 등 책이 다루고 있는 정치적 소재들이 너무 다양하다. 정치에 관한 쉬운 글을 쓰려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처럼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는 그의 시선은 다소 평범하다. 물론 이와 같은 평범한 시각을 찾는 것에도 의미를 둘 수 있겠지만...
야구광인 그가 평균자책점, 탈삼진 등의 수치를 통하여 선동렬보다 최동원이 더 우수하다는 편향을 영남의 지역감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나, 배트맨 vs 슈퍼맨을 각각 노동자와 경영자에 비유하며 슈퍼맨에 대응하기 위한 1만 명쯤의 배트맨이 있어야 조금은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그나마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던 '사표론'에 대한 주장은 크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진보정당에 투표하면 사표가 될까봐 ‘비판적 지지’를 선택하는데, 이해는 가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예컨대 지지율이 20% 정도만 돼도 다른 후보들이 진보정당 후보를 무시하지 못할 테고, 진보정당 후보가 낙선하더라도 지지율이 높으면 신임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할 때도 진보정당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정책이 자연스럽게 국정에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 133, 134쪽
그는 사표에 대한 고민을 줄이고 진보정당에 투표를 해야하고, 진보정당에 대한 투표율 확보가 곧 진보정책의 수용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적 서술일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51대 48이라는 박빙의 결과를 낸 지난 대선 이후에 과연 (그가 말한 20%를 훨씬 넘는) 48%의 지지자들을 위한 정책이 반영된 건이 얼마나 될까? 승자와 패자에 대한 확실한 분별이 있는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또 다시 같은 정당에서 정권을 잡는 것이 두려워 보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기우(杞憂)이며, 이를 단순히 사표를 우려한 반응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말하듯 입체적인 세상에 대한 그의 편향에 대해 비판할 의사는 조금도 없지만, 그와 반대적 편향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 진보정당의 포용성에 대한 한계도 검토해봐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는 서민들의 가슴에 금배지를 하나씩 달자고 제안한다. 헌법적 취지에 따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기타 공직자를 부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혐오에 빠진 정치 불신, 무소불위의 존재로서의 정치인에 대한 숭배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모두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이런 원론적인 주장에 더하여, 정 안되면 상징적으로라도 문방구에서 금배지를 사서 하나 달아보자고 하는 그의 제안이 평범하고 순진하게만 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편향성을 회피하려는 강박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 위치와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직선 안에 0점을 두고 음수와 양수를 표현하는 것처럼 세상을 왼쪽과 오른쪽으로만 나눌 수는 없다. 세상은 입체다. 한쪽에서 보면 한 면만 보이지만, 사실 복잡하게 빛나는 다면체다. 편향은 우리가 보는 세상의 한 단면이다. 각자의 시선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어느 한 단면임을 인정한다면, 편향들이 모여야 다면체가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정치에 대한 열린 토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20쪽
어느새 우리는 스스로의 영역을 점점 더 좁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나와 생각이 같지 않다면, 모두 적이 된다. 정보는 넘쳐 난다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사실이 된다. 언론들이 프레임 장난을 하는데도, 원하는 것만 보고 있으니 거기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 사람도 좋지만 그래도 나는 이러이러한 점에서 저 사람이 더 마음에 들어"라고 말하기보다 그 사람의 단점만 강조한다. 선명한 지지가 선명한 비난은 아닐 텐데,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상대 후보를 깎아내린다. 다들 협오는 나와 먼 이야기라 생각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가 혐오다. - 44쪽
불이 났을 때 출구가 넓어서 다 탈출할 수 있다면 "당신이 먼저 나가세요"라며 배려하는 게 가능하지만, 출구가 좁아서 일부만 탈출이 가능하다면 배려고 뭐고 서로 나가려 할 것이다. 우리 청년들은 지금 상황을 후자라고 생각하기에, 미처 나오지 못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기보단 "그러게 미리 문 옆에 대기하고 있었어야지!"라며 조롱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 질서에 투항하다 보니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갖기는 어렵다. -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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