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호장룡 - 아웃케이스 없음
이안 감독, 양자경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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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본인이 맞선을 볼 때였는데요

모르긴 몰라도 '펄펄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로워라 이내 몸은.......'어쩌고 하는 황조가 한자락을 군시렁거리며 한 마리 외로운 꾀꼬리가 되어 이 호텔 커피숍에서 저 호텔 커피숍으로 호텔 커피숍을 전전하며 흘렸을 내 한숨과 눈물이 만약에 위로 올라가 뭉쳐졌다면 비바람 부르는 먹구름이 되었을 것이고, 아래로 모여 흘렀다면 아마도 큰 강물을 이루었을 거입니다...... 이거이 무신 소린고 하니 본인이 참 맞선을 많이도 봤다는 그런 이야깁니다.

이날도 본인은 모 호텔 커피솝에서 이산가족 상봉 비스무리한 절차를 거쳐 묘령의 모모한 아가씨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게 되었던 것인데요.....처음에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 서먹서먹 멀뚱멀뚱 어리멍청하게 앉아 있었는데요......역시나 생면부지의 젊은 남녀 둘이 앉아 이바구를 풀기에는 영화만큼 만만한 화제거리도 없더란 말입니다. 아직까지 영화 싫어한다는 사람은 보질 못했으니깐두루 말입니다.

그리하여 ....여차저차하여 ......분기위가 점차로 화기애애해져 가는 가운데 영화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차에, 이 아가씨가 '지난해 본 영화중에 최고의 영화는 [와호장룡]이다' 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더만요. 자신있게 말입니다. 연전에 대학 후배 한 명도 - 이 후배도 여잔데 - 와호장룡을 극찬하며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봤고 나중에 비됴나 DVD 타이틀이 나오면 꼭 소장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더랬습니다.....

이 여성동무들이 이 영화를 왜 이리 좋아하지럴? 나는 그저 그렇던데.... 아카데미도 한몫 거들고 말이야.....기존의 무협영화와는 다른 무언가 독특한 면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서도리도리........허......참..........슬그머니 본인의 영화 안목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더란 이런 말입니다. 하기야 요즘같이 지 잘난 맛에 지 꼴리는데로 살아가는 세상에 영화를 보는 시각도 각인각색이겠지만서도요......으음.......꿍...

영화 초반에 나오는 '당당당....'하는 단순 경쾌한 타악기 장단에 맞추어 마치 춤이라도 추듯이 가볍게 남의 집 담을 기어오르고 월장하고 지붕위를 뛰어 댕기는 장면이 본인에게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는데 .......메스컴에서는 주로 대나무 가지위에서의 휘영청 휘청 스리슬쩍 결투장면을 자주 거론하더만요.........

본 영화에 등장하는 두 여성 동무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것입니다.. 열정과 욕망으로 온통 가슴속이 헝클어진 장지이,, 결국 그 열정과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여 자살해버리고 마는 장지이.....그런데 말이요......예쁘기는 정말 예쁘더만요........영감님들은 '곱다'라는 표현을 쓰지요........헐헐헐..... 반면, 수련(양자경)에게서는 어딘가 원숙하고 고요한 그런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오더만요........비극적인 사연의 여고수 수련(양자경)은 영웅적인 인내로 장지이를 살려보내지만 이 콧대 높은 아가씨에게 있어 용서란 어쩌면 굴욕이나 모욕보다 더한 어떤 것이었을란지도 모린다는 고런 생각도 들더만요........내가 보기에 말이죠..........그래서 결국 그녀는 스스로 뒈져버리기로 작정했을란지도 모린다는 그런 이야깁니다...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이 영화가 한 번 더 보고 싶어지누만요......오늘 저녁에 비디오나 함 빌려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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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1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김혜원 옮김 / 문학수첩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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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겨울 '조엔.K.롤링'이 어린 딸을 위해 동화를 쓰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는 32세였으며, 이혼녀였고, 정부의 생활보조금으로 조그만 아파트에서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 어린 딸을 옆에 재우고 시골 카페에 앉아 시리즈의 첫째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쓰면서 그녀는 알았을까? 완성된 원고를 복사할 돈이 없어서 가까스로 구한 구식 타자기로 8만단어에 이르는 분량의 원고를 손수 타이핑하면서 그녀는 생각했을까? 첫 출판사에서 황당한 이야기라고 거절당했을 때 그녀는 과연 짐작이나 했을까?

그녀의 책이 수십개국에 번역되어 수백만부가 읽히게 될것이며, 그녀 자신이 이세상 어린이들의 꿈과 이상과 희망같은 그런것들에, 그들의 정신에, 그들의 영혼에, 얼마만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슈퍼스타의 탄생이 목전에 안전에 도래했다는 것을.......

조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무명시절 나는 실업자에 이혼녀였지만, 내 신세를 비관하지는 않았다. 해리포터 이야기를 쓰고있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명랑해져서 무일푼인 것도, 남편과 헤어진 것도 상관없었다. 내가 겪은 시련이 동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해리 이야기는 내 어린 시절 상상의 세계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아! 위대하신 조엔이여~

훗날 수십억대의 거액에 거래되는 작품을 남긴 고호가 오베르에서 영혼을 갈아먹는 병과 싸우며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이 떨어져 동생 테오에게 물감 살 돈을 좀 보내달라는 편지를 써놓고 붙일려고 보니, 아~ 참말로! 한심하게도 우표값이 없더라는 믿거나 말거나 일화에 비교해 본다면.... 진정 복있구나! 조엔이여~ 살아 생전에 돈방석위에 올라 앉았으니......부디, 빈한하고 고달팟던 그 시절을 가슴 한켠에 고이 간직해두길.....이는 실로 천금보다도 훨씬 값지고 빛나는 진정한 보석이라.

'환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마라, 때가 가까웠느니라'는 류의...뭐...삭을대로 삭아 이미 오래전에 폐기처분된 퀘퀘먹은 금언을 새삼 들추어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를 오다가다 줏어듣게 되면, 어느새 그 곰팡내 풍기는 경구에 기대어 서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 일러 사람들은 인지상정이라 한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까?

저는 '해리포터'시리즈를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워낙에 세계적 명사가 되어버린 관계로 그녀의 과거 삶에 관한 이야기와 현재의 변화된 모습에 대한 소식은 간간히 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영화로 나올 줄도 알았습니다....그런데 갑자기 왜 조앤롤링인가? 이미 다 커버린 어른들에게도 희망과 용기가 필요한 까닭일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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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지음 / 동방미디어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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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 상복을 삼년복으로 해야하느냐 일년복으로 해야하느냐를 가지고 설왕설래 말이 많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는 사실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거나, 정말 한심두심한 통탄할 작태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며 조상 욕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흔히 걸리버 여행기의 계란이야기에 비견되기도 하는 이러한 상복 등 예송문제는 그리 단순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관한 문제이며 또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숨을 건 권력투쟁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덕일의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와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읽은 다음 이 책 '조선시대당쟁사'를 읽었다. '조선시대 당쟁사'는 앞의 두 책을 합한 것과 같지만 이 책들보다는 좀 더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것 같다. 이덕일의 두 저서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동인(남인)에 대해 조금 더 비판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성무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는 여말 사대부의 등장에서부터 조선전기 훈구파와의 투쟁에서 사림들이 화를 입는 사화를 거쳐, 고단한 투쟁 끝에 훈구파를 제거 한 후 잠시 전개되었던 건전한 붕당정치시대, 주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필연적인 내부분열 과정, 그리고 망국의 세도정치에 이르기까지 조선사 전체를 당쟁과 당파의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사서라 할 것이다.

이덕일과 이성무 양인이 모두 서두에 강조하고 경계하고 있는 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이다.. 일본인들이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내었다는 조선인들은 근본적으로 당파성이 강한 민족이어서 다른 민족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너무 피해의식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일본같은 무치주의 국가에서의 권력투쟁은 총칼로 하기에 칼로 자르듯 생사가 명확하고 흑백이 분명한 점이 있을 것이고, 이에 비해 조선같은 문치주의 왕조에서의 권력투쟁은 혀와 붓으로 하기에 결국은 말이 많고 말이 많다보면 왜곡되고 굴절되어 추잡해기 마련이라는 점을 십분 백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의리 명분보다는 당리 당략에 따른 정치인들의 이합집산과, 무수한 정당들이 없어졌다가는 다시 생겨나고, 갈라졌다가는 다시 합쳐지고 하는 합종연횡의 복마전같은 해방에서 작금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정치형태를 본다면, 안타깝게도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까닭은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반성하고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서 일진대, 그동안 우리들은 과연 무슨 공부를 했으며, 역사란 것이 정녕코 발전한다고 할 수 있을른지, 다만 반복 순환만을 거듭하는 것은 아닐른지....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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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지음 / 당그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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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깍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第二信...(생략)....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한 때는 이 시를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만 지금은 거의 잊어먹었습니다....유배시류의 백미라 할 만합니다.

'인물소개'

정약용 1762(영조38) ~ 1836년(헌종2)
15세때 풍천홍씨와 결혼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 2녀는 요절하고 위 시에 등장하는 학연, 그리고 학유가 있을 뿐.. 선생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정조의 총애속에 벼슬살이 하던 득의만만지절이라 할것이요, 제2기는 18년 귀양살이하던 환난고난의 시절인데........이 시기는 분명 선생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이상과 꿈이 무참히 깨어진 좌절과 절망의 시기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선생의 학문적 노력이 빛나는 결실을 맺은 성취의 시기이기도 할것이라.....본인같은 아둔한 후학들이 사사한데에까지 이른다면 그 성취의 빛남을 새삼 일러 무엇하리요......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살던 시절 되겠슴다.

정약전 1758(영조 34) - 1816(순조16)
약용의 둘째형인데요..... 어릴때부터 재주가 있고 총명하였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하네요...... 권철신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후에 이벽, 이승훈 등 남인인사들과 교유하였고 특히 천주학의 교리에 마음이 끌려 신봉하기까지 하였으니......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아우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는데요. 끝끝내 풀려나오지 못하고 유배 16년만에 흑산도 그 외로운 섬에 뼈를 묻었습니다. 애재......

정약종 1760(영조36) - 1801(순조 1)
약용의 셋째 형인데요.....일찍이 이익을 사사하였으며,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품을 지녔다고 하는데요......서학에 심취하여 카톨릭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당대 최고의 교리지식이었답니다. 역시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이승훈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습니다. 통재....

(사족)
서정주 생가가 있는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부위에는 네모난 서랍이 파여져 있는데, 사실 이것은 부처님을 봉안할 때 불경이나 조성내력이 기록된 문서들을 갈무리하는 감실이라는 것이요.......언제부턴가 이 감실에 대하야 괴이한 전설이 하나 생기게 되었던 것인데요...이 부처님의 배꼽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고런 참람한 유언비어가 조선조말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임다. 이른바 '동학농민전쟁'의 '석불비결'이 그것인데......후일, 유명한 동학장수가 되는 손화중 등이 도끼로 석불의 배꼽을 부수고 그 속에 있던 것을 꺼내어 가지고 사라졌다는 기록이 <동학사>에 실려있으니.....갑오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일년 전의 일이라.....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또다시 세월은 무심히 흘러 이 비결책에는 또 다른 증명할 길없는 전설이 첨가 되었으니, 그 비결책이란 다름아니라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였다는군요..(유홍준의 문화유산답기에 나오는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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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감상대관
김원중 지음 / 까치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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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주 옛날 이야긴데요... 천상에 거하는 신선들도 심심무료할 때 가끔은 지상에 내려와 인간들과 어울려 술도 한 잔씩하고, 아주 드물었지만 운좋게 천상의 선녀와 결혼한 지상의 사내들도 있었던, 인간들이 동아줄이나 선녀의 옷자락 같은 것을 붙잡고 천상으로 기어 올라가기도 했던, 그런데로 아직은 천상과 지상이 서로 교통하고 있었던 그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전설따라 삼천리 비슷한 이야기입죠..네...

오랜 옛날......중국 강하군이라는 곳에서 辛某라는 사람이 술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다 떨어진 낡은 누더기를 걸쳤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있어 보이는 몸집이 큰 선비 한 사람이 와서 외상술을 좀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신모라는 사람이 또 마음이 좋은 사람이어서 거절하지 않고 선선히 외상술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선비는 매일같이 와서 큰 잔으로 딱 한 잔 술을 마시고는 돈은 한 푼 내지 않고 휘잉~하니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하기를 반 년 넘어 했던 것인데요.....그래도 우리 신사장님은 조금도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 진정으로 복 있을진져!! 공짜술, 외상술 주는 이 세상의 모든 술집 사장님들이여!!)

그러던 그 어느날, 선비는 신사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동안 밀린 술값이 꽤 많을 것인데 내가 본디 돈 같은 것은 없으니 술값 대신으로 그림을 하나 그려 주면 안되겠남?' 신사장이 그러마고 하자, 이 선비는 손님들이 안주로 먹다가 남긴 귤 껍데기로 술집 벽에 학을 한 마리 그리니 이게 곧 '황학'이 되어부렸습니다. 그려~...... 술집을 찾는 손님들이 그 황학을 보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를라 치면, 하~ 요상하게도 벽 속의 이 황학은 그에 맞추어 춤을 추었던 것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려고 신씨의 술집에 구름처럼 떼거지로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일일것입니다. 그러는 수년이 지나는 동안 신사장은 그야말로 수억만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신회장이 되어부렸던 것입니다. (내 공짜술 외상술 줄때부텀 복 받을 줄 알아 봤음다)

그 뒤로 그 선비가 다시 신씨를 찾아오니, 신씨는 은인이라도 만난 듯 무엇이든 바라는 게 있다면 다 들어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선비는 잠시 피시시~ 웃더니 누더기 옷소매에서 피리를 꺼내어 불기 시작했습니다. 천상의 소리에 모두들 넋을 놓은 채 듣고 있자니, 하늘로부터는 찬란한 오색 서기가 내려비추이고.... 벽에 그려 놓았던 황학은 춤을 추며 벽에서 떨어져 나와 선비에게로 사뿐이 날아 왔던 것입니다.....그리하여 마침내 선비는 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렸으니 신씨는 다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을 멍청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신씨가 그 자리에 루(樓)를 세우니, 이름하여 황학루입니다.

그로부터 무심한 세월은 또다시 흐르고 흘러 이제는 천상과 지상이 서로 교통하기를 그만 두어버린 그 어느 때쯤에 당나라 시인 최호가 여행중에 이 황학루를 와서 보고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력한양수)
春草처처鸚鵡洲(춘초처처앵무주)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 버려
이곳에는 헛되이 황학루만 남았네
한 번 떠난 황학은 돌아오지 않는데
흰 구름만 천년두고 유유히 흐르네
맑은 물에 한양나무들 또렷하고
봄풀은 앵무주에 무성하구나
해는 지는데 고향은 어디쯤인가
강위의 안개 서리어 시름겹게 하누나

송의 엄창랑이라는 사람은 '당인의 칠언율시라고 하면 마땅히 최호의 황학루를 첫재로 꼽아야 한다'고 했다 하며, 이백도 황학루에 왔다가 이 시를 보고는 붓을 던졌다고 전해지나 그 진위를 알 수가 없으며 이 시를 모방하여 등금릉봉황대를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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